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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7화


모진아는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수천 무인들이 지키고 있고 산을 뺑 둘러 절정 고수들이 지키고 있으며 또 그 밖으로는 천여 명에 이르는 군웅들이 둘러져 있는 까닭인지 혈영신마의 주변은 오히려 한가한 편이었다.

하긴 혈영신마가 움직이는 즉시 수천 무인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릴 테니 그리 큰 경계는 필요 없을 성싶었다.

혈영신마가 수천 무인들을 속이고 감쪽같이 움직이려면 십여 명에 이르는 절정 무인들을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있는 절정 고수들을 단숨에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모진아는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모닥불 가로 다가갔다.

따뜻한 불기가 스며들자 꽁꽁 얼어붙은 몸이 사르르 녹았다.

종리추는 불기를 쬐며 앉아 있고, 혈영신마는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상태였다.

모진아가 다가오는 것을 힐끔 쳐다본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다시 묻지. 몇 명이나 죽였나?”

“오십 명쯤.”

“왜?”

“죽여달라고 달려들었으니까.”

“이유는?”

“질문이 다르군.”

“……”

“……”

종리추는 침묵으로 대답을 요구했으나 혈영신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으니 질문을 바꿔야겠군. 오십여 명을 죽였다고 했는데… 먼저 공격을 가한 게 몇 번이나 되나?”

“……”

“몇 번인가?”

“한 번이오.”

“물론 첫 살인이었을 테고.”

“……”

“혈영신공은 마공(魔功)이 아냐.”

혈영신마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왜? 그걸 증명하고 싶지 않았나?”

“마공이오.”

“그런가? 금종수는 상대가 어떤 진기를 지녔는지 알아내지.”

틀린 말이 아니다. 금종수가 지닌 또 다른 효용이라면 상대가 지닌 진기의 특성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사음수(蛇飮水) 성독(成毒), 우음수(牛飮水) 성유(成乳)라는 말이 있지.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혈영신공의 수련 과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내가 접해본 혈영신공은 정심(精深)했어.”

“……”

혈영신마가 심하게 흔들렸다.

눈꼬리에서 일기 시작한 잔파랑이 그칠 줄 몰랐다.

“첫 상대를 잘 택했어야지. 칠화대협(七化大俠)은 무명처럼 호협(豪俠)하지 않아.”

잔파랑이 경련으로 변했다.

모진아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종리추는 혈영신마의 과거 행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죽은 사람이 몇 명이며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혈영신마가 왜 죽였는지도.

‘하긴… 준비가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주공이시니……’

그럼 그는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물었을까?

종리추를 잘 알고 있는 모진아는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아냈다.

‘심성을 알아보고 있는 거야. 무공으로 짓눌러 버릴 때도 그렇고… 혈영신마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있는 거야.’

종리추가 언제부터 혈영신마에게 관심을 두었을까?

살문이 멸문하고 천부로 쫓겨간 시점에 혈영신마는 무림 공적으로 낙인찍히고 있었으니… 아마도 살문에 있을 때부터였으리라.

“제안을 하지.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주겠어.”

혈영신마의 입가에 비웃음이 매달렸다.

“그래서? 네 수족이 되라고?”

종리추가 고개를 들어 혈영신마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심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착각하지 마. 너 정도의 고수는 많아.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내 셋째 동생 하후민이라고 하지. 무명은 벽혈도. 넌 벽혈도도 감당하기 힘들 거야.”

혈영신마의 볼이 씰룩거렸다.

‘이건 너무 심한데……’

모진아는 종리추가 너무 몰아붙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리추가 혈영신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혈영신공의 장단점을 파악해 냈다.

그가 생각해 낸 혈영신공의 파훼법은 철저히 접전을 피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걸려들면 뼈가 으스러진다. 혈영신공에 당한 자는 내장이 진탕되어 즉사한다고 하니 암경(暗勁)이 대단한 것 같다.

걸려들지 않고 때려야 한다.

혈영신공을 물로 비유하면 광풍폭우(狂風暴雨)요, 불로 비유하면 활화산(活火山)이다.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위용이 뿜어져 나온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없지도 않았다.

모진아는 종리추가 너무 몰아붙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혈영신마를 바라보는 눈은 담담했다.

반면에 혈영신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단숨에 꺾어버린 중년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 같다.

그가 하후민이라고 소개한 중년인은 몸이 무척 가벼워 보인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통통 튀는 듯하다. 양발이 자유자재로 노는 듯하다.

만약 도법을 전개한다면 종리추처럼 쾌도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같은 쾌도라도 전혀 다른 도법이다. 종리추는 전신으로 속도를 이끌어 내지만 하후민은 보법에 의한 쾌도가 되리라.

