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도와 빙검 대구천현녀
―공포! 흔들리는 빙백심결
“큰언니, 직접 나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둘째 처 홍련선자 단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셋째 처빙련선자 사란도 조용히 입을 열어 찬동의 뜻을 고했다.
“이 정도 일에까지 신마가의 가모께서 나설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최절정고수 두 명을 개무시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염도와 빙검은 그 말에 토를 달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 라 하지 못했다. 방금 전 그녀들의 딸들 중 겨우 두 명을 붙잡고 씨름했던 터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신을 생각해 주는 두 동생의 말에 무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동생이 나를 쉬게 해주고 싶어한다는 것은 잘 아네. 하지만 이 아이들만은 내가 직접 상대하겠네. 저 아이들과 나는 인연도 있으니, 그 인연을 끊는 것도 내가 직접 해야 할 일.”
구천현녀 무화는 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염도와 빙검 앞에 와서 섰다.
그녀를 본 염도와 빙검은 목으로 꼴깍 하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몸이 위축되었다는 반증이었다.
염도와 빙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너희 둘과 마주서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원수를 구출하러 온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에 증오의 편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오히려 어딘가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뵌 이후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빙검이 공손하게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등천하시고, 그 둘이 강호에 출두한 이후로 벌써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나도 많이 늙었구나.”
빙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늙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지났다지만, 큰마님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 시군요.”
평소 냉정엄격하다는 평을 듣는 빙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변했다. 그때와 지금은 너무도 다르구나. 이십 년 전 그때는 있었던 나의 아들이 지금은 내 곁에 없으니 말이다.”
순간 염도와 빙검은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던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마치 강이 범람하여 땅을 덮는 것처럼 그들의 폐부로 침범해 들어왔다.
“……”
두 사람은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현재 그녀의 아들을 그녀로부터 빼앗아간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우두머리라는 의혹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그들 역시도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 면 모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격자가 한 명도 아니고, 그 어느 누구도 그 말의 무게에 토를 달지 못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검마 초월만 해도 갈중혁, 갈중천 이대에 걸친 충성심을 생각해 볼 때 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너희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망을, 천륜(天倫)이 끊어진 아픔을 아느냐?”
“……”
두 사람은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아이가 있느냐?”
“아직 혼자의 몸입니다.”
염도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후 빙검이 대답했다.
“…설지라는 이름의 딸이 한 명 있습니다.”
무화의 시선이 빙검을 향했다.
“예쁜 아이더냐?”
빙검이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생각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화는 현현한 눈으로 빙검을 꿰뚫을 듯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래… 그럼 누군가가 네 딸을 등 뒤에서 찔러 살해했다면, 그리하여 네 딸이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낸 채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싸늘해진 한 구의 시신으로 변 하여 관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너는 어떻겠느냐?”
빙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절대로 생각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
빙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아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은 그 무언가가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다음 돌아올 말이 그는 무서웠다. 지금 대답한다면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아 더더욱 무서웠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단장(斷腸)의 고통은…… 지금 네게 든 마음보다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강할 것이다.”
“……!”
고통으로 미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빙검은, 갑자기 그 무게와 그 아픔을 실감했다. 그녀가 내뿜는 기운 때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지는 고통에 숨 이 턱 막혔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본녀의 앞을 가로막겠느냐?”
준엄한 목소리가 염도와 빙검의 고막을 때렸다. 염도는 일순간 자신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특히 빙검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쳇!’
속으로 혀를 차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염도였다.
“정말 송구스럽고 죄송합니다만, 저에게 아이는 없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하지 못했죠. 하지만 아이는 없어도 제자들은 있습니다. 제 자식 같은 놈들이라 저도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빙검은 염도가 이 정도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자 속으로 무척 놀랐다. 덕분에 그도 입을 열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된 겁니다. 나 맹주님, 그분은 절대로 그런 비겁한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분명 착오가, 무언가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구천현녀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 착오가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그 흉적의 목을 치고 그 뼈를 발라낸 다음 시체에다 대고 물어보겠다!”
