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5화
“약은 놈들!”
여숙상은 단 한 마디만 툭 내뱉은 후 침묵했다. 그녀의 한마디는 구구절절이 설명한 것보다 더한 무게로 군웅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정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정운의 말은 군웅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군웅들은 구진법을 통과한 정운보다는 살수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 여숙상의 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지금 공격하면 피해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가?”
철권 구양춘이 물었다. 여숙상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종리추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절반이 죽을 거예요. 종리추와 검을 맞대기까지는 거의 칠 할. 그다음은 싸워봐야 알겠죠.”
여숙상은 비객 제일 비주다. 정운의 말은 비객들에게는 천명이나 다름없다. 그가 여숙상을 제일 비주로 명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게다. 유홍이 제일 비주가 될 때는 이의라도 제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비객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그것만 해도 충격인데 천객이 살문과 싸워 죽임을 당했다는 것, 하양 진인이 종리추와 동수를 이룬 후 무당파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얹혔다.
비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무공을 지녔어도 검을 뽑을 자신이 없다. 천하를 오시하는 문파에서 배운 무공이 고작 이것이었던가 하는 회의마저 치민다. 그래도 문파에서는 걸출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숙상을 제일 비주로 한다는 정운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비객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살문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들과 검을 맞대야 한다면…… 비객이 창건된 이유 그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야 한다. 합공은 물론 암습도 서슴지 않을 작정이다.
‘살문만 제거할 수 있다면……’
비객의 목표가 ‘사마외도의 척결’에서 ‘살문의 제거’로 좁혀졌다. 다른 사마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현재는 살문을 제거하는 것도 버겁다. 하양 진인을 무당파로 돌려보내고 삼절수사 정군유와 양가창법의 전승자인 양청을 죽인 종리추. 그를 상대할 사람은 천객 중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정운과 백천의뿐이다. 정운이 동으로 가라면 동으로, 서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갈 수 있다. 살문만 제거할 수 있다면. 허무하게 죽어간 비객 무인들의 영혼만 달래줄 수 있다면.
“그럼 또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는 말인가!”
철권 구양춘이 짐짓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종리추는 아주 약은 놈이에요. 저놈 주변에는 팔부령 비적마의보다 무서운 것들이 숨어있어요. 살문 살수들, 그들을 무시하고 공격했다가는 틀림없이 당하고 말아요.”
여숙상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종리추를 따라다닌 지 나흘. 밤과 낮을 불문하고 기회를 엿봤지만 도저히 뚫을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종리추는 진로를 바꿨다. 모자도로 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종리추가 가고 있는 방향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모자도로 향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백석산을 지나 연운, 그리고 마천, 성운… 적하를 건너고 오달평을 가로질렀다. 모자도와는 백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거리도 되지 않는다. 바뀐 것은 가는 방식이다. 종리추는 관도를 버리고 산으로 접어들었다. 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도 머물렀다. 머무는 곳은 갈대가 우거진 곳이기도 했고. 바위투성이인 돌산일 때도 있었지만 항상 살수가 몸을 은신할 수 있는 곳에서만 머물렀다. 발의 피로를 푸는 잠시 동안의 휴식을 취할 때도. 길을 가는 동안에도, 휴식을 취할 때도,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도 항상 살수들이 은신술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지형만을 골랐다.
공격하고 싶으면 해보라던 당당한 태도에서 조금의 공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방어 태세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비객 무인들은 살문 비기를 배웠기 때문에 기습이 어렵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들이 보고 있는 지형은 살수 입장에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능히 일당백을 상대할 수 있다. 군웅들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읽었다. 현재 종리추는 작은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를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무공을 펼칠 만한 사람이라고는 종리추와 유구로 보이는 사내밖에 없다. 거기에 환자 셋을 혹처럼 달고 다닌다. 두 여자와 노인 한 명. 소고. 소여은. 모진아다. 그러나…. 종리추의 주변에는 팽팽한 살기가 흐른다. 살문 살수들은 살기까지 감추고 있지만 천외천 고수들은 암암리에 흐르는 죽음의 기운을 읽었다. 아니, 느끼고 있다.
여숙상이 말했다.
“급할 건 없어요. 저자가 모자도로 향하고 있다면 모자도에 볼일이 있을 거예요. 모자도 강변은 모래밭밖에 없죠. 살수들이 숨을 구석이 없으니…. 계속 물러서도 괜찮아요.”
