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입하라!
-대우주의 진리
흑천맹은 호북성의 성도이자 교통 및 군사의 중심지인 무한(武漢)에, 더 세부적으로는 그 무한의 삼대요지 중 하나인 무창(武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한은 교통 면에서 동서 방향의 수로와 남북 방향 육로의 십자로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구성통구(九省通衢:아홉 성의 갈림길)’라 칭해지는 곳이었다. 그만큼 수운이 발달된 곳 이라, 동정호의 강호란도에서 무한까지는 빠른 배를 이용한다면 하루 만에 도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와우, 성벽 한번 높고 멋있네요. 수운의 중심지인 주제에 성벽이라니, 사치스럽다 해야 할지 무식하다 해야 할지.”
비류연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며 비비 꼬인 감탄성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이곳만 이런 거지. 내가 알기론 무한은 물론이고, 무창에서도 성벽에 둘러싸인 곳은 여기 외엔 거의 없다네. 관청을 포함해서 무창의 노른자위는 모두 저 안에 들어 있으니 말일세.”
“그게 문제 아닌가요? 정작 중요한 흑천맹이 저 장대하신 성벽 너머에 있다는 것.”
“뭐, 그건 그러네만, 쩝.”
장홍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 ‘무창 한정’이라는 장대한 성벽에 이어져 있는 성문은 경비를 서는 병사들에 의해 엄중하게 감시되고 있었다.
“이거참, 개미들처럼 열심히들 일하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은걸요?”
비류연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음, 당장에 달려가서 때려눕히고 저 성문을 통과할 생각일랑은 고이 접어두길 바라네.”
혹시나 비류연이 엉뚱하고 황당하고 무식한 계획을 추진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장홍이 서둘러 말했다.
“왜요? 안 돼요?”
비류연의 반문에 장홍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런 경비들이야 한주먹은커녕 한 손가락감도 안 된다지만 문제는 그다음 아닌가. 계획없이 힘만 믿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가는, 우리가 그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 갔다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는 꼴이 된단 말일세. 왜냐하면…..”
장홍의 말을 느닷없이 자르며 비류연이 뒤를 이었다.
“저들에게 이상이 생기는 것 자체가 비상 신호가 되기 때문이겠죠, 위대하신 흑천맹 앞마당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적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장홍이 흠칫하며 비류연을 노려보았다.
“뭔가? 자네, 다 알면서……!”
그제야 비류연이 자신을 일개 해설역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깨닫고 분개하는 장홍이었다.
현재 흑천맹에 떨어진 비상경고 등급은 적색 특일급, ‘흑천령(黑天領)’.
즉, 전시에 준하는 상태 같은 어영부영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쟁 상황 바로 그 순간에 내리는 가장 높은 등급의 비상경고였다. 흑천맹 관련자라면 다들 몸에도 마 음에도 살기등등하게 벼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소굴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그들의 원래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게 된 다. ‘정천맹주 나백천의 구출’이라는 가장 큰 대임(大任)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쉽지만 일단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포기해야겠군요.”
비류연이 으쓱, 어깨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들 구출대의 면면은 너무나 수상쩍어서 아무리 나뉘어 들어간다 해도 지극히 위험했다.
일단 저곳이 관청의 관리를 받는 도시인 이상 통행인의 완전한 차단은 물론 불가능했다. 하지만 성안으로의 출입을 담당하는 정문에서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관 (官)의 병사와 함께 검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흑천맹의 세력이 이 도시의 뿌리까지 미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문(軍門)에 관계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흑천맹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매수를 하는 데 돈도 아낌없이 부었으리라.
흑도무림총연합회인 흑천맹이 지난 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곳이다. 이 무한에서 칼을 잡는 모든 사람이 흑천맹의 색으로 물들었다 해도 결코 놀라운 일 이 아니었다. 이미 저곳은 국가의 관리를 벗어난 또 다른 세계였다. 오직 강호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무림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현재 구출대 내에서 길잡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장홍이 물었다.
“일단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죠, 좀 더 은밀한 방법으로, 예를 들면 변장이라든지…….”
“변장이라……. 흠, 그건 괜찮은 생각이군.”
