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던 사람이다
-누구시죠?
“딴 데 가서 알아봐, 꼬마야!! 여긴 소꿉장난하는 데 아니다! 그런 젓가락같이 가는 팔로 날붙이를 들다간 크게 다쳐요. ‘아야 한다 그 말이지. 그러니 가서 엄마 젓이나 더 먹고 오렴~ 알겠니?”
삼흉 중 가장 큰 자가 부드럽게 비꼬며 소년을 타일렀다.
“크하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그러자 나머지 둘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대놓고 무시해서 기를 팍 죽여놓자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래도 전 참가 신청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비켜주세요.”
세 사내의 대놓고 하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년이 당차게 말했다. 순간 비웃고 있던 사내들의 안색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소년의 당찬 모습을 보자 더욱 흥미가 돋은 연비는 나예린과 함께 좀 더 현장 가까이 다가갔다.
“어허! 이 발랄한 꼬맹이 좀 보게! 어른들이 좋게 생각해서 말해주면 똑바로 알아 처먹어야지! 앙?”
“제발 비켜주세요! 전 꼭 참가해야 해요!”
“헹, 너 같은 꼬맹이가 이런 투기제에 참가하겠다고? 참가하면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그 무서운 칠상흔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냐, 앙?” 황의를 입은거한이 흉한 얼굴을 들이밀며 껄렁하게 물었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헛소리! 너같은 꼬마 애송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도 할 수 있어요! 아마도.”
“못하겠다면?”
황의를 입은거한이 흉한 얼굴을 들이밀며 껄렁하게 물었다.
“그… 그럼…….?
은발소년이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이런 경험이 무척이나 생소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들 세 명은 사람들을 꽤나 죽여본 악적들로 실력은 둘째 치고 풍기는 기 운이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꺼져!”
삼흉 중 막내가 소년의 몸을 세차게 밀쳤다.
“꺄악!”
은발소년의 몸이 공중에 붕 뜬 채 뒤로 날아갔다. 금방이라도 엉덩방아를 찧을 태세였다. 그런데 거의 무방비한 자세로 엉덩이부터 떨어졌는데도 생각만큼 요란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나예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봤어요? 허공에서 순간 멈춘 것처럼 보였는데?”
연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봤어요. 다행이네요. 엉덩이가 여석 갈래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은 피할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소년을 잡아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전에 밀쳐질 때… 손바닥이 닿기 전에 뒤로 밀려났어요.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가뿐하게 말이에요.”
나예린이 본 것을 연비 자신도 보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바람이라니……. 무척이나 흥미로운 능력이네요.”
“역시 연비! 한눈에 알아보는군요.”
“린이야말로!”
과연 용안의 소유자. 예리한 관찰력이었다.
“오행에 속하지 않은 바람의 속성이라… 꽤 흥미롭군요.”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쪽 계통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고 하면 가까이는 도성의 표류무상기가 있다. 그것 역시 공기를 다루는 기술이었다.
“어머, 바람은 오행 중 금(金)에 속하지 않나요?”
나예린이 지적했다.
“분류는 그렇게 되어 있죠. 하지만 바람과 금은 무슨 상관관계인 걸까요? 목화토금―수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 오행의 순환은 이해가 가지만, 바람이 왜 금에 속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에요. 쉽게 마음속에 와 닿지가 않네요.”
옛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해서 무조건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연비는 납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주의였다. 맹목이 가져다주는 것은 무지와 광신뿐이었 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확실히 보기 드문 능력이죠.”
빙검의 검법이나 나예린 자신의 비기는 모두 수(水)의 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얼어붙을 수, 동결된 수가 그 속성이라 할 수 있었다.
“오행이 아니라면 팔괘를 기본으로 구축한 내공심법일까요?”
연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도 있죠. 바람 속성이라면 손巽) 괘로군요.”
그걸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바람 속성의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복잡한 것은 다 젖혀두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은발소년의 능력이 무척 특이 하다는 것이었다.
“꽤 흥미롭군요.”
“연비는 저 소년이 무척 흥미있는 모양이에요?”
그 말에 연비가 나예린을 바라보며 살풋 웃어 보였다.
“린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게다가 저런 식의 기 운용은 상당한 내공이 받쳐 주지 않으면 힘들어요. 저 나이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축적량은 아닐 거예요. 뭔가 사 연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확실히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소년이지만.
