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4화 – 분노하는 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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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4화 – 분노하는 효룡

분노하는 효룡

-부러진 쌍검

챙그랑!

바위를 내려친 두 자루의 검이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검날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핏물이 튀는데도 녹색 머리띠의 청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헉헉헉!”

한두 번 내려친 게 아닌 듯, 거대한 바위 여기저기에는 무수한 검상이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집요하게 내려친 흔적. 마구잡이로 내려친 듯 그 검흔에는 어떤 규칙성도 없었다. 오로지 폭발할 듯한 감정의 분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저 화가 치미는 대로, 분노가 터져 나오는 대로, 어떤 법식도 없이 그야말로 잡히는 대로 검을 휘두른 흔적이었다.

그것은 검술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그는 부러진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에 녹색 띠를 교차해서 묶은 청년, 바로 효룡이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인다. 숨이 차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러진 검을 바라보는 효룡의 두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존경하던 형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죽음.

자신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가족은 언제까지 운명(運命)에 의해 유린당해야 한단 말 인가?

“언제까지?”

왜 그분이 이런 부당한 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왜!’

이대로는 안 된다. 형의 복수도, 아버지의 복수도.

지금의 그는 무력하기만 했다.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제 두 개의 검으로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부러뜨렸다. 이제 더 이상 가짜인 자신으로 있을 수 없기에.

그는 이 일에 대해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정천맹주 나백천이, 설혹 강요에 의해서라도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했다면…. “그가 아무리 정천맹의 맹주라 해도, 친구의 연인의 아버지라도 해도, 나는 절대로 그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효룡의 말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냐?”

효룡이 몸을 한번 움찔한 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용하지만 거대한 태산을 연상시키는 노인이 서 있었다. 보통은 혁중 노인이라 불 리는 노인, 바로 무신마 갈중혁이었다.

“할아버님…….?”

효룡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혁중 노인은 깊고 현오한 눈을 들어 손자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손자의 두 눈은 지금 증오와 분노로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슬프더냐?”

분노로 타오르는 눈을 보며 혁중 노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나도 슬프다.”

무척이나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효룡의 가슴을 짓눌렀다. 노인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구나.”

담담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짙은 애상(哀想)이 깔려 있었다.

“노부는 이제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구나.”

그는 그동안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왔다. 너무 많은 죽음을 봐왔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아끼던 손자를 잃었다, 마음속으로 후계자로

점찍어두고 있던 손자를. 그리고 이제 아들을 잃었다, 가문의 대를 이은 장남을.

그러나 오래된 고목이라 수분이 모두 메말라 버린 것일까? 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어도 이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신마는 함부로 눈물 을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러나 분노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눈물은 말랐어도 아직 분노는 남아 있었다. 거인의 분노는 조용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법이었다.

“받거라.”

스윽.

혁중 노인은 효룡 앞에 포대기로 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효룡은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순간, 아래로 쏠리는 엄청난 무게에 효룡은 하마터면 자세를 흐트러뜨릴 뻔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할아버님?”

반문하는 효룡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펼쳐 보거라.”

효룡은 조심스럽게 포대기를 풀어 그 안을 확인했다.

“…...!”

효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심장이 콱 하고 쪼여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 자루의 도였다. 한 도에는 ‘천(天)’이라 새겨져 있었고, 다른 한 도에는 ‘중(重)’이라 새겨져 있었다.

“받거라. 이 도의 이름은 바로 쌍붕도(雙崩刀) 중천(重天), 앞으로 너의 양팔이 될 녀석들이다.”

“……!”

쌍붕도 중천, 그 이름을 듣고 효룡은 깜짝 놀랐다.

“중천’이라시면……

이것은 그의 아버지 갈중천의 이름과 같은 음을 가진 도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한 쌍의 도에 다른 유래가 있다는 것을 효룡은 알고 있었다. 혁중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할아비가 젊은 날 쓰던 쌍도다.”

효룡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떨려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이런 것을 감히 제가…….”

무신마의 쌍도를 손자라 해서 어찌 함부로 받을 수 있겠는가? 감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려는 효룡을 혁중 노인이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질문했다.

“왜 쌍검을 부러뜨렸느냐?”

“이제 더 이상 쌍검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효룡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대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역시 알고 있기에 부러뜨린 것 아니냐? 어차피 을진무쌍검은 무거운 중도(重刀)를 감당할 수 없는 딸아이들을 위해 만든 약식(略式). 진정한 십이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

때문에 세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쌍검법이었다. 그 검법만 가지고도 효룡은 지난 수년간을 버텨왔지만, 이제 그 검법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가 없었다. “원래는 네 형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제 네 형은 이 세상에 없다. 네가 대신 이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인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룡아야, 천외일도를 얻어라!”

