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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2화


벽리군은 하루하루를 외줄 타는 심정으로 보냈다.

무림에 나간 살문 살수들이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병기를 취하려다 되려 당하지는 않았는지, 자신들의 은거지가 하오문이나 개방에게 노출되지는 않았는지, 정보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외장 문도들이 이탈하지는 않는지……

모든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예전처럼 종리추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정보가 하남에 너무 편중되어 있어. 중원 전역으로 넓힐 방도는 없나?”

“돈이……”

벽리군은 고소(苦笑)를 지었다.

은자 구만 냥이면 엄청난 돈이다. 하지만 종리추와 같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오만 냥이라는 돈이 허공에 흩어졌고 남은 돈도 얼마나 갈지 알지 못한다.

살문에 정보를 주는 사람들은 돈 맛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돈을 챙기기 위해 정보를 준다. 만약 살문이 그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구파일방으로 달려가 역정보를 제공하고 은자를 챙길지도 모른다.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버릴 수 없는 것, 그것이 돈으로 정보를 사는 대가다.

물론 그들이 이반한다 해도 은거지가 노출될 위험은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철저히 점 조직으로 운용해 왔기 때문에 외장 문도 한두 명이 걸려들 수는 있어도 큰 타격은 받지 않는다.

살문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이 큰일이다.

중원무림은 살문이 멸문했다고 알고 있는데 살문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뒷감당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렇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니.”

종리추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벽리군의 거처를 찾았고, 중원에서 전해오는 소식을 꼼꼼히 점검했다.

그도 중원에 나간 살수들이 염려스러운 것이다.

한 장, 한 장 전서(傳書)가 넘겨졌다.

“차를 끓일까요?”

종리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서에 집중했다.

벽리군은 찻물을 올려놓았다.

연모하는 님… 남들이 알면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그와 이렇게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와 단둘이 한가한 오후를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벽리군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산책을 한다.

햇볕을 받지 않은 음기(陰氣)가 가득 깃든 샘물을 걷기 위해서다. 오후, 종리추에게 차를 끓여줄 생각을 하며.

주전자에서 다향(茶香)이 은은하게 우러나왔다.

“오늘은 희소식이 있어요. 혈살편복이 방절편을 얻었대요. 귀영방은 죽었고 깨끗하게 화장(火葬)까지 했다니 종적이 드러날 염려는 없어요.”

“……”

오늘 날아온 소식 중에 가장 기쁜 소식이다.

종리추는 그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연하다 못해 무심하게까지 보였다.

‘젊은 사람이 사오십 먹은 능구렁이 같아. 풋!’

벽리군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이로 비교하면 한참 어린데… 자신이 첫 성교를 할 때 종리추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아이를 가졌다면 종리추만한 자식이 있을 텐데……

그런데도 종리추가 어린 사내로 보이지 않는다.

나이 어린 사내는 비린내가 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종리추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이 어린 사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문득 벽리군은 자신의 행복이 깨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전서를 들여다보는 종리추의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녀는 오늘 들어온 전서 내용을 다시 상기해 봤다.

‘특이한 사항은 없는데…… 혈살편복이 방절편을 얻었고… 뒤처리도 깨끗하고 퇴로도 활짝 열려 있어. 아무 이상 없어.’

이상 없지가 않다.

종리추는 미간에 내천(川) 자까지 그려가며 고심하고 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오늘 들어온 전서 중에.

찻물이 끓고 있지만… 벽리군은 우두커니 앉아 종리추만 바라봤다. 이럴 때는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까닭이다.

“천정홍에게 배를 대라고 해줘.”

종리추는 나갈 심산이다. 자신이 직접 중원무림으로……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

“네.”

“모진아를 데려갈 거야. 여기는 텅 비게 되니 각별히 경계에 신경 써주고.”

“모, 모진아까지요?”

절세고수 두 명이 한꺼번에 움직일 만한 일이 있었나? 종리추가 중원에 나가는 것만도 획기적인데 모진아까지 데려갈 정도로 중대한 사태가 있던가?