그때 연비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앗, 그런데 린. 한 가지 정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예? 그게 뭔데요?”
자신이 놓친 게 있었던가? 나예린의 얼굴은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연비의 치켜 들렸던 검지가 은발의 소년을 향했다.
“저 꼬마, 소년이 아니라 소녀예요.”
“예에?”
연비의 그 한마디에 나예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자라고요?”
나예린은 아직 잘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맞아요, 여자. 왜요? 못 믿겠어요?”
연비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예린은 대답하길 망설였다.
“그럼 가서 확인해 볼까요?”
두 사람은 곧바로 소년인지 소녀인지 확실하지 않은 은발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는 소년의 앞에는 여전히 흉악한 무뢰배들이 벽이 되어 소년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때 나예린과 연비보다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여자였다.
그 여인을 본 나예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운 이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나타난 이는 바로 영령이었다.
“네년은 또 뭐냐?”
사내 하나가 거칠게 소리쳤다.
“지나가던 사람이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여인이 짧게 대답했다, 이런 사내들하고는 오래 이야기하는 것조차 역겨운 일이라는 듯이.
“지나가던 년이 웬일이냐?”
불꽃이 번뜩이는 오른쪽 눈으로 삼흉을 쏘아보며 여인이 명령했다.
“꺼져라!”
짧지만 강한 한마디였다.
사내들은 순간 움찔하는 것 같았으나 말 그대로 한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능을 믿기보단 자신의 사나이다움을 믿었다. 자신들처럼 당당하고 거친 사나이들은 저런 계집의 말 한마디에 움찔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없던 일로 치기로 했다. 그다음 들려온 것은 커다란 비웃음이었다. “푸하하하하하! 뭐라고 꺼지라고? 지금 이 어르신들께 꺼지라고 한 것이냐?”
“그렇다.”
“이거이거! 조금은 예절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계집이 너무 건방지면 사랑을 못 받지! 으흐흐흐흐!”
흉소를 지으며 삼흉 중 우측의 사내가 말했다.
“네놈들 같은 인간말종에게 받을 것 따윈 아무것도 없다.”
여인은 대답은 짧고 차가웠다.
“흐흐흐흐, 그럼 이 어르신들이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려주마! 바로 복종의 기쁨 말이다.”
삼흉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웃어 젖혔다. 한심스러운 듯한 한숨을 내쉬며 영령이 말했다. “말종은 말종이구나.”
대화란 상대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의 혼잣말은 의미가 없었다. “말종들과 말이 너무 길었다. 더 이야기해봤자 내 입이 더러워질 뿐. 뽑아라! 빨리 끝내자!”
챙!
맑은 검명을 울리며 검이 뽑혀져 나왔다.
앞으로 나서려는 나예린을 연비가 제지했다. 왜 막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연비가 대답했다.
“조금 더 지켜봐요. 과연 저 사람이 우리들이 아는 그 사람인지 확인해 보자고요.”
만일 정말 그 사람이라면 할 줄 아는 게 막말밖에 없는 저런 허섭스레기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제야 나예린은 나아가려던 기세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삼 흉과 마주 선 영령을 지켜보았다.
검끝은 여인은 오른쪽 눈동자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쉬이이이이잉!
은빛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툭! 톡! 톡!
병장기를 꺼내 든 채 영령을 어떻게 요리할까 잡담하며 웃고 있던 강남삼흉 세 사람의 오른팔이 단칼에 잘려 나가며 어깻죽지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 다.
“크아아아아아악! 죽는다! 죽어! 크아아악!”
“아파! 엉엉! 아파! 엉엉! 엄마야! 엉엉!”
“후헹헹헹헹! 쿠헹헹헹헹!”
삼흉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볼썽사납게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피를 보는 여인의 눈동자엔 미동조차 없었다. 더구나 팔을 베어 낸 검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다시 검을 살짝 들어 겨누며 영령이 차갑게 말했다.
“일단 오른팔을 거두었다. 이 중에 왼손잡이가 있다면 말하라! 아직 싸울 배짱이 남아 있다면 상대해 주겠다.”
물론 그 상대는 왼팔마저 잃을 각오를 해야만 할 터였다. 세 사람 중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고통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처지가 아니 었다.
“꺼져라!”
그들은 팔을 잃은 대신 막혔던 귀가 뚫린 모양이었다.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 콧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들은 자기들의 떨어진 팔을 주 워 들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찰칵!
