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22화 – 철가면의 남자 (2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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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3권 22화 – 철가면의 남자

철가면의 남자

-열두 번째 대장의 보고(報告)

그자는 몸에 착 달라붙는 칠흑 같은 검은 무복 위에 같은 색의 피풍의를 두르고 얼굴에는 철로 만든 가면을 쓴 채 마천각의 심처로 향하는 회랑을 걸어가고 있었 다. 딱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길이 마천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마천각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유 일한 길임에도 아무도 그를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회랑 양 끝으로 물러나며 조심스럽게 경의와 두려움을 담아 정중히 예를 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어둠 에 뒤덮여 있어 신분 확인을 할 만한 것이 없는 그에게 있어 딱 하나 눈에 띄는 상징은 그의 펄럭이는 피풍의 한가운데 적혀 있는 십이(十二)라는 숫자뿐이었다.

마천각 집무실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자가 그를 알아보고 기별을 넣었다.

“고(告)! 마천십삼대 제십이번대 대장 무성무영 무흔이 알현을 청합니다.”

그러자 집무실 안에서 낮지만 위엄있는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들라 해라.”

가면의 사내가 방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렸다. 딱히 몸수색은 하지 않는다. 무기도 소지 가능했다. 대장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례 조치였다.

이렇듯 가면을 쓰고 마천각주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 할 수 있었다. 그 가면 밑을 본 자는 죽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시는 주인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집무실 안에는 장막이 쳐져 있어 그와 마천각주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늘 보던 것이었기에 그는 상관하지 않고 늘 서던 자리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 린 다음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정천맹주 나백천이 강호란도에 나타났습니다.”

절대 무림맹주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흑도 역시 엄연히 무림의 반쪽이었기에 모든 것을 통합하는 무림맹주라는 칭호는 엄밀히 말해 잘못된 칭호였기 때문이다. 그런 오만한 호칭이 마천각주 앞에서 용납될 리 없었다.

“나백천이 사실이냐?”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는 않는 강철의 심장을 가진 마천각주도 이 일만큼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사실입니다. 가벼운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틀림없습니다.”

“목적은?”

아무런 할 일 없이 흑도의 영역 한가운데 걸어 들어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인 용무로 추측됩니다.”

“근거는?”

“그의 곁에 빙월선자 예청의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청까지?”

그렇다면 확실히 개인적인 용무일 가능성이 컸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무흔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하라!”

마천각주가 허가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열리는 투기제 참관이 목적인 듯합니다. 그곳에 정천맹주 나백천의 장중보옥인 빙백봉 나예린이 참가한다는 것은 이미 파다하게 난 소문이니까 요.”

역시 마천각의 정보를 수집하고 은밀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자답게 정황을 파악하는 분석력과 추리력이 무척 뛰어났다.

“그자의 성격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어리석군.”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몰라도 한 집단의 장으로서는 실격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정천맹주 나백천의 동향에 대한 은밀한 감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마치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요청한 자가 누구냐?”

싸늘한 목소리로 묻는다. 누군가의 월권행위가 개입되어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민감한 사안인지라 무흔은 철가면 뒤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와 같은 마천십삼대의 열두 대장 중 한 명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한 사람뿐이겠군.”

차갑게 내뱉듯 말한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요청을 거부할까요?”

“……”

잠시 숙고하는지 이번에는 금방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마천각주는 결정을 내렸는지 장막 뒤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일단 요청대로 해주어라. 하지만 반드시 나에게 먼저 알리도록 해라. 물론 ‘녀석’의 감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철가면을 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무흔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나가봐라.”

보고는 끝났다. 다시 임무가 주어진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남면(南面)한 주인의 눈이자 귀, 다시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존명!”

지극한 경외를 담아 인사한 후 제십이번대 대장 무성무영 무흔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하여 물러났다.

다시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그가 나가자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그제야 그의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무형의 압력이 사라졌다.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거석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그의 가면 은 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게 해준다. 이럴 때 그 사실에 위안을 얻게 된다. 마천십삼대의 대장답게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 무흔은 몸을 돌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아갔다.

***

인간의 취미란 것은 불필요한 것을 즐기는 일련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불필요한 것을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일종의 괴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오락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책을 보지 않아도, 경극 같은 공연을 보지 않아도, 필묵을 휘두르지 않아 도, 바늘을 들고 비단 위에 수를 놓지 않아도 생존엔 전혀 지장이 없다. 그것은 생존에 있어 지극히 불필요한 일이며 때때로 생존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래도 인간은 생존에 전혀 필요없는 유희를 만들어내고 향유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 문명이 탄생했다. 문명이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행위들의 결정체라 해도 과 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의 연장과 보존과 번식 이외의 불필요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것 자체에 의 미가 있는 것이다. 불필요함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은 생존의 본능 이외에 별다른 여분의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항상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동물들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도락이다. 그리고 그 유희는 인간의 역사가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그 규모 역시 끝 간 데 없 이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오락 하나를 즐기기 위해 돌을 깎고 쌓아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투기장을 만들기에 이르게 된다.

지금 그 건축물은 생존에 불필요한 일을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관중들로 인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빽빽했다. 오늘부터 시작될 경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 려든 인파들이었다. 비록 오십만 냥을 향한 대접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구경이라도 하며, 그 접전에 돈이라도 걸며 이 시끌벅적한 축제의 일부로서 참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저희들이 등장할 차례가 왔군요. 기다렸습니다. 기다렸어요! 초기다렸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광 선생님?”

미성공자 유진이 해설자석에서 앉아 장내에 바글바글한 관중들을 향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군요. 뭐, 시시한 예선전에까지 시시콜콜 분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런 건 그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뭐, 몇 개의 경기는 꽤 보는 맛이 있었지만 말입니 Ct.”