그때 함께 따라온 금영호가 불쑥 끼어들더니 말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떠돌이 예인으로 분장하는 게 어떨까요?”
노상에서 공연을 하는 떠돌이 예인들이라면, 큰 짐이나 무리한 충돌과정 없이 어찌어찌 될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각자 재주꾼으로 변장하고, 여자들은 서역 쪽에서 온 무희들로 변장하는 겁니다!”
이렇게 끝내주는 생각이 어디 있냐는 투로 금영호가 말했다. 교양이 깊고 박식했던 장홍은 그의 말을 가장 먼저 알아들었다.
“서역의 무희라면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에서 온 ‘그…’ 말인가?!”
“그렇죠, ‘그’배꼽이 드러나는 의상을 입고 허리를 요염하게 흔들면서 춤을 추는 무희들 말입니다.”
그 제안에 아저씨 장홍은 격렬한 반응으로 적극적인 찬동 의사를 보였다.
“오호, 그것참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일세! 탁월하군, 탁월해!”
금영호는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무희 변장 시의 주의점은, 아주 얇은 천 쪼가리로 가슴하고 허리 쪽만 감싸는 게 핵심이라는 겁니다. 필히 기억해야 할 사항이죠.”
“그렇지. 자네가 몸은 좀 뚱뚱해도 뭔가를 아는군. 배꼽은 우주의 중심이고, 허리와 허벅지는 우주의 순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
장홍이 본인의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다. 옥유경이 이 자리에 없기에 그는 두려움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오오, 그런 고견(高見)이! 그럼 가슴은 무엇입니까?”
금영호가 장홍의 식견에 찬탄하며 반문했다. 이미 잠입이라든지 구출이라든지 하는 본목적은 머릿속에서 까마득한 별나라로 날아간 표정이었다. 그의 두 눈은 오 로지 설법을 듣는 사람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장홍은 경건한 동작으로 합장하며 말했다.
“그것은 대우주의 의지 바로 그 자체라네. 우주의 신비 그 자체이자 심오한 이치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네.”
“오오오, 심오한 이치?! 어서, 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금영호가 장홍을 향해 정중한 존댓말로 가르침을 구했다. 학년의 고하나 구출대의 잠입 따위는 이 지혜의 ‘덕(德)’을 함양하는 덕력함양장(德力涵養場)에서는 아 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자리에는 그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구하는 자,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자네 혹시 직선적 무공과 곡선적 무공의 차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아하, 그런 이론을 들어본 것 같습니다. 곡선적인 무공이 직선적인 무공보다 더 위력적이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요?”
“허허, 바로 그걸세. 밋밋하고 뻣뻣한 것보다, 굴곡이 져서 굽이치는 게 더 위력적인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 말에 금영호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하, 확실히 그것이 더 뇌쇄적이지요! 그 이치를 이제야 깨닫다니!”
잠시 금영호는 자신의 늦은 개안에 대해 한탄했다. 사실 평생 눈을 뜨지 않는 게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닐세.”
“오오, 여기서 보다 더 깊은 이치가?!”
투실투실한 금영호의 두 눈은 지금 마치 최절정의 무공 기연을 얻은 무림인처럼 형형(炯炯)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협들이 슬금슬금 두 사람의 주위 로부터 한 발짝 두 발짝씩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불대대익선(不大大益善), 불소소익악(不小小益惡)!”
장홍의 입에서 구결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고, 작다고 다 나쁜 게 아닐세. 조화(造化)의 이치와 중용(中庸)의 이치를 품고 있어야 진정 아름답다는 진리의 발현이지!”
“오오오오오!”
“더군다나 그 신비함과 묘용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때때로 그것은 생명을 키우고, 때때로 그것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할 사람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의 등불이 되기도 한다네!”
누가 들으면 여인의 가슴에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는 신비한 힘마저 있다는 소리로도 들릴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어디 가서 교단을 하나 창시해도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최초의 신자가 금영호가 될 듯한 그 교단엔 아마 여신도의 존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지만.
“오오오오! 그런 신비가! 그게 사실입니까?”