-천외일도(天外一刀)!

효룡의 몸은 그 말이 가진 의미와 무게 때문에 부르르 떨렸다.

굉천십이도라 불리는 절대무쌍의 도법, 십이식의 밖에 있는 열세 번째 초식. 초식이면서 초식이 아닌 것. 그것은 어떤 경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싸움이 될 것이다. 천외일도를 얻지 못하면 넌 죽을지도 모른다.”

혁중 노인은 아들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재주가 없었다면 겨우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흑천맹주라는 중임을 물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만한 능력과 그만한 그릇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비로소 그는 그 자리를 장남 갈중천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래서 마음 놓고 강호를 종횡할 수 있었다. 어깨 위의 짐

하나를 덜어가 준 일에 대해서 그는 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도 살해당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백천이 그 손에 얼마만큼 놀아났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안이했다!’

그제야 노인은 그들 천겁령이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상상 이상으로 힘을 키워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늦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들의 저력을 너무나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할아비에게 너를 오래 붙잡고 가르쳐 줄 시간은 없구나.”

그것은, 짧지만 험난한 수련이 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전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은 단순한 가르침하고 같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와의 하루는 다른 이들과의 십 년과 맞먹었다.

“너의 형은 천재였다. 하지만 너도 이제 형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나는 너를 결코 너의 형 아래로 보지 않는다. 네가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이 할아비에게 보여다오.”

“할아버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효룡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울먹울먹 눈물이 흘러내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나는 지난 전쟁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잃어왔다. 동료들, 그리고 여인들, 그리고 유일하게 인정했던 친구를. 이제 노부에게 더 이상 흘릴 눈물은 남아 있지 않구나. 아들을 잃었는데도 이제 눈물이 나오지 않아.”

이미 그의 눈물샘은 메마르고 말았다.

“그러니…… 울 수 없는 노부 대신 네가 울어다오.”

그 말에, 막혀 있던 둑이 무너졌다. 효룡은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그래, 참을 필요 없다. 흘리고 싶어도 흘릴 수 없는 사람도 있느니라. 쏟아내라, 모두.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 지금의 슬픔을, 지금의 분노를. 그것이 너를 단련해 줄 불과 망치가 될 것이다.”

효룡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노인은 그런 손자를 한 손으로 안아주었다. 거의 처음 안겨보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효룡은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용서하지 마라, 결코. 너는 강해질 것이다. 너는 그리되리라.”

멀게만 느껴지던 할아버지가 오늘만큼은 굉장히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은 함께 핏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효룡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제 자신은 누구를 향해 칼을 겨누어야 하는가? 누구에게 먼저 죄를 물어야 한단 말인가?

혁중은 그런 손자의 어깨를 한번 도닥여 준 후, 조용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돌아서는 혁중 노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없이 차갑게 식은 거대한 바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채 숨어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예청이었다.

지금 저 거인의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걸까?

예청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아버님…….”

그러나 그 말은 예청의 입 안에서만 맴돌 뿐, 그녀는 선뜻 혁중 노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정천맹주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당대의 여걸인 예정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무거운 침묵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혁중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솔직히 무섭고 두려웠다.

만일 혁중이 소리쳐 애통해하거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면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하는 혁중은 가까이 가기조차 심장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거인의 분노는 지극히 조용하지만, 한없이 무거웠다.

근처에만 가도 숨이 턱 하고 막힐 것 같았다.

그 소리없는 분노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위로의 말을 건넬 위치에 있지 않았다. 과연 듣기나 할지도 의문이었다. 지금은 그저 입을 다문 채 다음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입장상 도저히 혁중 노인의 도움을 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남편이 그분의 아들을 죽였을 가능성이 영(零)이 아닌 이상, 그가 분노하여 나백천을 때려죽이러 가 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자중이야말로 최대의 도움.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가능성이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이라 해도 지금은 거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이를 이대로 죽게 놔두지는 않아! 절대로!’

그녀는 마침내 한 가지를 결심했다.

먼저 움직이기로.

이대로 그냥 무작정 소식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백천이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추적자를 뿌리치고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현재 흑천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그녀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어떻게든 손을 써야 했다.

하지만 누구를 통해서?”

마음 같아서는 그녀 자신이 직접 남편을 구하러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부재중인 정천맹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남편이 없다면 일단 그녀가 무게 중심을 잡아주어야 했다.