모자도는 비객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중원에서는 지형을 모르니 마땅히 급습할 곳을 찾지 못하지만 모자도 강변조차도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종리추는 반드시 죽게 될 거예요.”
여숙상이 하얗게 웃었다.
‘주공……’
구류검수는 종리추의 체취를 맡는 기분이 들었다. 종리추는 지척에 있다. 창문까지 검은 휘장으로 가려진 마차 속에 머물러 있어 밖을 내다볼 수는 없지만 사매와 군웅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구류검수의 눈에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생각한 여숙상과의 만남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여숙상이 독검을 휘두를 것은 예상했지만 일검으로 끝내줄 줄 알았다. 검으로 턱 끝을 추켜올리며 따라오라고 했을 적에는 솔직히 일말의 희망도 가졌다.
‘무엇이든… 사매의 마음만 풀릴 수 있다면… 혹 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여숙상은 그가 알던 사매가 아니었다. 그가 무림을 떠돌다 살수가 된 것처럼 여숙상의 신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유홍은 사매에게 죽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구류검수는 속이지 못한다. 사형이 죽고 정운이 들어와 비객을 차지했다. 또 마치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여숙상이 전면에 나서 제일 비주가 되었다.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사매의 이런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팔부령에서 죽었으면… 그것이 호사라면 사매를 만나지 않고 평생 살수로 떠도는 것이 좋았을지도…. 벽라군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다. 사령 살수들이 살검을 막지만 않았어도 죽었을 몸인데. 사매에게 어떤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 얼마만큼 잔혹한 학대를 받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 지경으로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주공…. 한달음이면 달려갈 수 있을 텐데. 용서하십시오, 주공’
그와 종리추 간의 인연은 팔부령에서 여숙상을 따라나설 적에 끊어졌다. 그는 더 이상 살문 살수가 아니다. 다음에 종리추를 만날 기회가 생길 때는… 어쩌면 검을 들이댈지도 모른다. 그만큼 구류검수와 살문은 단절되었다. 하지만 구류검수는 자신이 아직도 살문 살수인 것처럼 느껴졌다. 종리추와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다른 살문 살수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주공… 버리지 말아주시길.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게 된다면 살문 살수로 받아주시기를…’
또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혈살편복과 혈영신마가 죽었다. 두 사람 모두 친형제간처럼 정이 들었는데, 사매로부터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통곡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는데. 구류검수의 상념이 깨어졌다. 마차 밖으로 정운과 사매의 음성이 가늘게 새어 들어왔다.
“결전지를 어디로 잡은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모자도 강변.”
“정말 거기서 싸울 거야?”
“그럼요, 전에 비객들과 결론을 벌인 적이 있어요, 살수 비기로 싸울 적에 모자도에서 가장 싸우기 힘든 곳이 어디인가 하고, 결론은 강변으로 나왔죠.”
“그런 격론은 왜 벌였는데?”
“당신들 천객, 너무 안하무인이었거든요, 비객들은 손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죠. 만약 당신들과 싸우게 되면 어디서 싸우는 것이 좋을까 하고….”
“하하하! 좋아, 강변이든 어디든 살문과 천외천이 상잔만 할 수 있으면 돼.”
“물론 그 싸움에서 백천의는 죽어야겠죠?”
“물론, 반드시 죽어야지.”
“잔인한 사람이군요, 그래도 사형인데..”
“사문에 검을 들이대려는 여자보다는 덜 독하지.”
“비객은 털끝만큼도 다쳐서는 안 되고?”
“물론.”
“호호호! 속을 숨기지 않는군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역시 천객다운 자신감이네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구진법은 언제 전수해 줄 거죠?”
“목전의 일부터 해결한 다음에. 영물도 준비해야 되니 한 반년쯤 기다려야지. 약속은 지킬 테니 염려하지 마.”
“염려하지 않아요. 그만한 대책도 없이 당신에게 몸을 주지는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야?”
“호호호!”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지?”
“무림에는 십망이라는 것이 있었죠. 지금은 비객이 있고. 천객이나 천외천은 인정된 사람들이 아녀요. 즉, 당신을 무림 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죠.”
“….”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어도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을 걸요?”
“후후후!”