“약간이라도 기미가 이상하면 깊숙이 숨어. 천부를 버려도 좋아. 나와는 무슨 방법으로든 연락이 될 테니… 명심해. 약간이라도 기미가 이상하다 싶으면 깊숙이 숨어.”

“네? 네.”

종리추는 살문이 멸문당하기 직전처럼 긴장해 있다.

종리추가 거처로 돌아간 다음 벽리군은 종리추가 보던 전서를 들여다보았다.

특이한 내용은 없다.

산동성(山東省)에서 농사를 짓는 황엽(黃曄)이라는 자가 물어온 정보로 개방 거야(巨野) 분타 걸개들이 남왕호(南旺湖)로 집결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게 도대체……?’

벽리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붓을 들었다.

산동성에서 암약하는 외장 문도들에게 보내는 전서로 개방 걸개들의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하라는 지시를 담았다. 단서도 썼다. 정보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체가 발각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벽리군의 거처를 나온 종리추는 항상 무공을 수련하던 강변으로 갔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알몸을 들이밀자 뼛속까지 얼릴 듯한 한기가 밀어닥쳤다.

천정홍에게 배를 대라고, 모진아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뭍으로 나간 천정홍이 전서를 받고 배를 대려면 적어도 두어 시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묵은 때를 밀어내고 부스스하던 머리도 감았다.

‘잘한 결정인지……’

천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병기를 빼앗고자 무림에 나간 수하들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문의 형체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도 있다.

과연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일인가.

‘중원무림은 천천히 강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완벽하게 강한 상태여야만 돼. 점점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흠 잡을 데 없는 강자가 되어서 나타나야……’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순수한 육체의 강인함으로 혹한의 겨울 강물과 맞닥뜨렸다.

‘됐어! 고민은 그만! 하늘이 되든가 지하로 숨든가 둘 중에 하나라면… 하늘이 되고자 했으면 고민할 필요 없어.’

이제는 정말 중원으로 나간다.

중원무림…… 나간다 생각했고 준비도 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천부에서 보내는 마음 편한 삶이 좋았다. 무공 수련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땅을 갈며 살고 싶었다.

천정홍이 몰고 올 배를 타고 강 저쪽으로 건너가면… 다시는 천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가 강을 건너는 순간 중원무림과는 별개였던 천부가 중원무림의 한 부분에 속해진다.

그가 다시 천부로 돌아와도 천부는 변해 있으리라.

중원무림이라는 이름 속에.

‘가자. 휴우! 무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하늘이 되어야겠지. 사무령이라… 후후! 좋아, 이젠 내 의지다. 내 의지로 사무령이 되는 거야. 지금까지는 떠밀려 왔지만 이제는 내가 이끌어간다. 벗어날 수 없다면 헤쳐 나가야지.’

종리추는 번뇌를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냈다. 살갗을 스치고 지나는 강물이 마음속에까지 파고들어 번뇌를 씻어갔다.

그 역시 고민하고 번뇌하는 인간이었다. 수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

철썩……!

강물에서 몸을 일으키던 종리추는 화들짝 놀라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던 그였건만 이런 상황에서는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린… 그녀가 강 언덕에 앉아 방실방실 웃으며 목욕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심했어.’

종리추는 자신을 질책했다.

어린의 무공이 모진아와 비무한 그날부터 놀랍도록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살수였다면 적어도 한 번은 공격할 만한 빌미를 준 셈이다.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른데?”

어린은 춥지 않느냐는 둥 염려의 소리보다는 놀리기에 바빴다.

종리추는 상대가 어린이라는 것을 알자 알몸을 일으켰다. 물방울이 푸시시 떨어져 나가며 건장한 육체가 드러났다.

“와! 아무리 봐도 괜찮아.”

종리추는 어린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걸어 나와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어린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낯빛을 굳혔다.

“뭐, 뭐……! 설마……!”

어린의 예감은 사실로 드러났다.

언제 신법을 전개했는지 대여섯 장이나 떨어져 있던 종리추가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왜, 왜……”

어린의 말은 중도에서 막혔다.

건장한 사내의 가슴에 얼굴이 묻히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몸이 허공에 들렸다. 옷자락이 들춰지며 매서운 겨울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종리추가 있기에 포근했다. 그의 사랑이 있기에.

