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15화 – 광란(亂)하는 서풍(西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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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15화 – 광란(亂)하는 서풍(西風)

광란(亂)하는 서풍(西風)

-악몽의 원흉

“바로 당신이 예린에게 악몽을 선사했었다죠?”

비류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이 만남을 기뻐하고 있는 듯이.

“만나고 싶었어요.”

그건 진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만남을 기뻐하고 있었다.

“어째서냐?”

처음 보는 어린놈이 대뜸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들이 쓰러지는데도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서천은 아직도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래야 당신을 두 번 다시 안 만나게 될 수 있잖아요. 오늘 이후 다시는 당신 같은 개자식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아니, 존재 그 자체가 독이니 내가 예린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서 지워 드리죠, 그 존재 자체를.”

서천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기실 그는 아까부터 나예린의 옆에 나타난 애송이 녀석을 관찰하듯 구경하던 중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 심에 몸을 맡긴 채. 원래 희귀하고 소중한 재료는 주변 재료의 맛까지 고려해서 요리해야 제 맛인 법. 어차피 요리야 순식간이니, 그러려면 그전에 나예린의 옆에 붙 어 있던 저 주변 재료가 어떤 놈인지 들척여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네놈이 대체 예린이의 뭐기에? 그 아이가 마음에 둔 놈이라도 된단 말이냐?”

비류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더러운 입으로 예린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 같거든요.”

“흐흐흐, 그 작은 새는 나의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부터 심장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그 살점 하나하나가 모두 나의 소유인데, 내 소유물을 내 마음대로 부르는 게 뭐가 잘못됐단 말이냐?”

비류연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토 나오네요.”

서천의 눈에서 순간 기광이 번뜩였으나, 비류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 같은 개자식의 입에선 앞으로 예린의 ‘예’ 자라도 오르내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시죠. 그런 역겨움은 내가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어요.”

그 말에 서천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위험한 놈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광기 그 자체였다. 이자의 광기는 나예린과 같은 순백의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오염되어 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자의 영혼이 왜 비틀려 있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제거해야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는 예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지금 당장.

“네까짓 게 뭐기에 허락하고 말고 한단 말이냐? 난 누구의 허락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본좌는 오직 나 자신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그건 어제까지의 얘기였고, 오늘부터 다르죠.”

서천의 입가엔 여전히 광기 어린 웃음이 맺혀 있었다.

“좋아, 결정했다. 네놈의 심장을 뽑고, 두 눈알을 파내고, 혀를 뽑고, 귀를 잘라 그 아이 앞에 던져 주도록 하마. 그 아이도 아마 무척이나 기뻐하겠지. 벌써부터 기 쁨에 몸을 떠는 작은 새의 지저귐이 귓가를 울리는구나.”

네놈 따위의 심장은 언제든지 파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역시 당신은 숨 쉬는 것조차 이 세상에 대한 민폐예요. 자연에 대한 모독이라고요. 그러니 자연보호 차원에서 제거해 드리죠.”

비류연도 지지 않고 마주 웃는다. 기세에서 밀린 적은 한 번도 없는 비류연이었다.

“네까짓 게 과연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질 놈이?”

촤아아아아악!

서풍광란이 비류연을 향해 검은 마수를 뻗었다.

민활한 뱀처럼 빠른 공격, 검은 일격이 비류연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하고 지나갔다.

스스르륵!

서천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히기도 전에 비류연의 신형이 사라졌다.

어느새 비류연은 반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여기까지 닿을 수 있냐고 도발이라도 하듯이.

“잔상(殘像)?”

서천이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혔다. 위력이 반감된 서풍광란을 회수하기라도 하듯.

슈욱.

그 순간, 철갑마수 중 검지가 쭈욱 늘어나며 비류연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불시(不)의 일격(一擊).

미간에 구멍을 뚫리려는 순간, 비류연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퍽.

등 뒤에 있던 아름드리나무에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렸다. 마치 두부를 꿰뚫는 것처럼 손쉽게.

다음 순간, 서풍의 나머지 네 손가락이 일제히 강철 채찍처럼 늘어나며 비류연의 전신을 휘감았다.

