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2화 – 불난 집에 부채질

랜덤 이미지

비뢰도 24권 2화 – 불난 집에 부채질

불난 집에 부채질

-소녀는 바람을 타고

우천에 의한 경기 중단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광적인 열의가 하늘에 닿아 비구름을 몰아낸 탓인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위에서 해가 쨍쨍거리며 지상을 비추는 맑은 날이었다. 허가받은 잡상인들이 시원한 음료를 들고 돌아다니며 팔고 있었다.

여기서의 허가란 일정 비용 이상의 영업비를 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바글바글하다는 말로밖에는 원통투기장 안에 자리한 사람들 의 모양새를 설명할 말이 따로 없었다.

시합이 하나둘씩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투기장의 흙바닥이 머금는 피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소리를 높여가며 흥분해 가고 있었다. 아마 관 중들은 몇몇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해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오히려 환호 소리만 더 높아지고 있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의 이글이글거리는 흥분을 헤치며 연비와 나예린과 윤미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참가자 자격으로 투기장의 맨 앞줄에 별도로 마련된 특석에서 편안히 구경할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그곳에서라면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좀 더 쾌적하게 경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자기 자리를 뺏으려는 줄 알고 필사적으로 막아대는 사람들의 어깨를 힘주어 밀치며 세 사람은 나아갔다. 그들이 무공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한 발자국도 앞 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중도에 압사당해서 비명횡사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나예린이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다곤 하지만, 이런 미인들이 지나가는데 눈길 하나 주지 않다니 정말 제정신들이 아니긴 아닌 모양이었다.

연비는 마음 같아서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사람들의 뒷덜미를 잡고 사방으로 이리저리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연비의 성격이 갑자기 아 리따워져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화풀이에 내공을 써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최대한 내공을 쓰지 않고 아껴야만 했다. 모두 다 그 망할 사 부의 자비로우신 모종의 조치 덕분이었다.

겨우겨우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은 참가자 관람용 특석으로 갈 수 있었다. 그곳은 다른 자리들과는 벽과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쾌적했다. 저 위의 인간 지옥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연비는 무척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바로 진령과 남궁산산과 마하령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말을 걸 계재가 아니었다. 특히 진령의 상태가 심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피날 정도로 세게 깨문 채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는 지금 온갖 감정들 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같은 참가조에 속한 남궁산산과 마하령 역시 그 기운을 느끼는지 무척 불편해 보였다. 마치 바늘을 잔뜩 세운 독오른 고슴도치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시합은 바로 남궁상, 남궁 공자조의 시합이었군요.”

별생각없이 말하던 윤미는 진령의 비수와도 같은 시선을 받고는 헉 하며 숨을 삼켰다. 하마터면 잡아먹히는 줄 알았을 정도로 그 눈초리는 매서웠다. 그러나 이런 재미있는 상황을 피해갈 연비가 아니었다. 그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다. 진령들의 빈자리 옆의 자리를 탁탁턴 다음 앉으며 연비가 말 했다.

“아하, 이번 시합의 첫 싸움은 소문의 그 은발소녀인 모양이군요. 이거 참 재미있겠는데요? 천무학관 두 기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하게 활약하는지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옆에 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히익, 연비!”

진령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윤미였다.

이러지 말고 다른 곳에 빈자리도 있으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윤미가 설득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런 좋은 자리를 두고 뭣 하러 다른 곳에 가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령의 고개가 연비를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난, 관심없다.”

진령이 차갑게 말했다.

“정말요?”

“정말이다.”

“에이, 안 그런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집요한 거지?”

저 건방진 여자는 누구길래 이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단 말인가! 진령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보통 관심없는 사람은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질 않으니까요. 내가 보기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이 싸움에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그것 때문 에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로 말이죠. 안 그런가요?”

“대답하지 않겠다. 게다가 왜 내가 너에게 그런 걸 가르쳐 줘야 하는 거지?”

진령이 아무리 죽일 듯이 노려봤자 연비에겐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살기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그야 재밌을 것 같으니까요.”

연비가 태연하게 진령의 복장을 뒤집었다.

“후배 주제에 건방지구나!”

보다 못한 마하령이 외쳤다. 그러자 연비는 마하령 쪽으로 살짝 시선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쪽은 분명 마하령, 마 언니였죠? 듣자 하니 그쪽 낭군께서도 저쪽 조에 속해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그 역시 저 은발의 소녀한테 관심이 있는 걸까요? 역시 소문은 사실? 하긴 나도 한번 흘낏 스치듯 본 적이 있는데 누구와는 다르게 괄괄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고, 조용하 고 차분하고 얌전할 것 같이 생겼더군요. 역시 용 공자는 그런 쪽이 취향?”

