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
-당삼 & 당문혜
“그리고 [ ]’를 준비해 놔.”
“대체 대사형은 무슨 생각이지?’
남궁상의 귓가엔 자신과 주작단을 제십삼 기숙사에 놔두고 떠나면서 남긴 비류연의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남에게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했지만, 남궁상의 머릿속에는 한 자도 틀림없이 생생히 전달되어 있었다.
[탈출로.]
대사형이 그에게 준비하라고 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탈출로라고만 했지만, 남궁상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 탈출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류연은 ‘배’를 확보해 놓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마천각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그건 그만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런 행동은 자칫 잘못하면 천무학관 사절단 전체가 마천각의 적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만일 대사형 의 가정대로 그 서천멸겁이 마천각의 고위층이라면 천무학관 사절단 전원이 인질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전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천령의 손길이 이렇게 깊게 미치고 있었다니…….?
자신들이 서로 체면 싸움, 세력 싸움, 파벌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저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왔고, 어느덧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 다.
“이런 지경까지 와서야 겨우 실감할 수 있다니…….?
자신들이 천겁령과 싸워오고 있었다는 것을…….
정말 인간이란 때때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물이었다. 천겁령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자. 현 상황을 무사히 타개할 수 있도록.”
후회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탈출로를 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삼절검 청흔과 지룡 백무영의 힘이 필요했다. 비록 그들은 구대문파의 구정회 출신이고 남궁상은 군웅팔가회 출신이어서 늘 세 력 싸움을 하느라 사이가 나빴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그런 싸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남궁상은 현재 천무학관 사절단의 대장이었다. 그는 동료들을 데리고 무사히 탈출할 의무가 있었다. 용천명과 마하령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게 아쉬울 따 름이었다. 하지만 대신 그에게는 수년 동안 공포와 악랄과 지독의 대명사인 대사형 밑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뎌온 이들이 있었다. 그 무한 지옥을 가로지르며 얻 은 것은 구박에 대한 내성과 맷집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을 그들은 손에 넣었다. 그 어떤 지옥도 대사형 밑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하면 되니까. 지옥도 자주 맛보다 보면 익숙 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를 비롯한 주작단원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는 만전!’
이제 신호를 기다리며 한시라도 빨리 소모된 내공을 운기요상으로 회복해야 했다. 진령에게 하나뿐이 천심단(天心)을 주고 자기는 소양단만 먹은 터라 회복이 무척 더뎠지만, 비류연이 사전에서 지워 버린 이후 중도 포기란 말은 주작단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염도 노사님과 빙검 노사님이 함께 계셔주시면 정말 마음이 든든할 텐데….
그들의 부재는 용천명과 마하령의 부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책임 전가할 사람도 없이 전적으로 독박을 써야 한다는 것까지 전부 다.
“이제 놀이는 끝났구나…….’
남궁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몰랐던, 무지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 년을 이어온 평화의 시대도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왜 하필 우리 시대에…….
강호를 휩쓸 거대한 전란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고, 남궁상은 그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다.
움찔!
남궁상은 운기상 도중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고 눈을 번쩍 떴다. 심장에 차가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 느낌에 하마터면 정신이 산란해져 기가 흐트러질
뻔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눈을 뜬 남궁상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적셔져 있었다.
“대체 뭐였지? 방금 전의 그 서늘한 감각은?”
영혼의 일부가 잡아 뜯겨 나가는 듯한 섬뜩한 충격이었다.
‘혹시 산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와 남궁산산은 같은 어미 밑에서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쌍둥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정신 감응이 센 편이었다. 어렸을 때는 자신이 입지 않은 상처도 마치 자신이 입은 것처럼 느껴지던 적도 있었다. 크면서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두근두근!
지금도 미칠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궁상은 무럭무럭 솟아오르려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산산은 괜찮을 거야.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게다가 현운도 함께 있잖아? 현운, 내 여동생을 잘 부탁하네.’
아마 자신의 지금 생각을 남궁산산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누구더러 감히 여동생이냐! 난 누나야, 누나!”
라고 말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아직 두 사람 사이에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상, 왜 그래요? 괜찮아요?”