서풍광섬지(西風光閃指)

쇄인(碎刃)

취릭.

다섯 개의 늘어난 강철 채찍에 휘감긴 나무가 수십 토막이 되어 땅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토막 중에 비류연의 신체는 섞여 있지 않았다.

어느새 비류연은 아름드리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서천의 지검 공격은 나무의 몸통을 토막 냈지만, 그 꼭대기까지는 토막 내지 못했다.

서천은 무표정해진 얼굴로 서풍광란을 회수했다.

비류연이 무너지는 나무 위에서 사뿐히 뛰어내린 다음 다시 서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생각보다 쉽지 않죠?”

“겨우 그 정도를 피해냈다고 으스대기에는 너무 이르지. 이쪽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잠깐 가지고 놀 여흥은 되는구나. 아직 저 아이도 보고 있으니.” 배는 선착장을 떠났지만, 예린은 난간에 서서 계속해서 비류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흐흐, 그 아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부숴 버리고 싶어 참을 수가 없거든. 그것이 저 순백의 영혼을 얼마나 더럽힐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나의 온몸 은 기쁨에 떨지.”

그 순간 서천의 눈이 열락에 들떠 몽롱하게 변하는 것을 비류연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당신 변태군요. 게다가 정신이상.”

“변태라니? 난 지극히 평범해. 첫눈이 내린 마당을 보면 누구나 자기가 가장 먼저 밟고 싶어하지 않나? 그렇다면, 눈처럼 깨끗한 아이를 짓밟는 게 뭐가 나빠? 깨 끗한 것을 더럽히고 싶은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악(惡)’이다. 그야말로 순수 그 자체지.”

비틀렸다. 이 인간은 끝없이 비틀려 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비류연은 역겨워졌다.

“닥치시죠, 변태 양반. 순수한 영혼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당신 같은 변태가 함부로 더럽혀도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당신 같은 오염물은 빨리 정화시키는 게 자연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참으로 광오한 놈이로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허언장담이나 하다니. 네 그 깃털처럼 가벼운 혀는 뽑은 후에 날아가지 않도록 잘 챙겨야겠구나. 나의 작은 새, 그 귀여운 아이에게 가져다줄 선물이니 말이다.”

서천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류연을 조롱했다.

“네놈을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그 아이는 바스라지고 가라앉겠지. 그리곤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본좌는 그 아이의 털끝 한 오라기도, 영혼의 티 끌 한 점이라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내 아이를 낳을 아이니까! 절대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의 말은 거의 저주’에 가까웠다.

그 순간 비류연은 피부가 따끔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무언가가 그의 피부를 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살기를 품은 바람이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공기가 요동치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조(前兆).

곧 서쪽으로부터 광풍이 몰아칠 거라는 전조였다.

“나의 폭풍에 휩쓸려 세상 밖으로 보내주마!”

다시 한 번 서풍광란이 폭출되었다.

서풍광란 오의(奧義)

타신편打

서천의 마수가 주욱 하고 늘어나더니 거대한 채찍처럼 비류연을 향해 휩쓸어 왔다.

“똑같은 수에 두 번 걸리진 않아요.”

비류연이 가볍게 몸을 피하며 비웃었다.

“똑같은 수? 어디가?”

차캉!

뻗어 나온 마수에서 수백 개의 강철 가시가 돋았다. 강철의 마수를 이루고 있던 검은 비늘이 일제히 일어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비류연은 그 가시 역시 피해냈 다. 그러자……!

흑린회회廻廻)

콰라라라락.

돋아났던 가시들이 일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검은 뱀은 곧 소용돌이가 되었다. 서천이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검은 소용돌이가 채찍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 다.

서풍란(風亂)극오의極義)

서풍의광시곡(狂詩曲)

광풍요란(風亂)

“검은 용권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주위의 공기가 서천의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회오리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비류연이 급히 오른손을 뻗었다. 발출되는 다섯 개의 비뢰도와 뇌령사.

“이 기술은 위험해! 그렇다면!’

자신을 벽에 처박았던 사부의 기술, 사부가 자신에게 썼던 수법.

