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16화 – 무명,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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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16화 – 무명, 깨어나다

무명, 깨어나다

-비류연의 분노

두렵다.

저것이 두렵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것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저ᅳ

두 개의 눈동자가!

도망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저 황금빛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러나 저 시선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도망치고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다.

제발… 제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오열한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다.

몸은 재가 되고 정신은 무(無)로 돌아간다.

사라진다. 나[我]라는 것이 사라져 간다.

거대하고 끝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가리를 벌린다.

끝없는 망각(妄覺)이 그 공포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집어삼킨다.

새까매진다. 모든 것이 새까매진다.

그 암흑의 공간에 오직 두 개의 불빛만이 남았다.

두 개의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본다.

언제나! 영원히!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무명이 눈을 번쩍 떴다.

“대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응? 소옥이? 왜 내가 여기 누워 있지?”

무명은 자신이 왜 사번대 의무반 침상에 누워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까먹으셨어요? 그야 정신을 잃어서 그렇죠.”

“정신을 잃어? 내가 왜? 다친 곳도 없는데?”

그가 기억하기로는―물론 그의 기억이 의지가 안 될 만큼 형편없긴 하지만ᅳ상대의 공격에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기절했지? 그러고 보니 뭔가 굉장한 두 통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혼자서요.”

이해가 안 가기는 장소옥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대장이 당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무명은 당최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서? 아니, 내가 왜?”

“그, 그야 저도 모르죠. 오히려 묻고 싶은 건 제 쪽이라고요.”

갑자기 모시던 대장이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던가. 처음에는 독이 묻은 암기에 암습이라도 당한 게 아닌가 의심까지 했던 장소옥이다. 

“그것참…..”

아무래도 얘기를 종합해 보니 자신은 그 지독한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던 듯했다.

기절하기 전에 봤던 그 광경들은 대체 뭐였을까?

그리고 기절한 후에 봤던 그 꿈들은? 그 눈동자는?

분명히 자신의 기억 안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별로 의지가 되지 않는 기억이긴 하지만, 그 느낌은 무척이나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디 갔어?”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씀이신가요?”

“왜 그 앞머리가 긴 청년 말이야.”

자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잡고는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무명이 물었다.

“아,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이라면 이미 갔죠.”

“어디로?”

그제야 장소옥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탈출하러 간다던데요?”

“이런! 안 되는데!”

무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뭐가요, 대장님? 탈출하면 안 된다고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장소옥이 물었다.

“물론이지. 그냥 탈출하게 두면 안 돼, 절대로!”

웬일로 자신의 대장님이 이런 성실한 생각을 다 하지? 장소옥은 신기한 생각까지 들었다.

“으음…… 이럴 때가 아니지. 가자, 소옥아.”

“어디로요?”

“당연히 그들을 쫓아가야지.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고. 난 그 사람과 좀 더 많이 싸워야 해. 아주 많이!”

그러면 그렇지

아무래도 그의 목적은 탈출 저지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마천십삼대의 대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디를 가신단 말입니까? 자신의 입장을 잊지 마십시오.”

무명이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 생각에 제동을 거는 것 역시 부대장의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럼 대장 그만두지, 뭐.”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다.

“대, 대, 대장을 그, 그만두신다니요?!”

장소옥이 기겁할 정도로 놀라며 입을 붕어처럼 뻐금거렸다.

“안 됩니다! 절대 불가합니다! 저희 육번대 대원들은 어쩌라고요? 저희들을 버리신다는 겁니까?!”

“끄응……. 아니, 버린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만두는 건데. 다음 대장을 뽑으면 되잖아? 뭣하면 소옥이 해도 좋고.”

황당해하는 장소옥의 입에서 이윽고 장대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지난 수십 년 동안 육번대 대장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요! 이제 와서 새로운 대장이랍시고 나서는 사람은 누구 하나 인정해 줄 리 없잖습니까!”

“그게 그런가?”

“당연히 그렇죠!”

이제는 포기하겠지? 장소옥은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다음 이어지는 한마디에 단숨에 부서졌다.

“그럼 휴가를 낼래.”

“휴가요?”

“엉, 유급휴가로.”

***

당삼은 누이의 시체를 부여잡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진령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남궁상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팔을 잃은 노학은 응급처지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정신을 잃고 있어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

그러나 비류연은 울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서는 모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모든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혹은 모든 감정이 동결된 사람처럼.

나예린은 이런 비류연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항상 밝고 여유 넘치고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그리고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당문혜와 그녀를 둘러싸고 오열하는 제자 겸 사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뭐지? 이 지독한 불안감은??

눈물을 닦아내던 남궁상은 대사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끓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을 눈앞에 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북풍한설이 불 정도로 차가운 무표정 속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분노.

그 말 이외엔 지금 비류연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파직파직.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따갑다. 보이지 않는 살기의 바늘이 그의 피부를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나고 있었다. 가슴이 술렁거 린다.

그때, 배 주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남궁상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어느새 배 뒤에는 십여 척의 소형 고속선이 물살 위로 하얀 포말을 그리며 바람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차분히 당문혜의 죽음에 조의를 표할 시간조차 없었다.