“비웃어도 좋아요. 한 가지…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내가 강간당한 것으로 알죠. 그가 소문을 낸다면 아마 그렇게 낼 거예요. 정운이 여숙상을 강간했다고. 약간의 증거도 가지고 있을 걸요? 증거도 필요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의 말은 당신 말만큼이나 신빙성이 있으니까.”
“….”
“그러니 살인멸구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호호호!”
대화는 끊겼다. 거칠게 걷는 정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마차 문이 열리며 여숙상이 들어섰다. 풋풋한 살 내음이 풍긴다. 너무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은은하다고 해야 할 알맞은 분 내음도 코를 간질인다. 사매는 청초하다. 맑은 피부, 티 없이 맑은 눈동자, 분홍빛이면서도 윤기 있는 입술,… 어느 한구석 맑은 소녀의 모습을 벗어난 곳이 없다.
‘아! 사매….’
어쩌다 사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전에 사매에게 잡혀와 처음으로 단둘이 되었을 때, 사매는 비수로 왼 손목 힘줄을 끊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넌 내 몸을 더럽힌 게 아냐. 내 인생을 망쳤어. 난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고 싶었는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많이 낳고, 밥 하고 빨래 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망쳤어.”
오른손 힘줄을 끊으면서는 다른 말을 했다.
“난 화산파가 미워. 내 몸을 망가뜨린 건 더러운 네놈 짓인데 왜 내가 지탄을 받아야 해? 나랑 말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달려들던 놈들이 다가서기만 해도 더러운 걸레 보듯이 피할 때의 기분 알아? 다 똑같은 인간들이야. 사부란 놈도 그 일 이후 냉랭해졌고 사형, 사제란 놈들도 다 그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당한 것이 죄지? 그러니까 너도 당해봐.”
다음 날은 왼쪽 발목 힘줄을 잘랐다.
“넌 서서히 병신이 되어가는 거야. 두 팔을 못 쓰고 이제 한 발도 못 써. 기분 어때? 팔부령에서 내가 왜 널 끌고 나왔는지 알아? 거기선 널 죽이면 나도 살아 나오지 못할 것 같았거든. 난 살 거야. 악착같이 살아서 날 비웃은 놈들에게 비웃은 대가를 똑똑히 치러줄 거야.”
오른쪽 발목 힘줄을 잘린 날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사지를 못 쓰게 된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비수가 힘줄을 자르는 고통도 고통 축에 들지 못한다. 구류검수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고통, 바락바락 악이라도 지르고 싶은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너무 악물어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사형을 어떻게 생각해? 뛰어난 사람이지? 하지만 사형은 비객을 키우지 못해. 천객에게 맡길 거야. 내게는 다시없는 행운이지. 솔직히 널 죽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화산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거든. 그런데 기회가 생겼어. 천객에게 비객을 맡긴다면….. 그래서 오늘 사형을 죽였어.”
“유, 유홍 사형을!”
“왜? 안 돼? 당한 사람이 나쁜 거야. 사형이 좀만 똑똑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야.”
사형은 미련해서 당한 것이 아니다. 사매에게 검을 들이댈 수가 없어서 죽음을 택한 게다. 사형이 죽었다면… 사형은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자살한 게다.
“너 같으면 정운과 백천의 중 누굴 택하겠어?”
“……”
“그런 표정 짓지 마. 넌 내 몸을 탐할 때의 표정이 딱 어울려. 자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어봐. 옷 벗을까? 왜 그거 있잖아. 충혈된 눈으로 침 질질 흘리는 거.”
“…..”
“정운을 택할 거야. 백천의는 원한이 너무 깊어. 그런 자는 복수심이 강해서 야망을 택하지 못해. 정운은 야망을 택할 자야. 호호호! 무공이 강하고 야망이 있는데 생각이 단순한 자는 이용하기 쉽지. 정운을 이용할 거야. 사형도 내 말을 대충 짐작했을 테니 편히 눈 감았을 걸?”
사매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자신이 사매의 몸을 탐하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희망에 들떠 있을 때 그녀는 악마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다. 세상에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지 못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도 돌아오지 못한다. 사매를 강간한 일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매도 돌아오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사형을 죽인 것은… 화산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사매… 이제는 돌아가지 못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고 싶어도… 왜, 왜!! 그런 짓을 왜!!”