사부가 쓴 것은 풍신(風神)의 오의 중 하나인 쌍용권(雙龍卷)’이었다.

두 개의 용권을 동시에 부리는 풍신의 응용 오의.

아직 거기까지는 쓸 수 없지만, 다른 거라면! 하나 정도라면!

좌수룡을 제압한 지금이라면 쓸 수 있었다.

비뢰도(飛刀) 오의(奧義)

검기사살기(死殺技)

회선용권(回龍)의 장(章)

최종장(最章)

질풍(風)용권인(龍卷刃)

오른손에서 발출된 뇌령사가 그의 손 위를 회전하며 은빛 용권풍을 형성했다.

원래라면 두 손과 열 개의 비뢰도 모두를 사용해야 하는 기술.

하지만 지금이라면 한 손으로도 가능했다.

비류연의 손에서 용권이 발생하는 것을 본 서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느꼈을까?

“죽어라!”

검은 용권풍이 악마의 채찍처럼 비류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꺼져 주시죠!”

은빛으로 빛나는 하얀 용권풍이 지지 않겠다는 듯 마주 쏘아져 나갔다.

검은 용권풍과 백색의 용권풍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리고 검은 용과 백룡이 싸우는 것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며 싸웠다.

검은 용이 이빨을 드러내며 백룡을 물어뜯는다. 용체를 뒤집으며 백룡이 저항한다.

다시 흑룡의 반격, 다시 백룡의 반격. 물고 물어뜯기는 싸움이었다.

어느 쪽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직 상대를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쾅!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얼마 후, 흙먼지의 벽으로부터 두 사람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오의와 오의가 부딪친 반발력에 튕겨 나온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쓰러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살

두 사람의 용권이 모두 서로 상쇄된 것이다.

힘은 호각(互角)! 흑과 백의 두 용이 부딪친 곳에 땅에 꾸불텅꾸불텅 어지러이 깊게 패어 좀 전의 격전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럴 수가…….”

서풍광란의 오의인 광풍요란으로 저런 애송이 하나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서천은 경악했다.

정신적인 충격은 비류연도 만만치 않았다.

‘또 깨졌다…….?

비뢰문의 오의가 또 한 번 깨졌다.

대체 방금 전 그 초식은 뭐지? 마치 비뢰문의 오의를 파해하기 위해 만든 듯한 그 무공은?

그것이 바로 서천의 무공이란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나 오의가 깨지다니.

게다가 비류연 자신처럼 저자 역시 아직 최종 오의는 남겨두고 있었다. 좀 전에 보여준 한 수보다 더 대단한 한 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저쪽이 만일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그에 상응하는 준비가 필요했다.

‘역시 ‘그걸’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때, 희미한 소음과 함께 땅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적의 새로운 증원이 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까 쓰러뜨린 놈들보다 세 배는 많아 보였다.

“칫, 오늘 이후 당신의 얼굴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군요.”

마천십삼대의 대원들이 속속 항구를 향해 집결하면, 아무리 비류연이라 해도 난감해지고 만다.

“하지만! 당신이 예린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으니, 그 대가는 받아가야겠어요. 예린에게 악몽을 새겨 버린 죗값은 백만 번 죽어도 씻을 수 없겠지만요.”

“흥, 네게 그런 재주가 있기나 하느냐? 이 세상은 힘이 전부다. 힘을 가진 자의 생각이 바로 이 세상의 법칙인 법! 힘이 없으면 입 한 번 뻥긋하는 것도 용서되지 않 는다는 걸 알아야지.”

“그 말인즉, 힘만 있다면 그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짓밟아도 된다는 건가요? 자신이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보네요?”

“크하하하하, 누가 감히 본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본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고? 피도 눈물도 말라 버린, 증오로 가득 찬 나의 마음에?”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듯 서천이 미친 듯이 광소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이 상처를 받을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런 일이 자신 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은 남의 마음을 짓밟을 수 있지만, 남이 자신의 마음을 짓밟을 수 있다니. 그에게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 날 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할 수 있다면 해봐라. 절망 속에서 울부짖게 해줄 테니. 간과 내장이 뽑히고 나서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그러나 그런 협박으로 눈썹 하나 까딱이나 할 만큼 비류연의 심장은 야들야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양할 것 없겠군요. 그나저나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혹시 몰래 감추고 있던 사실이 들통날까 봐 찔리기라고 하세요? 자신이 ‘열등(等)’하 다는 사실이?”