창문 밖으로 완전히 포위된 정세를 감시하고 있던 진령이, 눈을 뜬 남궁상을 향해 달려왔다.
“이 식은땀 좀 봐! 남궁 상공, 괜찮으세요?”
류은경 역시 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왔다.
“잠깐! 어디서 은근슬쩍 상공이니, 상공은?”
손수건으로 남궁상의 이마를 닦아주려는 류은경의 손을 제지하며 진령이 힐문했다.
“어머, 언니. 앞으로 지아비가 될 사람을 상공(相公)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나요? 주인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갑자기 상공이라니…….”
류은경은 왜 진령의 얼굴이 새빨개져서 저렇게 당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언니도 상공이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어차피 전 첩이고 언니가 본처(本妻)가 되실 거니까, 안 그래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진령이 빽 하고 소리쳤다.
“누, 누, 누가 본처라는 거니!”
“그럼 본처 안 하실 거예요? 그럼 제가 해도 상관은 없는데요?”
“그건 안 돼!”
극구 단호하게 진령이 소리쳤다.
“안 되나요?”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류은경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뻔뻔한 건지 순진무구한 건지 알 수 없는 류은경의 행동에 진령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남궁상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위로, 그는 여기서 잘못 입을 뻥긋했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 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남궁상의 귀에는 마치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좀 전에 흘리던 식은땀과는 다른 의미에서 진땀을 빼고 있던 남궁상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들어오게!”
벌컥,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오며 동시에 소리쳤다.
“궁상, 괜찮나?”
“궁상, 괜찮아요?”
모두 녹의를 입고 있는 남녀 한 쌍이었는데,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서로를 보며 동시에 소리쳤다.
“따라 하지 마!”
““따라 하지 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바로 사천의 명가인 사천당문의 삼남인 당철영과 당문혜 남매였다. 남궁상과 남궁산산처럼 이 두 사 람도 같은 배에서 같은 시에 나온 쌍둥이 남매였다. 특히 당철영은 당문의 셋째라는 것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당삼(唐三)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불렸다.
지난 이삼 년 사이에 이들의 실력 역시 일취월장해서 당문 내에서도 그 위치가 급격하게 올라가 있었다.
당문혜가 먼저 말을 걸세라 당삼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이보게, 궁상. 자네 여동생한테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나?”
남궁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사실 누구보다 그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은 남궁상 본인이었다.
“흥, 누가 여동생이라는 거야, 남동생? 당연히 산산이 궁상보다는 누나지.”
옆에서 당문혜가 주의를 주었다.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산산은 문혜 네가 내 여동생인 것처럼 궁상이의 여동생이라고.”
당삼이 언성을 높이며 반박했다.
“홋홋. 그럴 리가 있나. 당삼 네가 내 남동생인 것처럼 궁상 역시 산산의 남동생이 맞아!”
“해보자는 거야?”
당삼이 허리춤에 꽂혀 있던 암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좋아, 실력으로 손위를 가리겠다면 사양하지 않겠어!”
이에 질세라 당문혜는 허벅지를 걷어 올리며 그곳에 감겨 있던 채찍을 움켜잡았다.
“자자, 두 사람 다 그만두게 포위된 상태라서 신경이 날카로운 건 알겠는데, 싸우지들 말라고. 적들을 밖에 두고 싸웠다가는 적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야. 만일 이 일이 대사형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나?”
움찔! 찔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두 사람의 몸이 ‘대사형’이라는 말에 즉각 반응해서 싸늘히 식었다. 이들에게 ‘대사형’이라는 단어는 마법과도 같은 효력이 있었다. 당삼 과 당문혜가 서로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흥, 오늘에서야말로 당삼 네 코를 꺾고 백 승을 채우려 했는데. 운 좋은 줄 알아.”
“누가 할 소리! 백승이 아니라 백 패를 채우고 싶었다는 걸 잘못 말한 거 아냐?”
지금까지 두 사람의 전적은 구십구 승 구십구 패였다. 시도 때도 없이 싸움을 벌였지만 워낙 두 사람의 실력이 비등비등해 아직 승패가 갈리지 않았던 것이다. “호오, 좋아! 그럼 다음 백 승째 이긴 사람이 손윗사람이 되는 게 어때?”
