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炎]의 쌍둥이
-일 더하기 일은?
“신마가의 효진,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살살 부탁드려요.”
짙은 자수정이 박힌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린 다섯째 효진이 포권을 취하며 서늘하게 웃었다.
“나 역시 신마가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이쪽이야말로 살살 부탁드리오.”
빙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는 오매 효진의 웃음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갈효혜처럼 예기를 감춘 웃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놓고 살기를 뿜어내는 웃음, 웃음이라기보단 음산한 위 협이었다.
‘신마가의 여인들은 혹시 모두 화날 때마다 웃는 건가?”
그런 의혹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사매 효린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살살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싸울 때는 항상 전력을 다해야 하는 법, 살살 하는 건 상대를 모욕하는 것일 뿐이죠!”
연홍빛 비단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넷째 효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흠, 넷째 선자는 나랑 마음이 맞는군. 절대 살살 하지 않을 테니 걱정일랑 마시오!”
염도가 호탕하게 외쳤다. 그는 빙검보다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넷째 효린이 다섯째 효진과 나란히 섰다. 작약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두 여인이 나란히 서니, 머리 모양을 제외하면 누가 누군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쌍둥이예요. 혼자 싸우는 것보다 둘이 함께 싸우는 게 더 편하죠. 어때요, 두 명씩 편을 먹고 합격진으로 승부를 가리는 게?”
효린의 제안에 염도가 질색팔색 기겁을 했다.
“이 얼음땡이 놈과 합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놈과 합공을 하느니 차라리 넷째 아가씨의 칼에 찔려 죽고 말겠소.”
빙검도 기분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저런 폭급한 인간이랑 손을 맞추기는 싫소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두 선자랑 혼자 싸우겠소.”
“두 분은 정말 사이가 나쁘시군요.”
“냅두시오. 아가씨 같으면 이런 퍼렇게 얼어붙은 냉동 시체 같은 놈하고 함께 싸우고 싶겠소?”
염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자네같이 피 뒤집어쓴 것처럼 시뻘건 놈하고 싸울 사람이야말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 안 드나?”
빙검이 그냥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
“뭐라고?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보고 또 보면 어쩔 텐가? 나랑 먼저 자웅을 겨룰 텐가?”
“못할 것도 없지.”
챙! 염도가 도를 뽑아 든 것과 거의 동시에 빙검도 검을 뽑아 들었다.
“두 분께서는 저희 같은 여인들과는 싸우고 싶지도 않으신가 보네요.”
이대로는 저 두 사람이 먼저 싸울 태세라, 보다 못한 효진이 한마디를 던졌다.
“물론 아니오! 다만, 내가 이놈과 같이 합공을 펼치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거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요.”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서로에게서 등을 홱 돌렸다. 강호의 저명한 절정고수로서의 풍모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효린은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넷이서 동시에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합공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함께 싸우기 싫은 사람은 싸우지 않는 거죠. 그럼 두 분도 상관없지 않겠어
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거라면 뭐.”
염도와 빙검은 선뜻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좋아요. 그럼 두 분이 손을 잡든 잡지 않든 저희들이 합공하는 데는 사양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 두 사람은 그녀들을 약간 깔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은 금방 나왔다.
“우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소. 선자들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오.”
빙검이 대표로 대답했다.
“호호, 아주 잘됐네요.”
오매 효진의 입에서 한기가 들 정도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맞아, 아주 잘됐어.”
사매 효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염도는 눈이 동그래졌다.
“무엇이 잘되었단 말이오?”
그러자 두 여인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야 물론 흉적을 구하러 온 위선자들을 마음껏 쓸어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순간 두 여인에게서 폭사되어 나온 살기에 염도와 빙검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 그 악독한 놈을 구하러 오다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자식들이지!”
오매 효진의 입에서 차가운 독설이 쏘아져 나왔다.
“증오스러운 정파 놈들! 어차피 다들 입으로는 정의(正義)를 외치면서 암습 같은 비겁한 짓을 하는 놈들이 아니겠어?!”