“여기 그 증거자가 있지 않은가! 바로 여기 자네 눈앞에! 자네는 눈앞의 증거를 보고도 믿지 못하겠단 말인가?”
장홍은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며, 찬양하라는 듯한 말투로 금영호를 엄하게 꾸짖었다. 최소한 장홍의 눈에 깃든 그 빛은, 뭔가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않은 자는 결 코 얻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강력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 그런 신비한 힘을 가진 ‘그것’이 이 세상에 있단 말입니까!”
있다면 부디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달라는 눈으로 금영호가 두 눈을 번쩍였다.
한 발 두 발 멀어지던 여인들은 이미 그들의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반대로 몇몇 남자들은 그들을 향해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처럼 한 발짝씩 다가오고 있었 다. 그리고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는 끌리는 자들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먼 산을 보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장홍이 금영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이미 ‘그것’을 본 적이 있네!”
금영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그럴 수가!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닐세. 자네는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려 하지 않은 것일세! 최고의 그것을! 그 완벽한 황금률을 지닌 우주의 신비를!”
우주의 신비가 깃든 그것이 옆에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다니, 금영호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아아, 제 이 못난 두 눈을 도려내 버리고 싶을 뿐입니다! 제발 제 불민한 눈에 광명(光明)을 비추어주십시오!”
그게 광명일지, 그의 앞으로의 인생을 가로막을 암운(暗雲)이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장홍은 마치 순백(白)의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지는 청명한 하늘 을 바라보듯 눈을 지그시 떴다. 그의 시선은 평안함과 그리움을 가득 담은 채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얼마 전 떠나왔던 강호란도 쪽을 향한 시선.
장홍은 어리석은 중생의 무지를 밝히겠다는 소명감으로, 그를 교주처럼 우러러보는 자들을 향해 한 이름을 외치려 했다.
“나에게 구원을 내려준 그것은 바로 옥……!”
바로 그때.
이 모든 이의 무지를 일거에 깨뜨려 줄 용음(龍吟)이 터져 나오려는 바로 그때,
“닥쳐요!”
빠―악!
그 순간 장홍의 목이 반대로 꺾였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게 머리를 가격당하고 만 것이다. 너무나 재빠른 순신(瞬身)에 장홍은 그만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기습?!”
“적이냐?!”
염도와 빙검이 가장 먼저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에 뒤질세라 다른 구출대원들도 병장기를 꺼내 들고 기습에 대비한 방어 및 역공태세를 갖추었다.
“감히 장 형을…… 안녕하세요!”
급분하여 외치던 모용휘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하게 바뀌었다. 그는 상대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비굴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공손해 진 것은 나타난 사람이 다름 아닌 ‘옥유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격분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격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옥 교관님, 여긴 어떻게…….”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맹주 구출. 옥유경은 흑도의 사람이니, 위치가 어떻든 함께 데려올 수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따라오려던 무명과 옥유경을 떼어놓고 움 직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단 말인가?
“우,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다.”
빨갛게 익은 얼굴을 감추듯 돌리며 옥유경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구출대 모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혼자 오신 거 아니죠?”
그렇게 질문한 것은 비류연이었다. 그의 시선은 옥유경이 뛰쳐나온 풀숲을 향해 있었다. 다른 구출단의 시선도 그곳을 향했지만, 무사부 급 밑으로는 아무런 기척 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옥유경이 약간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에 영 서툰 성격인 것 같았다. 흑도라고 해서 모조리 속고 속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 이었다.
잠깐 한숨을 내쉰 다음 옥유경이 풀숲을 향해 말했다.
““나오너라.”
그러자 풀숲이 부스럭거리더니 한 여인이 걸어나왔다. 검은 옷을 입고 앞머리로 왼쪽 눈을 가린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보고 나예린이 반색하며 외쳤다.
“령 언니!”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영령이었다. 그녀는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다분했는데, 아무래도 나예린의 호의와 호칭에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 는 듯했다.
나예린이 옥유경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옥 교관님?”
지금쯤 강호란도에 있어야 할 영령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따라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니 어쩌겠느냐? 데려올 수밖에.”
