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19화 – 마님이라 불리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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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19화 – 마님이라 불리는 여인

마님이라 불리는 여인

-마님이라 부르도록

그 황의사내는 매우 형형한 눈빛을 지닌 검객이었다. 기도를 숨기려 해도 쉽사리 숨겨지지 않는 단련의 세월이 그 사내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 사내가 묵묵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 위의 다른 승객들은 감히 옆으로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절정의 기도를 소유한 뛰어난 검객이 분명한 이 사내가 단 지 호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호위하는 이는 지금 배 난간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무척 풍만한 몸매를 하고 있으 면서도, 어딘지 모를 기품의 소유자였다. 대략 사십대는 넘어 보였는데, 세월도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승객들 중 다수의 남자 들은 이 미부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둘러치고 있는 무시무시한 호위 때문에 감히 정면으로는 쳐다볼 용기 가 나지 않아 힐끔힐끔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러다 어쩌다가 호위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앗, 뜨거라’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선실 안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다시 강으로부터 밤바람이 불어와 미부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물 위의 밤은 차갑게 마련이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호위가 그녀에게로 다가가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제야 흘러가는 물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미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됐어요. 그 안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으니까 그냥 여기 있겠어요.”

“그러다가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그랬다간 자신이 책잡히는 걸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이 마님이 너무 대가 세다는 것이었다. “제가 그렇게 약해 보여요?”

약하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경멸하기까지 하는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어찌 보면 그녀는 백도무림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무삼성을 제외하고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그럼 아무 문제 없겠군요. 그냥 여기 있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이는 지금 뭐 하고 있죠?”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여인이 물었다.

“아직 선실 안에 계십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거고, 이제는 다른 걸 알고 싶군요.”

퉁명스런 어조로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매우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직 서류 처리 중이십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진실을 이야기해야 했다. 그 일은 자기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 책임자가 아니었고, 그 위치에 따른 의무를 짊어질 사람 역 시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 그이는 이런 곳까지 꼭 일감을 들고 와야 하는 건가요?”

미부인이 퉁명스런 어조로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것이 아무래도 지금까지 뚱해 있던 원인인 모양이었다. 이건 호위인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그 일로 지금쯤 그의 주군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그의 주군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 마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 게든 주군을 대신해 변명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서찰을 받고 갑자기 뛰어나오신 거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때야말로 정말 큰일이니까요.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소홀히 하실 수 없다는 게 맹주님의…….”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러니 더 말할 필요 없어요.”

“예, 마님.”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화가 풀리는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남궁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이거 큰일이네. 여기서 이렇게나 시간을 잡아먹고 있으면 부인이 화낼 텐데…

노인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열심히 서류와의 씨름을 계속했다. 이제는 이 서류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습자들이 일부러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

다. 이렇게 엄청나게 쌓여 있는 서류들과 싸우다가 계속 부인을 홀로 떨어뜨려 두면 분노한 부인의 손에 의해 죽임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윽,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악독한 차도살인지계를 쓰다니…….?

그러나 어쨌든 그는 백도무림맹을 짊어지는 맹주였고, 이 서류들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까지, 배 타고 가면서도 선실 을 하나 통째로 빌려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다다다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나백천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보지 않고도 마누라의 분노 수치가 점점 더 높아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다다다닷!”

절세의 검공도 이런 두뇌를 써야 하는 서류 처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상이나 제갈 군사라도 데리고 올걸.”

좌호법 남궁진은 검에는 조예가 깊지만 서류에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부인 곁에서 엉뚱한 파리가 꼬이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 어 이쪽으로 빼기가 곤란했다. 그러다 보니 서류 처리에 비상한 능력을 지닌 맹 내의 두뇌파 두 사람이 못내 그리운 맹주였다. 그러나 배가 동정호 호반 위를 미끄러 지는 지금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봐도 좋았다.