영령이 손을 한 번 가볍게 휘두르자 검은 다시 검집 속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신으로 강남삼흉을 내쫓은 용맹한 여인에게 쏟아지는 박수였다. 이런 환호가 익숙하지 않은지 영령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좀 전의 서슬 퍼렇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통의 소녀처럼 보였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령 언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령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백의를 입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여자와 함께 그곳에 서 있었다. 두 손을 꼭 모 아 쥔 백의여인의 밤하늘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가 바람 부는 호수의 수면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영령의 검기를 확인한 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중들 속에서 뛰쳐나온 빙백봉 나예린이었다.
나예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령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누구시죠?”
“누구라니요? …령 언니? 저예요. 예린이에요.”
영령의 반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나예린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제 이름이 령인 건 맞아요. 하지만 처음 보는 분인 것 같군요. 정말 누구시죠?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령이 대답했다.
“독고 사자…….”
떨리는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붉은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혼란스러웠다.
“독고 사자? 이상하군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제 성은 독고 씨가 아니에요. 제 성은 몽 씨입니다.”
영령이 친절하게 정정해 주었다.
“몽 씨라고요?”
어떻게 된 일이지? 나예린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용안으로 흘러들어 온 모든 정보는 그녀가 독고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비단 생김새뿐만이 아니다. 무 의식중에 흘러나오는 사소한 걸음걸이와 근육의 움직임, 목소리의 높고 낮음과 미세한 근육들의 움직임까지 모두 그녀가 독고령이라고 특정 짓고 있었다.
나예린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두 명의 그림자가 달려나오며 나예린과 영령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몽환산장에서 영령을 따라나온 시녀, 몽환 쌍무였다.
“누군데 감히 저와 언니 사이를 가로막는 거죠?”
몽환쌍무의 돌연한 행동에 불쾌해진 나예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요하지만 삼엄한 기세가 퍼져 나가며 두 사람을 압박했다. 그녀의 기세에는 만인을 압도 하는 위엄이 있어 몽환쌍무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질 수 없다는 듯 성격 괄괄한 몽무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흥, 이분은 당신의 언니가 아니에요! 이분은 우리들의 주인이신 몽환산장의 몽영령 아가씨입니다. 사람 잘못 보셨군요!”
“사람을 잘못보다니.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친애하는 독고 사자를 못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자신은 독고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독고령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디라고?
‘몽환산장?’
나예린으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몽환산장에서는 시녀가 함부로 주인의 앞을 가로막으라고 가르치나 보죠?”
주인의 대화를 함부로 끊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가 있죠!”
몽무가지지 않고 외쳤다.
“그건 바로 당신이 아가씨의 적이기 때문이에요!”
듣고 있던 나예린으로서는 그보다 더 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몽무와 환무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충분히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검각의 제자죠?”
나예린을 향한 몽무의 질문을 들은 영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좀 전과는 다른 눈으로 영령은 고개를 홱 돌려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영령의 이 미묘한 변화를 먼저 눈치 챈 사람은 연비였다. 그러나 함부로 끼어들 만한 계제가 아니었다. 숨길 게 아무것도 없는 나예린은 순순히 자신의 출신을 인정했다.
“그래요, 난 검각의 제자예요.”
그 말을 들은 영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정말이냐? 넌 정말로 검각의 제자냐?”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영령이 물었다. 나예린으로선 그것이 너무나 이상한 질문이었다.
“물론이에요, 언니. 저와 언니는 같은 검각의 제자잖아요. 우린 사자매 관계예요. 설마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시겠죠?”
영령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
영령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거, 거짓말이라니요?”
그 말은 무척 충격적이라 나예린은 순간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사승을 부정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사매였던 자신의 일 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듯했다.
“거짓말!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내가 어떻게 그 증오스런 검각의 제자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영령의 외침에는 타오르는 듯한 분노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게 무슨… 우린 정말.
백옥처럼 하얗던 나예린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닥쳐라! 지금 날 모욕할 셈이냐?”
검각이란 말에 격발된 증오가 영령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영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격렬한 살기와 적의에 깜짝 놀란 나예린이 반문했다.
“모욕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사자에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자 영령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검각이야말로 가장 증오하고 가장 배척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 다. 검지로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왼쪽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의 이 왼쪽 눈 상처를 만든 곳이 어느 곳인지 아느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자신에게 감추는 게 없던 독고령이었지만 저 왼쪽 눈에 관해서만은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나예린 자신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지독한 자상을 남긴 결코 지워질 리 없는 상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던 것이다.
