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句句節節)
-소녀의 과거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예쁜 신을 신고,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머리를 땋는다. 흙더미에서 뒹굴고 코나 찔찔 흘리며 시도 때도 없이 싸움 박질이나 하는 머슴아들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멋진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의 자기 만족은 그런 어설픈 상념을 하루아침에 모래 성처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날 아침, 남동생이 태어났다. 삼대 독자였다. ‘류’가에 오십여 년 만에 태어난 사내애였다. 그전에 태어났던 사내아이는 바로 소녀의 아버지였다. 집안은 잔치 분 위기였다. 그리고 한 달 밤낮을 쉬지 않고 계속되던 그 잔치가 끝난 후 자신의 존재는 어른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져 버렸다. 잊을 수 없는 아침이었다.
어른들은 자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관심이 새로 태어난 남동생에게 집중되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붙여진 유모만이 간간이 삼시 세끼를 챙 겨줄 뿐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투명해진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못 본 척 지나칠 리 없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가가면 귀찮다고 밀쳐 낸 후 쓰 러진 자신에겐 일별도 주지 않은 채 남동생의 방으로 사라지는 엄마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유모에게만은 자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유 모에겐 특별한 영능력이 있는 게 분명해. 소녀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 순간, 세계는 다시 한 번 전복(顚覆)됐다.
그다음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 싸워왔다. 뭐든지 뛰어나기 위해 싸웠다. 공부도, 무공도, 요리도, 가사도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여 자라 해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동생이 기고 일어나서 이야기를 시작한 후 남동생과 자신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모든 면에서 자신은 남동생의 능력을 상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온갖 엄살과 떼를 다 받아주며 키운 남동생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이 무조건 적으로 주어지는 지나치게 혜택받은 환경 속에서 나태함 이외에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투명한 자신을 어떻게든 채워보기 위해 발버둥 쳤다. 투명한 자신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비참해져 가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일취월장해도 조부모와 부모의 눈동자에 여전히 자신의 모습은 비춰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투명한 채 그대로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무공을 갈고닦았다. 노력한 만큼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검만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 같 았다. 그녀의 노력에 보답해 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수련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무공 대결이 있었다. 남매 간의 대결이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커온, 노력이란 게 필요치 않았던 동생이 자신을 이길 리 만무했다. 단 오 초 만에 자신은 동생을 압도했다. 칭찬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입 안이 찢어질 만큼 강한 뺨따귀였다.
소중한 동생에게 상처 입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상처의 크기는 손톱만큼 긁힌 정도였다.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은 자신은 지하 골방에 갇혀 삼 일 동안 굶어야 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퀭한 눈으로 어둠을 직시했다.
자신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비참했다.
그 후 가출이라는 것을 했다. 멀리는 가지 못했다. 평소 혼자서 검을 휘두르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스승을 만났다. 기연이었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스 승에게서 대신 받을 수 있었다. 소녀는 삼 일 밤낮을 울었다.
돌아오자 집 안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토록 강하던 아버지가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도객이 벌이는 백인참이라는 비무 행에 걸려 비무를 한 결과였다. 목숨은 건졌지만 무공은 건지지 못했다. 류가는 그날 우두머리를 잃었다. 텅 빈 공석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집 안의 후계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문의 후계자로는 둘 다 너무 어렸고, 그중 한 명은 여자였다. 조부모와 어머니는 남동생을 밀었다. 그러나 동생 은 너무 어렸고 무공 실력 또한 아직 보잘것없었다. 고작 열세 살짜리 코흘리개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반대자가 나왔다. 그것은 즉, 자신을 지 지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논쟁은 삼 년을 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조용히 자신을 불렀다.
원수의 행방을 찾았다고, 가서 원수를 갚으라고. 그 원수만 갚는다면 가주 자리는 네 차지라고. 가서 네 의무를 수행하라고. 그러기 위해 투기제에 참가해 우승해 상금을 타오라고.
그러나 그렇게 강했던 아버지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자신에게 승산이 단일 할이라도 있을 리 만무했다. 죽으러 가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원수보다 상금이 강조되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이겨서 상금을 타와도 좋고, 혹은 거기서 죽어도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 인가? 그러나 그런 불만을 밖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한마디였다.
이 일만 어떻게든 완수하면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조금쯤 자신에게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비록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하다 해도 지금 자 신에게 남겨진 실낱같은 희망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남궁상과 용천명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궁상이었다.
“지독한 이야기군요. 인간이란 정말 때때로 깜짝 놀랄 만큼 잔인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용천명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일세.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는 쪽이 훨씬 더 현실감있겠군.”
그러나 지어낸 이야기보다 현실은 더 예측불가능하고 잔인했다.
“분명 남동생의 엄마는 계모겠군요? 맞습니까?”
남궁상이 물었다. 그런 지독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친혈육일 리가 없다. 분명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병으로 돌아가셨고, 지금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은 부친이 새로 들인 의붓어미가 분명했다. 계모가 전처의 자식을 학대한다.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물음에 소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쓰디쓴 고 소를 머금은 소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훨씬 빗나가 있었다.