“뭣이라! 방금… 무어라 지껄였느냐?”

서천의 입가에서 여유와 함께 비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가 살기와 한데 어우러져 일렁거렸다.

그것은 분노,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게 일렁거리는 차가운 분노였다.

서천이 밟고 있던 발 주위의 풀이 검게 말라가기 시작하더니, 반 장 정도 떨어져 있던 나무에서 잎이 시들어가고 나무가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져 갔다.

그가 품은 살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지기가 주위의 초목(草木)들에 죽음을 불러오고 있었다. 의형상인의 경지가 극에 달해 거의 심(心)의 경지 에 달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용.

엄청난 살의의 덩어리가 비류연을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말라비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에 싱긍벙글 미소가 떠오르는 게 혈색이 더 도는 모양이었다.

“귀가 좀 나쁘신가 봐요? 아니면 이해력이 떨어지는 걸까요? 선심 써서 딱 한 번만 더 말하죠.”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고 잘 귀담아들으라는 듯, 비류연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여—어―얼(劣), 드—으—응(等)!”

그리곤 ‘하다고요’, 라고 짧게 덧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나무들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비천한 것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나는 ‘서천멸겁’, 과거 전 무림의 공포에 몰아넣었던 ‘사천’의 일좌다! 그런 본좌를 보고 감히 열등하다고 지껄이는 게냐?! 감히! 네놈 따위가!”

확실히 서천의 말대로였다. 그의 본래 신분을 보나 서천멸겁이라는 현재의 위치로 보나 마천각에서의 지위로 보나 그가 우등하면 우등하지 열등하다고 여겨질 만 한 구석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자신의 생각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뻗대는 놈일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 열등감을 감추고 있을 뿐이죠. 어차피 당신은 평생 패배자로 살아오지 않았나요? 자신의 형을 이긴 적도 한 번도 없으 면서 그렇게 잘난 척이라니, 사실은 무공으론 형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하려고 예린을 괴롭히는 것 아닌가요? 정말이지 애처로 울 정도네요.”

“네 이노오오오오옴! 말 다 했느냐아아아아!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그 말을 당장 취소해라!”

서천의 얼굴이 시뻘게진 채 노호를 터뜨렸다. 당장 비류연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힘이 아닌 말로 비류연의 설복을 받아내려는 의도가 있나 의심될 정도의 태도. 만약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다면, 품기 전에 포기하라고 말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렇게 화내는 게 바로 자신이 열등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열등함은 비단 당신의 형에 대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자―알 알려주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멍청하긴. 당신이 나보다 훨씬 열등하단 소리예요.”

그것도 몰랐어요, 역시 열등하네요, 하는 태도로 비류연이 말했다.

“개 같은 소리! 그런 잡스러운 혓바닥으로 날 동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어리석은 놈!”

하지만 그는 이미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당장 손을 써야 할 시기를 놓치고 비류연의 말에 자꾸만 끌려가고 있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하하하, 지금 엄청난 착각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죠?”

“뭐라고?”

“당신 같은 쌍놈의 개자식한테 말로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대화만으로 모두가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아요. 때로는 매도 필요한 법이 죠. 당신의 잠꼬대, 일격에 깨뜨려 드리죠.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요? 힘으로 당신의 마음을 짓밟아주겠다고! 당신이 남에게 그렇게 했듯이!”

“잠꼬대는 네놈이 하는 것 같구나!”

그에게 비류연의 광언은 그저 백주대낮의 잠꼬대에 불과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이 일격,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죠.”

스윽, 비류연의 손이 서천의 미간을 가리켰다.

토옹!

명경지수의 마음에 한 방울의 의지가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다.

의지가 칼날이 되어 휘둘러진다.

보이는 것을 벨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베는 마음의 검이었다.