더 이상 설득은 무의미했다. 두 사람은 말만으로는 절대로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저희들 역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용서하시길.”
빙검이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용서를 구했다.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진정된 모양이었다. 반면, 무화의 얼굴엔 차가운 분노가 일렁거리는 미소가 맺혔다.
“용서? 그 흉수의 피와 살만이 이 어미가 어미보다 먼저 간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라.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아무리 너희들이라 해도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 경고가 진짜라는 것은 따끔따끔하게 피부를 찌르는 살기만으로도 충분히 절감할 수 있었다.
염도와 빙검은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몸을 긴장시켰다. 금세 두 사람은 자신을 극한의 전투 태세로 몰아넣었다. 생사대적을 앞에 둔 긴장감이 두 사람의 얼굴 위를 달려나갔다.
“가소롭구나. 너희들에게 과연 본녀의 앞을 가로막을 만큼의 실력이 있느냐? 따로따로 덤빌 것도 없다. 귀찮으니 예전처럼 둘이서 함께 덤비거라!”
농담?
이건 그런 시시껄렁한 것이 아니었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현현한 두 눈동자가 진실임을 말하고 있었다.
염도와 빙검의 얼굴이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음 한구석이 따끔따끔했다.
그것은 분노에 의한 상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아릿한 그리움을 동반한 옛 상처였다. 이십 년 동안에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들을 앞에 두고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선 아직도 그 둘은 여전히 철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때의 인연 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었지요. 하지만……..”
중얼거리는 염도의 미간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오싹한 기억을 떨치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큼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저희도 그때의 어린애가 아닙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를 본 구천현녀는 아미(蛾眉)를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한심해하고 있었다.
“진짜 충분하다는 것이냐, 아니면 단지 함께 싸우기 싫은 게냐?”
“합공은…… 싫습니다.”
염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무화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좋다, 그럼 어디 한번 너부터 오너라!”
화르르르륵!
염도가 화령신공을 최대한 끌어올리자 애도(愛刀) 홍염이 검염기의 불꽃에 휩싸여 이글이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쌍둥이들과 싸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엄청난 열기가 그의 도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몇 수 양보했다는 사실에 효린과 효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휘리리리릭!
홍염의 도신 주위로 바람을 빨아들이더니 열풍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무복 옷자락이 용광로 속의 불꽃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갑니다!”
염도가 열풍을 휘감은 채 땅을 박차며 무서운 속도로 구천현녀를 향해 홍염을 찔러갔다.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
검염기劍)
오의
열풍홍련창(熱風紅蓮槍)
피부를 화끈하게 데우는 뜨거운 열풍을 휘감은 화염의 창이 구천현녀의 면전을 향해 쇄도했다. 찌르기는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크긴 하지만 베기보다 훨씬 쾌속한 공격이 가능했다. 염도는 위험을 무릅쓰고 속전속결로 승부를 볼 요량으로 찌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우우우웅!
염도의 날카로운 도극을 타고 찔러 들어오는 화염의 창을 향해 구천현녀가 스윽 손을 뻗더니, 그대로 움켜잡았다.
“허억!”
그 광경에 염도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창을 움켜쥔 무화의 오른손은 흑요석처럼 검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불꽃의 창을 움켜쥔 채 손을 뒤로 잡아 뺐다.
촤아아아아악!
애도 홍염에 깃들어 있던 불꽃이 무화의 손에 의해 잡아 뜯겨져 나갔다. 그것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뜯겨져 나간 불꽃은 작은 불티가 되어 산 산이 스러졌다.
파파락! 피— 익!
애도 홍염에서는 불꽃이 먹히기라도 한 듯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거, 검염기가……!”
염도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염기는 그에게 있어 적을 무찌르는 검이자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했다.
이 이글거리는 열기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화상을 입기 십상이기에, 사람들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진홍십칠염의 진정한 위력은 이 창이자 방패인 검염기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불꽃이 무화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염도는 갑자기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이 멍청아! 앞을 봐!”
빙검의 다급한 외침에 염도는 퍼뜩 정신을 차렸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이 빙그르르르 돌고 있었다.
톡!
