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사 포위(包圍)
-남궁상, 깨어나다
스윽!
침상 위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남궁상의 몸에서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숨이 조용히 들이쉬어지고 내쉬어진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 면 호흡을 하고 있는지조차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깊은 호흡이었다. 그는 지금 운기행공 중인 것이다.
그런 그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정혼녀인 진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첩 지망인 류은경이었다. 류은경의 터무니없는 발 상과 행동에 한동안 그녀를 경원시하던 진령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눈에는 공통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바로 남궁상에 대한 걱정이었다.
진령의 안색은 기력을 다해 쓰러졌을 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남궁상보다 한발 먼저 운기행공을 끝낸 덕분이었다.
자욱한 안개처럼 뿜어졌던 하얀 기운이 다시 남궁상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이윽고 거무죽죽하고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더니 남궁상이 천천히 눈 을 떴다.
“깨어났어요, 언니!”
남궁상이 가부좌한 상태로 눈을 뜨는 것을 보고 류은경이 외쳤다. 진령은 창문 밖으로 밖을 경계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매우 날카롭고 얼굴에는 긴장이 감 돌고 있었다.
“어때요, 상?”
진령이 남궁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소. 오 할 정도는 회복된 것 같구려.”
“미안해요.”
자신이 그런 억지를 부리며 몰아치지만 않았어도 남궁상이 이 정도로 부상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나는 괜찮소. 하지만 진령 당신도 진기를 많이 소모하지 않았소?”
그 싸움은 거의 동귀어진이나 다름없었다.
“난 당신이 준 ‘천심단(天心丹)’을 먹고 괜찮아졌어요. 적어도 육 할 이상은 회복된 것 같아요.”
남궁상은 자신의 진기 회복보다 진령의 내공 회복을 우선시했다. 먼저 운기행공을 하라는 말도 극구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운기행공이 끝난 다음에야 운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때 진령에게 먹으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건네준 게 바로 ‘천심단이었다. 사실 진령에게 준 ‘천심단’은 세가에서 아주 급한 비상시가 아니면 쓰지 말라던 비장의 단약으로, 남궁상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령에게는 여러 개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가 먹은 것은 천심단이 아니라 그보다 효과가 훨씬 떨어지는 ‘소양단’이었다. 물론 그것도 안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에 일단 먹고 운기를 했지만 역시 생각만큼 진기가 회복되지는 않고 있었다. 오 할 이상 회복했다고 말한 것도 사실 진령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밖의 상황은 어떻소?”
썩 좋지 않은 자신의 상태를 내색하지 않은 채 남궁상이 물었다.
“완전히 포위되어 있어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진령의 표정에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밖에는 지금 백수십 명의 무사들에 의해 인해 장벽이 쳐져 있었다. 모두들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제십삼 기숙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상령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십삼 기숙사는 마천각의 무사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 던 것이다. 영문을 모른 채 말려든 다른 천무학관 사절단들도 모두들 대장 남궁상의 명령에 따라 방어 태세를 취한 채 농성(籠城)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는 그 후 로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단숨에 공격해 들어오지는 않네요.”
류은경이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남궁상을 쳐다보았다. 아마 이런 준전시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기에 더 당황스럽고 불안한 모양이었다.
“걱정 마시오, 류 소저. 저들이 당장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요. 천무학관 사절단이 우리들의 공범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지금은 일단 우리들을 구류해 놓은 것뿐이오.”
“하지만..
사실 사방에서 적에게 포위된다는 것은 그 상황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다. 괜히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나온 게 아니다. 현재 이들은 사람이 만든 감옥에 의해 감금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포위하는 쪽에 비해 포위당한 쪽이 받는 정신적 압박은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언제가 틈이 드러나고 무너지는 순간 이 온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하지만 저희들이 이 안에 있는 걸 안다면 바로 쳐들어오지 않겠어요?”
남궁상과 진령, 그리고 류은경은 확실히 이곳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침입한 침입자였다. 지금 밖에서 삼절검 청흔과 지룡 백무영이 그런 사람은 이곳에 없다면서
시치미를 떼며 저들의 수색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역시 대사형의 말대로인가? 이대로는 위험해.’
지금 이대로 보급도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필패가 분명했다.
‘그전에 탈출로를 뚫지 않으면…….?
그래서 대사형이 맡긴 일을 완수해 내야 했다. 완전 고립무원인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찌 됐든 이 천무학관 사절단의 대장이었다. 천관도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 역시 그의 책임 중 하나였다.
“산산이는 괜찮을까요?”