벽리군은 느닷없이 찾아온 어린을 보자 잠깐 당황했다.

“어, 어쩐 일로……?”

“차를 잘 끓이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맛 좀 볼까 하고 들렀는데 차 한 잔 주실 수 있죠?”

“아, 앉아요.”

벽리군은 지은 죄가 없으면서도 허둥거렸다. 침착함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어린이 그녀를 찾아온 적은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어린은 물론이고 배금향이나 구맥 등도 눈치를 챈 듯하다. 살문을 벗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라고 부르던 배금향이 요즘 들어서는 ‘총관’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아침저녁으로 식사 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는 일조차 고역스러웠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신의 초막으로 돌아와 혼자 있곤 했는데……

“아기는 없었나요?”

“예? …예.”

벽리군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기녀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아기 문제다. 그토록 조심을 해도 일 년에 기녀들 중 절반은 아기를 갖고 만다. 그중에는 특히 아기가 잘 들어서는 기녀도 있어서 아기 때문에 기녀 생활을 못하고 거리의 창기로 몰락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아기가 생겼을 경우 기녀들은 독초(毒草)를 복용하여 유산시킨다. 몸이 상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래도 유산되는 경우는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아기는 될 수 있는 대로 갖지 말아야 하고 낳지 말아야 한다.

아기를 낳아봤자 길러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니 갖다 줄 사람도 없다. 결국 두고두고 인생을 갉아먹는 흙이 되어 버린다.

남들에게는 축복이 될 임신이 기녀들에게는 천형이다.

그런 면에서 벽리군은 축복받은 기녀다.

그녀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남자와 관계만 가졌다 하면 임신을 하는 기녀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오히려 입덧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서 아기를 가져봤으면 하는 생각까지 가졌다.

“독초를 복용했어요?”

어린은 아픈 부분을 서슴없이 건드렸다.

“아뇨,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어요.”

“그럴 수도 있어요?”

벽리군은 싱긋 웃었다.

어린은 참 천진하다.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면 세상살이에 물들기 시작했을 텐데 어린은 그런 모습을 전혀 비치지 않는다. 철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린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터이지만 그녀와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참 맑은 여인이다’라는 생각을 할 게다.

어린은 아픈 부분이지만 자신이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다. 그럴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고.

“있죠. 세상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도 많아요. 제가 그런 여자 같아요.“

“어멋! 세상에……”

“차 들어요.”

종리추를 위해 새벽 바람을 맞으며 길러온 찻물이다.

오늘 그는 마시지 않았고 그의 여인이 마신다.

“정말 향긋하네요.”

“좋아요?”

“네.”

“아기 소식은 없어요?”

“그게 없네요. 언니는 벌써 낳았는데……”

어린이 언니라고 부르는 여자는 정원지다.

그녀와도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유구가 종리추의 노예를 자처해서인지 스스럼없이 지냈다.

정원지가 모지를 낳았을 때 가장 반색을 한 사람도 어린이다. 아마 유구와 버금갈 만큼 기뻐했을 게다.

‘아이를 갖고 싶은 거야.’

벽리군은 사랑하는 님의 여인이지만 어린 친동생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녀도 어린처럼 스스럼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싶다. 모지를 대하는 태도가 유난히 각별한 어린처럼 자신도 모지를 껴안고 싶고 똥오줌도 받아주고 싶다. 고사리처럼 앙증맞은 손을 휘두르는 갓난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혼인은 안 할 거예요?”

“혼인요? 했잖아요?”

“……?”

“상공이 어머니께 진주 목걸이하고 금팔찌를 선물했어요. 날 데려가기에는 형편없지만… 봐주기로 했죠 뭐.”

벽리군은 고소를 지었다.

그것이 혼인인가?

“그런데… 상공과 어쩌실 거예요?”

벽리군은 느슨하게 풀어지던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 전……”

“……”

어린은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벽리군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데…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상공을 좋아하죠?”

“……”

벽리군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했다. 설마 어린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올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홍리족은 한 여자가 여러 사내를 거느릴 수는 있어도 한 사내를 여러 여자가 갖지는 않아요.”

“……”

유구무언(有口無言).