추격자들이 따라붙은 것이다.

그 추격자들은 다른 아닌 마천각의 문을 지키는 ‘귀문장(鬼門十將)’이었다. 그들은 고속선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사절단 주위에 포위망을 펼쳤 다.

추격자들은 비단 귀문십장뿐이 아니었다. 마천십삼대의 부대원들마저, 빠른 솜씨로 배를 띄우고 닻을 올려서 뒤를 바짝 쫓아온 것이다.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을 보며 남궁상은 사색이 되었다. 아니, 남궁상을 포함한 모든 사절단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배를 타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지금 그들에게는 이 포위망을 뚫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천무학관 관도들의 마음속에 절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추격하는 배가 노를 저어가며 가까이 다가왔다. 사절단이 탄 배는 돛만 달려 있을 뿐, 노는 달려 있지 않았다. 노가 있다고 해도, 이 인원으로는 무리였다. 지금 인 원으로는 배를 앞으로 가게 하는 게 한계였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추격자들이 가까워지면서 함성 소리가 더욱 커졌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비류연의 눈썹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내 제자이자 사제인 여자애가 죽었는데 대체 뭐가 와와란 말이냐? 어디 경사라도 났단 말인가?

“닥쳐라!”

비류연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배와 배 주위의 호수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커다란 소리였다.

찰캉!

왼쪽 발목에 차여 있던 묵룡환이 풀리며 쿵 소리와 함께 갑판 위에 떨어졌다.

비류연의 앞머리가 펄럭이며, 감겨 있는 두 눈이 드러났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바람이 멈췄다.”

남궁상을 비롯해 당황했던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배의 돛을 밀어주던 바람이 멈추었다. 호수 위를 날고 있던 나뭇잎이 그대로 얌전히 떨어져 내렸다. 돛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주위의 배들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이상을 느꼈다.

“대기가 술렁이고 있어…….”

주위의 바람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피부가 따가웠다.

남궁상은 자신도 모르게 대사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스르륵.

배 주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수 위에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을 살짝 흔들 정도의 미풍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윽고 배 주위에 둥근 궤적의 물결을 만들기 시작했다. 궤적의 물결 을 타고 나뭇잎은 한 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물결은 배를 중심으로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비류연이 오른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배의 선체에 부딪쳤던 나뭇잎이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다.

비류연이 제압한 용과 함께.

휘몰아 치는 바람과 함께.

그리고 동시에 비류연의 손에서 다섯 개의 비뢰도가 발출되었다.

거대한 바람이 남궁상과 천무학관의 관도들을 때렸다. 남궁상은 급히 천근추의 신법으로 몸을 고정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날아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비뢰도(飛刀

최종비전오의(最終秘傳奧義)

풍뢰(風雷)의 장(章)

나선螺의 인刃)

편수풍신(風神)

발동(發動)

주위를 일제히 휩쓸더니 거대한 용권풍을 형성했다. 좀 전에 발생시켰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용권풍.

그 크기는 화산지회에서 홍매곡을 감싸고 있던 지옥의 업화를 일제히 끌어모아 화룡의 기둥을 만들었을 때와 거의 같은 규모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기둥이 아니 었다.

수룡(水龍)의 번(飜)

승천(昇天)

촤아아아아아악!

호수의 물이 일제히 하늘 위로 치솟았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승천하는 수룡이 하늘과 땅 사이에 거대한 물의 기둥을 세웠다.

호수의 막대한 물을 휘감은 거대한 용권풍이 비류연 일행이 탄 배 주위로 몰려왔던 십이호법을 비롯한 추격선들을 일제히 휩쓸고 지나갔다.

거대한 소용돌이와 회오리에 휘말린 추격선들이 차례대로 격침되어 갔다.

그것은 그야말로 ‘재앙(災)’이었다.

“이게 인간의 힘인가?’

폭풍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난간을 움켜잡으며 남궁상은 경악했다.

이것은 일개인의 힘으로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의 몸으로 구현할 수 있다곤 여겨지지 않는 기술이기도 했다.

물론 이 풍신의 모든 위력이 비류연이 펼친 오의와 그의 진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뢰도는 자연과 동화하여 자연의 바람을 회전시키는 최초의 원인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것이 자연과 융화되면서 점점 더 커져 가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자연의 팽이를 돌리듯. 비뢰도의 오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팽이를 돌리는 일종의 채찍이라 할 수 있었다.

자연의 순환에 몸을 동화시키고, 그 순환을 가속시킨다. 뛰어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극의(極意).

인간이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단초.

그리고 그 팽이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모두가 풍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깨지고 부서지고 날아갔다.

바람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허무한 잔해들만이 둥둥 떠올라 있을 뿐.

그곳에는 고요만이 남아 있었다.

당문혜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소란은 완전히 끊어졌다.

“문혜야, 너를 위해 보내는 장송곡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비류연이 중얼거렸다.

쏴아아아아아아!

하늘로 솟구쳐 올랐던 물이 비가 되어 비류연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비류연은 비가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을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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