겨우 쌓여 있던 서류 작업을 끝마친 나백천이 서둘러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마음이 무척 다급하다 보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의 부인인 예 청은 삐쳐 있었다. 그는 부인의 기분을 알아채는 데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생존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함부로 거슬리면 가정의 행복은 보 장할 수 없었다. 문짝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급하게 선실 문짝을 열어젖힌 노인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야 할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그 빼어난 미모 때문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일쑤였기에 그는 그저 사람들이 우글우글 진을 치고 있는 곳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노인은 사람들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딴청을 피우며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내 사람들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곧 중년의 미부 앞에 이르자 조금 전까지 근엄하고 엄숙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방긋방긋한 웃음이 가득 차 올랐다.

“저… 부인… 화나셨소?”

노인이 손바닥을 비굴하게 비비며 물었다. 놀랍게도 이 노인이 이 미부인의 남편인 모양이었다.

“흥, 몰라요!”

미부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그럼에도 노인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한 쪽은 그쪽이었다.

“부인, 내가 잘못했소이다. 그러니 용서하시구려.”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진짜 잘못한 건가요? 밀린 업무를 한 것뿐이잖아요? 잘못도 없는데 사과할 필요 있나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마음이 찡한 내용이었을 것이나 말하는 투가 날카롭다 보니 그런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당신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요.”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노인은 노력했다. 무림맹주로서의 체면 같은 건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가요?”

“무, 물론이오.”

“그럼 확실히 놀아줄 건가요? 딴청 안 피우고?”

“내 약속하리다. 지금부턴 딴청 안 피우고 당신과 확실히 놀아주겠소.”

노인이 두 손 모아 싹싹 빌자 그제야 이 중년 미부도 조금은 마음이 풀린 듯했다.

“그럼 됐어요.”

어느새 봄날 훈풍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남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여기 앉으세요, 상공. 제가 자리를 데워놨답니다.”

우아한 몸놀림으로 나백천의 팔을 감싼 여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업무 보느라 힘들었죠? 소첩이 차라도 한잔 올리겠어요.”

조금 전까지 살기등등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편의 건강과 안위를 근심하는 현숙한 아내였다.

“하하, 아니, 뭘 그럴 것까지야……. 괜찮소이다, 괜찮고말고. 부인도 긴 여정에 피곤할 텐데, 굳이 당신을 번거롭게 해서야 쓰겠소. 그냥 이곳에 나와 함께 앉아 바람이나 쐬며 달이나 구경합니다.”

“역시 절 생각해 주는 건 당신밖에 없군요. 좋아요. 여기서 함께 앉아 구경이나 해요. 혼자 보는 달은 차갑고 쓸쓸하지만 둘이서 보는 달은 필경 따뜻하고 온화한 빛을 띠고 있겠죠.”

그러면서 나백천 옆에 바싹 다가가 앉은 중년의 미부는 나백천의 힘찬 팔뚝에 가느다란 팔을 감으며 불어오는 강바람을 쐬며 함께 달을 올려다보았다.

강바람은 두 사람의 온기를 빼앗지 못했고, 달은 온화하고 따뜻한 빛깔을 띤 채 밤하늘에 조용히 걸려 있었다.

또 한 번의 전쟁이 극적인 타결을 맞이해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궁진만이 옆에서 나직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이 싸움의 승리자는 도대체 어느 쪽일까? 주군의 팔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바람에 그는 잠시 깊은 회의에 빠져야만 했다. 그러나 하도 봐오던 거라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다. 그래서 그냥 한숨만 내쉬곤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저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반 치도 없는 게 분명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백천과 그의 부인 예청이 타고 있던 배가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다. 곧이어 다리가 내려졌다.

“자, 내리시죠, 마님.”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물린 후 남궁진이 말했다.

“고마워요, 좌호법! 내려가죠, 여보.”

“아, 그럽시다, 부인.”