자신을 쳐다보는 그 하나밖에 없는 눈이 너무 간절했기에 옥유경은 도저히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령은 그녀가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여겨보던 인재가 아닌가? 어차피 근래의 영령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 보였기에, 그냥 두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면 한순간에 망가질 수도 있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옆에서 두고 관찰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잠시 옥유경의 눈을 쳐다보던 나예린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옥 교관님. 령 언니에게 그렇게 신경 써주셔서.”
그 깍듯한 인사에 혈옥선자라 불리는 옥유경도 약간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흠,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괜찮다. 원래 내 밑에 두려고 했던 아이이고, 저 아까운 자질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당돌하게도 자기를 안 데려가면 우리가 숨어들려는 것을 큰 소리로 외치겠다고 하더구나.”
옥유경은 어떻게 보면 화난 듯도 했고, 어떻게 보면 부끄러워하는 듯도 했다.
“그래도 전 감사하고 싶습니다.”
나예린의 투명할 정도로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옥유경이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굳이 감사하겠다면 거절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예린은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인 다음, 이번에는 빙검과 염도를 향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 노사님, 힘든 부탁인 줄 알지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령 언니를 일행에 넣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빙검이 영령을 한 번 흘깃 쳐다본 다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저 아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애매한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영령은 아직 원래의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이상, 그녀는 여전히 몽환산장의 영령으로 흑도의 사람이자, 어쩌면 천겁령의 비밀 세 력하고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정신이 어떤 식으로 주물럭거려졌을지는 당사자인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즉, 언제든지 그녀는 그들의 행적을 적들에게 노출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맹주 나백천의 구출 작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위험성이 다분했다. “네 아버님이시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쓸 수 있겠냐고 빙검은 묻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그 사실을 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책임지고 옆에 붙어 있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개인이 아닌 백도의 맹주이기에, 아무리 영령이라 해도 그녀 자신이 책임지고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도 예린의 의견의 찬성이에요.”
지금껏 잠자코 있다가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빙검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기에서 져서 어린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곤 해도, 이런 중대한 일에 그의 의견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우리랑 만난 이상, 우리들의 행적은 이미 이분들에게 노출되었다고 봐야겠죠. 이대로 돌려보냈다가 우리가 안 보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다?”
비류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죠. 게다가…….”
“게다가?”
비류연의 고개가 다시 옥유경과 영령이 숨어 있던 수풀 속으로 향했다.
“저기 또 한 분이 계신 것 같거든요!”
그 말에 구출대 전원이 깜짝 놀랐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빙검과 염도였다.
누가 또 있다고? 이렇게 똑바로 쳐다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데? 설마 이 어린 사부가 그들에게 장난친 것은 아닌가? 그런 의혹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때.
부스럭부스럭.
“아, 이런! 들켜 버렸네.”
아무런 기척도 없던 풀숲이 부스럭거리며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방금까지 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듯, 졸음기가 묻어 있는 허름한 옷의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마천 십삼대의 육번대 대장 무명(無名)이었다.
“이런, 설마 두 명일 줄은 몰랐는데…….”
비류연의 얼굴에서 좀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없는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풀숲을 헤치고 나온 것은 한 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대체 뭔가요?”
비류연이 쌀자루처럼 무명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소옥이? 우리가 배에 탈 때 남들을 방해할까 봐 미리 잠재워 놨다네.”
무명이 짊어진 ‘그것’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부대장 장소옥의 시신…… 처럼 보이는 몸이었다. 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그의 무공이 비류연 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현재 죽은 듯이 기절한 채 무명의 어깨에서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지가 밑으로 축 처진 게 저거 죽은 거 아 냐?”라는 의심이 저절로 드는 모양새였다.
“잠재운 것치고는 어쩐지 뒤통수가 좀 불룩해 보이는데요?”
“하하, 원래 우리 부대장이 뒤짱구라네. 선천적인 거지.”
“그렇다기엔 색상도 형태도 어째 상당히 최근에 생긴 것 같네요.”