사형이 사매에게 죽었다는 것이 비통하다. 사매는 알까? 화산파를 벗어난 사매가 평생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얼마나 잔혹한지. 자신이 화산파를 떠나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왔는지.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지만 마음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여숙상이 소검으로 살갗을 얇게 저몄다. 싸한 아픔이 전해졌다.
“모두들 종리추를 두려워해. 겁쟁이들, 무림에서 그만큼 이름을 팔아 먹었으면 죽을 때도 서슴없이 죽을 줄 알아야지. 살수 나부랭이들이 무서워서 주저하는 꼴이라니. 주공이라고 그랬지? 대단한 주공을 두었어.”
피가 흘러내리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구류검수는 시린 눈빛을 여숙상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여숙상이 계속 검을 놀리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는 말이야, 십망이 좀 잔인하다고 생각했거든. 입만 남기고 모두 병신을 만들어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어떻게 살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돼. 네 눈을 보면 도려내고 싶거든. 뭐야, 그 눈빛은? 내가 불쌍하다는 거야?”
“아니, 내가 죄인이야.”
“푸후! 그래, 네가 죄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내 꼴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니까. 사형도 죽지 않았을 걸? 왜 비객이 되겠어? 매화검수 중에서도 가장 탁월했는데. 나도 비객이 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야. 네가 여러 사람을 망쳐놨어.”
“….”
여숙상이 검을 거뒀다.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지를 적셨다. 여숙상은 금창약을 꺼내 꼼꼼히 발라주었다. 언제나 그렇다. 심한 상처든 약한 상처든 상처를 입히고 난 후에는 세심하게 치료해 주었다. 상처를 낼 적에는 악마의 분신이요, 치료를 해줄 때는 옛날의 사매로 돌아간 것 같다.
“팔부령이 초토화되었는데. 알아?”
“……!”
“정운에게서 들은 말인데, 정운과 하양 진인이 동굴로 쳐들어가서 모두 도륙 내버렸대. 계집애들도 모두 죽여 버리고.”
“그, 그 말이!”
구류검수는 진정 놀랐다. 동혈에는 벽라군이 남아 있다. 어린도 남아 있고 적지인살 등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들이 모두 죽었단 말인가! 벽라군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삼현옹도 있는데… 삼현옹의 기관진식이면 천객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몰살당할 염려는 없었는데. 종리추는 세 사람을 믿고 팔부령을 떠났다. 자신과 벽라군과 삼현옹. 세 사람이 힘을 모으면 천객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동혈에 들어설 수 없게끔은 할 수 있다고. 동혈까지 밀린다고 해도 죽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종리추가 가장 믿은 사람은 삼현옹이다. 무공이나 지혜로는 상대할 수 없는 천력을 지닌 자들이니 기관으로밖에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삼현옹이 밀렸단 말인가? 천객에게 삼현옹이?
“호호호! 마음이 아파?”
“……”
“아플 것 없어. 모두들 죽는 건 시간문제니까. 살문 살수들이 은신술을 펼칠 수 없는 지형에서 전력을 다한 천외천 무인들과 부딪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오늘이나 내일?”
“그래서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얻느냐? 생각해 볼 질문이네. 난 다 얻을 생각이거든. 살문을 몰살시킨 영광. 물론 천외천 고수들이 상당히 죽겠지만 나랑은 상관없고. 살문을 몰살시킨 영광은 비객에게 돌아올 거야. 호호호! 그다음은 비객을 한 문파로 독립시키는 거지. 구파일방의 절학이 모두 모였으니 볼 만한 문파가 될 거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비객이란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문파를 사랑하는 마음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잖아? 호호호! 구진법이면 모두 통해. 구진법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나약한 문파에 염증을 느끼고 있거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비객들은 그래. 우린 힘을 합쳐 무림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문파를 만들 거야. 구파일방도 하수인에 불과하게 될 거야.”
“미… 쳤군”
“그래… 미쳤어”
“……..”
“넌 미친 여자에게 걸린 불쌍한 놈이고.”
구류검수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여숙상은 확실히 그가 용서를 빌고 싶어 하던 옛날의 사매가 아니다. 지금의 여숙상이라면 차라리 살문 살수로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맑고 청초하던 사매를 이 지경으로 내몬 원인이 자신에게 있기에 괴로웠다.
“주공……”
구류검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휘장만 걷어내면 종리추를 볼 수도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