흥분하는 유진과 다르게 무광 선생은 냉정하기만 했다. 강하고 특색있는 무공 이외에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선 안심하십시오. 지루한 예선은 이미 끝났습니다. 재빨리 해치웠습니다. 후딱후딱, 빨리빨리! 광속보다 신속하게 진행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끝냈습니다. 지금부터 진행될 본선은 그 백여 개가 넘는 참가 조 중에서 추리고 추린, 그야말로 최고급 옥(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선 진 출자들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관중 여러분께서는 보다 즐겁고 화려한 오락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아아, 벌써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유진의 말대로 예선전은 본선과는 전혀 대우가 달랐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고 예선에 올라온 참가 조만 해도 백 개 조가 넘으니 그런 걸 일일이 응원하며 구경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두 해설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해설할 마음이 없는지 자리를 비운 채였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홀대 속에서 예선전은 삼 일에 걸쳐 진행되

었다. 백 개가 넘는 참가 조 중에서 본선에 올라갈 수 있는 조는 오직 열여섯 개 조뿐이었다. 그러니 예선이라 해도 그 치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세 번의 낮과 세 번의 잠이 지나간 날, 백 개가 넘은 참가 조 중에서 남은 것은 오직 열여섯 개 조뿐이었다.

“옥석은 가려졌습니다. 쭉정이는 이미 아궁이에서 재가 된 지 오래고 이제 남은 것은 최고급 알곡들뿐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거치고 올라온 열여섯 개 조의 면면 은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중에서 우승한 사람이 혈염제 칠상흔과 맞붙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해설에 탄력을 받았는지 더욱 신이 난 유진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무광 선생이 한마디 덧붙였다.

“더없는 불행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달아오른 함성 속에서 그 목소리는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들렸다 해도 장밋빛 망상에서 현실로 돌려놓을 만큼의 위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번 본선에선 각 경기마다 내기가 진행됩니다. 승리하리라 생각하는 곳에 돈을 걸어주십시오. 각 경기마다 내기가 행해지는 만큼 매 경기마다 일정액의 상금이 우승 조에게 증정됩니다. 막대한 상금이 걸린 만큼 모두 열심히 싸우리라 믿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군요. 저런 고수들의 싸움을 한자리에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과거 같았으면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죠. 원래 비전무공일수 록 문외불출이고 남들 앞에서 보이는 것조차 꺼렸으며 절기의 목격자는 반드시 살려두지 않았던 때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무광 선생은 과거와 현실의 격차에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모양인지 말투에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사람이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법이죠. 감춰놓기만 하면 보는 사람들은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다. 기왕 공개된 자리에 나온 것, 화끈화끈, 쌈박하게 싸워줬으면 하 는 바람입니다!!”

“그건 동감입니다.”

무광 선생이 짧게 한마디 덧붙였다. 무공 해설이 아닌 일에는 일일이 입을 놀리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오직 자기 분야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머지는 어찌 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최측에서도 말 많은 유진을 보조로 붙여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오히려 유진이 주역인 느낌이었다. 그도 그걸 의식하고 있는지 더욱 열렬히 뜨겁게 혼을 불태우며 목소리를 올렸다.

“자, 그럼 오십만 냥 대회 본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개최 시작!”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유진의 본선 개회 선언에 응답하듯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진정한 ‘오십만 냥 투기제’의 개막이었다.

화려한 본선 개막식을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비단 장삼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좋은 무대, 좋은 기회였다.

“크크, 옛말에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化) 세 가지를 갖춰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던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모든 것이 굴러 들어오는구나. 이 것도 운명일까?”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어 그자를 자신의 영역인 이곳 강호란도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덤으로 함께 발을 들여놓았다. 서천의 붉은 눈이 한 검객의 호위를 받고 있는 아름다운 중년 여인을 향했다.

“형수, 여전히 아름다우시구려! 크크! 그런데 어쩌지요? 이 아제는 당신을 잃은 형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말이오.”

그녀는 그의 형 나백천을 불행하게 만드는 최고의 재료였다. 행복의 원천일수록 그것이 상실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크다. 그렇게 한 번 뚫린 그 구멍을 영영 메울 수 없다. 그는 그런 구멍을 형의 가슴속에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의 철갑 마수가 그의 심장을 꿰뚫기 전에 말이다.

“흑사!”

“예, 주군.”

“손님을 한 분 모셔와야겠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빙월선자 예청! 현 무림맹주의 아내시지. 귀하신 몸이다. 정중히 모시도록 해라. 인원은 마음대로 동원해도 좋다. 방법은 묻지 않겠다.”

“존명.”

그리고는 흑사는 사라졌다.

다시 원통투기장을 굽어보는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어릴 때 사마귀의 팔다리를 뜯어내고, 쥐 꼬리에 불을 붙이며 짓던 아이 같은 미소였다.

“형님,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오. 이 아우가 선물을 하는 보람이 있을 테니 말이오.”

그의 시선이 형수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의 사랑스런 부인을 향해. 정말로 즐겁고 기쁜 듯이. 그는 형이 행복한 게 무척 기뻤다. “기다리시오, 최고의 불행을 선물해 줄 테니.”

입은 웃고 있지만 그 눈동자만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이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 안에 비춰지고 있는 것은 부인을 보며 즐겁게 웃고 있는 나백천의 모습이 었다. 아아, 저 웃는 얼굴을 절망으로 일그러뜨릴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흥분돼서 전율이 일 정도였다.

“그때 형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쿡쿡쿡, 기대되는구려!”

<『비뢰도』 제2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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