웃차 하고 장소옥을 내려놓던 무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몇 군데 혈도를 풀어주는 척하면서 장소옥의 뒤통수를 미묘한 각도로 안 보이게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 건 역효과였다. 뒤통수를 뒤로 돌리니 자연히 얼굴이 일행을 향하게 되었는데, 장소옥의 이마 한쪽에도 시퍼렇게 멍든 혹이 솟아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그가 배에 숨어들 때 방해할까 봐 때려서 기절시킨 다음, 추가로 혈도를 짚어 가사 상태로 만들어놓고 짐짝처럼 들고 다녔던 듯했다.
그리고 그 김에, 최절정고수인 염도와 빙검의 이목을 속이고 구출대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무공이 달리는 장소옥을 계속 기절시켜 놓는 쪽을 선택했던 모양이 다. 모시는 대장을 잘못 만난 게 그의 죄라면 죄였다.
잠시 후, 축 늘어져 있던 장소옥이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뒤통수를 붙잡고 미간을 찌푸린 채 앉은 장소옥이 주위를 둘러보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지? 난…… 난 누구? 여러분은 누군가요? 내가 왜 이런 곳에…….”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 같은 반응이었다. 옥유경이 약간 날카로운 눈으로 무명 쪽을 쳐다보았다.
“이런 내가 좀 세게 쳤나?”
무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윽, 머리가……. 어, 이런 데 언제 혹이……?”
소옥은 이마 한쪽에 손을 올리며 신음했다.
“어라? 글쎄, 언제 멍이 생겼을까? 그것참 신기한 일도 다 있군.”
가만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무명은 괜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 말에 알 수 없는 자극을 받은 것일까.
장소옥이 갑자기 번쩍, 눈을 뜨더니 무명을 쏘아보며 외쳤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대장님?!”
그 모습을 보고 옥유경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좀 전의 기억 혼란은 일시적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험험, 소옥이도 알잖아? 나 원래 기억력이 나쁜걸. 기억이 안 나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 애석한 일이야. 기억이 나면 참 좋을 텐데…….”
과연 대대로 육번대 부대장들에게 위장병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전설의 무명. 그는 장소옥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하는 어설픈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장소옥 을 순진무구한 눈으로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의 시치미를 떼는 모습은 이미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런 얼굴로 보셔도 소용없어요! 아무튼 딴 건 다 넘어간다 쳐도, 절 여기까지 억지로 끌고 온 건 대장님이니까 책임지셔야 해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투로 장소옥이 말했다.
“책임? 어떻게?”
장소옥은 잠시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좋아.”
무명은 생각할 건더기도 없다는 듯 단숨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자신에게 유리한 건수를 하나 잡은 것이다.
“그럼 당장 부탁을 말할게요.”
“응? 지금 당장? 그건 좀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장소옥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일회용 청탁권을 장롱에 넣어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리가요! 대장님께서 며칠 안에 그 일회용 청탁권의 존재 자체를 까먹는다에 이 장소옥, 전재산을 걸 수 있습니다!”
그 단호한 판단력에 무명은 순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장의 말이 너무 타당해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음, 그래서 소옥이 자네의 부탁은 뭔데?”
마지못한 말투로 무명이 물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행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장소옥을 주시했다. 이렇듯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공개 약속을 했으니, 억지 부 릴 틈도 없이 무명은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터. 과연 장소옥의 부탁은 뭐가 될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뒤이은 장소옥의 부탁과 무명의 반응은 대다수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고 말았다.
“마천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대장님도 같이.”
다른 건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
무명은 처음으로 기습이란 걸 당해본 무림고수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다음 안색을 회복하고는 말했다.
“다른 부탁 없어?”
즉, 이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그럼 저만이라도 보내주세요.”
장소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휴가는 그의 팔팔한 생명을 마구 깎아먹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음, 그것도 안 되겠는데? 다른 부탁 없어?”
“왜요? 전 어차피 별로 본 것도 없으니까 돌아가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게요.”
“응? 그게 아니라, 원래 대장을 보좌하는 게 부대장의 역할이잖아. 소옥이 없으면 난 어쩌라고?”
치매 걸린 내 수발은 누가 들어줘? 거의 그런 말처럼 들렸다. 대장님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소옥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 사람들을 따라가시겠다는 거군요?”
“응!”
무명이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옥은 솟구치는 혈압과 위산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크게 천천히 내쉬었다.