사매 효린의 목소리도 분노로 인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얌전하던 그녀들이 갑자기 지옥의 나찰이라도 된 것처럼 핏발을 곤두세우자 염도와 빙검은 정신이 멍해졌다.
“그건 분명 어떤 오해가 있었을 거요!”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빙검이 해명했다. 그러자 효진이 냉소하며 독설을 내뱉었다.
“어머, 너희들은 그냥 닥치고 계세요. 그런 헛소리는 저승에 가서나 하시죠?”
“너, 너희라니. .! 닥치라니……! 말이 좀 심한 것 아니오?!”
염도가 씨근거리며 항의했다. 그러자 염도를 쳐다보는 사매 효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심한 것은 당신들의 정신 상태겠지!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고 기어들어 온 거지? 여기는 무창, 큰오라버니가 공들여 키워놓은 흑천맹의 앞마당인 것을! 감 히 그 더럽고 위선적인 발바닥으로 이곳을 밟다니! 동생! 저들 둘 다 그 냄새나는 발부터 잘라내자꾸나!”
“…….!”
빙검과 염도는 놀라서 말문마저 막히고 말았다.
“그래, 언니! 조용히 닥치고 있게 혀도 같이 잘라 드려야겠어!”
다섯째 효진이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화사하게 생긴 그녀들의 입에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독설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자 염도와 빙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차 그들 역시 분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녀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모욕을 잠자코 받고 있을 생각은 결 코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들 둘 다 그만 하시오. 더 이상은 참지 않겠소!”
“어머, 참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우리도 오라버니처럼 뒤에서 칼로 찌를 건가요?”
오매 효진이 비꼬듯 반문했다.
“그런….!!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상대해 드릴 테니 두 분 선자께선 걱정 마시오!”
빙검의 외침에 사매 효린은 피식 비웃으며 효진에게 속삭였다.
“호오, 너도 들었니?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상대해 준대.”
“흥, 백도 놈들은 다 말뿐이라니까? 등 뒤 조심해야 해, 언니.”
그녀들의 말에 염도는 기가 막혀서 외쳤다.
“우릴 뭘로 보는 거요?! 다시 말하지만 백도에 그런 비겁한 자는 없소!”
“뭐로 보긴요? 평소 염도와 빙검의 명성을 듣고 흠모한 바가 있었는데, 좀 전엔 어린애처럼 반목하더니 근거도 없이 흉적을 감싸는 것을 보고 깨달은 거죠. 알고 보니 당신들도 겨우 그 정도 인물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을! 당신들 역시 백도의 유치한 위선자였다는 것을!”
비웃음이 담긴 효진의 말이었지만, 그 말엔 날카로운 지적이 담겨 있었다.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요. 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곧 알게 될 거요!”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그럼 갑니다. 사정 보지 말고 덤비세요. 우리 쌍둥이의 검무를 보여 드리죠!”
효린의 기세 좋은 외침과 함께, 쌍둥이의 합격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합공이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염도랑 합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오지 않는가?
그런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으면 어떤가?
신마팔선자 여덟과 동시에 싸우는 것도 아니고 겨우 둘과만 싸우는데.
결판은 금방 나리라. 진정한 위협은 그다음이다, 하고 빙검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승부가 나리라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쌍둥이들과 대결 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빙검은 자신의 예상을 크게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 얼음땡이! 똑바로 좀 못해!”
빙검의 귓속으로 염도의 불만 섞인 전음성이 파고들어 왔다.
“누가 할 소리. 자네야말로 적당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받은 대로 돌려준다.
“헛소리! 난 항상 제대로 하고 있다고!”
“그런데 왜 삼십여 합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는 건가?”
“몰라 묻나? 그야 네놈이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거지. 다 알고 있어, 네 녀석이 지금 힘을 비축해 놓고 있는 걸.”
“그 말 그대로 돌려주겠네. 슬슬 도망칠 힘만 남기고 다 쓰는 게 어떻겠나?”
“흥! 네놈이 먼저 쓰면!”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칠팔 합의 공방이 오고 갔다. 그러나 빙검의 상념은 끊이질 않았다.
“이보게, 불덩어리! 좀 더 나한테 맞추도록 하게. 자네 혼자 너무 돌출되고 있지 않나?”