전혀 다른 도법이다.

아무리 도법으로 일가를 세운 가문이라지만 한 가문에서 이토록 다른 도법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아냐. 이들은 벽도삼걸이 아냐. 벽도삼걸이 이런 제안을 해올 리가 없어. 하후가는 명문 정파의 허울을 뒤집어썼는데……’

“뭐, 뭐냐?”

혈영신마의 마음의 중심이 흔들렸다.

“……?”

“나를 구출해 주는 대가로 바라는 게 뭐냐? 혈영신공? 그거냐?”

종리추는 피식 웃었다.

“영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작자군. 너 정도의 무인은 많다고 했는데 혈영신공이 무에 그리 대수롭다고. 네 목숨을 구해주는 대가라…… 그래, 없을 수 없지. 그럼 하나 정하지.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주기 바래.”

“……?”

혈영신마는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곁에 있던 모진아도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종리추의 무공으로, 재주로 혈영신마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던가?

“사람을 구해달라는 부탁이야.”

두 사람의 안색은 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군웅 천여 명이 운집한 곳을 뚫고 들어와 혈영신마를 구해 주겠다는 사람이……

“일 년만 내 곁에 있어주기 바래. 일 년 동안 부탁할 일이 없으면 대가는 치른 것으로 하지.”

모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추는 혈영신마를 최후의 구명줄로 삼을 생각이다. 살문이 무림에 나섰을 경우,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비교적 무공이 약한 적지인살이나 배금향, 구맥… 그들의 안위를 부탁할 심산이다.

아주 적절한 인물을 골랐다.

모진아는 지금까지 살수로 사용하기 위해 혈영신마를 구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림없다. 혈영신마는 무공 특성상 단 한 번만 살인을 저질러도 종적이 드러나고 만다.

그런 단점을 지니고 있는 반면 모진아 자신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무공을 지녔고, 구파일방의 십망을 받고도 태연히 야산으로 불러들일 만큼 배포도 크다.

그가 구명줄이 된다면 종리추는 마음 놓고 무림을 횡행할 수 있으리라.

“나는 마인이야. 십망을 받은. 내가 구해주리라 생각하나?”

“후후후! 나도 십망을 받은 적이 있지.”

혈영신마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확실히 벽도삼걸이 아냐. 이 사람은 도대체……’

혈영신마는 종리추의 정체를 종잡지 못했다.

음성으로 미루어보면 아직 젊은 사람 같은데 십망을 받은 적이 있고, 살아남은 사람이라……

“좋아, 따라가지.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혈영신마의 말문이 닫혔다.

종리추가 꺼내 든 인피면구.

혈영신마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후량, 하후광, 하후민… 벽도삼걸은 야산을 넘어 군웅이 운집한 곳과는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긴 밤이 지나고 동녘이 밝아왔다.

일찍 일어난 잡새들이 눈 덮인 산야에서 먹을 것을 찾아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새들은 인간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안식처에서 피비린내 나는 혈겁이 벌어질 뻔한 사실도 모른다.

혈겁이 벌어졌다면… 오히려 새들에게는 좋았으리라.

종리추는 동물들의 세계를 안다.

그들의 세계는 오직 생존과 종족 보존밖에는 없다.

인간의 죽음은 새들에게는 좋은 먹이가 생긴 의미밖에 없다. 덩치가 큰 동물들이 살점을 뜯어 먹고 뼈를 부숴 놓으면 새와 같은 작은 동물이 부스러기를 삼킨다.

비정한 세계이지만 동물들은 그렇게 생존한다.

“누구냐?”

앞에서 인형이 튀어나오며 길목을 막아섰다.

도복을 입었으니 도인이고, 가슴에 태극(太極)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으니 청성파 무인이다.

“아! 길을 잘못 들었군요. 저희는 어제 막 도착해서 길을 잘 몰랐습니다. 수천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도인은 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얼굴도 살피고, 옷 입은 모습도, 허리에 찬 병기도 살폈다. 도집에 새겨진 번개 문양도 봤다.

“어제 벽도삼걸이 왔다던데, 자네들인가?”

“죄송하지만… 존성대명(尊姓大名)이……?”

종리추는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청성파 도인은 일금 안에 들어서 있다. 절정 고수다. 나이는 쉰쯤으로 생각된다. 나이로 추측해 보면 뒷 글자로 풍(風) 자(字) 항렬이다.

“벽도삼걸이 뛰어나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군. 난 진풍(秦風)이라고 하네.”

“아! 진풍(秦風) 진인(眞人)이셨군요. 오래전부터 청성파 삼검(三劍)님을 흠모해 왔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종리추의 얼굴에는 존경이 가득했다.