눈썹 끝을 파르르 떨며 당문혜가 말했다.
“좋지! 좋고말고. 후회하지 말라고.”
“후회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하겠지.”
“이번 일이 끝나면 두고 보자고. 빨리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네.”
“벌써부터 ‘누나’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걸. 호호호호.”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푸른 불꽃이 빠지직하고 튀었다.
‘정말 못 말려.’
남궁상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산산과 자신도 이 당씨 남매랑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다지 자각하지 못하는 남궁상이었다.
“그런데 궁상, 우린 대체 언제까지 이 답답한 기숙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나?”
더 이상 당문혜랑 싸워봤자 이로울 게 없다고 느꼈는지, 당삼이 고개를 흔드는 남궁상을 돌아보며 물었다.
“맞아요. 답답해 죽겠어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 채찍을 들고 뛰쳐나가서 한바탕 날뛰고 싶어요.”
지금까지 실컷 싸우더니만 이런 일에는 금방 동조한다. 그녀 역시 이미 불만이 가득 쌓여 폭발 직전이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 초조 해하는 것도 꼭 닮아 있었고, 그 초조함을 푸는 방식도 똑 닮아 있었다.
“자네랑 진 소저가 회복됐다면 여기에 박혀 있을 게 아니라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당삼 말이 맞아요. 여기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들도 이제 움직여야죠.”
“조금만 더 기다리게. 아직 신호가 오지 않았어.”
“신호? 무슨 신호 말인가?”
비류연이 그들과 헤어져서 나예린을 구출하러 떠날 때 남궁상에게 몰래 지시한 것. 남궁상은 이곳으로 와서 계속 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준비는 갖춰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제십삼 기숙사 전체를 둘러치고 있는 인(人)의 장벽(障壁)이었다.
“그건…….”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익!
그때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푸른 깃털을 지닌 해동청 한 마리가 날개를 살짝 접은 채 활공하듯 창가로 날아들었다. 남궁상은 날아든 매의 다리에 매달린 전서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기다리던 신호는 바로 이 녀석일세.”
날아든 것은 바로 비류연이 기르는 애매, ‘우뢰매’였다.
“뭐라고 적혀 있나, 궁상?”
우뢰매의 전서통에서 쪽지를 꺼내 읽어 내려가는 남궁상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당삼이 물었다.
“나 소저, 아니, 대사저를 구출했다고 하네.”
그 말에 당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좋은 일이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겐가?”
“산산이…… 부상을 입었네.”
“그, 그게 정말인가, 궁상?”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요! 산산이 부상을 입다니…….”
“나도 믿고 싶지 않소. 하지만 사실이오.”
“그녀는, 산산은 괜찮대요?”
이 벼락같은 소식에 경악한 진령이 남궁상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며 물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하오.”
그제야 세 사람은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은 불명이라고 하오. 그리고 현운 역시 ‘만독’에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하는군.”
여동생과 가장 절친한 친구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남궁상은 격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운마저 중독되다니……. 한데 ‘만독’에 중독되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삼의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확실히 그러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살아 있으면 잘된 거지.”
“우리가 아는 만독이 바로 그 만독이라면 아직 해독제가 발명되지 않은 독일세. 독 중에서도 그 치명도가 수위를 달리는 무서운 독이지.”
당문혜도 그 의견에 찬성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당문에서도 아직 해독제를 연단해 내지 못했는데 대체 누가……!”
“이보게, 그전에 현운 그 친구 몸부터 걱정해 주게. 그 친구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만 말고.”
누가 독과 암기에 미쳐 사는 사천당문 사람 아니랄까 봐, 독과 암기 얘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는 당씨 남매를 보며 남궁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당삼, 지금 당장 청흔 형과 백 형을 불러주게.”
더 이상 잡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더라도, 기다리고 있던 신호가 온 이상 남궁상은 움직여야 했다.
“알았어, 궁상. 금방 갔다 올게.”
***
“지금부터 이곳 마천각을 탈출합니다.”