부맹주의 독단을 적절히 막아낼 필요가 있었다. 나백천이 살아 있는 이상 아직 그녀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만일의 사태에 불온한 움직임이, 불법적인 수뇌부 장악을 노리는 기미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그녀가 나서야 했다. 그녀는 그가 빠진 자리를 대신 지키고 있 어야 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아무 일도 없도록. 그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왔을 때도 편할 수 있도록. 그것이 안주인인 그녀가 할 일이었다.

그러니 흑천맹 쪽으로는 다른 사람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어떤 가능성을 가진 이가 필요했다. ‘누구를 보내지??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혹시 그 녀석이라면…….”

왠지 경망스러운 듯하면서도 그 밑바닥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청년.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나예린의 구출도 보란 듯이 해내지 않았던가. 그가 장담하던 대로, 그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지켜냈다.

그 자신의 손으로,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딸 나예린을 구해오리라고는 아무리 총명한 그녀라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내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지.’

자신의 예측과 상상을 뛰어넘어 줄 사람. 지금 그녀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금 자신이 만나러 가는 청년이 그런 사람이길 바랐다.

진심으로.

슥삭슥삭.

비류연은 바닥에 뭔가 나선 문양을 여러 가지 그리고 있었다. 네 방향에서 시작된 나선이 소용돌이 원을 그리고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그 밑에 뭔가를 막 적어가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모든 것을 다 지운 다음, 다시 위에서부터 점 세 개를 찍더니 천(天), 인(人), 지(地)라고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천(天), 지(地), 인(人)과는 다른 순서였다.

그런 다음 한참 고민을 하다가 위쪽 천(天) 위에 대(大)라고 쓰고, 지(地) 쪽에는 소(小)라고 썼다.

그리고는 천(天)과 대(大)를 묶는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지(地)와 소(小)를 묶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는 위쪽 동그라미의 중심과 아래쪽 동그라미의 중심을 직선으로 이었다. 그러다가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하고 큭큭 웃기도 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듯했다.

“너는 지금 왜 웃고 있는 것이냐?”

뒤쪽에서 느닷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여인이었다. 바로 예청이었다.

“재미있으니까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비류연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대답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느냐?”

그녀가 보기에 지금 비류연이 하고 있는 일은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궁리(窮理)를 하고 있었어요. 뭐, 심심풀이 같은 거죠.”

비류연은 여전히 땅바닥의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무엇을 궁리하고 있었느냐?”

“세상을 돌리는 법에 대해서요.”

“뭘 돌린다고?”

예청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상이요.”

두 번 반복된 대답으로 그녀의 청력은 정상이었음이 밝혀졌다.

“저번에 조금 얻은 게 있었거든요.”

비류연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게 재미있느냐?”

“그럼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수수께끼 놀이랑 같은 재미죠. 다른 점은 그저 문제를 낸 상대가 자연이라는 것뿐이랄까요?”

“…그래서, 해답은 찾았느냐?”

“조금은요.”

“참으로 불확실한 답이구나. 그래,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세상을 돌리기 위해서는.”

예청의 물음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거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서였다. 자신 안에 의문이 없다면 어떤 답도 시큰둥할 뿐이다.

“간단해요.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되더라고요.”

하나도 간단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시죠?”

“너에게 한 가지 풀어줬으면 하는 문제가 있다.”

“오, 그럼 잘 찾아오셨네요. 문제 풀이는 제 취미이자 특기죠. 그런데 무슨 문제죠?”

비류연의 반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 의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네가 짐작하는 바와 같다. 무림맹주이신 그분의 구출에 너의 힘을 빌리고 싶구나. 남편을 구해다오.”

평소 항상 당당하고 고고하던 예청의 목소리에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아무리 강단있는 그녀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이었다.

“그러죠, 뭐.”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비류연이 즉답했다.

“흠, 지금 당장 출발하면 좋겠지만, 이건 난이도가 좀 있는 문제라 이런저런 준비를 좀 해야겠네요. 아, 길잡이 한 명은 붙여주세요. 길치는 아니지만, 그쪽 지리가 밝지는 못하거든요.”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 예청의 말에 비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반문했다.

“그리고 뭐요?”

“그걸로 끝이냐? 달리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느냐?”

“그럴 리가요. 바라는 거야 아주 많죠.”

이번에도 망설임없이 즉답이다.

“…말해보거라.”

“뭘요?”

