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20화 – 괴노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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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20화 – 괴노인의 정체

괴노인의 정체

-강호 최강의 변태

괴노인은 일부러 추적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백천 부부는 쉽사리 노인의 등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되자 이 두 집단은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팔 장 거리를 유지한 채 인적이 드문 변두리 장소로 향했다. 어느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노인의 신형이 멈추었다. 그러자 정확히 팔 장 거리를 두고 나백천 부부와 남궁진의 신형이 내려섰다.

“노인장은 누구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여전히 뒤돌지 않은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나백천이 외쳤다. 부인에게 한 짓은 치가 떨리고 이가 갈렸지만 지금 우선순위는 노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쯧쯧, 눈깔만 놓고 온 게 아니라 귀까지 두고 온 게로구나.”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백천과 예청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때 남편보다 먼저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예청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할아버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나백천이었다. 예청이 할아버지라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그래, 나다!”

노인이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이목구비가 뚜렷이 드러났다. 백이십 세가 넘었는데도 노인의 두 눈에는 정기가 가득했고, 전신에선 만인을 압도하는 기 운이 뻗어 나왔다. 그것은 무림맹주 나백천조차도 뛰어넘는 놀라운 기도였다. 강호상에서 이런 압도적인 기도를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갈 대형!”

깜짝 놀란 나백천이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빽 질렀다. 설마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인물이 그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그가 어찌 놀 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좀 보이나 보지? 눈이 침침했던 건 좀 나은 게냐?”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오랜만이구나.”

이 사람이야말로 과거 천겁혈세 때 강호를 구한 두 명의 영웅 중 하나인 무신마 패천도 갈중혁, 그 사람이었다.

“어이쿠! 오랜만에 만난 할아비를 죽이려 하다니, 정말 큰일 날 뻔했잖느냐!”

노인이 짐짓 엄살을 떨었다. 하마터면 목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는 둥, 불능이 될 뻔했다는 둥, 사지 중 하나 잃어버리면 책임질 거냐는 등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듣 고 있는 나씨 부부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 쪽이 가해자고 어느 쪽이 피해잔데, 이래서는 주객전도가 아닌가! 화를 참지 못한 예청이 성깔있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원래 흑도에 몸담고 있던 그녀에게 무신마란 존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관계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거짓말이라니? 저 녀석의 검이 뽑히면 얼마나 빠르고 무서운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이런 다 늙은 노인네는 바로 황천행 아니겠느냐.”

은근슬쩍 남편을 치켜세워 주니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 정도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흥! 이이의 검이 비록 번개처럼 빠르다곤 하나 할아버지를 죽이는 데는 아직 부족함이 있죠. 할아버질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이 강호 흑백을 통틀어도 그만한 능력을 지닌 이는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이이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죠.”

“허허, 우리 예쁜이가 기특한 소릴 다 하는구나.”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저도 이제 다 컸답니다. 딸아이가 곧 천무학관을 졸업할 나이인걸요. 예쁜이라 불리울 나이는 이미 지나도 한참 전에 지났답니다.”

“노부가 보기엔 아직 새파란 어린앤데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구나.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야.”

“애 한번 나아보시면 훨씬 더 신통방통한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가 이 강호에서 거의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있고, 이제껏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천하를 오시했지만 그것만은 이번 생에선 가능할 것 같지 않구나. 그러니 아쉽지만 그 신묘함은 포기하는 수밖에.”

“하긴, 할아버진 육아도 해본 적이 없잖아요. 훗!”

마지막 웃음은 우월감에 찬 승리의 미소였다. 하긴 무신마에게 젖먹이를 안겨놓는 위험천만한 짓을 할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마누라가 고생 좀 했지. 하지만 내 두 손에 피 묻은 두 자루 칼 말고 젖먹이 어린아이가 들린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안 가더구나. 그때만큼은 무서울 게 없던 노부 도 무서웠다. 살짝만 건드려도 퍽 하고 터져 버릴 것같이 위태위태하니 어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아항, 그래서 애를 내팽개쳐 두고 도망쳐 나온 거군요.”

“도망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인 거야. 그때 노부가 그 녀석을 들었으면 그 녀석이 지금 사지 멀쩡하게 흑도의 맹주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느냐? 그것도 다 부모의 사 랑인 것이야.”

찔리는 게 없잖아 있는지 저 노인이 저토록 정색하면 반박하자 우스운 생각이 들어 예청은 그만 키킥,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혁중 노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백천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네도 고생 좀 하겠어.”