무화의 오른발이 그의 발목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여인이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 전에 발가락 끝으로 콕 찍어보듯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발목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염도는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신형을 비틀었다. 겨우 몸을 바로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좀 전에 가격당한 왼발이 극심하게 시큰거렸다.
휘청, 염도의 왼쪽 무릎이 꺾였다.
그다음 순간, 무화의 무정한 오른손이 그의 얼굴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와 그의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끝났느니라.”
짧은 작별 인사. 무화의 등 뒤에서 아홉 가닥의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얼마 전 산중에서 색마황 초운락의 생명을 거두고 그를 먼지로 만든 바로 그 수법이었다.
“크헉!”
염도는 자신의 천령개를 통해 급속도로 진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토했다. 그의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온몸이 만 개의 바늘로 찔리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희(姬)!”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염도는 발끈했다.
“놈!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 순간 아득해지던 정신이 확 하고 돌아왔다. 갑자기 주변의 사물들이 그를 향해 덤벼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사방이 밝아졌다.
어느새, 그의 천령개를 움켜쥐고 있던 무화의 손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무화 사이에 새하얀 한기를 뿜어내는 푸른 검을 든 은청발의 검객이 서 있었다. 그 의 뒷모습을 본 염도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빙검의 손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이 얼음땡이 자식!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그러자 빙검이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자네 나한테 빚진거야. 잊지 말라고.”
그러자 염도는 인상을 더욱더 크게 찌푸리더니 버럭 소리쳤다.
“걱정 마라! 치사해서라도 안 잊는다, 이 인간아! 어쨌든…… 쓸데없는 짓 하긴 했지만, 일단 고맙다고는 해두마.”
염도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휘청, 또다시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좀 전에 구천현녀에게 진기를 빨린 탓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이쿠, 자네 서 있을 힘도 없는 것 같은데? 부축해 줄까, 희?”
비틀거리는 염도를 향해 빈정대는 투로 빙검이 물었다.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염도가 격분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네놈 부축 받을 바에야 죽고 만다!”
어느새 염도는 좀 전의 비틀거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너도 혼자 싸울 테냐?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니 둘이서 다시 덤벼도 된다.”
그러나 빙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친구가 혼자 싸웠는데, 저만 같이 싸울 수는 없지요.”
“저 친구라… 친구라고는 생각하고 있는 게냐?”
“그럴 리가요.”
빙검이 또다시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니라.”
혼자 싸운다고 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친구가 아니라고 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애매한 말이었다.
“제 역량을 한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빙검이 애검 ‘빙백루환(氷魄淚幻)’을 중극에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무 길어서 보통은 ‘빙루(氷)’ 아니면 ‘빙백(氷魄)’이라 불리는 푸른 검. 사부님은 빙루라는 이름을 좋아했지만, 그는 빙백이란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빙루는 너무 여성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이란 것이 싫었다.
빙검이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수법으로 몸을 활처럼 휘었다가 앞으로 내밀며 땅을 박찼다. 쏘아진 화살처럼 그의 신형이 무화를 향해 쇄도했다.
그의 신법은 염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자유자재로 신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제법 빠르다만, 이 우직한 공격으로 될 성싶더냐?””
쇄도해 오는 빙검의 기세에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검게 빛나는 손을 내밀었다. 검게 빛나는 그녀의 오른손이 빙검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
그러나 그 순간, 빙검의 신형은 바람에 흩어지는 눈처럼 사라졌다. 어느새 빙검의 신형은 무화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잔상과 분신을 함께 섞은 보법 설풍보(雪風 步)였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면에서 덤벼선 안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휘오오오오오!
빙검의 검 빙백에서 극음의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구천현녀의 전신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그녀의 잔영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알고 있었느냐? 본녀 역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의 등 뒤였다. 어느새 무화는 그의 등 뒤로 돌아서 있었다.
빙검이 다시 보법을 밟고 세 번 방향을 틀며 고속으로 이동했지만, 무화를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술래잡기는 여기까지다!”
무화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기 위해 뻗어 나왔다.
빙검은 다급하게 몸을 고속으로 회전시키며 검을 팔방으로 휘둘렀다.