“나에게 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힌 곳이 바로 검각이다!”
그렇게 말하는 영령은 진심으로 검각을 증오하고 있었다.
“서, 설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검각이 어떻게 자신의 후계자 중 하나가 될지 모를 인물의 왼쪽 눈을 파낸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분명 잘못 알았을 거예요!”
필사적으로 나예린이 외쳤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럼 나의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순간 몽환쌍무가 흠칫 안색을 굳혔다.
“그건…….”
나예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없자 영령이 다시 한 번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예린을 쏘아보며 외쳤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난 독고령이란 사람이 아니다. 어찌 내가 철천지원수 같은 검각의 제자일 수 있겠는가. 내 이름은 몽영령! 몽환산장의 장녀 몽영령이다. 검각 은 나의 적이자 원수! 난 검각이 밉다! 나의 이 눈을 앗아간 너희들이 밉다! 나예린, 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넌 나의 적, 난 검각의 제자인 널 증오한다!”
드러난 오른쪽 외눈에서 짙게 타오르는 그것은 분명 증오의 불길이었다. 용안의 힘을 쓸 것까지도 없었다. 자신을 몽영령이라 칭하며 검각을 적이라 단정한 저 여 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끝없는 증오와 분노였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농밀한 어둠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나예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차가운 단어에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독고령 본인인지 아닌지를 떠나 독고령과 같은 얼굴을 한 이로부터 자신을 증오한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나예린의 마음은 강한 충격으로 산산조각 부서질 것만 같았다. 타인에게는 굳게 마음을 닫고 있지만, 한 번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거의 무방비가 되어 버리는 게 바로 나예린의 특성이었다. 슬픔과 아픔에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때 곁에서 잠자코 보고 있던 연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하,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군요. 차라리 그 편이 더 설득력이 있겠는데요?”
나예린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쥔 손의 임자를 바라보았다. 궁지에 몰렸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넌 또 누구냐?”
영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죠.”
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무슨 뜻은요. 그냥 문자 그대로의 뜻이죠. 당신이 그 독고령이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기억을 잃었거나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는 이야기 죠.”
“무슨 근거로?”
연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은 정말로 독고령이 맞으니까요.”
“헛소리! 너희 두 사람 다 미쳤군!”
영령의 격렬한 반응에 연비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본인이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실은 사실인 거죠. 원래 진실은 때때로 아픔을 동반하기도 하니까요.”
“연비…….”
나예린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어두컴컴했던 암흑의 밑바닥에 한줄기 광명이 비춰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나예린을 바라보며 연 비가 씩 웃었다.
“난 린의 보는 눈을 믿어요. 린이 그렇게 봤다면 그런 거죠. 만일 린이 확신하고 있다면 저쪽이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 말아요. 아직 진실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때때로 억척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필요가 있을 때도 있는 거예요.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에 대한 판가름은 나중에나 알 수 있겠죠.”
상당히 과격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비는 진짜 그렇게 믿었다. 나예린의 용안을 믿었다. 그 눈이 잘못 본 경우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보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틀리게 보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예린은 감격했다.
“…..”
너무 감격하다 보니 무슨 말로 그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연비는 충분히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린, 저 사람이 정말로 그 독고 사자라고 생각해요?”
끄덕!
나예린이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린을 믿겠어요. 그러니 린도 자신을 믿어요.”
구김살 하나 없이 활짝 웃으며 연비가 말했다.
“연비가 그렇게 말해주니 용기가 생겨요. 그렇다면 좀 더 억지를 부려보겠어요. 진실을 확인할 때까지 말이에요.”
나예린의 모종의 결심을 한 눈으로 영령을 바라보았다.
“웃기는 소리! 그건 망상이야!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어떻게 내가 내가 아닐 수 있지?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러자 연비가 웃으며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어멋, 그건 걱정 말아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진짜 누구인지 잘 모른 채 그저 살아만 가고 있으니까요. 다들 자신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면 자아성찰이나 정체성 확립 같은 말이 왜 나왔겠어요? 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니까 나온 말들이에요.”