비뢰도(飛刀

검기오의(義)

단심무형(無形)의 장(章)

심뢰(心雷) 극(極)

천형인(印)

비류연이 서천에게 남기는 일격, 마음에 심어주는 악몽. 그가 비류연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천형. 그것은 하늘의 벌.

저 높은 천공에서 떨어지는 신의 벼락이 서천의 망막에 화인처럼 아로새겨지며, 동시에 그의 정신을 비틀고 찢으며, 그의 어둡고 타락한 검은 마음에 눈부시게 빛 나는 상흔(傷痕)을 남겼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서천의 입에서 지옥의 틈바구니에서나 흘러나올 법한 무시무시하고도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자랑하던 서풍광란의 방어가 완벽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방어를 찢으며 뇌광이 그의 얼굴과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 상처는 밝은 정신에 어두운 상처를 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비류연의 일격은 어두운 마음에 빛나는 상흔을 남기는 일격이었다. 빛 속의 어둠보다 어 둠 속의 빛이 더욱 선명한 법이다.

비뢰도 오의 심뢰(心雷).

이것은 과거 비류연이 무당산에서 금제에 걸려 있던 갈효봉의 정신을 깨어나게 했던 바로 그 수법의 변형이었다. 락비오의 단단한 갑옷을 뚫고 그의 머릿속을 새 하얗게 만든 수법이기도 했다.

별다른 공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단순한 손짓에 왜 이리도 서천은 괴로워하는가? 그것은 그의 육체보다 그의 정신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 하게 말하면, 신체가 아니라 그 신체와 연동된 기로 이루어진 본체, 즉 기체(體)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열등……

아니야! 난 열등하지 않아! 난 열등하지 않아! 난 열등하지 않아!

사내는 외친다.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뇌리 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 저 두 자(字)를 떨쳐 버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강하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열등’이라는 두 글자는 더욱더 강하게 그의 뇌리와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넌 열등하다고! 인정 하라고!

아니야, 난 열등하지 않아! 열등하지 않아!

난 서천멸겁! 일찍이 전 무림을 벌벌 떨게 했던 공포의 대명사.

자신은 더 이상 옛날의 그 무력한 나일천이 아니었다.

항상 그 대단하신 형의 그늘에 가려져 기를 펴지 못하던 그 나일천이 아니었다.

형에게 팔이 잘려 나가 ‘병신’이 되었던 그 나일천이 아니다.

그에게는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손에 넣은 멋진 힘이 있었다. 그 힘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죽음과 공포를 선사했던가. 그러니 나는 열등하지 않 아. 열등하지 않아.

ᅳ어라, 사람 좀 많이 죽이면 열등한 게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멍청하게? 열등하면 열등할수록 그걸 숨기기 위해 남을 공격하죠. 열등한 자들은. 남 을 상처 입히면 자신이 대단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열등한 생각’이라니까요.

라는 말이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난 열등하지 않아! 난 열등하지 않아!

난 최고야! 난 최고야! 난 최고라고!

필사적으로 외쳐 보았지만, 그의 외침에 동의해 주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심뢰는 단순한 외가적 공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적이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심뢰는 육체가 아닌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다. 정기신(精神) 중 육체인 정(精)이 아니라, 기(氣)인 마음을 공격한다. 이 일격은 혼(魂), 즉 신(神)을 뒤흔든다.

일종의 정신 공격이지만 그 타격은 육체로 드러난다. 마음을 당했는데도 육체에 상처가 나타나는 것이다.

서천의 이마 한가운데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천형인은 심뢰의 최고 경지로, 마음을 베어 육체를 베는 경지였지만, 그 화후가 아직 완벽하지 못해 목숨을 취하지는 못했다. 절정의 고수일수록 단련된 정기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명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은 매우 지난했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그때, 아까부터 점점 커져가는 땅의 진동으로 다가옴을 느껴왔던 적의 증원이 함성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저 뒤에서 일번대 대원들 수십 명이 병장기를 들 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에서 다발적으로 함성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몰려오는 건 비단 일번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예린과 천무학관 사절단이 탄 배를 먼저 출항시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선착장을 떠나기도 전에 백 명이 넘는 추적대가 갑판에 득실댔을 게 분명했다.