“걱정 마시오, 산산은 괜찮을 테니.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그랬소. 언제나 필사적이었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소. 꼭지가 돌아가면 물불 안 가리는 게 좀 문제지 만.”
“맞아요. 한번 화나면 정말 무섭죠. 평소에는 얌전한 편인데.”
“이 강호에서 얌전한 사람이 모두 전멸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소? 내 동생이지만 정말 막 나갈 때는 오빠인 나도 어쩔 수가 없소.”
“후훗, 산산이는 자기가 누나라던데요?”
진령이 일부러 보란 듯이 웃으며 말했다. 계속 긴장한 채로 있다가는 정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 소리! 그건 그쪽 주장이고, 내가 오빠가 맞소!”
남궁상이 입을 뿌루퉁 내밀며 말했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벌써 그 문제로 싸워온 지도 이십여 년. 아직도 결말은 나지 않고 있었다. “후훗, 어쩜 남매가 그리 똑같은지
“안 똑같소. 절대로 안 똑같소. 누가 똑같다는 거요?”
남궁상이 격렬히 항의했다.
“바로 그런 점이 똑같다는 거예요. 다만 산산이는 가끔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걱정이에요. 기습 같은 데 약한데…
산산은 본인이 남을 기습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확실히 그건 걱정이긴 하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현운이 붙어 있으니.”
그 말에 진령은 약간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믿어도 괜찮을까요? 현운 그 사람, 요즘 왠지 너무 조용하지 않나요? 왠지 의욕이 없어 보이던데.”
최근 들어서는 예전 같은 재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을 해결한 것 같지도 않았다.
“걱정 마시오. 그 친구는 내가 잘 아오. 그의 경쟁자인 내가 그의 진짜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거요. 그의 저력은 아직 빙산의 일각밖에 드러나지 않았소.”
“과연 그럴까요?”
“그는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겉과 달리 안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끓고 있는 사내요. 겉보기에 유유자적하고 있다고 해서 속으면 안 되오. 나도 그랬다가 몇 번 당한 경험이 있소. 현운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수련에 정진하는 이요. 그가 지금 몰래 연마하고 있는 무공이 완성된다면…… 나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소.”
“믿어도 될까요?”
“그는 내가 인정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요. 난 그를 믿소.”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더 언급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걱정이 쾌청하게 사라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남궁상 역시 두 사람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날 티격태격한다지만 남궁산산과는 피를 나눈 남매였다. 그리고 현운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수라장을 함께 건너온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였다.
‘현운, 여동생을, 산산을 부탁하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동생과 친구를 믿는 것뿐이었다.
***
잠깐의 소동 중에 남궁산산의 몸을 살핀 현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기습이었지만 다행히 급소는 모두 피했다.
서둘러 응급처지를 한 다음, 살짝 내공을 불어넣어 거칠어진 호흡을 안정시켰다. 뼈가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무거운 것이 그녀를 때린 것은 사실 이었다. 급히 막아내지 못했다면 치명상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산산은 구룡칠봉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 그 기습을 쳐내긴 했지만 급 격한 자세 변화 때문에 기혈이 뒤틀렸고, 그 상태에서 그녀의 검을 부순 강력한 충격을 연속해서 받는 바람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유유자적을 인생 지침으로 삼는 나라도 용서할 수 없게 되었군.’
현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남궁산산이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어떻게 된 거죠?”
“괜찮소, 산산? 당신은 암습을 당했소. 하지만 무엇에 당했는지는 나보다 산산 당신이 더 잘 알 거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묵직한 게 부딪쳐서 내 기혈을 뒤흔들었어요. 하지만 뭔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암기 같았는데… 그건 그렇고, 날 암습한 사람은 대체 누구죠?”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한 번 당한 걸로 꺾일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무얼 말해도 그녀는 괜찮으리라. 그래서 현운은 말했다.
“…남해왕이오.”
남궁산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돼요. 그 뚱땡이는 방금 내가 쓰러뜨렸잖아요? 당신도 보지 않았나요?”
“그는 가짜요. 우리가 속았던 거요. 진짜는 계속 우리 곁에 있었소.”
“그게 무슨 뜻이죠?”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궁산산이 반문했다. 무리도 아니라고 현운은 납득한다.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길 바라며 현운은 진실을 말했다.
“전혼, 그자가 바로 진짜 남해왕이었소.”
“그… 그럴 수가……!”
남궁산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이오. 그가 우릴 속였던 거요. 그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내 실수요.”
현운이 자책하자 산산이 발끈했다.
“왜 그게 당신의 실수죠? 엄밀히 따지면 그 암습을 막아내지 못한 내 실수 아닌가요? 대사형 역시 같은 생각일 거예요. 암습은 약한 놈이나 하는 거지만, 그런 암습 에 당하면 더 약한 놈이라고.”
