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수 거절
-거절당하다
“딴 데 가보시오.”
사내의 퉁명스런 대꾸에 연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라고요?”
“못 들었소? 장난치려면 따로 알아보라 그 말이오.”
뚱뚱한 중년 사내의 태도는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아, 지금 아저씬 우리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말하는 연비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러나 이 투기장 접수처를 담당하고 있는 사십대 중년 아저씨 장씨는 야생에서 너무 떨어져서 그런지 위험에 대한 감 이 많이 떨어진 듯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물론 진심이죠.”
그러나 여전히 장씨는 믿지 못하지는 눈치였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안 되오.”
“이유는 준비되어 있겠죠?”
“규칙이오.”
“거짓말!”
연비가 단정하며 말했다.
“거, 거짓말이라니?!”
접수처 장씨가 당황하며 반문했다. 그 반응은 연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줄 뿐이었다. 연비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틀린 말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이니까. 규칙은 무슨. 그냥 돈이 안 될까 봐 그러는 거겠죠.”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연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의 농도가 짙어졌다. 장씨가 보기에도 눈앞의 이 검은 아가씨는 이쁘긴 했지만 웃음이 어쩐지 무섭게 느 껴졌다.
“장사가 안 되다뇨?”
“이런 연약하고 예쁜 미소저들에게 돈을 걸 바보들은 없다, 뭐 그런 뜻이겠죠. 그리고 너무 한쪽으로 판돈이 쏠리게 되면 주최측에 남는 게 없을 테니까요.”
정곡을 찔렸는지 장씨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사방에서 그의 심장을 조여와 숨조차 제대로 편히 쉴 수 없었다.
“그, 그렇다면 어쩔 작정이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장씨가 되물었다.
“어쩌긴요. 안 된다는데 그냥 돌아가야죠. 가요, 린!”
고정관념의 노예가 된 이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후 연비는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섰다. 나예린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당황하여 따라나서며 연비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연비. 어떻게 하겠어요? 포기하시겠어요?”
검은 우산을 쓴 연비가 빙글 몸을 돌렸다.
“예? 아니, 왜요?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해요? 겨우 한 번 당한 거절 따위로 포기했다가는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 따윈 거의 없다고 보면 돼요.”
적어도 세상을 만만하게 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밑에 쫄다구가 보는 눈이 없다면 위쪽을 쪼는 수밖에요.”
나예린을 바라보는 연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왼쪽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설마…….”
“그 설마죠. 어멋, 갑자기 이 투기장의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물컹물컹 샘솟아 나는 거 있죠. 어멋, 놀라워라!”
나예린은 한번 연비를 말려보려 했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그녀의 용안이 외치고 있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럴 땐 내가 알던 그 사람과 똑같이 닮아가는 거지…….”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요?”
“설득해야죠.”
“뭘로 설득해요?”
“물론 말로요.”
정말일까? 쉽사리 믿음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예린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멈출 수 있는 선은 지나간 것 같았다.
“이 투기장을 지배하는 자가 어디에 틀어박혀 있을까요? 우선 그 장소부터 찾아봐야겠네요.”
신이 난 목소리로 연비가 말했다.
이 투기장을 지배하는 자는 ‘돈왕’이라 불리웠다. 그는 이 투기장뿐만 아니라 강호란도의 어둠의 질서를 지배하는 자이기도 했다. 이 강호란도에 소속된 모든 자 들이 그의 통제에 따라야만 했다. 그는 통제력을 유지할 만한 재력과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의 실력은 뛰어났고, 그 수 또한 많았다.
“이곳이 확실한 거겠죠?”
상식인이라면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면 돈 많은 돈왕의 집무실로 향하는 통로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는 생각보다 무척 넓고 높았다. 그 리고 계단 양옆에 놓여 있는 장식품도 상당히 화려하고 값나가게 보였다. 넓은 계단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을 지키는 자들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 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미심쩍었다.
“어떡하죠?”
조심스런 어조로 나예린이 물었다.
“확인해 보면 되겠죠.”
연비는 이런 데서 망설일 만큼 우유부단하지 하지 않았다. 연비는 주저없이 계단에 발을 디뎠다.
퓨뷰뷰뷰뷰뷰뷰욱! 쐐애애애애애액!
파바바바바바바박!