“뭐, 그렇죠.”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나백천이 대답했다.

“잠깐만요! 그건 무슨 뜻이죠? 간과할 수 없는 대화인데요?”

쌍심지에 불을 켠 예청이 매서운 기세로 추궁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백천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섭기만 했다. 그 위대한 무림맹주조차도 쩔쩔매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자네 정말 꽉 잡혀 사는구만.”

그 모습을 보고 안됐다는 듯 혁중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예청이 소리쳤다.

“아, 알았다. 누가 뭐랬니? 그러다 잡아먹겠다.”

짐짓 무섭다는 시늉을 하며 혁중 노인이 대꾸했다. 나백천이 중간에 나서서야 겨우 흥분한 예청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난 네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구나.”

“흥, 싫으세요?”

“아니,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언제나 똑같을 수야 없지만, 몽땅 다 변해 버리면 재미없지 않느냐. 너는 여전히 너인 것 같아 기쁘구나.”

혁중 노인의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저이지, 제가 아니겠어요?”

“하하, 그런가? 그것도 그렇구나.”

다시 한 번 혁중 노인이 허허 웃었다.

“아참, 언니는 잘 있나요, 할아버지?”

예청은 일부러 화제를 돌리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혁중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글쎄다, 그거야 중천이 녀석이 알지 않겠느냐? 노부야 알 수 없지.”

중천이란 당연히 그의 아들인 흑도무림 연합회 맹주인 갈중천을 가리켰다. 그리고 예청의 언니는 바로 그 흑도맹주의 부인인 비향선자 예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들 세 사람은 매우 복잡다단한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촌수랑 서열 매기기가 애매하다 보니 애초에 포기하고 옛날부터 부르던 버릇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셋 다 그런 호칭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었다.

자매가 모두 각 맹의 맹주와 결혼했으니 대단한 위력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실 전략적인 혈맹이었다. 갈중천에게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다면 문제없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현재 노인의 자식 중에 살아남은 자는 갈중천 혼자뿐이었다. 때문에 혈족의 인연을 강조하기 위해 나백천에게 소개한 이가 바로 부인 예 림의 동생인 빙월선자 예청이었던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촌수로만 그럴 뿐 훨씬 어렸을 때는 만날 할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입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 가 계셨습니까, 대형? 통 소식을 들을 수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습니다.”

노인의 행보에 궁금증이 인 나백천이 물었다. 이 노인의 거동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 같은 미세한 움직임도 강호에 엄청난 여파를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무림맹 주라는 입장에선 심각하게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애 하나를 키우고 있지.”

가벼운 말투로 혁중 노인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나백천에게 거의 경천동지할 만한 내용이었다.

“새로 제자를 들이셨단 말입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무신마의 제자라는 자리는 그리 녹록한 자리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칫 잘못하

면 무림의 균형을 깨뜨리는 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혁중 노인이 갈씨 혈족 이외에 무공을 전수한 예는 거의 없었다. 딱 세 명 있었을 뿐인데, 한 명은 죽고 나머지 두 명은 모두 행방불명 상태였다. 특히 장래가 촉망 되던 마지막 제자는…

‘그날 일’ 이후로 제자는 안 받지 않으셨습니까?”

무거운 안색이 된 나백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입에 담지 말게.”

갈중혁의 나직한 경고에 나백천은 입을 닫았다.

“넘겨짚지 말게. 뭐, 정식 제자라곤 할 수 없으니까. 옛 친구의 비전을 전수해 주는 것일 뿐이니 내 제자가 아니라 그 녀석 제자라고 해야 맞을지도…….”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나백천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라시면… 설마 태극…..

혁중 노인은 손을 들어 그 말을 막았다.

“뭐, 안달하지 말게.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게야. 아직 걸음마 중이라 보여줄 만한 상태는 아니거든. 이 일은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도록 하게.”

혁중 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캐물을 수 없게 된 나백천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목적이라도 알아내지 못하면 수지타산 이 맞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찾아뵈려고 만방으로 소식을 넣어봤지만 소식이 없던 분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다니,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좀 볼일이 있어서 온 것뿐일세. 자네 부부를 본 건 우연이고, 노부야말로 깜짝 놀랐지. 쯧쯧, 늙은이 심장마비 걸리게 할 일 있나? 지금쯤 정천맹 집무실에서 서류나 붙잡고 끙끙거려야 할 자네가 마누라랑 함께 흑도의 한복판인 이곳 강호란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어 몰래 뒤를 밟았던 것이다. 나백천의 거동이 지닌 영향력 역시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이다.

