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復碁
-타초경사(打草驚蛇)
“괜찮겠나?”
마진가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아직 그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지 않았다. 사실 말이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유능한 참모가 그의 흔들리는 마음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걱정되십니까, 관주님? 너무 정직해지셔서?”
은목 손문경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가느다란 눈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정직하다고? 누가 말인가?”
짐짓 과장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린 마진가가 말을 이었다.
“하긴 심중에 있던 말을 다 끄집어내 보여줬으니 정직하다고도 할 수 있겠군. 내 배를 가르고 그 안에 든 걸 보여준다 해도 이보다 더 정직할 순 없을 걸세.”
“정직한 건 좋은 겁니다. 진실인만큼 힘이 깃들어 있지요.”
그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숨김이 없었으니 도덕적으로도 문제될 것 없잖습니까? 여러모로 두루두루 이익이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해서 마진가가 손문경의 도덕성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군사란 원래 적을 속이는 것이 일이라 그에 관련된 약간의 비도덕적 행위를 해도 직업윤리에 저촉받지 않았다. 오히려 권장 사항이기까지 했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때로는 정직함이 거짓말보다 더 야만적이고 잔인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이번 경우만 하더라도 마진가의 정직함이 손문경의 책략에 의한 것이라면 마진가의 정직은 손문경에게 있어서 비정직ᅳ일단 상대가 누구든 속이는 수단으로써 이용되는 것이니까―이 되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하기는 했네만…….”
마천각의 눈과 귀를 앞에 두고 너무 떠든 것이 아닐까?
마진가는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그 눈과 귀는 다른 곳의 눈과 귀도 겸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로 깃털이라 불리며 그들을 백 년 동안 들들 볶아온 존재들 의.
상상만으로도 불쾌해지는 이야기였다.
“의심스럽다면 조용히 조사해서 증거를 잡아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
방금 전처럼 중요한 이야기는 은밀하고 조용하고 정숙한 회의실에서 남들이 들을까 신경 바짝 세워가며 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을 현재 잔뜩 그 진정성을 의심 받고 있는 마천각의 대표로서 온 인물 앞에서 신나게 나불나불 떠들어댄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인지 그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나 많은 위험을 감 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략의 주인은 그런 심려까지 다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잘 압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까 봐 두려우신 거지요?”
손문경이 미소 지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보았네.”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해서 도망치게 만들면 뱀을 잡을 수 없다. 다시 수면 밑으로 잠적하면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하염없는 입질을 기다리며 몇 년을 허 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손문경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저랑은 정반대시군요.”
“정반대?”
“예. 전 오히려 그들이 좀 빠릿빠릿 움직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멀리서도 잘 보이게 말이죠.”
현재 중원이란 이름의 풀밭은 너무 넓었고, 그에 반비례해서 투입할 만한 인력은 태부족이었다. 아무런 지표도 없이 뒤지다가는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딱 좋았다. “일부러 도발했다는 건가?”
손문경이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풀을 건드려 도망치게 만들기에 그들은 오랫동안 너무 잘 숨어 있었습니다. 아마 풀이 난 지상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기란 힘들 겁니다. 이미 땅속 깊숙한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놈들입니다. 백 년 묵은 능구렁이죠. 우리가 여차하면 땅을 뒤집을 거라는 의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더 깊은 땅 밑으로 숨으면 어찌하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있을 법한 일 중에서 손문경이 검토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때문에 손문경은 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잠잠해지면 잠잠해지는 대로 좋습니다.”
손문경은 전혀 걱정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마진가는 걱정이 있었다.
“왜 그런가? 자네만 알고 있지 말고 나도 알려줬으면 좋겠네. 그것 때문에 자네에게 월급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비록 내 돈이 아니라 학관의 돈이지만 자네가 나 의 참모 겸 보좌라는 점은 변함이 없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참모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한 자리이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대 신해 준다는 데 대해 그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가 부끄러워할 때는 그 참모의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을 때이지, 지금처럼 그 능 력이 십분 발휘되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결단력이었다.
결단만큼은 참모가 대신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남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결단을 회피하는 것은 곧 그 책임을 방기한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우두머리임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결단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손문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반응은 아니죠.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 또한 반응입니다. 움직이려면 그전에 움직이지 않아야 하지요. 동(動)만 운동이 아닙니다. 정 (靜) 또한 운동이지요. 그 역도 가능합니다. 멈추려면 그전에 움직이고 있어야 하지요. 운동이란 변화입니다. 제가 보고 싶은 것은 이 변화입니다. 위상이 변하는 것, 차이가 지는 것, 지금과 같지 않은 것, 그 폭이 크면 클수록 그들을 파악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풀이라 해도 다 같은 풀은 아니죠. 조금 전 우리는 어떤 풀 하나에 표시를 해놓았으니까요.”
철썩!
마진가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과연!”
그의 두뇌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렇군! 우리가 추측하고 있는 것을 첫 공개한 것은 조금 전 회담뿐이었으니 앞으로 다른 곳에서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면 그 청년을 통해 흘러들어 간 것이 되 는군.”
원래 구분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작업들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딱 하나의 풀에만 표시를 함으로써 그 정보 유출의 창구를 특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중에 노사들에게 입단속을 한 것이었군.”
그 청년 사절이 물러난 후 손문경은 그 자리에 있었던 노사들에게 대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철저히 함구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 부탁(?)을 어길 시에는 엄하게 처리 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혀를 잘못 놀려 허락도 없이 다른 풀들에다가 사방팔방 표시를 하고 다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네는 마천각이 그들의 본거지라 생각하나?”
그것이 가져다줄 충격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상상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최상을 추구하면서도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 우두머 리의 역할이었다. 개인의 호불호 때문에 책무를 회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상상이 불쾌하면 불쾌할수록 그곳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런 곳이 진짜 위험 한 곳이기에.
“아직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하지만 상당 부분까지 그들의 세력이 침투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으리라.
“백 년 동안 숨어 있고도 들키지 않은 여우 같은 자들입니다. 숨바꼭질에는 이골이 나 있을 겁니다. 크게 흔들어놓지 않으면 그들은 바위틈에서 나오지 않을 겁니 다. 굴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불을 붙여야지요.”
“그 여우들이 그 연기에 놀라서 굴속에서 뛰쳐나왔으면 좋겠군.”
그럼 그때서야 비로소 여우 사냥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두 줄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입만으로 웃으며 손문경이 대답했다.
“홍, 자네 거기 있나?”
“여기 있습니다, 관주님!”
천장 쪽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부탁하네.”
“음, 근데 뭘 말입니까?”
“…….”
“거시기 말일세, 거시기.”
“아, 거시기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유능한 부하는 이심전심이라던데 일일이 말해줘야 되나?”
“말 뒀다 뭐에 씁니까? 이럴 때 써야죠.”
“거시기도 오십보백보 아닌가?”
그러나 마진가는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홍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