연비의 거침없는 말에 마하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누, 누, 누가 낭군님이라는 거냐! 우, 우리 그런 사이 아니다! 말조심해라, 후, 후배!”

“큭큭, 정말 그럴까요? 한 은발소녀를 두고 싸우는 두 남자라… 꽤 그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비가 소리 죽여 웃었다.

“헛소리!”

마하령이 빽 소리쳤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극도로 흥분한 티가 역력했다. 그만큼 지금 마하령의 마음속에는 거센 폭풍우가 일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얌전한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그는 좋다고 해주었다.

“그건 모두 다 거짓말이었을까요?”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냐?”

“당연히 그의 취향이죠. 사납고 괄괄한 당신을 좋다고 말한 바로 그 취향!”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연비가 한마디 덧붙였다. 마하령의 몸이 벼락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마씨 언니, 당신은 얼마나 그를 믿고 있나요? 그 믿음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산산조각난 이후일까요? 이 후배는 그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연비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얄미운 웃음이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진언니?”

“저 남자가 어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미 말했다. 난 그를 더 이상 믿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진령의 얼굴에 괴로움과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상관없는 사람이 그렇게 심경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참 놀랍군요. 안 그래요, 윤 미소저?”

“네? 예? 저, 저 말인가요?”

당황한 윤미는 말을 더듬었다. 칼날 위에서 즐겁게 춤을 추다가 갑자기 자신을 끌어들일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제발 그러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 그렇겠죠…… 아니, 그럴까요?”

윤미는 이렇게 대답하지도 저렇게 대답하지도 못했다. 어느 쪽 대답이든 자기에게는 불리할 게 분명했던 것이다.

다행히 연비는 윤미의 어중간한 대답에 대해 트집을 잡거나 하지 않았다. 진령과 마하령의 신경을 긁는 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윤미는 안도의 한숨 을 쉴 수 있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어어어요!’

하지만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윤미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투기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차라리 그러는 편이 마음 편했다. 옆에 있는 진령과 마하령이 분노해서 검이나 뽑아 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언제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믿음이 언제 산산조각날지 옆에서 지켜봐 줄게요.”

참 고맙죠, 라는 어조였지만, 두 사람은 전혀 고맙지가 않았다.

“말 다 했느냐?”

그럼 이제 죽여주지, 라는 눈빛으로 마하령은 칼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할아버지 도성에게 받은 바로 그 칼이었다. 그녀 역시 구룡칠봉의 일인으로서 소림제일의 기 재라는 용천명도 제압한 전적이 있는 막강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어머, 그걸로 찌르려고요?”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요.”

연비가 웃으며 충고했다.

“왜 그래야 하지?”

“규칙도 안 읽어봤어요? 참가자는 자신의 시합 이외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참가자랑 싸우면 실격이에요, 실격(失格)!”

“큭!”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마하령의 몸이 움찔했다.

“그런데도 할 거예요? 정말로? 진짜로? 후회 안 해요? 그렇게 되면 저 남궁상 조와는 싸울 기회를 잃게 되는데? 그래도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싸울 거예요?”

연비가 몰아치듯 묻자 마하령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압박하는 후배는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

마하령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남궁상 조와 싸워보기도 전에 실격될 수는 없었다.

“현명한 판단이에요.”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연비가 말했다. 밝고 환하지만 상대의 속을 뒤집는 미소에 마하령은 다시 한 번 찔러 죽일 듯이 연비를 노려 보았다. 하지만 연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재미있나?”

진령이 마하령 앞으로 나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비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어떤 망설임도 필요없었다.

“물론 재밌기 때문이죠. 재미도 없는 일에 뭣 하러 힘들게 입을 놀리겠어요. 안 그래요?”

진령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지?”

“타인의 어리석음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뭐, 가끔 좀 짜증나기도 하긴 하지만.”

재밌다는 건지 짜증난다는 건지, 어느 쪽인지 헷갈리게 하는 말투였다.

“내가…… 어리석다고?”

진령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그럼요. 평생을 믿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니면 그냥 진실을 아는 걸 두려워하는 것뿐인가요?”

연비의 눈동자와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령의 아미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동시에 무형의 살기가 진령의 전신에서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보고 윤미는 안절부절못하고 나예린도 살짝 아미를 움찔거렸지만 연비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설마 그 뒤에 있는 나 소저를 믿고 있는 건가?” 그 말에 연비는 속으로 폭소를 터뜨렸다. 참 많이 컸다는 생각에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그런 실례의 말씀을. 왜 내가 내 일을 우리 사랑스런 린에게 전가하겠어요? 자기 일 정도는 자기가 책임질 수 있다고요. 사람 그렇게 보면 섭하죠.”