나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왼팔을 내밀자 예청은 자연스럽게 그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와 뛰어난 미모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넋을 잃고 이 중년의 미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개중에는 입을 헤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니 이 부인의 미모가 얼마나 출중한지 알 수 있다. 지난 세월도 그녀의 미모에 크나큰 손상을 입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빙월선자 예청은 초립이나 면사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당당히 얼굴을 하늘 아래 드러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서 내려 대로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이런 시선 집중 현상은 계속되었다. 길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고개를 돌려 보는 이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가다가 고개를 잘못 돌려 균형을 잃고 낙 마하는 이까지 생겼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더 불편해진 쪽은 나백천이었다. 음탕한 시선들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이 노고수의 마음속에서 맹렬한 살기가 뜨거운 용암처럼 부글부글 김을 내며 들끓어 올랐던 것이다.

“저기, 부인.”

참지 못한 나백천이 마침내 조심스럽게 예청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여보?”

그다지 안색이 밝지 않은 나백천의 얼굴을 보며 예청이 반문했다.

“저기… 초립이나 면사를 쓰는 게 어떻소?”

“어머, 왜요?”

그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짓궂게 예청이 물었다.

“어흠, 어흠. 뭐 그냥…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나백천이 변명했다.

“흐흠, 그게 다인가요? 다른 할 말은 없고요?”

중년의 여인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맑은 봉목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보통 때라면 무척 흐뭇한 광경이었을 터였다. 이런 부인이 옆에 있으면 자신도 더 젊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남들이 당신의 얼굴을 흘낏흘낏 쳐다보는 게 썩 기분 좋지가 않기 때문이라오. 어흠.”

나이 들어서 그런 말 하는 게 부끄러운지 나백천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예청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제 얼굴, 보기 싫어요?”

화들짝 놀란 나백천이 한 손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겠소?”

“정말이요?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 있겠어요? 부끄러운 얼굴도 아니고 보기 싫은 얼굴도 아닌데. 원래 미인은 어딜 가나 주목받게 돼 있는 법이라고요. 나이 들 어서도 아직 젊은 애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군요.”

“어허, 풋내 나는 어린애들이 어찌 당신의 완숙한 아름다움과 비교될 수 있겠소? 그건 불가능하오.”

“어머, 아부도 많이 느셨네요.”

짐짓 놀랍다는 시늉에 나백천은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커흠, 당신 덕분에 많이 연습했다오. 어흠.”

봄에 뭇 꽃이 만개한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기뻐요.”

그러면서 더욱 나백천에게 몸을 밀착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자 저절로 기쁜 마음이 일어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체통이 있는지라 그럴 수는 없었다.

“당신이 보기 좋다고 하니 계속 내놓고 다니겠어요. 사실 이곳에서 한 번도 얼굴을 가리고 다닌 적은 없거든요.”

이십여 년 전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인이었고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선을 두려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흑심을 품고 자신에 게 접근하는 남정네들에게 따끔하고 뼈저리고 눈 아픈 교훈을 주는 것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마당에 소심하게 초립이나 면사로 얼 굴을 가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시구려.”

역시 자신의 부인은 보통의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나백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앙칼진 성격까지도 나백천은 좋았지만 말이다.

“자, 그럼 우린 이제 어디부터 가면 되는 겁니까, 부인?”

정중한 어조로 나백천이 물었다. 예청의 대답은 간단했다.

“일단 두노이 집부터 들러야겠어요.”

“두노이는 또 누구요?”

“이곳 강호란도에서 가장 오래된 늙은 정보상이에요.”

그때 모든 이들이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씨구, 나이 먹고 잘하는 짓이다. 아주 살림을 차렸구나, 살림을 차렸어. 나이 백 살이나 먹어 오순도순 소꿉장난하니 기분 좋으냐?”

두 사람을 조롱하는 그 소리에 발끈 화가 난 예청은 소리가 났다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몸을 홱 돌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물컹!

순간 예청은 기절할 듯 놀랐다. 웬 정체불명의 손 하나가 자신의 엉덩이 한 짝을 와락 움켜잡았던 것이다.

‘어, 어느새?!?