“딸아이 일 때문에 왔습니다.”

“하긴 자네 같은 벽창호를 움직이려면 그 일이 아니면 안 되겠지. 그런데 무슨 일로?”

“제가 듣기론 얼마 후 이곳 투기장에서 오십만 냥의 상금을 건 투기제를 개최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딸아이가 이번에 그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는 이 대단한 노인도 조금 놀랐다.

“응? 설마… 진짠가?”

나백천이 어두운 안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타는 듯했다.

“대형께선 그럼 이곳에 그 제자 분 일로 오셨습니까?”

물론 여기서의 제자는 혁중이 최근 새로 들였다는 아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중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제자는 제잔데 딴 제자 일 때문일세.”

나백천은 순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제자가 아니라면 짐작 가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구 년 전 ‘그날 이후로 행방불명되었지 않습니까?”

이 행방불명 사건은 그전에 터진 더 큰 사건(갈효봉의 광란 사건) 때문에 묻혀져 버리긴 했지만 적지 않은 반향을 던졌던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나백천으로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소식이 끊어진 지 여러 해라 이미 무림의 각계 각층에선 죽은 사람 취급 하고 있었다.

“그랬지. 한데 최근에 실마리를 찾아서 말일세.”

“아직 그 친구가 살아 있단 말입니까?”

“노부는 시체엔 관심없네. 게다가 이곳은 시체가 걸어다니기엔 너무 휘황찬란하게 밝은 곳 아닌가?”

나백천은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서, 설마 그 사람, 혈염쌍도 이벽한이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 이곳 강호란도에?”

“노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여긴 마천각과 엎어지면 코 닿는 데인데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더구만. 노부도 요즘은 옛것에서 이것저것 배운다네. 낡았다고 다 쓸모없는 건 아니더군. 뭐, 노부도 남 말할 처지도 아니지만 말일세.”

“하지만 그 친구는 전 마천십삼대의 총대장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위를 모두 던져 버리고 도망쳤잖습니까?”

그것은 마천각과 흑도로서도 매우 뼈아픈 상처였다. 그리고 크나큰 오점이기도 했다.

“아픈 기억 다시 한 번 헤집어서 무엇 하겠나. 그만 하게.”

나백천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혈염쌍도 이벽한이 누구던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던 자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 사람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촉망받던 후기 지수이자 무신마 갈중혁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되었던 갈효봉의 사형이자, 갈효봉이 광기에 빠져 미쳐 날뛰던 그날의 진상을 알고 있을지 모를 거의 유일한 인물이 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홀연히 종적을 감춰 사실 그 ‘혈야비사’를 일으킨 범인이 그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돌았던 것이다. 그 후 엄청난 사람들을 풀어 강호를 이 잡듯 뒤졌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때 사랑하는 큰손자와 아끼던 제자를 동시에 잃은 혁중 노인의 충격도 매우 컸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났다고? 그것도 이 강호란도에?”

그리고 우연찮게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불려왔다고? 그 순간 나백천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러갔다. 이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것이 운명이 자아낸 최악의 조합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흰 화선지 위에 뿌려진 먹물처럼 그의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번져 나갔다.

“자칫 잘못하면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불안한 바람이 나백천의 가슴속 한 켠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자네 동생은 어찌 되었나?”

이번엔 혁중 노인이 감추고 싶은 과거의 일을 건드렸다. 나백천으로서는 좀처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 모두가 잊어도 그는 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어찌 되었든 사천멸겁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은 제 동생이 아닙니다.”

나백천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자네가 부정한다 해도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닐세.”

“아직도 못 찾았나?”

“송구스럽습니다.”

“이상하군. 정천맹의 거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했는데도 십 년 동안 모습을 숨길 수 있다니…….”

“어떤 힘이 그를 숨겨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나백천이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혁중 노인의 반문에 나백천은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것 이외의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순 없었다. 거의 정천맹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세력이 그자를 비호하지 않는 한 이미 그는 정보망의 그물 안에 들어왔어야 했다.

“사실 나도 그런 의심이 들어서 묻는 것일세. 혹시나 그들은 우리들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야.”

“등하불명(燈下不明)이란 말씀입니까?”

“그런 셈이지. 이 경우 어느 쪽 등잔이냐가 문제겠지만 말이야.”