진령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연비라고 했던가?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진다고 한 말을 믿지. 이 대회가 끝난 후에 다시 이 빛을 청산하겠다. 그때 어떻게 자기 일을 책임지는지 두고 보지. 어디 로 도망가거나 하지는 마라.”

연비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나요? 물론 모르겠죠. 아마 영원히 모르는 편이 행복할걸요? 큭큭. 뭐, 좋아요. 이건 이것대로 재미있으니까. 잠시 잊고 있나 본데 난 이래봬도 입관 시험에서 저 ‘궁상’ 공자를 쓰러뜨린 사람이에요. 그러니 무시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쪽이야말로 도망가지 말아요.”

순간 진령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빽 소리쳤다.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르지 마!”

연비가 그를 궁상이라 부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주작단원들로부터 상당한 놀림을 당했어야 했다. 또 미녀라고 헤벌레하며 방심하다가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기억이 진령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연비가 남궁상을 궁상이라 부르는 것이 이유없이 귀에 거슬렸다.

“그 이름으로 그를 불러도 되는 건 우리 주작단 이외에 대사형 한 사람뿐이야.”

“오, 그건 미처 몰랐군요. 그 대사형이란 분은 무척 훌륭한 분인가 보죠?”

그러자 진령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절대 아냐! 비록 대사형이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이고 막무가내인 데다가 전혀전혀전혀 안 훌륭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를 궁상이라 부를 순 없어. 내가 허락하지 않아.”

“맞아맞아. 훌륭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망할 사람이야!”

남궁산산이 옆에서 거들었다.

순간 연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정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얼굴이 굳어 보일 정도였다. 연비는 호안석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두 사람을 유심히 바 라보았다. 그 순간 눈동자 깊은 곳에서 황금빛 광채가 암운을 가르는 찰나의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 말도 기억해 두죠, 옆에 분의 말과 함께. 아~주 오랫동안.”

진령과 남궁산산은,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호안석 눈동자와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번쩍이고 있는 광채가 자신들을 옭아매는 듯했다.

‘윽, 뭐지? 이런 압박감, 대사형 이외에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여자… 정체는 모르겠지만 방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냐, 진령은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자, 그럼 이제는 사이좋게 시합이나 관전할까요? 자, 린과 윤 미소저도 여기에 앉아요.”

그러면서 바로 진령 일행 옆에 그대로 앉아버리는 연비를 보며 윤미는 경악했다. 분위기를 여기까지 나쁘게 몰고 가놓고서도 여전히 저런 말을 태연히 내뱉을 수 있다니, 강심장도 저런 강심장이 없었다. 나예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타부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연비 옆에 가서 앉았다. 혼자 남은 윤미는 울고 싶어졌다.

‘연비 소저, 하는 행동이 꼭 류연하고 똑같네…….?

비류연의 터무니없는 행동 때문에 곤란을 겪을 때의 심정이랑 지금 심정이랑 너무나 똑같아 묘한 기시감까지 느껴졌다.

사실 연비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비의 가면이 벗겨지는 쪽이 훨씬 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윤미는 ‘하 아……’ 하고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연비 옆에 앉았다. 누가 콕콕 바늘로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진령은 관심이 없는 척, 동요하지 않는 척, 아무렇지도 않는 척,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애쓰고 있었지만, 현재 그 노력은 그다지 보답받고 있지 못했다. 옆에서 흘낏흘낏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더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진령은 지금 소문의 ‘은발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눈으로 보는 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면 이미 류은경은 손톱 하나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진령은 집요하게 류은경의 전신 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연비가 한마디 했다.

“재미있군요, 진 소저는. 뭐, 귀엽기도 하고.”

그 소리에 진령이 발끈했다. 지금 그녀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불안정한 폭탄이었다. 그 옆에서 재미로 불장난할 수 있는 담을 가진 것은 연비 정도였다. “아까부터 재미있다 재미있다 하면서 재미를 찾는데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재미에 중독되기라도 했어?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하지만 난 하나도 재미가 없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진령이 대꾸했다.

“그런 점이 바로 재미있는 거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람의 시합을 보며, 순간순간마다 계속해서 표정이 바뀔 정도로 감정 이입이 잘되니 누구누구씨를 옆에 서 구경하는 것 같은 거 말이에요.”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취미 생활이라고 해두죠. 그렇게 화내니까 꽤 귀여운데요, 진언니? 킥킥.”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지 연비가 키득거렸다. 자기 정체를 알면 아마 졸도하겠지? 그건 너무 불쌍한 일이었다. 연비는 그만 놀리기로 했다.