빙령수류검(水流劍)
검한기(劍氣)
구명절초(救命絶오의
빙령지순(靈之盾)
극음의 검기, 검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검으로 검막을 펼치자 순식간에 ‘얼음의 방패’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원래 그의 검법은 공격보다 수비에 더욱 특화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어떤 공격이 와도 이 수백 가닥의 극음검기로 짜인 방패를 꿰뚫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무화는 그물처럼 얽힌 검기에 망설임없이 쑤욱 손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봐도 ‘내 손 떼 가시오’라는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음의 방패가 바닥에 떨어진 사기그릇처럼 챙그랑 깨어졌다. 그 파괴의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빙검에게로 전해져 내부가 진탕되었다. “이, 이럴 수가…….”
어느새 그의 검은 은은한 묵광(墨光)으로 빛나는 무화의 손에 의해 잡혀 있었다. 전력으로 펼쳐진 상태에서 검날이 잡히다니, 검객으로선 굴욕이 따로 없었다. 동시에 그의 검을 타고 진기가 급속도로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흡성대법의 힘인가!’
•흡성대법(吸星大法)! 상대의 진기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무공. 익히기는 극히 어려우며, 대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칭해지는 전설의 무공이 다.
단전이라는 항아리에 구멍이라도 뻥 뚫린 것처럼 내공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진기가 아니었다. 그의 생명 그 자체였다.
진탕된 오장육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빙검이 쿨럭 피를 토했다.
“이십 년의 적공이 겨우 이 정도였던가……. 천하오검수란 호칭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던가…….’
검에서 손을 놓으려 해도 아교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육체는 자신의 지배를 벗어나 있었다. 육신의 생사여탈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런 멍청이! 큰소리치더니, 꼴좋다!”
홍염에 휩싸인 불꽃의 바퀴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
검염기
신오의
비도(飛刀) 화륜참(火輪斬)
빙검의 검을 그대로 잡고 있으면 불꽃의 바퀴는 그대로 그녀의 팔을 자르고 지나갈 터. 무화는 가볍게 잡고 있던 검을 놓았다.
그러자 빙검이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섯 걸음을 물러섰다. 다리의 힘을 잃고 털썩 쓰러지려던 빙검의 몸은 그대로 넘어지지 않고 섰다. 누군가의 손이 쓰러지려 던 그의 어깨를 잡고 버텼기 때문이다.
“이봐, 조심 좀 하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잖나?”
여전히 빙검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염도가 투덜거렸다.
“비도술이라……. 자네 딴엔 잘 쓰지 않던 걸 쓰는군.”
어느새 염도의 손으로 돌아가 있는 홍염을 흘깃 바라보며, 빙검이 말했다.
“누군가 때문에 이런저런 연구 좀 했지. 아직 미완성이지만, 네 녀석 한 놈의 목숨 정도는 구해줄 만하지.”
그 누군가는 당연히 비류연이었다. 솔직히 가까이 접근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더욱더 비도술을 사용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덕분에 살았군. 자네랑 다르게 잘될 줄 알았는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자 그의 은청색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이걸로 빚은 갚은 거야. 빨리 갚을 수 있어서 그거 하난 좋군.”
퉁명스런 어조로 염도가 말했다. 이 얼음땡이한테 쌓인 빚이 청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염도는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잡고 있을 텐가? 이 손?”
빙검이 흉한 걸 봤다는 듯 염도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흥, 누군 잡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넘어지면 나한테 부딪치니까 잡고 있었을 뿐이야! 혼자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잘난 척하긴!”
염도가 금세 분통을 터뜨리며 손을 잡아 뺐다.
“걱정 말게! 이제 멀쩡하게 잘 설 수 있으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무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은 목숨이 간당간당한 이 순간까지도 서로 싸우는구나. 됐다, 됐어. 어차피 안 되는 것, 이제는 그냥 한꺼번에 오너라.”
염도와 빙검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가는 그것이 오히 려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이기에.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합공하자고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남은 최후의 자존심, 혹은 쇠고집이었다.
