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장에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다
“자,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 물건을 사실 분 없습니까?”
사회자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의사를 표현하는 이는 없었다.
“정말로 구매 의사가 있는 분 안 계십니까? 그 유명한 흑룡선 두 척입니다. 이만한 물건 찾기 힘들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없습니까?”
조용.
다들 시선을 피한 채 딴청만 피울 뿐이었다. 왠지 의도적으로 신경 안 쓰려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열까지 세겠습니다. 만일 열을 셀 때까지 입찰자가 없을 경우 ‘불매(不賣)’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사회자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렇다는데요?”
제자가 옆을 앉아 있는 사부를 보며 한마디 했다.
“노부도 귀가 있다.”
사부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으나 그다지 개선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열!”
모든 이들이 침묵할 뿐 끝까지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룡선 두 척, 안타깝지만 팔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땅땅땅!
망치를 세 번 내려치며 사회자가 선언했다. 사부가 그렇게 자신만만해했던 경매 건은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잔존했다.
“이대로 끝나진 않겠지?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왜냐하면 사부는 이대로 그냥 납득할 인간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비류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안 팔렸네요?”
꼬시다는 듯 왠지 얄미운 목소리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는 오늘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부의 까다로운(?) 취향 때문이었다.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실내에서도 초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다행히 몇 번 주위를 둘러보며 확인해 봤지만 아는 얼굴은 없는 듯했다.
“웃지 마라. 네놈 것도 안 팔렸지 않느냐.”
“윽!”
흑룡선 두 척은 물론 비류연이 나포한 해신도 안 팔리긴 매한가지였다.
“음, 이건 좀 예상 밖의 일이로군. 저 정도 물건이면 충분히 구매자가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데… 안 그러냐, 제자야?”
사부가 보기엔 이상할지 몰라도 당연했다. 그 대단한 사부도 이번엔 한 가지 간과한 일이 있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경매 참가자들의 입장을 너무 고려하지 않았으니 당연하죠. 원주인이 장강수로십팔채잖아요. 그 시점에서 저건 이미 위험한 장물이랑 다름없다고요. 모두가 다 사부 같은 무지막지한 괴물인 줄 아세요?”
다들 흑룡선이 갖고 싶어도 그 뒤에 있는 장강수로채의 보복이 두려운 것이다. 정당한 가격을 지불했든 지불하지 않았든 그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물 위에 서 다시 찾아갈 것이 분명했다. 큰소리친 것과 달리 물건이 안 팔릴 때까지는 그 역시 간과한 부분이었다.
“이런이런, 그 점을 잠시 잊고 있었구나. 물건의 질만 생각하다가 구매자의 입장을 깜빡하다니!”
대화와 마찬가지로 장사도 나 이외의 타자(他者)가 한 명 이상 필요했다.
“그렇다면 잘됐구나.”
사부의 말에 비류연은 호박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요?”
비류연이 보기엔 하나도 잘된 게 없었다.
“그렇게 잘 아는 네가 이 일을 맡으면 되니 어찌 잘된 게 아니겠느냐.”
사부가 무엇을 맡기려는지 깨달은 비류연의 온몸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서… 설마 저걸 맡기려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사부가 비류연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적은 유사 이래로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당연히 그럴 셈이지. 저 까만 배 두 척, 네가 팔아 오너라. 파는 김에 네 것까지 팔아도 되니 이 어찌 아니 좋은 기회겠느냐? 안 그러냐, 제자야?”
사부가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왜 내가 그런 것까지..
비류연이 초립을 눌러쓴 채 투덜거렸다.
“그럼 늙은 내가 하랴? 그동안 네 녀석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한 것 아니냐. 다 가르쳤으니 이제 그 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배웠으면 써먹어야지. 배워놓 고 써먹지도 않을 거면 무엇 하러 배웠느냐.”
역시 말발이라면 제자에게 절대 지는 법이 없는 사부였다. 어째서인지 비류연의 귀에는 제자 키워놨다가 어디 써먹겠냐, 이런 때나 써먹어야지로 들렸다. “칫, 난 노후 대책용이라 그겁니까?”
구 할 구 푼 구리의 확률로 비류연은 확신했다.
“그걸 이제 알았니?”
훗 하고 사부가 비웃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뭐라 대꾸하기도 귀찮아졌다.
“알았어요. 아아, 다른 일로도 바쁜데 이런 잡일까지…….”
투덜거리곤 있지만 지금 비류연의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장강수로채에 편지를 쓰는 게 좋겠네요.”
내용을 뭐라고 써 내려갈지 궁리하며 비류연이 말했다.
“뭐라고 쓸 셈이냐? 안부인사라도 하려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사부가 물었다. 그게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비류연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아뇨, 잃어버린 물건을 맡아두고 있으니 찾아가라고요. 물론 사례는 잊지 말고.”
“호오, 그거 괜찮은 생각 같구나. 역시 마음을 전하는 데 편지만큼 좋은 게 없지. 그렇게 해라.”
“저도 하산한 다음 놀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요.”
진심을 전하는 데는 따스한 편지 한 장이면 만사형통이었다. 다만 이번 경우, 절대로 살가운 편지는 되지 않으리라. 뭐, 편지 용도란 것은 무궁무진한 것 아니겠는 가. 편지의 용도와 효과를 한 가지로 한정시키는 것은 편지에 대한 가능성을 죽여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말이죠, 사부?”
“왜?”
“제자한테 일 떠넘기려고 일부러 실수한 건 아니겠죠?”
“글쎄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느냐?”
