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56화
“그르르릉……!”
종리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고양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뜩한 소리! 동물의 소리에는 전혀 무지한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갓 태어난 갓난아기도 무의식중에 느낄 수 있는 소리다.
‘세상에! 고양이에게 공격 명령을!’
소고와 소여은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긴장감도 잊어버리고 수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과연 종리추의 명령을 받은 고양이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애완 동물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흔한 일이고, 그러다 보면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고양이도 나오기 마련이지만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무리 지어 움직이는 일은 고금을 통틀어 전무하다.
“그르르릉……!”
종리추는 고양이라도 된 듯 낮은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적을 앞에 둔 고양이가 갈기를 곤두세우는 듯했다.
소고와 소여은이 기대한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림 속으로 스며든 고양이들은 벌써 멀찌감치 도주라도 한 양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이 수림을 휘감았다. 한쪽으로는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윤기 나는 검은 강물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는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들이 옅은 비명을 토해낸다.
모진아와 유구는 들것을 든 채 낮게 앉아 있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바짝 긴장한 채. 사전에 약조라도 되어 있는 듯 각이 맞는 행동이다. 종리추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너무 나직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다. 두 여인 역시 종리추 바로 옆에서 듣지 않았다면 들고양이가 싸우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무심히 넘겨 버렸으리라.
야옹! 야옹……!
숨죽이고 있던 고양이들이 움직이는지 사방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극성을 부렸다. 세상에 들고양이, 도둑고양이가 없는 곳은 없지만 이곳 강변은 유독 많다.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고양이들이 일시에 잠적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그르르릉……!”
종리추가 얕게 으르렁거렸지만 화답이 없다.
‘모두 제압당했어. 하기는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면 신경 꽤나 쓰일 거야.’
소여은은 다시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풀숲에서 고양이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을.
‘이 조그만 언덕에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이 숨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일시에 그 많은 고양이들을 모두 잠재울 수 없지. 무풍무영의 신법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장담하건대 그런 신법을 지닌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법이란 상대적이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삼류 무인의 신법도 경이롭게 보일 것이다. 신법을 제대로 저울질하려면 초절정고수 반열에는 들어야 한다. 소고, 소여은, 종리추, 모진아, 유구… 이들의 눈에 비치는 신법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이들이 무풍무영이라고 느낄 만큼 빠르고 날랜 신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천신의 날개라도 달고 있어야 한다.
천외천의 천객들도 그만한 신법은 지니고 있지 않다. 결론은 사람 수가 많다는 것이다. 종리추의 울음소리에 화답하던 고양이가 무려 백여 마리에 달했으니, 일시에 소리를 죽이려면 한 명에 다섯 마리씩,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은 숨어 있어야 한다.
숨어 있는 자들은 틀림없이 당황했다. 느닷없이 고양이 무리 속에 뛰어든 꼴이 되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일시에 쳐낸 살수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죽였지만 다른 정보를 알려주었다. 가장 큰 것은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숨은 위치를 알려준 것이고, 좀 더 자세히는 어디에 몇 명 정도가 숨어 있는지 하는 세부적인 상황까지 알려준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들은 틀림없이 당황하고 있을 게다.
쒸이이익……!
종리추가 쾌속하게 짓쳐 나갔다. 양손에서 비수가 번득였다. 일수비백비를 전개할 때 사용하는 비수가 아니다. 비류혼을 전개할 때 사용하는 비수다. 비수는 고요롭게 빛나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슛! 수슛!
비수가 스치는 곳에 풀잎이 갈라졌다. 비수에 잘려 나간 풀잎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쉐에엑! 쒜에엑……!
비수가 허공을 찢었다. 살을 갈라내고 피를 머금고 싶어 하는 악마의 이빨이 되었다. 맞은편에서도 반응이 일었다. 도광에 스친 풀잎이 맥없이 잘려 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물 흐르듯 조용하게 펼쳐진 도광이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힘은 철벽에 부딪힌 듯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기척 없이 다가서는 것은 또 있다. 풀 속에 바짝 엎드려 있던 뱀이 고개를 쳐들 듯 도광 사이로 은빛 창날이 번쩍였다.
카캉! 카카캉……!
장도와 짧은 비수가 부딪치며 맑은 불똥을 튀겨냈다. 순식간에 수십여 합을 교환하며 일궈낸 불똥이다.
‘아! 포위당했어. 어느새……’
소여은은 내심 가벼운 한숨을 토해냈다. 소고와 둘이 쫓길 때와 비교해 봐도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이쪽에는 종리추와 모진아, 그리고 유구가 가세했고, 소고가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들것에 누워 있다는 것만이 다르다.
중원 무인들에게 끊임없이 쫓긴다는 것, 포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언제 포위당했을까? 포위를 한 자들은 누구일까? 천외천은 개방의 정보망을 이용하고 있으니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한두 명쯤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쳐온다고 해도 하등 놀랄 게 없다.
스르릉……!
검집을 찾아 들어간 검이 하루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살문주!”
종리추의 비수를 가로막은 자가 거센 고함을 내질렀다. 강변에 흐르는 물이 출렁일 정도로 거센 고함. 고함 속에 섞여 있는 내력이 무척 심후하다. 일장 격돌을 치른 세 사람은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그중 고함을 지른 자는 체격이 다부져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하후가주… 양가주……”
나지막하니 흘리는 듯 잦아드는 소리는 격전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터져 나왔다. 들것에 누워 있던 소고가 흘린 소리다. 그녀도 사태의 위급함을 짐작했고, 사방을 주시하던 중 종리추와 맞겨룬 두 명을 보게 되었다.
도법으로 종리추와 맞선 사람은 하후가주다. 중간중간 창을 내지른 사람은 양가주다. 한 시대를 풍미한 두 절정고수가 평소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연수’라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종리추 앞에 섰다.