가식적인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활짝 웃는 얼굴, 눈동자에 가득 깃든 선망, 더욱 조심스럽게 움츠러드는 몸가짐… 명문 정파의 자제가 올바르게 자란 모습이었다.

“허허! 삼검은 무슨……”

진풍 진인은 실소를 터뜨렸지만 싫지는 않은 듯했다.

당금에 들어와 청성파에는 검의 달인이 세 명이나 탄생했다.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의 달인인 영풍(英風) 진인(眞人),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의 달인인 진풍 진인, 생사무흔검(生死無痕劍)의 달인인 하풍(霞風) 진인.

사람들은 그들 세 명의 도인을 일컬어 청성삼검이라고 부른다.

하후광… 혈영신마는 새삼스럽게 소름이 쫙 끼쳤다.

죽기로 작정했을 때는 세상 누구도 두렵지 않았지만 살기로 마음을 돌리니 서로의 무공을 견주게 된다.

이곳 이름 없는 야산에는 무당파의 현학 도인과 삼정 중에 일인인 삼절기인이 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자신이 죽을 때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죽으리라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도인 진풍 진인은 그들에 못지않은 고수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천여 명 무인들 중 가장 강한 상대와 만난 것이다.

“죄송합니다. 진인께서 계시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계신 줄 알았으면 어제저녁에 바로 인사를 드렸을 텐데……”

“허허! 괜찮네. 난 어제 늦게야 도착했어. 두어 시진 후면 혜선(慧詵) 대사(大師)가 도착할 걸세. 그때나 인사를 여쭙게.”

“혜, 혜선 대사님도 오십니까?”

진풍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함운(緘雲)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있었으니 늦어도 두어 시진이면 도착할 걸세.”

“그럼 소생들의 무례는 그때 다시 사죄드리겠습니다.”

“허허! 괘념치 말라니까. 이따 볼 수 있으면 보세.”

종리추는 포권지례를 취했다.

오늘이었다.

현학 도인, 삼절기인, 진풍 진인 그리고 소림사 계율원(戒律院) 원주인 혜선 대사.

군웅들은 그들을 기다렸다.

“목숨이 열이라도 부족하겠군.”

모진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한 명이나 두 명쯤은……”

혈영신마가 눈을 반개하며 낮은 음성으로 되받았다.

종리추가 묘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혈영신마는 보면 볼수록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종리추가 만든 인피면구는 그냥 얼굴 가죽만 뒤집어씌운 정도가 아니라 감정의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드러났다.

인피면구 안에 칠해진 색조(色調)가 피부의 색깔을 결정짓는다. 인피의 겉면에 덧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은 안쪽에서 우러나온다. 그렇기에 더욱 살아 있는 인간의 피부와 흡사하다.

얼굴 근육이 뒤틀릴 정도로 아픔을 주던 아교는 인피에 맞는 얼굴형으로 고정시킨다.

혈영신마의 코는 뭉툭하다. 하후광의 코는 뾰족하다. 그런 코를 만들기 위해서 숨이 막히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 코에 칠해진 아교는 살갗을 수축시켜 바짝 오므라들게 만들었다.

혈영신마는 여섯 번에 걸쳐서 인피면구를 썼다.

써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덧붙이고 남는 부분은 잘라내고… 인피의 입술과 혈영신마의 입술을 맞닿게 하는 게 가장 어려운 듯했다.

인피가 입술 안쪽으로 말려 들어왔다.

남의 살을 혀가 맞닿는 입술 안쪽에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여 인피면구를 쓰고도 할 일이 남았다.

인피면구와 본래의 살이 맞닿는 부분을 분장해야 한다.

‘다른 부분은 다 덮을 수 있지만 눈동자와 눈썹만은 덮을 수 없어. 안광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거야. 인피를 썼는지 안 썼는지 알아보려면 눈을 봐야 해. 아무리 뛰어난 변장의 대가라도 눈만은 어떻게 할 수 없어. 잘하면 눈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청성삼검 중의 일인인 진풍 진인이 인피를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완벽한 변장이다.

종리추가 혈영신마의 기분을 망가뜨렸다.

“아직도 모르겠나? 이번 십망의 참살권은 현학 도인이 쥐고 있어. 내가 현학 도인이라면 죽은 자들을 살펴보겠어. 혈영신공은 한 번쯤은 들어본 무공이지만 실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무공. 상처가 어떤지 봐야 해. 상처를 보면 적을 알 수 있지. 내력이 어느 정도이고 무공 성취는 어느 정도이고…… 적을 알고 나를 알고, 그래서 준비한 사람들이지. 내 생각에는 현학, 삼절, 진풍, 혜선이라면 혈영신마를 잡을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데?”