염도의 공격은 너무 패도적인 경향이 강해서 무조건 강공을 일삼는 경향이 있었다.
“흥,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이 얼음땡이야! 왜 내가 너한테 맞추냐? 네놈이 나한테 맞춰야지! 원래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한테 맞추는 거야.”
“그러니 자네가 나한테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얼씨구. 네 녀석은 여전히 이 하늘 아래에서 자기만 제일 잘난 줄 아는 것 같은데 그게 착각이란 걸 모르냐?”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그리고 난 적어도 자네와 달리 생각은 하고 사네.”
“뭐라고?! 내가 골빈 놈이라고?! 이 얼음땡이가 말 다 했냐?!”
“일단 다 했네. 그리고 더 들을 말도 없네.”
두 사람은 감정이 고조된 탓인지 이제는 전음도 쓰지 않고 말싸움을 서슴지 않았다. 합공이 아니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합공을 하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녀석이 농땡이를 치고 있다손 치더라도…… 확실히 이 상황은 당황스럽군.’
빙검은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비록 전력을 내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봐주면서 살살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합공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 정도 되는 최절정고수 두 명이 동시에 싸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금 전력을 내지 않는 것은 전략적으로 그게 옳은 판단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은 지금 당장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만이 아니니, 함부로 전력을 다할 수도 없고…….?
아직 싸워야 할 적은 산처럼 남아 있었다. 이 상황에서 섣불리 기력을 낭비했다가는 곧바로 치명적인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다.
빙검 역시 남아 있는 모든 적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차라리 사천멸겁(四天滅劫)하고 싸우고 말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그러니 최소한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도망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남겨두고자 했다.
좀 전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쳤지만, 목소리가 큰 것만으로 이길 수 있다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는다. 그만큼 구천현녀 무화는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설마 그 최악의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여기서 이렇게 무의미하게 초식을 남발하며 내공을 소모하게 될 줄이야……. 이게 바로 신마팔선자의 저력이라는 건가?”
그 후, 이십여 합을 더 지나 오십여 합에 다가가는데도 여전히 승패는 갈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빙검과 염도는 쌍둥이들로부터 승기(乘機)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왜들 저러지, 언니? 좀 전에는 그렇게 큰소리를 탕탕 치시더니?”
“흥, 역시 위선자들이라 그런지 말뿐이라니까! 그런 자들의 우리들의 이화합격진을 막을 수는 없어!”
챙챙챙챙!
시간이 갈수록 쌍둥이가 펼치는 합격진에 실린 화기의 위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염도와 빙검이 그녀들의 합공을 상쇄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쌍둥이의 연환합격이 더욱더 기세를 더해갔다.
개개인의 능력은 염도와 빙검 쪽이 훨씬 뛰어남에도, 좀처럼 염도와 빙검은 쌍둥이 자매의 연수합격을 패퇴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수세에 몰리고 있
었다. 빙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라도 이대로 계속 밀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한번 받아보시오, 빙백신정(氷魄神釘)!”
기회를 봐서 빙검이 검한기를 일으키며 검을 무찔러 들어갔다.
빙백신정은 수백 개의 얼음 못을 날리듯 응축된 극음의 검기를 날려 보내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못 받을 거라 생각했나 보지?”
염궁 비전(秘傳)
화령신검(神劍) 오의
홍염의 방패
효린의 화검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불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빙백신정을 모두 막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여기도 있다!”
때를 놓치지 않고 효진이 똑같이 불의 방패를 만들어내며 효린이 만들어냈던 홍염의 방패와 합쳤다.
두 개의 방패가 합쳐지자 정말로 홍염의 방패라는 명에 걸맞은 불꽃의 방패가 완성되었다. 빙검이 뿌렸던 빙백신정의 검초는 모두 그 불꽃 안에 삼켜지고 말았다. 빙검이 깜짝 놀랄 틈도 없이, 함께 방패를 만들고 있던 효진의 검이 불꽃의 꼬리를 이으며 방어식에서 빠져나오더니 빙검을 향해 붉은 검광을 폭사했다.
이런 낭패가!