“음… 이봐, 얼음땡이? 내가 잠시 생각해 봤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저분의 명이니, 우리들의 의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아?”
순간 빙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렇게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결코. 우리들의 의사는 아니지만, 사모(師母)와도 같은 웃어른이시니 분부에 따라야 하지 않겠나?”
“웬일로 자네가 옳은 소리를 다 하는군. 확실히 우리야 그럴 의사가 티끌만큼도 없지만, 저분의 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지.”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군?”
염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홍염을 비스듬히 빗겨들며 빙검의 옆에 섰다.
“어쩔 수가 없는 거지.”
무화에게 시선을 맞춘 채 검을 치켜들며 빙검이 말했다. 그리고는 동시에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합공 한번 하는데 정말로 오래 걸리는구나.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 일이었더냐?”
몇 번이고 공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손을 놓다시피 했던 그녀다. 염도와 빙검은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진다면 저희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죽이시든 살리시든 알아서 하십시오.”
구천현녀 무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일갈했다.
“좋다, 이제야 좀 싸울 만하겠구나! 저세상에 가도 미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덤비거라!”
“목이 타군…….?
빙검은 목 안이 갈증으로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숨 쉬기라는 과정이 이렇게나 힘들었던가?
빙검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죽음이란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건 비단 그 혼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항상 대춧빛처럼 붉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니 염도의 상황도 자신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산이었다!’ 빙검은 뒤늦게 깨달았다.
“둘이서 같이 덤빈다고 해도 승패를 바꿀 수가 없구나.’
그들은 이미 구천현녀가 방출한 수십 가닥의 무형지기에 암중으로 속박되어 있었다. 지금 그 둘의 신세는 도검 한 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 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북해에 떠 있는 거대한 빙산처럼 그의 철벽을 자랑하던 평정심에 무수한 금이 가고 있었다. 그 갈라진 금 사이로 두려움과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려 하고 있었 다.
“믿을 수가 없군. 빙백심결(氷魄心訣)이 흔들리다니…….?
빙백심결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지게 해주는 영능을 가진 심법이었다. 평정심은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한 판단을 가능케 하며,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대 처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지금 그 얼음의 마음이 깨지려 하고 있었다. 빙백심결이 깨진 상태에서 펼쳐진 빙령수류검의 위력은 평소의 오분지 일로 떨 어지고 만다. 염도 역시 조금 전 큰소리는 탕탕 쳤지만, 막상 다시 대적하게 되니 그와 비슷하게 굳어버린 상태였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빙검은 이를 악물고 염도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이봐, 희! 들리나?”
듣자마자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되냐?! 이 망할 얼음땡이 냉혈인간아!”
발끈한 염도의 분노가 전음을 통해 빙검의 고막을 직격했다.
“그렇게 폭급하게 화를 낼 수 있는 걸 보니, 좀 몸이 자유로워진 모양이군.”
“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호칭에 대한 분노가 일순간 분출하며 구천현녀의 압박을 이겨낸 모양이었다.
“나도 어린 사부에게 나쁜 지혜를 배워 버린 모양이로군…….”
예전의 그라면 결코 쓰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직 완벽히 풀린 건 아니었다.
빙검이 계속해서 염도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니까 말이지.
빙검의 말을 듣는 족족 염도의 표정이 펴졌다 찡그려졌다 일그러졌다를 반복했다.
“조금 전 자네 덕분에 난 생각이었네.”
“흥, 네놈이 내 덕분이라니 별일도 다 있군!”
염도의 퉁명스런 반문이 돌아왔다. 기분이 나빠진 탓에 무화에게서 받는 압력이 좀 더 낮아진 듯 보였다.
“기적적으로 가끔 그런 일도 일어나더군. 나도 믿을 수가 없었네.”
“뭐라고? 말 다 했나?”
마지막 한마디로 굳어 있던 게 완전히 풀렸다.
“다 했네. 내 말 기억하게.”
반격하려면 때는 이때였다.
파앗!
빙검의 손에서 애검 빙백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무화는 어깨를 살짝 트는 작은 동작만으로 그의 비검(飛劍)을 피해냈다. 그러나 쏘아진 빙검의 검은 그대로 허공을 선회하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기어검술(氣御劍術)!”