결코 가벼이 넘겨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하,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나? 뭐, 이 이야긴 나중에 계속하도록 하지. 보아하니 당분간 이쪽에 머무를 셈인 것 같은데? 한데 자네들은 이제 어디로 갈 셈인 가?”

혁중 노인이 물었다.

“일단 두노이라는 정보 상인 집에 갈 예정입니다.”

나백천이 곧바로 대답했다.

“두노이 집에? 그곳엔 무슨 일로?”

어투로 보아 혁중 노인도 그 정보 상인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딸아이 일로 알아볼 게 좀 있어서요.”

예청이 대신 대답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혁중 노인이 함께 있다면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닐세. 그 입싼 녀석한테 얼굴 보여봤자 좋을 것 없지. 그 녀석이 입이 무거울 때는 눈앞에 돈이 준비 안 돼 있을 때뿐이거든.”

“두노이도 여전한 모양이네요.”

“나중에 숙소를 정하면 그때 보도록 하지. 어차피 이번 투기제도 볼 생각 아닌가?”

“하아,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그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품 안에서 자기에게 날아온 서찰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본 혁중 노인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함정일 가능성은?”

혁중 노인의 물음에 나백천이 대답했다.

“배제하진 않고 있습니다.”

“그 편이 훨씬 현명할 걸세.”

혁중은 일단 나백천 부부의 볼일이 끝난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겨우 혁중에게 해방된 예청은 나백천을 한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데 길을 걷던 도중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나백천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세요, 여보?”

“아,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해서 말이오. 상당한 실력자요.”

“할아버님일까요?”

“아까 만났는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소? 아무래도 마천각 쪽 사람인 것 같소. 상당한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사로잡긴 힘들 것 같구려. 따 돌리는 게 좋겠소?”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그러면서 한 으리으리한 기와집의 정문을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당신이 말하던 그 늙은 두노이가 살고 있는 집이오? 정보 상인치고는 꽤 눈에 띄는 곳에 사는구려.”

예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노이의 집 겸 사업소죠. 그의 말로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다 숨겨야 한다고, 너무 은밀한 곳에 있으면 오히려 눈에 띈다더군요. 뭐,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말이에요. 이곳 주인인 두노이는 ‘구이십안(九耳十眼)’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늙긴 했지만 그 이목은 꽤 쓸 만해요.”

“왜 하필 눈은 열 갠데 귀가 아홉 개요?”

사소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예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에 두노이가 말하길, 귀 한 짝은 순풍산부이 나대이가 가져갔기 때문이라더군요.”

“재밌는 농담이구려.”

그 말은즉, 자신은 나대이보다 열 배나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순풍산부이 나대이보다 아홉 배의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죠. 이곳이라면 분명 쉽게 예린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마침 오늘은 제일휴식일이니 이곳 강호란도 안에 있을 확률이 높아요.”

접객실에서 이 강호란도 최고의 정보상이라 불리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청에게 듣기론 이제 칠십 먹은 노인네라고 했는데 나백천이 보기엔 너무 젊 어 보였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삼십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즘은 정보상들도 신공을 수련해 반로환동하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예청이 물 었다.

“두노이는?”

“예에? 두노이라뇨?”

삼십대 후반의 사내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아버지를 두 노대나 두 노야로 칭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한 번도 두노이라 칭하는 인물은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아홉귀 두노이 말이야. 넌 무슨 관계지?”

“아… 아들입니다.”

사내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상하게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노이한테 아들이 있었군. 그런데 두노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예청이 다시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이미 은퇴하셨습니다. 전 아들인 두칠로 이곳 구이관의…….”

“죽었어?”

두칠의 말을 끊으며 예청이 대뜸 물었다. 그 무례한 질문에 두노이의 아들 두칠은 좀 황당했지만 화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살아 계십니다.”

감히 거짓을 아뢰지 못하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당장 불러와 빙월희(氷月姬)적예가 오랜만에 찾는다고 전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들 두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부인께서… 그… 악명…….”

“방금 뭐라고 했지?”

호수처럼 맑고 깨끗한 두 눈에서 한기가 번뜩이자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진 두칠은 서둘러 자신의 주둥이를 책망하듯 찰싹찰싹 때렸다. 그 순간 아버지가 해준 충고가 기억났던 것이다. 혹시나 그런 별호를 가진 여성을 만나게 되면 절대로 신경 건드리지 말라고. 까불다간 저승 왕복 운동할 수도 있다고.