“하아… 역시 안 통할 것 같더라니. 좋아요. 하지만 저한테 부탁 하나 빚지신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증인이니까 나중에 억지부리실 생각은 말고요!” “걱정 마, 그건 절대 안 잊을 테니까.”
절대적으로,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장소옥은 품에서 휴대용 지필묵까지 꺼낸 다음 무명에게 친필로 그 사실에 대해 명기하도록 했다.
“소옥은 항상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녀?”
“항상 기억이 가물가물하신 대장님을 보좌하는 부대장들에게는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죠. 증인만으로는 부족해요. 이런 것도 있어야 나중에 대장님이 발뺌을 못 하실 것 아니에요?”
“그건 그래. 똑똑하네.”
발뺌하지 않을 거라며 부정하지도 않는다.
“선인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죠, 수많은 희생 속에 쌓아 올려진.”
그렇다. 이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육번대 부대장들이 남긴 ‘치매대장 대비책’이었던 것이다.
〈극비! 튼튼한 위장을 위한, 치매대장 다루는 법!>이라는 비급서에 그는 얼마나 많은 구원을 받았던가!
대대로 육번대 부대장에게 전해져 내려온다는 그 책이 없었다면 장소옥은 애저녁에 위에 구멍이 난 채로 사번대에 실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자, 이야기가 그렇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구출대를 돌아보며 무명이 활짝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들이 자신을 합류시켜 주는 데 대해 아무런 의구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명과 장소옥의 만담을 지켜보며 비류연은 골치가 아픈지 미간을 모았다. 귀찮은 상대가 따라붙은 것이다. 그의 위험도는 옥유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사시, 옥유경은 여차할 경우엔 염도나 빙검 중 한 명만 있어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명은 여전히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강제 개입할 경우, 사태를 무사히 수습할 수 있을까?
항상 천상천하유아독존 급의 자신감 넘치는 비류연에게 이런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무명은 그런 존재 중 하나였 다. 무명은 비류연조차 그 파급효과를 예측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변수 중 하나였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강호란도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 사실 그들 구출대의 뒤만 쫓아오는 게 아니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역시 힘으로라도 쫓아내야 할까? 그렇게 될 경우 이쪽의 피해는 어느 정도가 될 것인가? 옥유경은 과연 누구 편을 들게 될 것인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비류연의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라고. 어차피 방해할 생각도 없고, 지금은 휴가 중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따라가기는 할 거란 얘기였다. 아무래도 이 거머리 아저씨를 여기서 떨쳐 내는 것은 힘들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말 정말이에요?”
미심쩍다는 투로 비류연이 물었다.
“그럼, 정말이지.”
무명이 걱정 말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믿어보죠.”
그리하여 무명과 옥유경의 합류는 기정사실화되었다.
어째 구출대의 결정권이 염도와 빙검이 아닌 비류연에게 있는 듯한 분위기에, 주작단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염도와 빙검은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 가운데 어디선가 희미하지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한 사람 잊은 사람 없나?”
대체 누구 목소리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끼아아아아아악! 귀, 귀신이다!”
마하령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더니 옆에 있던 용천명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용천명은 약간 부끄럽긴 했지만 그다지 싫지 않다는 얼굴로 마하령이 말한 ‘귀 신’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한 사내가 왼쪽으로 목이 꺾인 채 이곳을 보고 있는 것을. 조금 전 옥유경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장홍이었다.
“용케도 아직 살아 있네요.”
비류연이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목이 거의 수직으로 꺾인 것 같은데 아직 살아 있다니, 신기할 뿐이었다.
“해외 유학 중에 배운 기술일세. 하지만 부작용이 있어서 혼자서는 원래대로 돌리기가 힘들어. 좀 도와주게.”
원래는 목이 돌아간 채 땅에 드러누워 죽은 척하는 기만기술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옥유경의 분노로부터 그 기술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몇몇 우두둑 꽈드득 소리가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장홍의 목이 제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옥유경 앞에서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 다.