“…….”

“혈영신마를 만난 적이 없어도 상관없지. 상처를 보면 만난 것이나 진배없으니까. 상황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좋아. 저 사람들은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혈영신마 자네를 잡으려는 거야.”

혈영신마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쳤지만 참아냈다.

승복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하후량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겪은 것만으로 봐도 계획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치밀한 사람이니.

일금을 벗어난 벽도삼걸은 우거진 수림처럼 빼곡히 들어찬 군웅들을 헤쳐 나왔다.

아직 방심하기는 이르다.

완전히 빠져나온 게 아니다. 개방 거마 분타 걸개들이 지키고 있는 마지막 관문을 벗어나야 숨이나마 돌릴 수 있다.

종리추는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모진아가 말했다.

“이쪽은 거마 분타주가 지키고 있는데 일결이나 이결이 지키고 있는 쪽이 좀 수월하지 않을까요?”

“속이는 것은 아는 사람이 더 쉬운 법이지. 거마 분타주는 생각할 필요도 없지만 다른 쪽으로 뚫으려면 생각을 해야 돼. 그 차이는 큰 거지.”

“혼절해 있는 수천 무인들은 언제쯤 발각될까요?”

“반 시진 후.”

“예? 아니, 주공! 어떻게 반 시진 후라고 딱 잘라 단정 지으십니까? 날이 밝았으니 벌써 발각됐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수천 교대를 한 시각이 술시정(戌時正:밤 8시), 지금 시각이 진시초(辰時初:아침 7시), 여섯 시진 교대는 반 시진 남았어. 혈영신마가 수천 무인들을 공격하지 않은 덕분에 허점이 생긴 거지. 만약 공격을 가했다면 교대를 반 시진 간격으로 좁혔을 거야.”

“아!”

모진아는 알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혈영신마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주공? 그렇다면 주인이라는 소리인데… 그럼 하인? 하인의 무공이 나하고 승부를 가늠할 수 없다? 이것 참, 도깨비에 홀린 것도 아니고……’

생각은 복잡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스름한 안개가 깔린 저편에 어슬렁거리는 거지들의 모습이 비쳤다.

“수고하십니다. 벽도삼걸입니다.”

종리추는 거마 분타주에게 곧장 걸어가 포권지례를 취했다.

“벽도삼걸? 언제 안으로 들어가셨소?”

거마 분타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름 없는 야산으로 들어간 무인은 근 천여 명에 이르지만 거마 분타주의 머릿속에는 그 사람들의 명호가 똑똑히 새겨져 있다. 개방의 경계망은 촘촘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들을 거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명호는 촌각도 지체치 않고 거마 분타주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쉴 새 없이 오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마 분타주의 기억 속에 벽도삼걸의 명호는 없었다.

“그제 낮에 들어왔습니다.”

종리추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갔는지……?”

종리추는 인상을 찡그렸다.

벽도삼걸이라면 그래도 명성이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무례할 수 있냐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어제저녁에 진풍 진인 어른과 함께 들어왔는데 기억이 안 나십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모진아와 혈영신마는 바짝 긴장했다.

어떤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진풍 진인과 같은 사람이 오는데 거마 분타주가 직접 마중하지 않았을 리 없다.

두 사람은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렸다.

몸을 슬쩍 움직여 공격하기 쉬운 위치도 점했다. 사실 공격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개방 걸개들을 도륙하는 데는 촌각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거마 분타주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 어제 진풍 진인님과 함께하셨소? 너무 언짢아 하지 마시오. 맡은 일이 중차대해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혜선 대사님을 뵈어야 하기 때문에……”

“혜선 대사님? 뭐 급히 전갈할 일이라도 있으면 우리에게……”

거마 분타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몇 번 자리를 같이한 분이라서 마중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 오신다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어야죠.”

“그럼 어서 가보시오.”

거마 분타주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길목을 열어 주었다.

“주공, 어쩌자고 진풍 진인과 함께 들어왔다고 하셨습니까? 일이 잘 돼서 망정이지……”

“진풍 진인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이십여 명이나 돼. 거마 분타주가 일일이 점검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의 신분이나 명호는 오늘 아침이나 되어야 거마 분타주 손에 들어갈 거야.”

종리추는 상세히 알고 있었다.

야산에 모인 군웅들뿐만이 아니라 현재 모이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까지 세세히 파악해 놓았다.

‘이 사람!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혈영신마는 종리추를 다시 봤다.

현 무림에서 이만한 정보력을 갖춘 문파는 개방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가 되려면 눈과 귀가 사방에 널려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왜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지?’

종리추는 알면 알수록 신비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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