하얀 유성(流星)
-외출
그녀는 왕이었다. 그녀의 왕국에서 그녀의 권위를 부정하는 불경스럽고 자살 충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권위와 위엄은 절대적이었 으며, 그 광휘는 그녀의 녹옥빛 왕국 아주 미세한 곳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늠름하고 당당했고, 그녀의 첫눈보다 더 하얀 갈기는 태양을 받아 더욱 우아하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는 어떤 수컷들보다도 날래고 강대했으며 또한 거대했다.
그녀는 왕국의 최첨단에 올라 사방으로 구비구비 뻗어 있는 자신의 왕국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그녀의 발아래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솜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순백의 은은함은 바로 그녀 자신의 색깔이기도 했다.
이 산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옆으로,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옆으로 이어지는 모든 산맥이 그녀의 통치 아래 있었다. 옆의 옆의 옆쪽쯤에 위치한 좀 크다고 으스 대는 여자 인간들의 무리 떼들이 모여 있는 봉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근방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그곳 역시 그녀의 지배가 미치고 있었다.
크어어어어어엉!
왕국의 정상에 그녀는 왕의 위엄을 토해냈다. 그녀의 포효는 대기와 산맥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의 포효에는 언제나 왕의 위엄이 담겨 있었고, 그녀의 분노 는 산천초목을 부르르 떨게 만든다. 아무도 그녀의 권좌에 도전하는 이는 없었다. 그 행위의 무모함을 그의 권속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세계는 적자생존의 세계였고, 그에 걸맞은 힘이 있는 자에게만 ‘왕 중 왕’의 칭호가 주어졌다.
지난 백오십 년간 그녀의 치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이 강대하고 자비롭고 위엄 넘치는 어머니가 왕으로 있을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 산봉우리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지배하지 않는 지배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무시한 이가 이 산에서 무사했던 역사는 산이 대지 위로 솟은 이래 단 한 번도 없었 다. 그 지배자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의 주인이었고,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대부터 계속해서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 어둠의 지배자 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지배권에 도전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몇 년 전 그녀의 아들 중 하나가 지배자의 권속과 조우한 일이 있었다. 아들은 아직 젊었고, 젊은이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강철처럼 단단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철판도 잘근잘근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의 예리한 송곳니를 맹신하고 있었다.
그 애는 그녀의 아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산의 금기를 범하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는 차기 왕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들은 그녀의 경고를 무시했고 그 대가는 뼈저린 것이었다.
아들의 발톱은 무심하게 허공을 갈랐고, 지배자의 권속이 내뿜는 번개는 섬광보다 빠르게 순백의 몸체를 꿰뚫었다. 가죽이 벗겨졌고, 발톱과 이빨 역시 몽창 뽑혀 져 나갔다. 지배자의 권속은 낭비를 몰랐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들의 포를 뜨던 도중에 떨어진 하얀 털 몇 오라기뿐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죽어서 가죽을 남겼고, 그 가죽은 그 희소성에 비례하여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삼 일 밤낮을 슬퍼했지만 복수를 꿈꾸지는 않았다. 여전히 진정한 지배자의 권위는 하늘에 떠 있는 일월의 운행만큼이나 절대불변이었고, 적자 생존은 숲의 섭리였다. 강자가 약자를 배제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약육강식의 규칙 안에서 사는 자신이 이 섭리를 어길 수는 없었다.
오늘은 그 진정한 지배자가 이십여 년 만에 산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녀는 산의 왕으로서 마중을 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의 늠름한 다리가 대지를 박차고 바람을 가르자 은빛 털이 파르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백호(白虎)는 하얀 유성이 되어 구름 아래로 긴 궤적을 그리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