환영 인사는 무척이나 요란스럽고 성대했다. 환영받는 당사자의 입장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도(飛刀)와 화살처럼 내 리꽂히는 날카로운 창촉을 좋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경고도 없이 마흔여덟 자루의 비도와 스물네 자루의 창과 열두 자루의 검이 섬전처럼 연비의 발 치에 내리꽂혔다. 눈이 먼 게 분명한 도검창들은 자신들이 연비의 심장을 꿰뚫든 배를 꿰뚫든 머리를 꿰뚫든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연비는 그런 데 관심이 무척 많았다. 내디딘 발자국을 오기로라도 회수하지 않은 채 상반신만을 움직여 날아오는 도검창의 소낙비를 모조리 회피했다.
연비는 웃었다.
“어머, 확실히 찾아온 모양이네요.”
게다가 황송스럽게도 열렬한 환영 인파까지 있었다. 벽에 스며들어 있기라도 했는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계단을 가득 메웠다. 어느새 계단은 사 람 하나 지나가기도 힘들 만큼 빽빽한 인파로 들어차 있었다.
“뭐야, 안내할 사람이 있었네요.”
연비의 말이 나예린으로서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안내보다는 쫓아내는 쪽이 전문인 것 같았다. 그때 검은 무리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붉은 장식 이 들어간 검은 머리띠를 매고 있는 매우 강렬한 눈빛을 지닌 사내였다. 기도로 미루어보아 그가 아무래도 이 무리의 대장인 듯했다.
“돌아가라. 여긴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다!”
사내가 말했다.
“용건도 들어보기 전에 축객령인가요? 게다가 보자마자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접객 태도가 글러 먹으신 게 아닌가 걱정부터 앞서네요. 여긴 그런 초보적인 것도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죠?”
눈은 웃고 있었지만, 연비의 혀에는 칼날이 담겨 있었다. 사내의 눈이 한순간 움찔했다. 설마 자신들 백팔호위를 앞에 두고 이렇게 입을 마음껏 놀릴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계집애가.
“뭐, 뭐라고… 말 다 했느냐?”
“아직 남았어요. 쯧쯧,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우리가 만약 이곳 주인과 미리 약속된 귀한 손님이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요?” 연비의 한마디는 두려움 모르던 이 사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야, 약속이 되어 있으셨습니까?”
순식간에 사내의 태도가 바뀌었다. 거만하게 열려 있던 어깨가 좁아지고 뻣뻣하던 허리도 금세 숙여졌다. 손바닥 뒤집는 것도 이보다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아뇨.”
물론 그딴 게 되어 있을 리 없었다.
“이이이익!”
그제야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곤 연비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었는데 못 알아먹은 네가 바보멍청이라는 뜻이었다. 듣고 있는 이의 복장을 뒤집기엔 충분한 한마디였다.
“너무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요. 지금부터 중요 손님이 될 예정이니까.”
여전히 태연한 안색으로 연비가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쯧, 정말 말귀가 어둡군요. 이곳 주인한테 회담을 신청한다 그 말이죠.”
“주인님을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냐?”
“물론 일 얘기를 해야죠.”
“일?”
“사업에 관련된 일이죠. 나머지는 아랫사람하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호오, 그렇다면 아무런 예약도 연고도 없이 주인님을 만나뵙겠다, 그 말이냐?”
“이제야 겨우 이해가 된 모양이군요.”
기다리기 무척 지루했다는 어투로 또 한 번 흑건사내의 비위를 뒤집어놓는 연비였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좋아좋아!”
사내는 갑자기 무엇이 그리도 흡족한지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외쳤다.
“거력신!”
쿵!
그 한마디에 계단 전체가 ‘쿵’ 하고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르르 진동했다.
그리고는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단 전체를 꽉 메우고 있는 그림자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한 그림자인 줄 알았다. 계단 위에 켜져 있던 불이 차례차례 꺼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믿겨지지 않게도 그것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계단 전체를 그 체구로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거구였다.