벽리군은 목이 타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침조차 말라붙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것도…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들이켜고 싶지만 찻잔을 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급히 내려놓았다.

어린이 계속 말했다.

“우리 홍리족도 정분(情分)이란 게 날 수 있어요. 사내가 정분이 날 경우에는 거세(去勢)시키고 가둬뒀다가 전쟁이 났을 때 제일 앞에 세워요. 그런 사내는 죽어도 마을 묘지에 묻히지 못해요.”

어린의 말은 점점 끔찍해졌다.

“여자의 경우는 사내들을 모두 잃어요.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사내들을 남편으로 맞아야 돼요. 바보가 되었든 병신이 되었든…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같이 살아야 해요.”

어린은 간통이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사내에게는 참혹하고 여인에게는 관대한 처분이다. 아니, 더욱 잔인할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와 산다는 게 얼마나 지독한가.

“어떡하실 거예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단지……”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다고요?”

‘그래요.’

대답은 목구멍 너머로 숨어들었다.

어쩐지 대답하기가 염치없는 것 같았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종리추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지 않은가. 그의 아내 앞에서 벌써 시인을 하고 말았지만.

“휴우! 언니, 정말 상공을 사랑하는군요?”

‘그래요. 사랑하죠.’

“상공이 죽을 때 같이 죽을 수 있어요?”

‘그럼요. 같이 죽을 수 있죠.’

“상공이 죽으면 같이 죽을 수 있냐고요. 대답해 봐요.”

이게 철없는 여인인가? 종리추를 이야기할 때의 모습은 현자(賢者)가 진리를 탐구할 때보다 진지했다. 아니, 진지하다 못해 정열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휴우!’

벽리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떠날 때가 된 거야. 어린은 내가 문주 곁에 있는 것도 싫은 거지. 호호, 언감생심… 내 주제에……’

탁!

벽리군은 탁자 위에 올려진 단도(短刀)를 보며 생각을 멈췄다.

어린이 단도를 꺼내놓은 속뜻은 무엇인가? 떠나는 것을 종용해서 죽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생사양단을 가르겠다는 말인가.

“상공이 절 처음 가졌을 때 전 이걸 준비했어요. 상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죽으려고요.”

“…..”

“죽을 수 있어요, 없어요?”

“이, 있어요.”

벽리군은 결국 마음속 말을 꺼내놓고 말았다. 단도까지 꺼내 보이며 진지하게 묻는데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동생도 단도를 준비해.”

“……?”

동생? 동생이라니? 그리고… 갑자기 반말이라니?

“홍리족 여인들은 사내가 죽는다고 따라 죽지 않아. 사내는 많으니까. 하지만 암연족 여인들은 사내가 죽으면 따라 죽어. 죽기 싫어도 강제로 생매장당하는데 죽지 않을 도리가 없지. 상공이 죽으면 동생도 죽어야 해. 죽지 않으려고 도망가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그럴 자신 없으면 지금 물러서.”

벽리군은 어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격정이 확 치솟았다.

“어, 어린!”

“언니야. 내가 상공과 먼저 잤잖아. 그리고 명심해. 상공과 자고 싶으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해. 알았지? 내 허락 없이 자면 돌팔매질당할 거야.”

유구한테 들은 기억이 있다.

암연족 여인들은 위계 질서가 뚜렷하다.

나이는 상관하지 않는다. 먼저 같이 잔 사람이 윗사람이 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고 아랫사람은 죽으라는 명령도 복종해야 한다.

암연족 여인들은 전쟁에 져서 끌려온 여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부족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그녀들은 북쪽에 두고 온 모든 사람을 잊어야 했고 한 사내에게 철저히 짓밟혀야 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그녀들도 암연족 부족민이 되어 살아가게 된다.

철저한 위계 질서는 그런 연유로 세상에 태어난 부산물이다.

어린은 암연족 전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네, 언니. 언니 말을 따를게요.”

벽리군은 목이 멨다.

어린이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것만도 감개가 벅찼다.

“무릎 꿇어.”

“끌려온 여인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암연족이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사내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 해도 여인들이 죽여 버리면 어쩔 수 없죠.”