당삼이 청흔과 백무영을 불러오자 남궁상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설명은 해둔 뒤였다. 처음에는 이곳 마천각에 천겁령의 손길이 뻗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던 청흔과 백무영도, 마천각의 무사들이 흉흉하게 병장기를 치켜들고 제십삼 기숙사 전체를 포위하자 어쩔 수 없이 남궁상의 말을 믿을 수밖 에 없었다. 게다가 이 사절단의 대장은 명목상이나마 남궁상이었기에 그들은 남궁상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인가?”
뭔가 탈출에 대한 복안은 세워놨냐는 뜻이었다.
남궁상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사람들을 둘러보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항구로 가서 배를 탈취합니다.”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배의 확보였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동정호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인만큼, 배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이를 위해 비류연은 현운과 남궁산산을 제외한 모든 주작단을 기숙사에 남겼던 것이다.
“이번 구출 작전의 핵심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배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구출 작전의 성패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때 백무영이 손을 들었다. 좌중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탁!
“그러려면 우선 처리해야 할 게 있겠군. 안 그렇소, 남궁 대장?”
지룡 백무영이 섭선을 접으며 남궁상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빛냈다.
“처리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겁니까, 백형?”
“이런, 난 당연히 남궁 대장이 아는 줄 알고 있었소만?”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원래 무당파 출신의 청흔과 형산파 출신의 백무영은 구대문파 연합회, 구정회의 핵심 간부라 남궁상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 었다. 특히 백무영은 용천명이 사절단의 대장이 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남궁상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용천명이 마하령과 싸우느라 내공을 모두 소모한 탓에 어부지리로 대장 위에 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끈해서 앞으로 나서려는 진령을 제지하며 남궁상이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은 서로서로 힘을 합해서 고난을 이겨 나가야 할 때 아니겠습니까, 백 형? 제가 모르는 게 있으면 백 형이 가르쳐 주면 되지요. 그게 협력이라는 거 아니겠습 니까?”
분위기 파악도 하고 상황 봐가면서 틱틱거리라는 뜻이었다. 또한, 딴지 걸 줄만 알지 협력할 줄은 모르느냐는 핀잔도 살짝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어흠, 그야 물론 저 밖에 있는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하는 문제 말이오.”
접은 섭선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백무영이 말했다.
“그건…….?”
말꼬리를 늘이면서 남궁상은 속으로 뜨끔했다.
‘큰일 났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해봤는데…….’
삼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포위망을 강행돌파할 수 있는 능력은 천무학관 사절단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궁 대장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강행돌파를 못할 건 아니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적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싸움이 길어지게 될 것이고, 발이 묶인 새에 적이 원 군을 부르면 기력을 소모한 우리는 꼼짝없이 전멸당할 위험이 있소. 그러니 유능한 남궁 대장이라면 ‘물론’ 강행돌파 말고 다른 수를 준비해 놓았겠지요?”
만일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너는 엄청나게 무능한 놈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때 당삼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물론 준비되어 있죠. 남궁 대장님이 그런 것도 준비 안 해놨을까 봐서요?”
“그게 뭡니까, 당 공자?”
당삼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자색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바로 이겁니다, 안락휴(安樂休).”
그 주머니를 보고 당문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머, 당삼아, 너 머리 좀 썼구나!’
“안락휴? 그게 뭔가?”
청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삼을 대신해 설명해 준 것은 당문혜였다.
““대사형이 없는 안락한 휴식을 줄여서 ‘안락휴죠. 일종의 강력한 수면향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사형 없는……?”
“안락한 휴식?”
청흔과 백무영은 도대체 저 수면향에 왜 그런 희한한 이름을 붙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복도 있는 법 이지, 라고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생각했다.
“뭐, 더 정확히는 실패작이라는 딱지를 뒤에다 붙여야겠지만 말이에요.”
“실패작?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믿어도 되는 겁니까, 당 소저?”
“걱정 말아요, 대사형한테만 실패한 거니까.”
대사형에게 시도 때도 없는 특훈을 받다 보니, 주작단이 제대로 쉴 수 있을 때는 바로 대사형이 잠들어 있을 때뿐이었다. 대사형의 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 의 안락하고 온화한 휴식도 길어지게 마련이다. 그 꿈처럼 달콤한 휴식을 조금이라도 잡아 늘리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늘 티격태격하던 두 당씨 남매가 처음으로 힘을 합쳐 공동 연구해서 만든 특제 수면향이었다.
