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정말 은거기인?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네.”
장우양이 계약 성사를 채 자축하기도 전에 노사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문하십시오.”
장우양은 어떤 이야기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다는 자세로 공손히 대답했다.
“그 아이들을 어찌할 셈인가?”
“그 아이들이라 하시면… 청룡은장의 생존자인 그 두 아이 말씀이십니까?”
노사부는 고개를 한 번만 끄덕였다.
“지금 나와 자네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세계 내에서 아이들이라고 하면 그 두 아이뿐이지. 다른 아이는 없지 않은가?”
“부끄럽습니다만 도착하고 나서 표물의 인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원하는 곳으로 호위를 두어 명 붙여서 보내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연고도 모두 잃었고 가업도 모두 잃었으니 어디 의지할 데가 있겠습니까?”
“쯧쯧, 그건 모르는 일이지.”
노사부가 딱 잘라 대답했다.
“예?”
“가업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길세. 혹여 잃었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다시 세우면 될 게 아닌가?”
오늘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가볍고 태평한 어조였다.
“다시 세우다니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자네의 마음이 그걸 어렵게 만들지 않는 이상 간단해. 자네는 왜 그렇게 하양이를 원했나?”
“그거야 노사부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중양표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써의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오십 점짜리 답안이군.”
“예?”
장우양은 아직 노사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사업을 확장해 볼 의향이 있나?”
앞머리카락이 기다란 누군가에게서 얼마 전에 들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그 말에 장우양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복안이 있으시다면 삼가 경청하겠습니다.”
몸가짐을 바로 하며 장우양이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보통 사람이 일생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 운명의 파도와 조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안이라면 이미 얘기해 주지 않았나?”
노사부가 조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에?”
장우양이 다시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둔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키워가려고. 내 다시 한 번 말해주지. 불타 버린 청룡은장 재건에 자네들 중양표국이 발 벗고 나서는 게 어떤가 하는 것일 세.”
“전장업에 뛰어들라… 그 말씀이십니까?”
정말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장우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물론일세.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인지도 모르네.”
“그건 좀…….?”
장우양은 무의식중에 몸을 움츠렸다. 그건 너무도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일대 모험이었다. 사업의 무리한 확장은 언제 어느 시대나 위험을 담보로 하기 마 련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있던 기반마저 무너질 수 있었다. 장우양이 꼬리를 슬며시 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물러나면 비류연 의 사부가 아니었다.
“중원표국이 왜 천하제일표국으로 불릴 수 있었는가? 그자들이 수많은 사업에 여기저기 문어발식으로 발을 뻗었지만 그런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직접 운영하는 중원전장이 있었기 때문임을 모르지는 않겠지?”
산속에 파묻혀 산 은거 기인이라고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현실 파악 능력이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다 얻는 것일까?
“정말 잘 아시는군요! 그건 사실입니다. 중원전장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을 무기로 중원표국은 지금의 기반을 쌓았지요.”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법. 중원이란 들판은 한 마리의 호랑이만 있으면 족하네. 자네가 중양표국을 천하제일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차 피 중원표국은 넘지 않으면 안 될 산이자 벽일세.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에서 지원해 줄 자금줄이 꼭 필요할 걸세.”
삼 년 전만 해도 꿈같았던 이야기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새롭게 전장을 세우고 판로를 뚫고자 한다면 천년만년이 흘러도 앞서 달려가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네. 하지만 청룡은장과 연합하게 된다면 이야 기는 달라지지. 자네는 청룡은장의 대주주이자 은인이 되는 걸세. 기존에 청룡은장과 신용을 트고 있던 고객들도 잿더미가 되어 날아간 돈을 회수해 준 자네에게 감 사를 느낄 걸세. 그러면 청룡은장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인맥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데다가 평판도 올라가 더욱 많은 손님들을 모을 수도 있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이제야 비로소 조금 전 노사부가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백무후가 하나의 상징이듯 두 아이 역시 청룡은장 재건의 대의명분을 지닌 상징적인 존재였다. 지 금 하나의 상징을 손에 넣었고, 확실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노사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 자칭 은거기인은 그 자칭이 의심이 갈 정도로 이재에 밝았다.