‘역시 지금까지 모든 불의의 사고는 사실 고의적이었던 거 맞죠?”라고 묻는 그녀의 시선에 그가 어찌 감히 ‘그, 그것은 대우주의 인도였을 뿐이오’라고 답할 수 있 겠는가. 목숨이 아깝다면, 그리고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싸늘한 공기 속에서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눈치없이 끼어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저, 그런데 계획은, 제가 제출한 그걸로 가는 건가요? 정말 끝내주는 계획인데……. 안 그래요, 서역 무희 변장 계획?”
그 존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성들의 무시무시한 눈총에 맞아 고슴도치 신세가 되었다. 명백한 비난과 경멸의 시선이었다. 아무리 눈치없는 금영호라지만, 그 농후한 살기 어린 시선에는 후덜덜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옥유경도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음란한 계획은 허락할 수도 없을뿐더러, 현명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어째서입니까, 옥 교관님?”
그러나 옥유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대답해 줄 의리가 없다는 듯이. 그녀는 흑천맹주 살해의 의혹을 받고 있는 나백천을 구하러 가는 구출대를 도와줘야 할 의리가 없었다. 사실 그들을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녀의 행동은 선을 넘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다 장홍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좋 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 차라리 따라오지를 말지!’라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었던 것이다. 그 애매무쌍한 상태를 타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장홍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기서 검문하는 인간들 중엔 그자가 끼어 있었군. 안 그렇소, 유경?”
일개 관도가 마천십삼대 제칠번대 대장인 옥유경의 이름을 함부로, 그것도 성도 빼고 존칭도 빼고 ‘유경’이라 부르다니,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을 아는 몇몇은 그저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원래 비상시가 되면 외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건 남문밖에 없는데, 저 남문의 검문 담당자 중 한 명은 나도 아는 얼굴이야. 이쪽에서 유명한 ‘눈썰미의 강목(强 目)’이라 불리는 자지. 어떤 변장도 짚어내는 자로 이름이 높아.”
장홍이 검문소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유난히 두 눈이 크고 눈빛이 사나운 회색 수염의 사내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오?”
“그렇다네. 그는 어떤 무림인이 어떻게 변장하든 그가 무림인인 걸 알아볼 수 있거든. 그는 선천적인 투기나 살기 같은 것을 감지하는 것이 아주 뛰어난 인간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민감한 감각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무척 신경질적이긴 하지만, 숨어서 들어오려는 무림인을 색출해 내는 데 저만한 자는 없지. 솔직히 어지간해 서는 그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 걸세. 게다가 저런 눈썰미 없이도 금방 눈치채일 수 있는 분들이 우리 중에는 몇 분이나 계시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염도와 빙검을 훑었다. 사실 그들의 형색은 너무 특이해서 숨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무림인이기를 감추고 들어오는 무림인이라면 참 수상쩍어 보이지 않겠어? 잡아다가 어두운 지하실에 가둬두고 이런저런 고문을 해보고 싶을 만큼 말이야.”
확실히 생각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았다. 고작 성문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해서야 어떻게 맹주님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모 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을 때, 비류연이 짧게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무림인인 채로 들어가야겠군요.”
“…….!”
모두의 시선이 비류연에게로 향했다.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그러나 장홍의 반응은 달랐다.
“오, 그거 기발하군.”
“……?”
어떻게 하면 무림인인 걸 숨기고 들어가나 하는 질문에, 무림인인 채로 들어가자고 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나. 둘이 함께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어린 시선들이 장홍과 비류연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비난의 시선들은 익숙한 것이었기에, 비류연은 물론이고 장홍도 꼼짝하지 않았다. 비류연 옆에 있다 보면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무림인인 채로 들어가면 저자의 눈썰미도 소용이 없겠지.”
장홍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좋은 곳이 한 군데 있죠.”
비류연의 입가를 타고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게 어딘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써먹기 좋은 곳을 비류연은 한 곳 알고 있었다.
씨ᅳ익!
양쪽 눈이 앞머리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바람에 찰랑이는 앞머리 아래에 그려진 그 미소가 더욱더 인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비류연과 구출대의 대원들은 또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모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 움직임이 앞으로의 여정에 얼마만큼 막대한 장벽이 되어 그들 을 가로막을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