“네…놈이…… 감히……!”

역시 천하의 독한 놈이라서 그런지 서천의 회복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운이 좋은 줄 아시죠.”

약속대로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완전히 끝장을 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에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날 믿어요. 약속하죠!”

그것은 경고. 서천의 가슴과 귀에 새기기 위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것은 약속. 반드시 돌아와 다음에는 끝장을 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또한, 그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이대로 물러나지만, 도망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면 억울하지 않는가.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남겨두려는 것이다. 그날 그때까 지 서천이 두 발 뻗고 잘 수 없도록. 밤이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도록.

“다음에 만날 때까지 그 상처를 잊지 말아요. 하긴 절대로 잊진 못하겠지만. 그럼 당분간은 우리 악몽 속에서 만나요!”

그것은 그에게 밤마다 악몽을 선사해 주겠다는 협박이었다.

“크윽, 이미 배는 떠났다. 저 배가 네놈을 데리러 올 줄 아느냐? 어리석은 놈! 우선은 네놈을 잡고 저 배를 동정호 바닥에 가라앉혀주마!”

아직도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서천이 으르렁거렸다. 이곳은 섬,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넓다는 동정호였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배 없 이는 절대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배가 이미 항구를 떠난 이상, 저 씹어 먹을 꼬마에게 탈출구는 없었다.

““바보 아니에요? 열등하게시리. 저쪽에서 못 오면 이쪽에서 가면 되죠.”

펄럭!

비류연이 등짐에 싸여 있던 기다란 검은 막대기를 꺼내 들더니 활짝 폈다.

그것은 바로 현천은린(玄天銀鱗)이었다

“……”܂

서천은 물론 그의 주위에 몰려든 마천각의 부대원들 사이에서도 의문이 떠올랐다.

“자, 그럼 안녕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비류연은 현천은린을 호수 위로 던졌다. 그러자 빙글빙글 회전한 현천은린이 호수 위에 가서 거꾸로 툭 떨어졌다.

파바밧, 비류연은 허공을 몇 번 박차더니 거꾸로 떨어진 현천은 위에 사뿐히 올라탔다. 묵린혈망의 가죽으로 되어 있기에 방수성은 완벽했다. 봉황무의 비기 중 하나인 ‘봉익일우(鳳翼-羽)’의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 비류연은 왼손으로 우산대를 잡은 다음 오른손으로 장풍을 쏘아댔다.

강력한 장풍이 호수 면을 때리자 우산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비류연을 쫓던 연합 부대는 항구 끝에 선 채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뒤늦게 암기나 칼, 극히 일부는 활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현천은린을 배 삼아, 장력을 노로 삼아 일행이 탄 배로 접근한 비류연은, 마지막으로 수면에 수직으로 장력을 쏘아낸 다음 그 반동으로 도약해 배 위로 사뿐히 착 지했다. 그리고는 현천은린을 들어 올렸다.

주르르륵.

그러자 수면에서 튀었던 물이 비가 되어 검은 우산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미리 우산을 쓰고 있었기에 비류연의 옷깃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다녀왔어요, 예린.”

배의 난간에는 나예린이 서 있었다. 배가 떠난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비류연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와요, 류연.”

나예린이 그를 맞이했다.

“미안해요, 저 빌어먹을 자식을 끝장내지 못해서.”

그 말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천은 그녀 자신의 악몽. 오늘은 진기를 모두 소모한 참이었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오늘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야말 로 검을 들고 그자와 마주서리라.

“아니요, 될 수 있으면 마무리도 제가 해야죠. 그런데…….”

“왜요?”

“그 우산…… 어디서 난 거죠?”

나예린의 시선이 비류연이 들고 있는 검은 우산 ‘현천은린’에 못 박힌다. 이 정도로 독특하고 특색있는 우산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 연비가 한시도 몸에 서 떼지 않고 지니고 있던 바로 그 우산이었다. 그 우산을 왜 류연이 가지고 있는 거지?

“아, 이거요? 그러니까 이건…….”