“청룡은장을 재건하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네.”
“두 가지… 음, 두 가지…….”
장우양은 필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한 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귀 쪽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는 소실된 장부를 복원하는 일일세. 쫄딱 망해 버린 청룡은장의 기존 고객들을 다시 유치하려면 그들이 은장에 예금해 놨던 은자를 다시 환급해 줘야만 하 네. 처음에는 손해 보는 것도 같고 부담도 크겠지만 나중에 가면 그 신용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걸세. 고객의 돈을 날려먹은 은장에 다시 돈을 맡길 고객은 없을 테 니 말일세. 그럴 바에는 청룡은장이란 이름을 쓸 필요가 없지.”
노사부는 장우양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정리되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첫 번째 문제에 비하면 두 번째 문제는 가볍다고 할 수 있네. 그러나 간단하지만 쉽지 않을 수는 있네. 왜냐하면 두 번째는 단순한 돈 문제이기 때문일세. 그러 므로 중양표국의 재정이 튼튼하면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걸세. 반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테고. 자네도 알다시피 다시 은장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두촌(頭寸:지급 준비금)을 마련해 놓아야 하네. 그래야만 고객들의 인출 요구를 제때 제때 들어줄 수 있지. 때문에 이게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허가가 나오지 않네. 물론 청 룡은장은 이미 관에 등록된 정식 은장이지만 한 번 큰 난리를 겪고 그 터까지 잿더미가 되었으니 관에서 감사를 요구할 걸세. 그러니 일정분 이상의 두촌을 마련할 필요가 있지. 그 다음은 고객들에게 잠시간의 양해를 구해야 하네. 자금이 모이기도 전에 예금 인출 소동이 일어나면 그 돈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도로 마련된 지급 준비금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요.”
장우양으로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노인은 어떻게 보통 장사치들도 잘 모르는 그런 세부사항들을 이토록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사천성과 현에서도 도움을 줄 걸세. 그들도 자신들의 가장 큰 돈줄 중 하나가 날아가는 것은 원치 않을 테니 말일세.”
신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노사부는 풍진의 세속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장우양은 그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시점에서 그는 이미 유 혹에 팔 할 이상 넘어가 있었다.
“자네는 그 아이들의 후견인이 되는 걸세. 중양표국이 적극적으로 청룡은장 재건에 앞장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관(官)과 고객들도 안심하고 지지해 줄 걸세.” 들으면 들을수록 솔깃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장우양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장대한 꿈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평생 감히 꿔보지 못한 엄청나게 장대한 꿈 이었다.
“그러려면 하루빨리 소실된 장부를 복원할 필요가 있겠군요. 하지만 어떻게 그걸 복원하죠? 이미 예전에 검은 재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걱정 말게. 청룡은장주가 똑똑한 사람이라면 여벌의 장부를 남겨두었을 걸세. 전에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그 아이들을 탈출시킨 건 청룡은장주 본인이었네. 아들 에게 미래를 위탁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 아이는 부친이 남긴 희망의 씨앗을 그 안에 품고 있을 걸세. 그 씨앗을 발아시키고 키우는 것이 자네 몫이고.”
장우양의 입이 함지박만큼 커졌다.
“그렇게 되면 청룡은장은 재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중양표국은 천하제일표국으로 도약할 마지막 발판을 손에 넣게 되겠지.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노후 보장 연금도 다시 찾게 되겠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굳이 해줄 필요는 없었다. 둘보다 셋이 함께 잘되면 매우 좋은 일이었 지만 노사부는 자신을 감춤의 미덕을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우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노사부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이 못난 우부의 절을 받으십시오, 노사부님!”
“절 같은 거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닐세.”
장우양은 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탄복했습니다, 노사부님! 오늘 이 장모가 크게 개안하는 날입니다! 정말 고명하신 수법입니다! 둘 다 이기는 거래를 하기란 정말 천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 로 힘들죠. 노사부님 덕분에 저희 중양표국은 날개 단 호랑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호랑이가 날개 단 격이라는 것보다 훨씬 상황에 맞는 표현이었다. 그 호랑이는 눈처럼 새하얀 백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