참으로 비류연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운에게는 그 말도 먹혀들지 않았다.
“아니오. 적의 숨겨진 저력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나의 실수요. 당신이 싸우고 있을 때 그 뒤를 지키는 것은 내 역할이었소. 적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데… 난 방심했던 거요. 그래서 당신이 다쳤소. 난 저자보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소.”
“무, 무슨 상관인가요. 내가 실수로 암습에 당한 거랑 당신이랑? 내, 내가 상처 입은 거랑 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이건 자업자득인데?”
어쩐지 남궁산산의 얼굴이 빨갰다. 현운은 어디까지나 진지하다. 이렇게 진지한 상태의 현운은 그녀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산산, 당신이 상관없다 해도 난 상관있소. 이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상관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날 일으켜 줘요. 날 속인 대가로 한 방 먹여주지 않으면 속이 안 풀려요.”
남궁산산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걸 현운이 말린다.
“지금은 가만히 있으시오. 함부로 움직이면 상처가 더 커질 수 있소.”
“흥, 이 정도 상처는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고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현운이 억지로 도로 눕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의 얼굴이 무척 가까워졌다. 사실 지금 남궁산산은 아직도 현운 에게 안겨 있는 상태였다. 그걸 자각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불에 달군 석탄처럼 새빨개졌다.
“이, 이, 이, 이게 무슨 짓이죠, 현운?”
항의하는 그녀의 혀가 약간 꼬여 있다.
“저자와는 내가 싸우겠소.”
현운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별다른 동요는 없는 듯 보였다.
“이건 내 싸움이에요.”
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 싸움이기도 하오. 슬슬 나에게 맡겨도 괜찮지 않소?”
“난 안 괜찮아요. 날 무시하지 말아요. 난 당신보다 강하니까.”
씩씩 숨을 거칠게 내쉬는 걸 보니 화를 억누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당신은 나보다 강하오. 그러니 나에게 실전 경험을 쌓아 내가 더 강해질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니겠소?”
“음…… 그런가요? 정말 내가 당신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해요?”
“물론이오. 나도 간만에 폼 좀 잡게 해주시오. 산산, 그대가 모두 다 해결하면 난 하는 일이 없잖겠소? 나도 대사형을 만났을 때 내세울 공적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남궁산산은 잠시 고민했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를. 그러나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기가 힘들었 던 것이다.
“좋아요. 하지만 제대로 못 싸우면 바로 강판이에요.”
“고맙소.”
현운은 검을 늘어뜨린 채 앞으로 나섰다.
남해왕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남해왕을 향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치며 불꽃을 튀긴다. 그러나 현운의 눈동자에 깃든 의지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다. 그래, 남궁산산과는 관계없다.
이건 그가 멋대로 하는 일이고, 반드시 끝까지 해내고야 말 일이었다.
“유유자적(悠悠自適)은 잠시 폐업이오. 그래서 난 반드시 당신을 쓰러뜨려야겠소.”
현운은 당당하게 그렇게 선언했다.
남궁산산을 한쪽 벽에 옮겨놓은 다음 현운은 다시 전혼과 마주 섰다.
“천무구룡의 일인, 무당의 현운이 상대해 주겠소.”
검끝으로 전혼을 겨누며 현운이 말했다.
“호오, 들은 적이 있네. 천무학관의 젊은 기재를 모아놓은 구룡칠봉 중에 유룡이라 불리는 무당의 기재가 있다는 것을. 자네가 바로 유유검 현운인가?”
“그렇소. 이런 무명의 도사를 알아주다니 정말 놀랍구려.”
현운은 그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자 살짝 놀랐다.
“정보라는 것은 상인의 무기지. 흑도뿐만 아니라 백도의 정보 또한 정통하지 않고서야 어찌 장사를 하겠나. 기본이지, 기본.”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과연 대단하오.”
현운이 솔직히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데, 자신은 저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시작부터 상당히 그에게 불리하다 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유룡은 연못 속에서 유유자적하기만 할 뿐, 한 번도 날아오른 적이 없다고 들었네만?”
현운이 그다지 큰 활약 없이 잠잠히 있었던 것을 빗댄 말이었다.
“잠룡물룡(潛龍勿龍), 잠자는 용은 쓸모가 없다, 그 말이오? 하지만 당신은 오늘 운 좋게도 그 유유자적하던 용이 날뛰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글쎄, 그것보다는 과연 그 용의 목숨 값은 얼마나 할까, 상인으로서는 그쪽이 더 궁금하군.”