“자, 그럼 잡담은 이만하고 시합이나 구경할까요? 소문의 은발 아가씨가 얼마나 활약하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요.”

나예린도 동의했다.

“확실히 그녀의 기(氣) 운용은 확실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요. 저도 연비처럼 궁금하군요.”

바람을 이용한 무공이라는 것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나예린도 검사로서 무인으로서 흥미가 있었다. 특히 그녀의 스승이 누구인지 안 이후로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때는 영령이 나타나서 사태를 수습하는 바람에 그녀의 무공 실력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자리였다. 나예린은 조용히 투기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키 차이가 거의 삼척은 될 것 같은 거인과 소녀가 서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소녀의 머리카락은 투명한 은색이었다.

“저, 아이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원통투기장 한가운데 선 은발소녀를 바라보며 나예린이 말했다. 솔직히 거의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 필사적이었던 모양이에요. 장하다고 칭찬해 줘야 할까요, 이런 때는?”

“기회를 던져 준 건 연비였잖아요?”

아마 연비의 한마디가 없었으면 애당초 류은경은 좌절해서 상금은커녕 여기 서지조차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연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회를 준 건 나지만 기회를 잡은 건 저 아이죠. 기회란 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 다만 그걸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의 문제 죠. 그런 부분에선 좀 더 점수를 주겠어요.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사실 성공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용천명까지 같은 조로 만든 것은 예상 밖이었다. 성공한다 해도 나머지 한 명은 주작단의 현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멋지게 빗나가고 만 것이다. 하긴 남궁 상이 대장이고 용천명이 부대장이니 어떻게든 밀어붙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기지 못하면 곤란할걸요? 궁상 대장도 바보가 아니라면 동정심만으로 참가자로 뽑진 않았겠죠. 그쪽도 지금 상금 때문에 목이 탈 지경일 테니까요.”

만일 도박으로 빚진 돈을 못 갚게 된다면 무슨 수모를 당하게 될지 미지수였다. 얼마나 그 염원이 대단하면 그들의 조명을 ‘사채청산’이라는 암울함이 줄줄 흐르 는 이름으로 지었겠는가.

“이번 상대는 ‘강맹삼인방’이란 조였죠? ‘서해왕’이라는 자의 직속 부하들이라는?”

“맞아요. 마천십삼대 중에서도 특히 더 난폭한 자들이라더군요. 모든 문제를 칼과 근육으로 해결한다고 악명이 자자한 자들이에요.”

“어, 잘 아네요?”

약간 놀랍다는 투로 연비가 감탄했다.

“헤헤, 조금 공부해 왔어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윤미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 이후로 정보통 장홍을 꼬드겨 이런저런 정보들을 속성으로 교육받았던 것이다. 확실히 장홍은 이상한 것에까지 아는 것이 많았다.

“덩치도 그자보다 크고, 생김새는 좀 비슷하네요.”

강호란도의 숨은 지배자라 할 수 있는 돈왕을 방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연비가 쓰러뜨렸던 거력신이란 자보다 류은경의 상대는 더 커 보였다.

“저자의 이름은 거력왕이래요.”

“더욱 의심스럽군요, 그런 부끄러운 이름, 아무나 못 쓸 테니까 말이에요.”

“확실히 그렇네요.”

나예린도 동의했다.

때마침 미성공자 유진이 이 두 사람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무의 재능으로만 본다면 거력왕, 그는 형을 훨씬 뛰어넘고 있죠. 스무 살 이후로는 순수한 힘 겨루기에서도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박 “선생님?”

정말로 저 거력왕은 거력신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능했던 형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했다.

“맞습니다. 그는 천생신력을 타고 태어난 장사입니다. 힘 겨루기에 있어서는 그의 형 거력신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죠. 때문에 그는 적은 내공으로도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의 내공이 더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죠. 저 자그마한 아가씨한테는 최악의 상대라 할 수 있겠군요.”

멀리서 보니 그 거력왕이란 사내는 은발소녀 류은경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아무래도 그는 류은경 같은 작은 소녀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이런 자그마한 소녀랑 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단한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뽑기 운이 나빴고, 성격이 그보다 거칠면 거칠었지 결코 부드럽지 않은 동료들은 그와 순서를 바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매우 기분이 나빴다.