“닥쳐닥쳐닥쳐!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마치 자기가 놀림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 영령이 버럭 소리쳤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뭐, 지금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지만요.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진 않군요. 세상은 넓고 이런저런 수상한 기술들이 많으니까요.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는 환술이나 최면술이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죠. 선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렇게 일부러 떠보며 유심히 몽환쌍무를 살폈다. 어떤 특별한 반응이 나올지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 년 전 무당산에서 합숙할 때…….”
그때 그들을 기습했던 갈효봉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어떤 이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배후가 밝혀지진 않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렇 다면 독고령에게도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역시 당신은 독고령, 독고 사자가 분명해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확신할 수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호수 같은 심원한 눈동자로 영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예린이 외쳤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어라!”
더 이상 입씨름하고 싶지 않게 된 영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을요? 그건 어떤 의미죠?”
걸라고 한다면 걸 수 있었다. 독고령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두렵지 않은 나예린이었다.
“그런 말을 하려면 일단 나를 쓰러뜨린 다음에나 하라는 이야기다!”
나예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좋아요. 만일 언니가 자고 있다면 그걸 두들겨 깨우는 것이 이 동생의 몫이겠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의 말을 나의 검으로 증명해 보이겠어요. 승부 방법은 어떻 게 하죠?”
결투든 뭐든 할 수 있었다, 독고령을 찾기 위해서라면.
“너도 투기제에 참가하나?”
끓어오르는 증오를 억누르며 고통에 찬 표정으로 영령이 물었다.
“네, 물론이에요. 저도 투기제에 참가합니다.”
규칙상 한 번 등록한 선수는 같은 등록 선수끼리 싸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비합법적인 승부 조작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너무 많은 돈이 결려 있는 시합에는 종종 시합 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대전 상대를 쓰러뜨리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투기제 시작 전에 불신을 주는 것은 올바른 상행위가 아니 었다. 누구나 조작이 없다고 믿게끔 해야만 돈덩이가 끊임없이 굴러오는 법이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참가하지. 승부는 그곳에서 내주마. 약속하지. 만약 그곳에서 나를 만난다면 넌 나의 검 아래 죽을 것이다.”
친애하는 언니의 입에서 그런 잔혹한 말을 듣는다는 것은 무척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고통스러움을 참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도 약속하죠, 반드시 원래의 언니로 돌려놓고 말겠다고. 제 모든 힘을 걸고! 필요하다면 당신을 쓰러뜨려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놓겠어요!” 나예린의 봉목에서 굳은 의지가 별처럼 빛났다. 물러서지 않는 자기와의 약속이었다.
“아직도 그렇게 당당히 헛소리를 할 수 있다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군. 모든 것은 투기제에서 결판나게 될 것이다. 그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투기장에서겠군.” 그곳에서 누군가 한 사람은 쓰러져야 한다.
“그래요. 그럼 투기장에서!”
나예린과 영령이 대답했다.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요!”
영령은 망설임없이 등을 돌려 앞으로 나갔다. 몽환쌍무는 나예린을 한 번 힐끔 노려본 후 그 뒤를 따랐다.
연비는 나예린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위로하듯 말없이 감싸 안아주었다. 힘든 시기에 이런 조용한 배려가 나예린은 무척 고 마웠다.
“그래도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지금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자고 나예린은 스스로를 달랬다.
“다시 만나요, 언니.”
멀어져 가는 영령의 등을 바라보며 나예린이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때는… 그때는 진짜 본모습으로…….’
그러나 나예린은 뒷말을 삼켰다. 그것은 말로 내뱉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연비…….”
시선은 앞을 고정한 채 나예린이 조용히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왜요?”
곁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울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목이 메이는지 나예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야죠. 린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아요. 웃음이 훨씬 더 어울리거든요. 훨씬 예쁘기도 하고요.”
연비의 말은 나직하지만 따뜻했다.
“그럼 웃어야 되겠네요?”
나예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웃어요, 린.”
“하지만 웃어본 적이 많지는 않은데요?”
얼음의 숙녀, 빙백봉이라고까지 불리던 그녀였다. 웃는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걱정 말아요. 앞으로 훨씬 더 많이 웃게 될 테니까요.”
연비가 나예린의 손을 꼭 쥐어주며 말했다.
“……”
나예린이 연비를 보며 웃었다. 눈물을 삼키고 지어 보인 웃음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요, 반드시.”
연비가 진심을 담아 선언했다.
나예린은 웃었다. 웃는 그녀의 하얀 뺨으로 수정 같은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