사부가 ‘씨익’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영 못 미더운 웃음이었다.
“그런데요, 사부.”
갑자기 비류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또 왜?”
“이 경매 문제를 잘 해결하면 그.거. 돌려주실 거죠?”
일부러 확정적인 표현을 써서 비류연이 물었다.
“그거라니? 무슨 그거. 말이냐?”
사부는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사부의 그런 태도가 더 얄미웠다.
“아잉, 아심서.”
당연히 빼앗긴―사부는 극구 회수했다고 주장하는―비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 비류연의 관심사가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고마해라. 괜히 더 수상하다, 훠이훠이.”
안 하던 짓 하면 귀엽다기보다 수상쩍어 보일 뿐이라는 게 사부의 지론이었다.
“칫.”
아첨도 쉽게 먹히지 않는 매우 귀찮은 상대였다.
“아참, 말이 잘못되었구나. 너에게 이것의 소유권이 없는데 돌려준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느냐?”
“에이,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시구요.”
비류연이 애교를 피우며 손사래를 쳤다. 실로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징그럽다. 고마 하라 그랬지?”
사부가 소름이 돋는지 팔뚝을 쓸며 나직이 경고했다.
“그럼 돌려주실 건가요?”
눈을 반짝 빛내며 비류연이 물었다.
비류연의 눈빛은 진지했다. 이만큼 진지해지기도 쉽지 않았다. 그만큼 그것은 비류연에게 중요한 물건이었다. 없어져 보니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 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뭐, 잘 처리하면 생각해 보마.”
그렇게 썩 만족스런 대답은 아니었다. 발뺌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도 맘에 걸렸다.
“확답은 안 해주시는 겁니까?”
비류연이 항의했다. 쉽게 확답하지 않고 애매하게 상황을 몰아가는 것이 정말로 능구렁이 사부다웠다.
“넌 어떠냐? 사부가 그런 걸 해줄 것 같냐?”
“아뇨.”
이럴 땐 너무도 현실적이라 몽상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알면 됐다.”
그리하여 비류연은 장강수로연합채 앞으로 한 통의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한참 뒤, 사부가 물었다.
“다 됐냐?”
“다 됐습니다.”
비류연이 붓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표국편으로 부쳐라. 특급으로, 물론 대금이 네가 내고.”
“또 내 돈입니까?”
“그럼? 노후보장연금이 끊긴 이 가난하고 늙은 사부가 내야겠느냐?”
콜록콜록 기침하는 시늉을 하며 사부가 물었다. 사부에게 끔직할 정도로 안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약한 척하는 모습일 것이다.
“안 어울리니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내면 되잖습니까, 내면, 그럼 일단 마천각에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 일 후에나 뵙게 되겠네요. 뭐, 구매자가 오려면 이 주일 정도 더 걸리겠지만요.”
사부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냐, 그동안 느긋하게 이곳에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으마! 하지만 도망치진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요즘 노부가 남는 게 시간이거든.”
얼마가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이야기였다.
“거참 끔찍하네요.”
비류연이 짧게 대답했다.
***
무림맹주 나백천이 초대장을 받아 들던 것과 거의 같은 시각, 장강수로채 채주 앞으로도 서찰이 한 통이 도착했다. 자신의 지성을 뽐내며 까막눈인 부하들 앞에서 글을 읽어가던 흑룡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불같이 화내고 있다는 표시였다. 이럴 때는 함부로 다가가다간 피 를 보는 수가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짧은 단문 몇 줄로 장강의 패자를 이토록 분노에 떨게 한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장강수로연합채 총채주 친전.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이번에 저희가 우연찮게 좋은 배 세척을 얻었기에 이렇게 삼가 연락을 드립니다. 분명 귀하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리라 사료됩니다. 무엇보다도 흑룡선 과 해신이라 불리는 유명한 배들이니까요.
구매의사가 있다고 판단되는바, 모월 모일 저녁 모시까지 지불하실 대금을 가지고 강호란도 경매장 옆 선착장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추신:단, 오래 기다리진 않습니다.
-의문의 발송자 갑.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니 배는 우리 배가 되었다. 갖고 싶으면 와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라.’
그 밑에 돈을 들고 와야 할 일시와 장소가 친절하게 자세히 적혀 있었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고맙기는커녕 이가 뿌드득 갈리고 속에서 열불이 솟구쳐 올랐다. 와락!
흑룡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서찰을 사정없이 구겨 버렸다.
“갈(喝)! 감히 어떤 놈이 이따구 서찰을 보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본좌가 누군 줄 알고!”
흑룡왕이 분노의 일갈을 토해냈다. 오늘 받은 이 서찰보다 더 무례하고 시건방지고 그의 화를 돋우는 서찰을 그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장강수로십팔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행위는 오래전부터 자살충동적 행위로 규정되어 있었다.
“좋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겨우 흑룡선 두 척과 해신 한 척을 나포한 것 가지고 기고만장하다니! 장강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려주마! 모두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서 !”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해주리라! 장강의 패자가 그렇게 결정한 이상 그 일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흑룡왕이 부관인 조가피에게 명령했다.
“당장 애들을 준비시켜라! 제일급 전투 준비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쳐라! 출진이다. 나 흑룡왕 해어광이 직접 나간다. 장강의 굽이치는 힘을 보여주자!” 부관 조가피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흑룡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짙푸른 피풍의를 몸에 둘러 걸치고 문을 사납게 벌컥 열어젖힌 후 성큼성큼 위풍도 당당하게 걸어나가며 외쳤다.
“가자, 강호란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