아직 효린은 그의 검기를 방어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그의 검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 펼쳐진 검초를 중간에 끊고 회수하는 것은 매 우 어렵고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 일이었다.
진기의 흐름을 중간에 끊으면 기혈이 역류하거나 내장이 진탕되어 지독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것은 산 위에서 굴러가는 눈덩이를 중간에서 막는 것과 같았 다. 그러나 효진의 공격이 너무나 시의적절하여 빙검은 그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검초를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염도의 도움 따윈 애초에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따다땅!
큰 종이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빙검은 세 걸음 연신 뒤로 물러났다.
“멍청한 놈! 겨우 그 정도에 그런 큰 낭패를 당하다니!”
빙검은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바람에 염도의 핀잔에 대꾸해 줄 여력도 없었다.
“이 쌍둥이 자매의 합공은 정말로 놀랍구나. 둘이 오랫동안 합격진을 연마했다고 해도 이런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쌍둥이라서 그런지 마치 영혼이라도 이어져 있는 것 같구나.’
그의 검한기가 마치 불꽃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흩어졌던 것을 빙검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들 자매 개개의 실력은 비록 강호를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하나, 염도와 빙검에 비해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낭패를 본 것은 다름 아 닌 빙검 자신이었다.
“비켜봐! 이 어르신이 하는 걸 잘 보라고.”
염도가 빙검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다음 검염기를 일으켜 진홍십칠염 중 일초인 검린초열의 식으로 쌍둥이의 합격진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화염이 일렁거리는 도기가 빙글빙글 뱀 이 똬리를 틀듯 회전하며 쌍둥이를 향해 날아갔다.
화령신검 오의
치화의 술(術)
이화염류(流)
이번에는 다섯째 효진이 전면으로 나서며 붉은 검기가 흐르는 검으로 만월 같은 원을 그리며 그의 검염기를 맞상대해 나갔다. 그러나 검에 실린 화기의 기세는 염 도의 검염기를 막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효진은 염도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 초식은 일종의 화기(火氣)를 다루는 화경(化)이었다. 불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을 제어하는 기술이었다.
그녀는 이 염도의 도기가 그리는 원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마치 안으로 끌어들이듯 원을 그렸다. 붉은 도기가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 기라도 하듯 끌어당겨졌다.
“어어어!”
도기가 끌어당겨짐과 동시에 염도의 몸도 안으로 끌어당겨졌다. 다시 효진은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속도를 맞추어 뒤로 물러났다. 염도는 당황하면서도 계속해서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염궁(宮) 비전(秘傳)
화령신검(神劍오의
염창아돌(炎槍突)
콰아아아아아아!
염도와 효진이 서로 대치하는 틈을 타서, 효린이 검기를 흩뿌리며 시의적절하게 염도의 전신을 무찔러 들어갔다.
“으헉! 제길! 빌어먹을!”
염도는 욕지기를 터뜨리며 초식을 회수하고는 다시 세 걸음 물러나 빙검 옆에 섰다.
“좀 전에 큰소리치고 나갔던 것치고는 성과가 어째 별로군그래.”
빙검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염도도 당했던 것이다.
“냅둬!”
염도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소리쳤다.
이들이 싸우면서 드러내 놓은 틈을 쌍둥이들은 놓치지 않았다.
“정말 형편없군요. 서로가 서로를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서로 발목 잡는 데 여념이 없다니!”
그녀들의 말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우리 각자는 하나의 작은 불[]이라도!”
효린이 선창했다.
“둘이 합치면 커다란 불꽃[炎]이 될 수 있다.”
효진이 그 뒤를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을 교차하며 동시에 외쳤다.
“영혼[]과 영혼[]을 하나로!”
화르르르르르륵!
교차해 있는 검으로부터 거센 불꽃이 일렁거렸다.
이 순간 두 사람은 두 사람이면서 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효린과 효진이 불꽃을 검에 감고서 정확히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염궁 비전(秘傳)
열혼이화합격진(熱魂離火合擊陣)
열혈(血) 오의(奧義)
건패염진炎陣)
화르르르르륵!