“끄응!”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박하는 존재감이 있는데 기분 탓에 얼굴까지 일그러져 있으니 더욱 험악해 보였다. 그에 비하면 류은경은 어찌나 작은지 그의 그림 자에 다 가려져 버릴 지경이었다.

“괜찮을까요, 저 아이?”

나예린이 약간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여기서부터는 그녀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이죠. 여기서 저 근육밖에 안 차 있는 덩치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칠상흔을 상대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요. 그 정도도 못하면 어차피 그자에게는 어떤 눈물도 통용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와 만나는 순간 저 아가씨는 눈물을 흘릴 짬도 없이 바로 죽을 테니까요. 하긴 우리가 있는 이상 그자와 싸울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말이에요.”

가혹할 정도로 엄한 말이었지만, 연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회는 줬어요. 이제 그 기회를 잡고 안 잡고는 오직 저 아가씨 실력에 달렸어요.”

기회를 얻은 것이 ‘운’이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은 ‘실력’이었다.

“자, 거기는 막다른 길, 물러설 곳은 없죠. 쓰러뜨리고 앞으로 가느냐, 그 자리에서 주저앉느냐, 선택은 하나뿐이니까.’

기왕이면 흥미로운 장면들을 보여주길 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구경뿐인 거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대하고 있어요. 여기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섭섭하죠. 한 남자의 인생을 절단 내면서까지 저 자리 에 섰으니까요.”

남궁상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직 절단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이라고 외치며 항의했을 것이다.

“확실히 특이한 속성의 무공을 익히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을까요?”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예린은 궁금했다.

“궁상 대장이 바보긴 하지만, 같은 조에 속할 사람의 실력을 시험 한 번 해보지 않고 뽑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귀여운 협박을 당했다고 해도 말이죠.” “협박? 협박을 당했다는 게 무슨 소리지?”

진령이 고개를 홱 돌리며 반문했다. 역시 무공을 익힌 고수답게 이목이 날카로웠다.

“어라, 내가 무슨 말이라도 했나요?”

연비는 시치미를 뚝 떼며 씨익 웃었다. 참지 못한 진령이 소리쳤다.

“방금 분명 ‘협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연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에이, 기분 탓이겠죠.”

‘내, 내가, 저 사람을 혼자서 이길 수 있을까??

너무 키가 커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픈 거력왕을 쳐다보며 류은경은 고민했다. 설마 그녀의 상대가 이런 거구일 줄은 상상도 못해봤던 것이다. 그녀의 대련 상대는 그동안 사부인 검선자 이약빙이 유일했기 때문에 이런 거구의 사내랑은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다행히 거력왕 그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 즉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서해왕님의 심복 중의 심복인 이 천하의 거력왕이 너 같은 작은 계집애랑 싸워봤자 무슨 보람이 있겠냐? 녀석들의 놀림이나 당하고 말 텐데. 그러니 그냥 항복해 라, 지금 당장. 싸워서 이기기도 귀찮다. 안 때릴 테니 그만 들어가 봐, 어서.”

그는 힘을 최고의 가치로 숭앙하는 무골이었는지라 모든 가치 판단은 기준은 ‘힘’이었다. 그러므로 힘을 겨룰 수 없고, 힘도 뽐낼 수 없는 싸움에 그는 아무런 흥미 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항복시켜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의 영광된 싸움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의 계획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 다.

“아니오. 전 항복하지 않아요!”

류은경이 외쳤다. 사실 그런 마음이 안 든 것은 아니었으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억지를 부리고 부려 여기 이 자리에 섰는데 상대가 엄청 키가 크고, 팔뚝이 굵고, 성성이(고릴라)처럼 생겼다 해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를 같은 조에 끼워준 남궁상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가 비록 그 허락을 내릴 때 소태 씹은 표정 을 짓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계집. 방금 말 후회할 거야. 멀쩡히 돌아가지 못하게 될 테니까!”

거력왕이 윽박지르는 목소리로 외쳤다.

“상관없어요.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으니까요. 나 따위 받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는걸요.”

순간 또다시 세상을 불신하는 류은경의 병이 도졌다. 이럴 때의 그녀는 상당히 불안정하고 막무가내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빨리 덤비세요! 어차피 봐주지도 않을 거잖아요. 그저 힘밖에 없으니 분명 사람을 때리는 것 말고 다른 건 할 줄 모를 테죠? 그러니 때리세요. 때려봐요! 어차피 때릴거니까요, 이 난폭자! 흑흑!”

거력왕의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누가 난폭자냐!”

커헝!

야수의 포효 같은 일성을 터뜨리며 거력왕이 주먹을 날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