다만, 모든 주작단 동료들을 상대로 실험해서 효과를 입증한 다음 실전에 들어갔는데도, 정작 대사형한테는 별 효과가 없어서 뒤지게 혼났던 끔찍한 기억이 있었 다.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는 즉효였던 초강력 수면향이었다.
“그런데 이걸 쓰려면 한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문제점? 그게 뭡니까, 당 소저?”
“이 안락휴는 연막탄 형태로 만든 게 아니라서, 이 수면향을 저들이 쏘이게 하려면 다른 하독 방법을 써야 돼요.”
안락휴는 그저 향처럼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워 올리는 단순한 구조였다. 대사형에게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진 이후 더 이상 개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거라면 저 친구한테 맡기면 되오.”
청흔이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백무영은 조금 당황했다.
“저 친구의 선법(扇法)은 최고거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청흔이 싱긋 웃었다.
***
포위를 맡은 것은 마천십삼대 중 정보 수집과 은밀 행동을 담당하는 제십이번대 대원이었다. 대장과 부대장이 무슨 일 때문인지 자리를 비워서였다. 그래서 현재 포위망의 지위는 서열 삼위인 허당이 맡고 있었다.
그의 별호는 ‘허공기’로, 있으나 없으나 잘 구별할 수 없다는 그의 탁월한 비존재감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 흐릿한 존재감 덕에 그는 탁월한 은신술을 남들보 다 수배나 빨리 익힐 수 있었고, 그 능력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가며 수많은 정보들을 캐내올 수 있었다. 그러니 그가 서열 삼위까지 올라간 비결은 바로 이 타고 난 ‘흐릿함’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을 통솔해야 할 때만큼은 그 옅은 존재감이 독이 되게 마련이었다.
“이봐, 부부장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별다른 변화가 없는 포위망에 약간 지루해진 십이번대 대원들이 하나둘씩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안 보이셔.”
“자네도? 나도 못 봤어!”
“과연 부부장님이야. 그 흐릿한 존재감은 따를 자가 없다니까.”
“괜히 공기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조심해. 부부장님이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까부터 쭈욱 없었는데?”
“부부장님이잖아. 없지만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조심해야 해. 부부장님은 존재감이 옅은 만큼 속도 좁단 말이야.” “하긴 그렇긴 하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 옆에 수수처럼 깡마른 남자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이봐, 나 여기 있거든? 너네들 곁에? 그리고 아무런 은신술도 안 썼거든?”
그런데도 이 부하라는 녀석들은 자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 서 익숙해지는 일도 아니었다.
“좋아, 이번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서 내 존재감을 과시하고 말테다!’
그는 이번 기회에 완벽한 포위망 지휘로 존재감을 강화하겠다고, 자신도 뭔가 활약을 하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바로 그때였다.
‘응, 저게 뭐지?”
제십삼 기숙사의 정문으로부터 웬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다지 짙은 연기는 아니었지만,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 저기 좀 봐.”
모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허당이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하 중 그쪽을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얘들아, 저쪽 좀 쳐다보라니까?”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주의를 상기시켰다. 그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일까.
“얘들아, 어디선가 부부장님 목소리가 들리는데?”
“그래? 무슨 착각 아냐?”
“아냐, 방금 누군가가 날 건드린 것 같아.”
얼마나 존재감이 약한지 지시를 내리는데도 잘 들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기를 보라니까? 저 연기, 어딘가 수상해.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게 좋겠어!”
허공기 허당이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야, 방금 부부장님 목소리가 들렸어. 뭔가가 수상하다는데?”
“맞아, 나도 들었어. 그런데 소리가 희미한 걸 보니 아주 먼 데 계시나 봐.”
“좋아, 그럼 큰 소리로 물어보고.”
십이번대 대원 중 가장 목소리가 큰 대원 한 명이 나서서 양손을 입에 모으고 외쳤다.
“부부장님! 뭐가 수상한가요오오오오!”
“연기가 수상해!”
허당이 있는 힘껏 외쳤다. 그 목소리가 간신히 닿았는지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가 수상하대.”