두 개의 화기가 한데로 합쳐지며, 그것은 이글거리는 거대한 홍련의 불꽃이 되어 염도와 빙검을 압박해 들어왔다.
“헉!”
염도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며 홍염을 휘둘렀으나, 그의 홍염에 깃든 화기는 두 사람의 합쳐진 영혼이 불사르는 불꽃에 먹히고 말았다. 빙검의 빙백 역시 그들의 불꽃을 이겨낼 냉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일신 능력이 조금만 더 부족했더라도 염도와 빙검은 서로 춤을 추는 듯한 불꽃의 합격진에 휩쓸려 재가 되고 말았 을 것이다.
‘정말 이상하군.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된 광경에 빙검의 의혹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효린의 내공은 빙검의 검한기를 상쇄하기에 부족했다. 효진의 내공 역시 염도의 검염기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검기는 발하 는 족족 상쇄되고 있었다.
‘정말로 놀랍군. 일(一)에 일(一)을 더해 삼(三)의 효과를 만들다니…….?
불[火]과 불[]을 한데 모아 커다란 불꽃[炎]을 일으키다니! 서로의 화기가 발판이 되어 상대의 화기를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이 염진(炎陣)의 위력은 그녀들이 개별적으로 가진 역량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치명상을 피하기 위해 살초를 피하고 있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과연 강하고 엄격한 어머니를 스승으로 삼은 티가 역력했다. 또한 무신마의 피 역시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호흡이 딱딱 맞는군,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없고 저들에게는 있는 것.
조화(造化)…….?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며 자기 좋을 대로 공격하는 염도와 빙검에게는 그런 조화가 전혀 없었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오직 불협화음뿐이었다. 지금도 합 공은 죽어도 싫어서 각기 따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저들은 이미 조화상생(造化相生)의 경지라는 건가…….’
넷째 효린과 다섯째 효진은 서로가 서로의 위력을 증폭시켜 주고 있었고, 염도와 빙검은 서로가 반발하며 서로의 위력을 감쇄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의 기량이 훨씬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정말로 위험했었다.
‘어쩔 수 없단 말인가? 할 수 없이 살수(殺手)를 써야 한단 말인가??
이 대치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에 대해 빙검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빙검의 시선이 슬쩍, 잠자코 있는 구천현녀 쪽을 향했다.
신마가의 삼대낭랑.
신마가의 호랑이들을 낳고 가르친 세 명의 어머니자, 신마가를 실질적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진짜 기둥. 저 세 사람의 저력은 그 둘로서도 가늠할 수가 없다. “아무리 어린 사부라 해도 저분을 이길 수는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몸을 빼내야 했다.
‘이 쌍둥이 자매 정도의 실력이라면 전력을 사용해도 죽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순간의 틈을 만들어 이 불리한 곳에서 몸을 빼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빙검은 자신의 생각을 전음을 통해 염도에게 밝혔다.
“그러니까 네놈 말은, 내가 저 넷째 선자를 공격하는 동시에 자네가 저 다섯째 선자를 공격하겠단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이거 합공이 되는 거 아냐?”
“그건 아니지. 그저 싸울 상대를 나누자는 뜻일세. 즉, 남의 상대는 건드리지 말고 자기 상대에게만 집중하자는 뜻이지. 그저 각자 맡은 사람만 담당하기로 하세. 어떤가?”
“합공이 아니라면 뭐…… 상관없겠지.”
협의는 짧게 끝났다. 서로 아옹다옹하는 사이였지만, 지긋지긋한 악연인만큼 서로의 생각은 별로 긴말이 아니더라도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힘 아끼지 말고 가자고!”
“그럴 예정이네.”
움찔! 쌍둥이 자매 효린과 효진은 무언가 등줄기를 섬뜩하게 하는 오싹함에 순간 몸을 긴장시켰다. 돌연 염도와 빙검의 기세가 일변했던 것이다. 화르르르르르륵!
앞으로 내뻗은 염도의 날카로운 도가 저녁노을처럼 붉은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 마치 화룡의 날숨처럼 보였다. 휘오오오오오오오!