“또 알면서 묻는구나. 너의 바람, 문제를 풀었을 때의 부상(副賞) 같은 것 말이다. 그는 정천맹주이자 내 남편이다. 설마하니 너는 그런 부탁을 받고도 아무런 요구 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러자 비류연은 웃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일에 대해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죠. 알면서 부탁하신 것 아니셨나요?”

이번에는 비류연이 반문했다.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 그쪽이 아니냐고.

허를 찔린 것일까, 아니면 정곡을 찔린 것일까? 예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린의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에요. 그 일에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요구를 했다가 그 요구가 혹 거부되면…… 나, 이 일 거절해야 “하나요?”

그건 그것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 공짜로 움직이진 않아요. 하지만 그분이 예린의 아버지라는 것은 그 값을 모두 충당해 주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대답이 됐나요?”

비류연이 이 건을 빌미로 무언가 요구해 올 거라 생각했던 예청은, 자신의 생각이 빗나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이 됐다. 미안하구나.”

예청이 사과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를 함부로 예단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자신이 그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너무 가볍게만 파악, 아니, 까놓고 말해 얕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괜찮아요. 그리고 난제라는 건 때때로 그걸 푸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까요.”

“네가 꼭 그 난제를 풀 수 있길 기도하고 있겠다.”

“그럼 전 이만 준비를 하러 가볼게요.”

사지(死地)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디 나들이라도 가는 듯한 태도다. 대범한 건지 무식한 건지 예청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잠깐.”

예청이 멀어져 가는 비류연의 발길을 잡았다.

“….. .?”

비류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청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런 건 모녀가 참 닮아 있었다. 엄마 쪽이 좀 더 표정이 풍부하다는 게 비류연의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이렇듯 나예린과 닮았다는 것 때문에라도 예청을 더 싫어할 수 없는 비류연이었다.

“이번에 무사히 예린이의 아버지를 구해온다면 두 사람의 교제를 정식으로 승낙하는 걸 생각해 보겠다.”

원래 이 일은 정천맹에서 해야 될 일,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류연과 천무학관의 사절단에게 그 일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일이 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생사의 경계를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더욱더 그러했다.

그래서 그냥은 부탁할 수 없었다. 그런 뻔뻔한 짓은 예청의 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만일 그 이를 구해만 온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공인해 주겠다고.

물론 나백천은 펄쩍 뛸 것이다, 자신이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살아 있어야 펄쩍 뛸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앗, 그건 정말 예상치 못한 부상(副賞)인데요? 그럼 더 힘내야겠네요. 어차피 최선을 다할 거지만요. 예린을 슬프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나예린에 대한 마음은 어찌 보면 그의 최대의 약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약점 앞에서 그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가진다는 것도 나쁘 지는 않다고, 도리어 그런 약점이 생김으로서 더욱더 완전해졌다고 생각하는 비류연이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약점이라고 벌벌 떠는 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그의 견해였던 것이다.

“자, 그럼 일단 사람을 모아봐야겠네. 과연 몇 명이나 따라나서려나.”

이번 선발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이 될 터였기에, 그조차도 구출대의 인원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을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맡기기로 마음먹고 있 었던 것이다.

“아참, 예린이는 이 일에 데려갈 수 없다. 명심하거라.”

예청이 못 박듯 말했다.

“그러죠…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건 예린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닐까요?”

사실상 이번 납치사건으로 말 못할 고초를 겪었으니 예린도 조금은 쉬어줄 필요가 있긴 했다. 하지만 나예린 본인이 가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자신의 걱정이나 배 려 때문에 예린의 의지를 강제로 꺾을 마음은 없었다. 그 경우 그가 할 일은 예린을 안전한 곳에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녀의 곁에서 함께 뜻을 이루도록 지켜주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부모이자 무림맹의 안주인인 내가 해야 할 결정이야. 이 일은 너무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그 아이가 낀 것을 알게 되면 ‘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도리어 일을 그르칠 수 있느니라.”

‘그란 물론 다름없는 나백천, 팔불출 딸 사랑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비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그럼 그러죠, 뭐.”

평소에도 딸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나백천이다. 그런 그가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서 딸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을 알면, 심지어 구출대가 위기에 처하는 상 황이라도 된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 출발할 수 있겠느냐?”

예청의 물음에는 재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내일 당장이요.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요.”

“내일을 당장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만, 적절한 준비가 필요해서라고 믿겠다.”

당장이라는 말은 ‘오늘’에 한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당연하죠. 일단 같이 갈 사람을 정해야 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좀 정리정돈이 필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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