도문 제일가 하후가. 신창들의 고향인 양가. 두 가문을 이끄는 가주가 병장기를 들고 종리추와 마주 섰다.
“살문주, 살문주…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과연 명불허전 뛰어난 솜씨. 미꾸라지 한 마리가 못을 흐리는 줄 알았더니 잘못 알았군. 미꾸라지가 아니라 이무기였어.”
하후가주가 말을 하며 도를 고쳐 잡았다. 양가주 양왕은 창을 비켜 잡고 좌측으로 삼 보 정도 물러섰다. 보기에는 싸움과는 무관한 사람 같았다.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가세할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도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목적은 도주하는 것을 막겠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듯했다.
천만에! 양가주의 병기는 창이다. 양가주는 창수들에게는 신으로 군림하는 창술의 달인이다. 양가주가 싸움에 가세하려고 들면 그까짓 서너 걸음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아니다, 그런 생각까지도 할 필요가 없다. 양가주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싸움에 가담할 게다. 그가 삼 보 정도 옆으로 물러선 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창법을 전개하기 위해서다.
양가주 양왕이 말했다.
“하하! 단병, 중병, 장병. 모두 한자리에 모였군. 아주 좋아. 그중에 자네의 병기가 가장 짧군. 비수라… 많은 무인과 겨뤄봤지만 내 창에 비수로 맞선 자는 보지 못했어. 이제 보게 되었군.”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무 명 정도 숨어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다. 사태를 굉장히 낙관적으로 본 것이다.
이름도 없는 강변에 숨어 있는 고수의 수는 무려 이백여 명에 이른다. ‘도문 제일가’라는 명성을 버리고 낭인이 되어 떠도는 하후가 무인들이 모두 모였고, 양가에서 신창으로 소문난 고수들도 무려 백여 명이나 합류했다. 이것은 종리추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실례로 모진아와 유구가 당황한 모습을 보인 것만 봐도 그렇다.
모진아와 유구는 아직도 들것을 들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 내달려 뛰려는 생각만 했지 공격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강변에 무려 이백여 명에 육박하는 무인들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들것 대신 병기를 들었으리라.
‘빠져나가기 힘들겠어.’
소여은은 소고를 힐끔 쳐다봤다. 소고는 제 몫을 하지 못한다. 가슴에 그어진 검흔은 움직임조차도 거부하는 중상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된다. 아무리 사나운 호랑이라고 해도 상처를 입었다면 운명이 다한 것과 진배없다. 현 상황에서 소고는 목숨이 다했다.
모진아와 유구는 자기 몫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들것을 놓아야 한다. 소고를 살필 여력이 없다.
‘언니, 잘 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소고의 몸 상태로는 그 누구의 일격도 막아낼 수 없다. 무리를 해서 진기를 운용한다면 한두 번의 공격쯤이야 막아낼 것이고, 더 무리를 한다면 한두 명쯤은 격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억지로 진기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기혈이 뒤틀리는 일만 없었더라도 조금은 더 싸워볼 수 있었으련만.
소여은의 마음을 읽었는지 소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매달렸다. 소고는 말하고 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살수가 될 때부터, 그러니까 혈암검귀의 혈뢰삼벽을 익힐 때부터 항시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사무령이 되지 못하는 한 살수들의 종말은 정해져 있어. 한결같아. 모두 죽음이야. 모두들 죽었잖아? 살혼부도 살천문도, 혈리파도 잠용조도 모두 죽었어. 우리 모두 죽을 거야.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여한 없이 싸워.’
체념이라고 해야 하나, 자조라고 해야 하나? 옅은 미소를 머금은 소고의 얼굴에 편안함이 깃들었다. 번뇌와 고통이 어우러져 있어야 할 얼굴에.
스슥, 스스슥……!
바람도 없는데 풀숲이 일렁거렸다. 적은 기다리지 않았다. 하후가주와 양가주가 종리추를 가로막은 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무인들이 사방에서 속속 나타났다.
한 명, 두 명……
짐작한 대로 근 이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다. 모진아와 유구는 들것을 놓았다. 그들도 지금에 와서는 소고를 고집할 수 없다. 주변 상황은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모습을 드러낸 무인들은 몸가짐만 보아도 평범한 고수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긴 하후가 무인이라는 것, 양가의 무인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은 고수다. 하후가와 양가가 중원제일도, 중원제일창이라는 명성을 이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리추는 하후가주와 양가주에게 몸이 묶여 있다. 주변을 돌볼 상황이 아닌 것이다.
‘힘든 싸움이 되겠어, 무림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문득 소여은은 팔부령에서의 싸움이 생각났다. 절곡에서 화살 세례를 받던 일, 주변을 빼곡하게 메우던 무림인들. 어느 한구석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던 당시. 하지만 살아났다. 종리추의 도움 덕분이기는 했지만 살기는 살았다.
‘힘들지만 살 수 있어. 원껏 싸워보는 거야.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고.’
소여은은 검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어떤 무공으로 싸워야 하나? 어산적 녹림마왕에게 전수받은 공동파의 절기를 사용해야 하나, 아니면 살문 살수들의 비기라 할 수 있는 은신술을 펼쳐야 하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으니 은신술을 펼치는 것이 더 나을 법도 한데.
종리추를 쳐다봤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살수는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종리추는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무공으로 겨루고 있다.
소여은은 모진아와 유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도 숨지 않는다. 당당하게 무인 대 무인으로 싸우겠다는 듯 편안한 모습들이다.
‘모두 무공으로 싸울 생각이야.’
생각은 의외로 쉽게 결정지어졌다. 더불어서 어산적 생활을 할 때처럼 전신에 팽팽한 투지가 회오리쳤다.
‘복마검법으로 싸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