정체불명의 노인은 괴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효효~ 이야, 궁뎅이가 정말 토실토실하구나. 구워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예청은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키며 노인의 면상을 향해 빙월장 중 일초인 한월침침을 암암리에 전개했다. 장심에서 뻗어 나간 차가운 한기가 노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정면으로 맞으면 오장이 한순간에 얼어버리는 무서운 장법이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노인이 가볍게 손사래를 한 번 하자 차가운 빙장의 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노인은 다시 예청의 엉덩이 쪽으로 신형을 옮겨 놓고 있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노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허참, 뭘 그리 화내고 그러느냐?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부비부비 엉덩이에 얼굴을 비비는 만행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이 노색마!”

분개한 예청은 다시 한 번 장법을 출수했으나 역시 맞히지 못했다. 비록 변태라곤 하나 일신상 지닌 무공의 깊이가 범상치가 않았다.

“부인, 물러서시오!”

사랑하는 부인이 모욕을 받자 대노한 나백천이 뇌성장의 일초를 전개하며 노인의 전신을 압박해 나갔다.

우르르르릉!

미약하게 벽력 치는 소리가 나며 쌍장에서 뿜어져 나온 장세가 노인의 전신을 덮어나가는데, 그 기세가 용 같기도 하고 범 같기도 하여 실로 위력적이었다. 명색이 무림맹주인 나백천이었다. 당금 강호에서 그의 일장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허, 이놈 보게. 장난 한 번 한 것 가지고 사람을 잡으려 드는구나!”

이 일장은 실로 무시무시한 거력이 담겨 있어 이 괴노인도 쉽게 생각할 수 없었는지 제대로 자세를 잡고는 천천히 쌍장을 내밀었다. 무척 느릿느릿한 일초였는데 도 그 안에는 기묘막측한 힘이 담겨 있었는지 나백천의 쌍장에서 뿜어져 나온 뇌성장의 거력을 한데 끌어 모아 손 안에서 동그랗게 구를 만들더니 천천히 합장하듯 양 손바닥을 마주 댔다. 그러자 뇌성장의 거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우렛소리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비록 칠 할 공력이 담긴 일장이지만 이토록 간단하게 장세를 소멸시키다니……!”

나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벽력 같은 전음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이 망할 공처가 녀석아! 맹에서 나올 때 눈깔을 빼두고 왔느냐?”

“누, 누구?”

두리번거릴 것도 없이 이 전음을 보낼 사람은 저 괴변태 노인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은 목소리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빠진 상판 하고는! 여긴 사람 눈이 많으니 날 따라오너라!”

그 말을 남기고 괴노인은 재빨리 벽과 건물을 넘어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잠시 얼이 빠진 채 서로를 바라보던 나백천과 예청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남궁진과 함께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네 사람의 절정고수가 한바탕 어울린 다음 갑자기 사라진 터라, 조금 전 무슨 조화가 일어났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들이 한바탕 어

울리다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눈앞에서 미모의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그 미모를 보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일이 일장춘몽이라도 되는 듯 그들은 다시 원래의 걸음대로 길을 오가며 자신들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

“확실한가?”

급보를 받은 붉은 옷의 사내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확실합니다. 부인인 빙월선자 예청과 함께였습니다.”

돈왕이 보고했다.

“뭐라고? 예청이?”

이번에는 이 사내도 조금 놀란 듯했다.

“예, 그렇습니다.”

“호오, 그건 또 뜻밖의 소식이로군.”

희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붉은 장삼의 외팔이사내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드디어 오셨구려, 형님. 이 아우는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모르오. 게다가 형수님까지 함께라니…….”

이렇게 되면 입장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다 화려한 축제를 벌여 드리겠소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화려한 피의 축제를.”

이제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왔던 인연의 실을 끊어야 할 때였다.

“형님, 당신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요. 가장 지독한 절망과 비통을 맛보며 죽으시오. 자리는 이 아우가 마련해 드릴 테니 말이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두 사람의 동향을 한시도 놓치지 마라.”

“존명! 명심하겠습니다.”

어두운 계획이 차근차근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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