반면 빙검의 푸른 검 주변에서 무지갯빛 비단 같은 너울이 투명하게 넘실거리며, 그 아래로 하얀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해 끝에서 일렁이는 극 광아래에서 휘몰아치는 북풍한설을 연상케 했다.
쌍둥이 효린과 효진은 이번에 염도와 빙검에게서 펼쳐 나올 초식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아야 해!’라는 느낌보다는 ‘피해야 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 두 가지 기술을 동시에 맞는다면 그녀들의 합격진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은 자신들의 합격진에 지금까지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조심하시오! 칼끝에는 눈이 없으니!”
쌍둥이 자매에게 바야흐로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짝!”
그때 양쪽 귀 안의 고막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울리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공이 약한 사람은 그 소리만으로도 기절할 법한 위력이 그 박수 소리에 담겨 있 었다. 몇몇 수련이 부족한 흑천맹 무사들은 양쪽 귀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박수 소리는 너무나 시의적절한 순간에 터져 나왔고, 그 순간 염도와 빙검 쪽으로 흘렀던 승부의 흐름이 단숨에 깨어지고 말았다.
박수 소리 한 번에 초식이 흩어지고 만 것이다.
“…..?!”
그러나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였기에 모두들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해진 염도와 빙검의 시선이 박수를 친 장본인에게로 향했다.
구천현녀는 아직도 양손을 가슴 앞에 든 채, 차갑지만 위엄 가득한 눈빛으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박수 소리로 그녀는 이 일대 전장의 흐름과 그 주 도권을 일거에 장악한 것이다.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까지!”
그녀가 선언했다. 그리고는 두 명의 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얻은 게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구나.”
그 말에 쌍둥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머님.”
큰오라버니를 죽인 흉수를 도우러 가려는 파렴치한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다니…….
그래서 한순간이나마 이들의 정체를 잊고 감탄하고 말았던 자신들이 몹시 부끄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염도와 빙검을 씹어 먹을 듯이 덤벼들던 그녀들이 아니 었던가.
“죄송할 것 없다. 때때로 혈육의 정마저도 뛰어넘는 게 무인의 서글픈 본능 아니겠느냐?”
“죄송합니다, 그동안 쭈욱 막혀 있던 게 풀려서 그만..
다섯째 효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효진의 잘못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넷째 효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무화는 그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무감정한 목소리로 명했다.
“감사하거라.”
“예? 감사하라니요?”
쌍둥이 효린과 효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원수나 다름없는 적에게 감사라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구천현녀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녀는 추상같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상대가 그 누구든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답례는 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무인으로서의 도리이니라.”
쌍둥이는 그 말에 감히 항변하지 못하고 즉시 염도와 빙검을 향해 장읍하며 외쳤다.
“두 분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과연 두 분의 도기와 검기는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오늘 우리 두 자매가 크게 개안(開眼)을 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 둘을 잡아서 토막 친 다음 갈아먹을 듯 달려들던 이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매우 절도있고 기품있는 인사였다.
“과, 과찬이오.”
“벼, 별거 아니오.”
그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염도와 빙검이 얼떨결에 마주 공수하며 답례했다. 기대도 않던 감사 인사를 받기는 했지만, 마음은 엄청나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 다.
“그만 됐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나도록 해라.”
“네, 즉시 명을 받들겠습니다.”
쌍둥이 자매는 즉시 뒤로 빠져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우리도 물러나면 되는 건가, 얼음땡이?”
“지금 당장, 무조건 물러나야 하네.”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적극 동감이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염도와 빙검은 이 장소에서 몸을 빼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탈출하기 위해 진기를 끌어 모으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모으던 기가 그녀의 단 한마디에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경악했다.
“인사도 없이 어딜 가려 하는 게냐?”
그 말과 동시에 구천현녀가 한 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한 동작만으로도 염도와 빙검은 움찔했다.
강호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 두 사람, 천무학관의 대무사부를 겸임한 천하오검수의 일좌 빙검 관철수와 무사부 겸 천하오대도객의 한 사람으로 불타는 개 차반이라는 악명까지 듣는 염도 곽영희가!
지금 이 순간 이들은 진정으로 위압당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여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