넷째 효린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기어검술.
진기를 이용해서 검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지고의 검공. 게다가 빙검의 이기어검술은 단순히 진기로 검을 조종하는 초입 단계가 아니었다.
“쏟아져라! 빙백!”
은청색으로 빛나는 극음의 검기를 머금은 검이 허공에서 수십 개로 갈라지면 얼음 창의 폭우를 내렸다.
빙령수류검(氷靈水流劍)
검한기(劍氣) 상급) 오의(義)
이기어검지술(以氣御劍之術)
빙폭우(氷雨)
하늘로 솟구친 빙백이 응축된 극음의 검기를 폭발시키자, 수십 개의 얼음 창이 구천현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혼자서 먼저 나대지 말란 말이다, 이 얼음땡이야!”
화르르르륵.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던 염도의 도가 불꽃을 일렁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홍십칠염(眞十七炎)
검염기焰
신상급 오의
비차(車)화륜람(火輪嵐)
염도가 크게 팔을 휘두르며 이글거리는 홍염을 내던졌다.
쐐애애애액!
염도의 손을 떠난 홍염이 마치 거대한 홍련의 바퀴처럼 변하여, 구천현녀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굴러갔다. 이 거대한 불꽃의 바퀴 앞에 놓인 존재는 전소압궤(全燒 壓軌)되어 모두가 새카맣게 짓이겨질 것만 같았다. 좀 전에 보여주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 염신(神)이 탄 불꽃의 전차가 적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위세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얼음과 불꽃의 기운이 한곳에서 맹렬하게 부딪치며 엄청난 수증기가 발생했다. 그 폭발력에 의해 흙먼지가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
검한기와 검염기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쏟아진다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우와, 우리가 너무 심했나?”
자욱이 일어나는 먼지와 수증기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염도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더 이상 그때의 쬐끄만 애송이들이 아니었다. 그때 이기지 못했다 해서 지금도 이기지 못할 거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너무 과거의 추억을 신격화했던 것 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빙검의 표정은 여전히 신중했다.
“글쎄? 너무 부족했던 걸 수도 있지. 자네는 그녀들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나?”
빙검이 손이 단혜와 사란, 그리고 그녀들의 딸들을 가리켰다.
“…...!”
그녀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염도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그녀들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태평한 시선으로, 구천현녀가 서 있던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둘의 시선이 셋째 처 사란과 마주쳤다.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지혜를 가진 눈으로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년빙설의 정화가 두 눈에 드러난 듯 투명하고 흔들림없는 눈동자는 날카로운 얼음의 창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만 같았고, 모든 허상을 깨부수는 것만 같 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빙검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경악했다.
‘저 눈은 설마 빙심안(氷心眼)?”
빙심(心). 혹은 빙백심안(氷魄心眼).
만년빙정 같은 절대부동의 평정심과 얼음 칼날처럼 시릴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경지. 그러나 빙검이 놀라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럴 리가…….?”
빙검의 마음속에 의혹이 샘물처럼 솟구치고 있을 때, 사란이 마음을 꿰뚫는 듯 투명한 눈빛으로 빙검을 보며 조용히 전음을 날렸다.
“한가해 보이는구나. 겨우 이 정도로 그분의 발걸음을 한 발자국이라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참으로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 고저(高低)가 없는 조용한 울림이었지만, 마치 거울 같은 호수처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평정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빙검은 그 차가운 울림에 얼굴을 잔뜩 긴장시킨 채 구천현녀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의 눈이 부릅떠졌다.
수증기와 흙먼지가 걷힌 곳에서 구천현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얼음의 창에 꿰뚫리지도 않았고, 불꽃의 바퀴에 치이지도 않았다.