“저도 그런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차라리 이렇게 가슴 아픈 괴로움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요. 차라 리… 차라리 계모였다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을 텐데……..
자조 섞인 미소 속엔 괴로운 빛이 역력하다.
“헉! 서, 설마 그렇다면…….”
소녀는 아픈 미소를 머금은 채 끄덕였다.
“잘못 안 건 아니고요?”
“아니에요. 맞아요. 그래요. 그분은 의심할 바 없는 저의 친어머니랍니다. 분명 피와 피가 이어져 있는.”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엔 괴로운 빛이 역력했다. 그것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분명 갈기갈기 찢겨져 피눈물과 함께 흩어지고 말았으리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그의 상식에 반하는 일이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너무한 이야기군요. 그리고는 마지막엔 동생의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사지로 보냈다 이겁니까?!”
구역질이 난다는 표정으로 남궁상이 날카롭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보게, 남궁 대장. 그런 심한…….?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궁상의 말에 틀림은 없었다. 그러나 듣고 있는 당사자인 소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줄 필요가 굳이 있을까? 그 점이 용천명은 회의스러웠다.
“진실은 비정하고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냉엄하죠. 제가 아는 한 인물이 그러더군요.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고. 그래 봤자 그런 건 임시방편일 뿐이라고요. 현실 속에 사는 이상 현실의 파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요.”
“누군지 모르지만 엄격한 말이로군. 나도 지난번 화산화 이후 좌절했을 때 나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좌절해서 도망치려고 한 적이 있었지. 도망쳐 보고 나서야 알았다네.”
“뭘 알아냈습니까?”
남궁상이 물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해결책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일세! 그게 업(業)이란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류은경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남궁상과 용천명은 자신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내밀한 이야 기를 이렇게까지 깊숙이 알려줬다는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을 믿는다는 말이었다. 고질적인 불신병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두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그 믿음에 보답해 줘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두 사람을 지배했다. 어떻게든 이 가련한 소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 던 것이다. 그리하며 두 사람은 격한 감정에 지배되어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만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두 사람, 약소하지만 힘을 보태 드리지요.”
분개한 용천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정말이신가요? 제가 드릴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요?”
“하하하, 대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 용천명, 도움을 주면서 대가를 바라는 그런 치졸한 사람은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신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쉽게 남의 부탁을 들어줘도 되는 건가요?”
부탁을 들어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반문이었다. 이미 그녀의 불신은 마음속 깊숙이 뿌리 내려져 있는 듯했다.
“이 사람, 그렇게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 아닙니다. 제가 내뱉은 말 정도는 책임질 수 있습니다.”
용천명이 호언장담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보기에 이렇게 일이 쉽게 성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두 분께는, 특히 용 공자님께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인데도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시오! 사나이 용천명, 이득을 보고 움직이는 자가 아니오!”
그 호언장담에 남궁상은 당황하며 용천명을 쳐다보았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왜 이러시나??
제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일까지 냉큼 떠맡다니. 용천명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취소하기는 때늦은 감이 있었 다. 류은경의 두 눈이 이미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훌륭한 마음을! 소녀, 감격입니다! 감격!”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주겠다니, 이 무슨 횡재란 말인가! 감동의 물결에 휩쓸린 류은경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게 아닌데…….?
남궁상은 용천명이 거부 의사를 밝히기 매우 곤란해진 자신을 대신해 류은경을 설득해 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와서 먼저 도와주 겠다고 나서 버린 것이다. 아무리 류은경의 사정이 딱하다고는 하나 현재의 상황을 망각한 행태라 할 수 있었다.
“저… 용 형, 그렇게 되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용천명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곤란하긴 뭘 곤란하단 말이오, 남궁 대장? 부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자를 위해 지옥까지 달려가셨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자가 있는데 자비의 부처님을 받드는 자로서 어찌 외면할 수 있겠소!”
더 반대했다가는 자기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될 판이었다.
‘이 사람, 예전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가 알고 있던 용천명은 좀 더 가까이하기 힘든 고고한 한 마리 학 같은 그런 느낌의 사내였다.
“이건 아무래도 최근 사귀기 시작한 마 소저의 영향인가? 아니면 전에 빠졌던 침체 탓인가?”
의식이 마하령에게 미치자 또다시 불쑥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마 소저가 가만히 있을까??
무척 회의적이 된 남궁상은 약간 딱한 시선으로 용천명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직 연애 경험이 적구려, 용 형. 뒷일을 생각 안 하고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그 질투를 어찌 감당하려고.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용 형의 미래도 그 리 썩 밝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용천명의 걱정을 하기엔 자기 코가 석자인 남궁상이었다.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게 됐는데 어쩌지? 세 번째 선수로 현운이나 청흔 형을 넣을까 하던 계획은 취소해야 하는 건가? 근데 진령에겐 어떻게 해명하면 좋단 말인 가? 아니, 그전에 해명이란 걸 할 수 있게 될 때까지나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회의적인 관측이 아닐 수 없었다. 다가올 앞날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새카맣기만 했다.
갑자기 남궁상은 심히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