“말을 안 듣는 여자도 있을 것 아녜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여자들은 끌려오는 순간부터 포기하니까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고 옷을 벗으라면 벗고… 시키는 대로 다 하게 되어 있어요. 한 여자는 그렇지 않았지만……”

유구가 말한 한 여자가 누구인지는 벽리군도 안다.

그 여자 때문에 유구와 정원지를 얻었다. 그녀도 정원지처럼 막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고 혼을 놓쳐 버렸다.

벽리군은 무릎을 꿇었다.

주책없이 눈에서 눈물이 솟구친다.

그녀는 암연족 전통에 따라 머리를 조아리고 어린의 발에 입을 맞췄다.

“좋아. 넌 이제 우리 식구야. 오늘 밤 괜찮지? 목욕 정갈히 하고 내 초막으로 와.”

벽리군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녀는 질겁하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가득 차서.

종리추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처럼 어린 탁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똑같았지만 침상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인은 전혀 생소한 풍경이었다.

종리추는 여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 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사람은 어린이었다.

“괜찮아. 오늘 밤 같이 자. 내가 양보할게.”

“뭐, 뭐를…… 이러려고 오늘 떠나지 말라고……”

“그래. 그래서 오늘 떠나지 말라고 했어. 사내가 뒤처리는 깨끗이 하고 다녀야지. 뭐야, 이게. 질질 흘리고 다니고.”

“뭐, 뭐를 흘리고 다닌다고……”

“총관을 동생 삼기로 했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해.”

어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해가 떨어진 지 오래건만 자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섬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적지인살의 초막에 모여 앉아 훈훈한 불기를 쬐고 있다.

“앙앙! 아아앙……!”

모지가 앙칼지게 울어댔다.

모지는 요즘 들어 낮과 밤이 바뀌었다. 낮에는 잠만 자고 밤만 되면 안아달라 젖 달라 보챘다.

정원지가 돌아앉아 젖을 물리자 모지는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뚝 그쳤다.

그때 어린 찬 바람 나게 문을 밀치며 들어섰다.

“속상해 죽겠어.”

어린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른거렸다.

구맥이 어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구맥과도 나이 차가 십여 년 밖에 나지 않아 동생뻘이 되는 벽리군이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했다. 배금향에게 하오문 기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을 들은 후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암연족의 풍습을 넌지시 말해 준 것은 그 때문이다.

중원 역시 암연족처럼 처첩을 많이 두고 있지 않은가. 능력만 된다면 열 여자를 거느려도 흠이 되지 않는 게 중원의 풍습이다. 홍리족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잘했어. 잘한 거야.”

구맥은 딸의 마음을 달랬지만 남몰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종리추는 침상으로 다가가 알몸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의 거처로 온 벽리군은 어린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을 게다. 한 여인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같이 목욕을 한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이 아니라 한 사내와 같이 자기 위한 준비라는 데서 수치심이 온몸을 뒤덮었을 것이다.

사내 앞에서 옷을 벗는 것과 여인 앞에서 벗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침상가에 앉아 벽리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전율이 느껴진다.

정말… 벽리군은 요부와 현부의 자질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특이한 여인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부끄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은 측은함을 자아내고 손에 착 달라붙는 말랑말랑한 살갗의 감촉은 욕정을 자극한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백색의 감촉이 뜨거운 불을 지폈다.

종리추는 벽리군을 안아 일으켰다. 몽실몽실한 가슴의 감촉이 뭉클하니 느껴졌다.

“총관.”

“군아… 군아라고 불러주세요.”

“이럴 수 없어.”

벽리군이 팔을 휘감았다. 농염한 여체가 풍겨내는 살 내음은 엄청난 유혹이다.

온몸을 연 여인이다. 나긋나긋하면서도 풍염한 여체다.

“난… 어린을 사랑해.”

벽리군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고지식한 사람이란 걸.”

“이해해 주니 고마워.”

“하지만 나도 당신 아내예요. 이제부터. 알았죠?”

“그건……”

“아내예요.”

종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뒤 좀 돌아줄래요? 옷 입게.”

벽리군이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부평초처럼 떠돌던 자신의 삶이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큰 행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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