아차, 뭔가 그럴듯한 말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갑자기 허점을 찔려서 대답할 말을 잃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가 바로 연비예요, 놀랐죠, 아하하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용안이 지켜보는데 거짓말이라니……. 아무리 그의 마음 이 읽히지 않는다 해도 그런 모험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머뭇거리던 찰나.

“대사형….”

어디선가 끊어질 듯 말 듯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계신가요……?”

뒤이어 당삼의 비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 매! 정신이 들어? 혜 매!”

“이 소리는!”

비류연과 나예린이 서둘러 그 목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당삼이 피에 젖은 당문혜를 안은 채 망연자실한 상태로 오열하고 있었다.

희미한 목소리로 비류연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당문혜였다.

“혜매(妹)! 정신이 들어, 혜 매?!”

당삼이 의식을 되찾은 당문혜를 안으며 소리쳤다.

물컹! 물컹!

악마의 손톱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에서 붉은 피가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심장을 빗겨났다곤 해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상태다. 다같이 지혈을 해보 긴 했지만, 그녀가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혈량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아니, 보통은 가슴에 구멍이 뚫렸을 때 충격으로 그 즉시 심장이 멎었으리라. 지금 의식을 되찾은 것은, 어쩌면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잠깐 밝아지는 회광반조의 현상 같은 건지도 몰랐다.

“바보…… 혜 저(姐:누나)라니까…….?”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당삼의 뺨을 향하다가 힘이 모자란지 허공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점점 더 핏기가 빠져나가는 그 손을 붙잡고 당삼이 오열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말하면 피가 쏟아지잖아! 살아나면 누나라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불러줄 테니까, 살아나라고. 이 바보야!”

당삼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같은 삶을 공유했던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반 으로 쪼개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바보는 너지……. 위험했었잖아……..”

당문혜는 애써 미소 지었다.

“대사형은……. ““나 여기 있다.”

당문혜의 간헐적인 부름에 감정이라곤 단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굳은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당삼을.. 부탁.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줄 것이라 믿기에 언제나 계산 하나만은 확실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멀쩡했다 면 그녀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옥훈련을 시켜주었을 테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대사형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녀 가 당한 걸 갚아 주리라는 것을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런 인간을 한때나마 멋지다고 생각한 자신은 좀 취향이 이상한 걸까?

“열심히 굴려줄 테니 걱정 마라. 저 하늘을 꽃으로 가득 덮을 수 있을 정도 굴려줄 테니.”

“믿을게요…….”

“약속하마.”

안 하면 모를까, 한 번한 약속한 것은 절대로 지키는 인간이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 마라! 함부로 죽기라도 하면 혼난다!”

당문혜의 입가에 힘들게 미소가 맺힌다.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가슴께에서 왈칵 피가 솟아올랐다.

“이런…… 혼……나겠네…….”

중간중간이 끊기며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져 갔다.

“싫으면 혼날 일은 하지 말라고.”

그러니 죽지 마, 비류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문혜는 다시 웃었다. 금세라도 꺼질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약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당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 보고 싶은.”

“보고 싶은 거? 뭔데? 말해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보여줄게…… 누나!”

당삼이 마침내 당문혜를 ‘누나’라 불렀다. 살아만 난다면 천번만번이고 불러줄 수도 있었다. 자신을 누나라고 부른 당삼을 향해 당문혜가 미소 짓는다. 자상하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

그리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바람소리가 뒤섞인 한마디 한마디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꽃비가……. 너의 손에서…… 만천화우(滿天花雨)의…… 꽃비를. 사천의 색(色)으로… 물든 하늘을…..”

만천화우의 극의만 깨우쳤더라도 오늘 이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겨우 이 정도가 사천당가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한이었다.

“볼 수 있어. 볼 수 있고말고. 내가 꼭 완성시켜서 보여줄게! 반드시! 맹세할게!”

당문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삼의 맹세에 당문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약속……이……야…….”

당삼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당문혜의 손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감기며 입가에 맺힌 엷은 미소가 점점 더 흩어져 갔다.

그리고 이윽고 그 미소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에 흩날려 버린 마지막 꽃잎처럼.

이날, 주작단 열여섯 명 중 첫 번째 결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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