그러자 옆에 있던 대원 하나가 재촉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물어봐.”
목소리 큰 대원이 다시 외쳤다.
“그럼ᅳ 어ᅳ떻게 하나요오?”
“아, 그렇지. 일단 물러나
게―!”
허당이 다시 있는 힘껏 외쳤다.
“야, 일단 물러나래.”
“드디어 내 목소리가 닿았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허당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드디어 보상을 받은 것 같은 찡함을 느꼈다.
“그래, 그럼 물러나야 되겠네.”
“그러자고…… 응? 왜 갑자기… 졸립지?”
“그, 글쎄에…… 나도 졸리
픽픽!
제십삼 기숙사를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잃고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안락휴의 연기가 그들을 완전히 감쌌던 것이다. 당씨 남매가 장담한 대 로 그 효과는 나무랄 데 없었다. 모든 부하들이 쓰러져 다들 정신없이 코를 골고 있을 때도 십이번대 부부장 허당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존재감이 약하면 약효도 늦게 듣는 것일까? 그러나 그 역시 이미 대원들에게 소리 지르느라 수면향을 듬뿍 들이마신 후였다.
“그러니까…… 내가……피하랬는데…….”
바닥에 풀썩 쓰러지며 허당은 그렇게 되뇌었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대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음, 자네의 선법은 언제 봐도 뛰어나군.”
***
청흔이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공력을 끌어올려 가며 열심히 부채질을 했던 백무영이 섭선을 접으며 말했다.
“헉헉, 놀리는 건가? 내 부채는 이런 걸 부치라고 있는 게 아니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군.”
그래도 열심히 부쳤는지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놀리긴 누가 놀린단 말인가? 이런 연기를 내공이 담긴 부채질로 기숙사 주위 전체에 빙 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지. 진심으로 감탄한 거라네.” 물론 향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던 모습은 평소 점잔을 빼는 백무영답지 않게 상당히 웃겼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고맙군. 자, 이제 만족하나, 남궁 대장?”
이층에서 남아 있던 사절단을 끌고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남궁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백형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군요. 그리고 자네들도 고맙네.”
“뭘, 이런 때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지.”
“대사형한테만 들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돌아가면 좀 더 쉽게 하독할 수 있도록 개량해 봐야겠어요. 이름도 ‘문혜탄’으로 바꾸고요.”
주작단 이외의 사람에게는 처음 써보는데도 상상 이상으로 효과가 빨랐다. 아무래도 주작단보다 내공이 약하면 약효가 더 빨리 듣는 모양이었다.
“문혜탄이 뭐야, 문혜탄이 당연히 철영탄이라 붙여야지.”
“철영탄? 당삼탄이겠지. 아유, 촌스럽다, 동생아.”
당삼이 당장 발끈했다.
“뭐라고? 촌스럽다고? 촌스러운 건 ‘혜매(妹)’ 쪽이겠지.”
“누가 혜 매라는 거야! 누구 맘대로!”
좀 전에 진정시켜 놨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싸움의 불이 붙었다. 이대로 두면 하루 종일 싸울 게 분명했기에 남궁상이 중간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자자, 싸움은 돌아간 다음에 충분히 하도록 하게. 지금은 이곳을 탈출하는 데 모두들 집중하자고. 대사형을 생각해야지. 대사형이 기다리고 있다고.”
대사형이라는 말에 다시 두 사람은 찔끔했고, 그제야 싸움을 멈추었다.
“자, 모두들 항구를 향해 출발합시다. 단, 아직 우리들이 이동하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니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이동하도록 합시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척을 죽인 채 움직일 수 있는가가 성공의 열쇠였다.
‘항구에 경비가 적으면 좋으련만…….?
섬 전체가 폐쇄된 지금 그런 기대는 아마도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하지만 항구까지만 들키지 않고 간다면…… 탈출은 자신있었다.
“이 정도 면면이면 검마劍魔) 급의 최절정고수가 와도 무섭지 않겠어!’
포위망을 뚫는 게 너무나 수월했기에 마음이 느슨해진 탓인지, 이때만 해도 남궁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신(死神)의 낫이 그들의 목을 겨누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