“용의 목숨 값이라… 그건 직접 확인해 보시오.”
피융!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번쩍이는 섬광 한줄기가 현운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꿰뚫는 듯한 엄청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방금 그의 목숨을 앗아가 려 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조금 고개를 옆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바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방금 그건 대체…….”
그리고 현운은 방금 전 남해왕 전혼이 튕기며 가지고 놀던 동전 한 닢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쏘기[彈]…….”
방금 전 전혼이 펼친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극강의 탄기(彈技)였다.
엄청난 쏘기 기술에 약간 얼이 빠진 현운을 향해 남해왕 전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네 목숨 값, 적어도 동전 한 닢은 넘는 모양이군.”
그리고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목숨 값이라고?”
“난 공짜를 싫어해. 무언가를 얻을 때는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건 사람의 목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때문에 난 한 번 던진 동전은 회수 하지 않지.”
돈을 버는 데 악착같은 것치고는 무척 특이한 습관이었다.
“목숨을 사고 싶다면 그 대가를 치러 그럼 되팔아주지.”
“되판다고 했소?”
“물론. 자네들의 목숨은 이미 내 거니까.”
피융!
순간 그의 오른손 엄지가 튕김과 동시에 섬광이 번쩍였다.
말 그대로 그것은 한순간의 번쩍임이었다.
무언가가 번쩍였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기습.
팅!
무언가가 현운의 검을 맞고 튕겨 나갔다.
“꺄악! 현운!”
남궁산산이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부르르르!
무거운 철퇴에 두드려 맞은 듯 현운의 검이 맹렬히 진동했다. 진동음은 공기를 떨게 만들며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현운은 손아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 이 를 악물어야 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지??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혹은 그동안 지옥의 조련 속에서 단련되며 몸에 새겨진 직감이 반응한 것이리라. 현운의 몸이 거의 무의식중에 검을 옮겼고, 날아온 그것은 그의 검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저 멀리 등 뒤에 펼쳐진 벽이 ‘푹!’ 하고 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방금 전 막아낸 게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몸이 반응할 수 있도록 자세를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한다.
방금 전에는 희미하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간파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호오, 막았나? 나의 ‘매혼전’을? 꽤 비싼 친구군.”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자신이 일격에 상대를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는 듯이.
“방금 그건 뭐였소? 암기의 일종이오?”
상대를 떠보기 위해 현운이 물었다.
“암기라니, 그런 시시한 게 아니지. 말했을 텐데, 자네들의 목숨은 이미 내가 샀다고. 물건을 사는 데 필요한 거래 수단은 단 하나뿐 아니겠나?”
“설마…… 돈이오?”
남해왕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당연히 돈이지. 참고로 방금 전 것은 동전이었어. 하지만 자네의 목숨 값은 동전 한 문보다는 비싼 것 같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일생일대의 큰 거래가 있어서 말이지. 나도 물러설 수가 없다네.”
“거래라니, 무슨 거래 말이오? 이 마천각 전체라도 집어삼킬 생각이오?”
“워워, 진정하라구. 상인은 자신의 그릇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아니, 주머니의 크기라고 해야겠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상인은 자신의 주머니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해. 주머니는 마천각 전체를 살 만큼 묵직하지 않아. 물론 고위험을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고수익을 얻을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한 번쯤 몰빵을 하고 싶을 때가 있긴 있지.”
“그게 바로 이번 일이오? 여인을 납치하는 일? 그것도 무림맹주의 금지옥엽을? 그거 확실히 고위험이 틀림없겠소. 하지만 과연 당신이 이 일에 가담하고도 무사 할 수 있겠소?”
“납치라니? 난 모르는 일이군. 알고 싶지도 않고. 아마 오해인 것 같네.”
무림맹주의 여식이 납치당했다는데도 그는 그리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해라고?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변명 믿을 것 같소? 우리 대사형이 말하길, 장사꾼은 신용을 잃으면 한낱 사기꾼 쥐새끼에 불과하다고 했소.”
“쥐새끼라니, 듣기 안 좋은 말이군. 누가 들으면 내가 만날 거짓말만 하는 줄 알지 않겠나. 하지만 이 몸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네들은 여기서 죽어줘야겠 네. 자네들의 목숨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걱정 말게, 자네들의 목숨 값은 후하게 쳐줄 테니.”
“내 목숨을 살 수는 없을 거요, 난 팔지 않을 테니까.”
“아직 젊어서 그런지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둡군. 이 세상엔 돈이 전부라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어. 비록 그것이 사람의 양심이라 해도, 혹은 생명이라 해도.”
남해왕 전혼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