“아, 아닙니다. (찰싹!) 그저 소인의 정신 나간 혼잣말이었을 뿐입니다. (찰싹!) 이놈의 주둥아리가 주제를 모르고 떠벌렸지 뭡니까! (찰싹!) 제가 당장 가서 아버님 을 모셔오겠습니다. (찰싹찰싹!)”

“그렇게 해.”

예청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두칠을 보냈다. 겨우 목숨을 건진 두칠은 재빨리 바람처럼 달려가 곤히 오수를 즐기고 있던 아버지를 두들겨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두노이는 우선 험하게 잠을 깨운 대가로 아들을 주먹으로 몇 대 팬 다음 자초지종을 듣고는 엉덩이에 불난 황소처럼 정원을 가로질러 집무실로 나는 듯이 달려들어 갔다. 그리고는 재빨리 손바닥을 비비며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고, 공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두노이. 오랜만.”

예청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치 하인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두노이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이십 년 만입지요. 여전히 아름다운시군요, 공주님께선.”

예청이 웃으며 대꾸했다.

“두노이, 댁은 더 쭈글쭈글해졌군. 그땐 그래도 정정했었는데 말야.”

“사람은 속여도 나이는 속일 수 없더군요. 어떻게든 늙어가는 걸 감춰보려 했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니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덜 속이나?”

지나가듯 묻는 말에 칼날이 숨어 있었다.

“하하, 그때 공주님한테 약조했지 않습니까. 다시는 사람을 속여 거짓 정보를 팔지 않겠다고요. 요즘은 정직을 생명으로 장사하고 있습니다. 이놈한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아버지가 그렇게 신용과 정직을 강조하던 게 다 눈앞의 이 미부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두칠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거짓 정보 팔다가 반죽을 뻔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 장본인이 이런 미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 험한 강호란도에서 잔뼈가 굵어 아홉귀라고까지 불리는 아버지가 마치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벌벌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 공주님, 그런데 저분께서는…….”

두노이가 나백천 쪽을 힐끔 쳐다본 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미 이쪽 방면으로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그는 노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아챘던 것이다.

“공주님?”

자신의 부인이 왕족이나 황족과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백천에게 두노이의 호칭은 무척 생소하고 낯설게 들렸다. 예청이 간단하고 짧게 대답했다. “아, 우리 남편.”

그러나 그 한마디에 두노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도깨비 공주님이 남편이라 부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헉! 그… 그럼 이분이…….”

그도 명색이 정보 팔아먹고 사는 정보상이었다. 이런 거대한 정보덩어리를 보자 그만 본능적으로 군침이 흐르고 말았다.

그때 섬섬옥수 하나가 두노이의 시야 위로 올라왔다.

“그만.”

예청은 함부로 나불거리려는 두노이의 입을 단 한 마디로 조용히 시켰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두노이는 얼른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어느 분 분부시라고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의아함을 참지 못한 나백천이 물었다.

“한데 아까부터 계속 이 사람을 공주님, 공주님 하고 부르는데 어떤 연유로 그러는 건가?”

두노이가 얼른 대답해 올렸다.

“아, 그건 아가씨께서 예전에 칠공주파에 계실 적에… 저희들에게 그렇게 불리웠습니다. 그땐……..

정말 만인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말을 이으려던 그의 혀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살기가 그의 노구를 직격했던 것이다.

“그만 하지, 두노이?”

나직하지만 조용한 살기가 응축된 그 한마디에 두노이는 찔끔하며 황급히 입을 봉했다. 두노이가 치매가 오려는지 쓸데없는 말을 자꾸 지껄이려 하자 예청은 다시 한 번 조용한 목소리로 경고했던 것이다.

-그날의 일을 잊지 마라! 그날을 다시 기억해 내라!

예청이 두 눈으로 그렇게 충고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의 과거는 비밀로 묻혀 있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아참, 그런데 무슨 일로 예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습니다. 물론 공짜입니다, 헤헤.”

손바닥 지문이 벗겨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열심히 양손을 마주 비비며 두노이가 말했다. 자린고비 구두쇠 두노이가 이렇게 자청해서 공짜 일을 맡으려 들 다니,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참으로 희한하게 생각했을 광경이었다.

“찾을 사람이 있다.”

예청이 짧게 용건을 말했다.

“누구를 찾으면 되겠습니까?”

두노이의 반문에 예청이 짧게 대답했다.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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