그런데도 두 팔은 비계 대신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끈불끈, 보기만 해도 더운 알통에 시퍼런 힘줄이 펄떡거려 보는 소저들을 불편하게 했다. 게다가 시위라 도 하는 건지 웃통은 완전 벗어 젖히고 심장을 보호하는 철판을 가죽 띠를 이용해 도끼 부(父) 자 모양으로 달아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됴됴됴됴’라고 외치며 주먹을 날린 뒤 ‘넌 이미 죽어 있다!’라고 외칠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머리 뚜껑을 열어보면 그 안도 근육으로 들어차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문이 새록새 록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흐흐흐!”
발달된 근육에 비해 지성은 반비례하는지 그는 짐승 같은 웃음만 흘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시위하듯 근육을 불끈불끈 부풀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말로 대화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인가요?”
그 한심하고 보기만 해도 더운 모습에 회의를 느끼며 연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 물론!”
분명 저 뒤룩뒤룩, 울퉁불퉁한 근육이 뇌 내의 언어 체계를 압박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신 설명해 준 것은 호위대장인 흑건사내였다. “어떠냐? 놀랐느냐? 이 거력신은 ‘금종조’라는 특수한 외문기공을 익혔기 때문에 어지간한 도검으론 그 피부조차 상하게 할 수 없지. 그러니 후회해도 이미 늦었 다.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을 테니까. 잠깐 남은 시간에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도록 해라!”
퍽퍽!
거력신이라 불린 거구의 사내는 바위 같은 주먹을 맞부딪치며 으스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표정만으로도 상대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당신 까막눈이죠?”
연비의 갑작스런 질문에 거구의 사내가 흠칫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아, 뭐,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니라는 투로 연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 죽인다!”
거력신은 자신의 취약 부분을 건드린 연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연비는 그가 용서해 주든 안 해주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한편 나예린은 조용한 눈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끼어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녀는 연비를 믿기로 했다.
“뭐, 좋아요. 전 평화주의자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 나오신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어요. 꼭 대화만이 의사소통의 유일무이한 수단은 아니니까요.”
그렇다. 때로는 눈빛, 때로는 마음, 그리고 가끔, 정말 가끔 주먹으로도 의사소통은 가능한 것이다. 연비 역시 대화 이외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 력한 적은 없었다. 가끔은 오히려 앞쪽보단 뒤쪽을 선호하기도 했다. 제자들 겸 사제들도 그 마음 씀씀이를 분명 잘 알아줄 것이 분명했다. 몇몇이 게거품을 물지도 모르지만 그땐 또 그때대로 차분히. 대화를 나누면 다 해결되게 되어 있다. 자기 좋은 방식만 고집할 만큼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시도조차 포기해선 안 되죠. 서로 교집합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래요?” 연비는 구심살없는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접혀 있던 자신의 검은 우산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았다.
스륵!
연비의 왼쪽 발이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고정된 오른발을 축으로 힘차게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며 부드럽게 허리를 돌려 발끝에서부터 허리를 지나 어깨까지 전해 져 오는 그 회전력에 힘을 실어 두 팔을 힘껏 횡으로 휘둘렀다.
“카카!”
거력신은 괴이쩍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가소롭다는 듯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우산을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뻐억!
공기를 찢으며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에엑!”
다음 순간 수백 근은 족히 나갈 것 같던 거력신의 거구가 몸이 반으로 접힌 채 계단 위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물론 그 거구가 지나가는 길에 있던 무수한 호위들이 무사할 리 만무했다. 거력신의 거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아비규환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지독한 참상만이 남아 있었다.
“흠, 종소리는 안 나는군요. 겨우 북 터지는 소리라니……. 실망이에요.”
금종조를 익혔다 해서 두들겨 맞았을 때 종소리가 나란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일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연비의 억지에 불과했다. “그럼 갈까요?”
연비가 미소를 듬뿍 문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시작의 일보일 뿐이었다.
아직 남은 계단은 그들을 막을 자들만큼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연비는 아직 얼마든지 말 이외의 수단으로 의사소통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로 설득하겠다는 말에 추호도 거짓은 없었다. 그 의지에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순수성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당사자를 만나야 말로 설득을 하 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연비에게 있어서 설득의 대상은 최고위층 단 한 사람뿐이었다. 똘마니들에게 용무는 없었다. 그래서 약간 거친 수를 쓰기로 했다. 피차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는 듯했으니 굳이 사양할 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걸 정당방위라 하는 거겠죠?”
무척이나 쓰임새가 잘못된 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사실을 지적해 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