수십 개의 얼음 창으로 변해서 기세 좋게 쏟아져 내렸던 빙검의 애검 빙백은 그녀의 오른손에, 불꽃의 바퀴로 변해 그녀를 깔아뭉개고 지나가려 했던 염도의 애도 홍염은 그녀의 왼손에 그대로 잡혀 있었다. 지금 그녀의 양손은 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검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홍염과 빙백에 깃 든 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는 그녀의 자태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어떤 손상도 입지 않은 무결한 모습이 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얼어붙은 염도와 빙검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방금 전 두 사람은 전력을 다했다.
죽지는 않았을지라도 중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본 염도와 빙검의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붉은 도와 푸른 검을 쥔 채, 구천현녀가 빙검을 바라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전의 한심한 모습보다는 좀 낫구나. 구련흡성결(九連吸星訣)의 대처법. 네가 생각해 낸 게냐?”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빙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어검술이라…… 나쁘진 않은 생각이었다. 직접 닿지 않으면 진기가 흡수될 일은 없으니.”
자신의 양손에 잡힌 홍염과 빙백을 그들 앞에 내보이며 무화가 말했다.
“조금만 더 예리했다면 옷자락만이 아니라 피부에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르지.”
구천현녀가 자신의 양 소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소매는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 거칠게 찢겨져 있었다.
“설마…… 잡아내실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이 빙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차피 환검(劍환영검)의 일종, 실체를 꿰뚫어 본다면 ‘묵현천수(墨燐玄天手)’를 이용해 잡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궤적이 단순하고 위력만 무식한 이 불꽃 바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뭐냐, 대체? 이 어정쩡한 미완성 초식은?”
빙검과 이야기하던 무화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을 향하자 염도의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에 심하게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왜 생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상대에게 혼나야 되는지, 그러면서도 왜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떤 불만도 생겨나지 않는지 불가해할 정도였다.
“가져가거라.”
무화가 쥐고 있던 홍염과 빙백을 염도와 빙검에게 던져 주었다. 날아오는 도와 검을 그대로 받아 든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건 대체……. 저희들을 놓아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러자 무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착각 말거라. 어찌 신마가의 여주인이 무기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을 거둘 수 있겠느냐?”
즉, 무기를 들고 다시 마지막으로 덤벼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좀 전의 공격은 효과가 있었기에 염도와 빙검은 조금 활로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들의 내심을 읽은 것일까? 무화가 깊은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입 을 열었다.
“그리 좋아할 것 없다. 설마 본녀의 무공이 구련흡성결 하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흠칫! 그녀의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두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내 소매를 벤 상으로 가르쳐 주마, 본녀의 별호에 왜 아홉 개의 하늘[九天]이란 말이 붙었는지.”
그리고는 딸들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보며 명했다. “검(劍)!”
그러자 이 싸움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신마팔선자의 장녀 갈효인이 등에 지고 있던 직사각형의 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서 헝겊으로 감싼 길쭉한 막대기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효인은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친 채 걸어와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낸 다음 무화 앞에 내밀었다.
“그, 그것은…….”
어떤 무서운 신병이기가 들어 있을까 긴장하고 있던 염도와 빙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겹겹이 싸여 있던 그것은 새카만 몸통의 목검(木劍)이었다.
“.목검 아닙니까?”
검막이조차 달리지 않은, 살짝 휘어진 검은 목검이었다.
“그래, 현천묵검(玄天墨劍)이라 하지.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이 녀석을 꺼내보기는 실로 수십 년 만이구나.”
새카만 목검, 현천묵검을 들어 올린 무화가 아련한 시선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사부한테 듣지 못했느냐? 본녀의 장기가 검법(劍法)이라는 것을.”
그런 건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대꾸할 여유조차도 지금 이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현천묵검을 들고 그들 앞에 우뚝 선 구천현녀의 기세는 뭔가 아득한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단지 서 있는 자세,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검의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구련흡성결은 구천현현신공(九天神功) 중 제사천(第四天)인 북명현해신공(北冥玄海神功)의 오의에 불과하다. 이제 아홉 하늘 중 여덟 번째 하늘인 제팔천 (第八天), 검천(劍天)을 보여주마.”
그리고는 굳어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덧붙이듯 말했다.
“저승에 가서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다, 검천(劍天)의 검공구천현녀지검(九天玄女之劍) 아래 죽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