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91화
여숙상은 진득하게 기다렸다.
살문 비기를 배우면서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웠다.
살수들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다. 자연과 동화하는 방법이라든가, 공격 시점을 노리는 따위는 눈여겨볼 것도 없다.
살수들의 모든 행동 양식은 ‘기다림’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허어! 일이 급하게 되었는데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으니.”
“글쎄 말이오. 우리가 어떻게 해봐야 되는 것 아니오?”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천야가 자금을 모두 틀어쥐고 있는데.”
“우선 우리끼리라도 자금을 돌려보잔 말이오, 난 당장 삼천 냥이 필요한데, 누가 돌려주실 분 없으시오?”
“그것 참 나도 오천 냥이 필요한데.”
돈밖에 모르는 돈벌레들이 궁시렁거리는 소리도 처음처럼 거슬리지 않았다.
‘백천의가 제일 입맛을 다시던 곳이 이곳이야. 야이간이라는 작자도 입맛을 다신 곳이고, 힘의 근원 역시 돈인가? 두고 봐.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말 테니.’
현재 무림에서 그녀가 할 일은 없다.
정과 사 어느 쪽에도 몸을 두지 못하는 형편이다.
화산파로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렇다고 무림을 횡행할 수도 없다. 종리추의 무공을 보고 난 후인지라 무림을 돌아다닐 수도 없다.
구류검수가 그렇게 된 것을 보았으니 철천지원수 대하듯 이를 갈고 있을 것이 아닌가.
‘역천단 역천단을 만드는 거야. 역천단이면 천객 같은 무인을 길러낼 수 있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여숙상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배었다.
역천단의 원래 이름은 구신단이다. 단약을 제조하는 도인들이 꿈에 그리는 단약으로, 구신단을 복용하면 구궁의 신을 접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구신단의 제조 기법은 유실된 지 오래다. 구신단에 소용되는 약재도 알고 있고 약재의 배합도 전해오고 있지만 구신단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많은 도인들이 구신단을 제조했지만 성공한 사례는 전무하다. 화산파 도인들 중에서도 구신단 제조에 손을 댄 도인이 있다. 문파에서 금지시킨 단약 제조지만 아무래도 구신단이 주는 매력은 쉽게 물리칠 성질이 아니다.
구신단을 제조할 수 있는 약방문이 있으니 더욱 뿌리치기 어렵다. 도인은 은밀하게 구신단을 제조했다. 이십 년이란 세월이 지났을 때 드디어 구신단은 완성되었다. 몇백 번 몇천 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한 끝이다. 그러나 그는 구신단을 복용하지 못했다. 진작부터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있던 화산파 도인들이 들이닥쳤고, 도인은 구신단을 복용하기 직전에 사로잡혀 구금되었다.
그가 만든 구신단이 정말 구궁의 신을 접견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신단을 완성한 도인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가 수천 번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연에 깊숙이 묻혀 있는 난폭성을 폭발시키는 마성. 도인의 밀실에서 찾아낸 억울한 사람들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악마라 한들 그런 짓은 저지르지 못하리라. 인간을 가축처럼 사육했으니 그 죄를 어디다 비할까.
그 후 구신단은 역천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여숙상은 구신단을 떠올리자 마음이 편했다. 역천단을 만든 도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지 벌써 죽어 한 줌 진토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화산파에서 이름도 지워져 버린 도인이 역천단 사건을 일으킨 것은 여숙상이 화산파에 입문하기 훨씬 전이니.
여숙상은 구신단 제조 기법을 알고 있다. 약재의 배합도 알고 있다.
모두들 쉬쉬하며 철저히 감춰 버린 비방이지만, 세상에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많다. 무인이 아니더라도 구신단 제조 기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시골의 이름 모를 농부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할머니가 먼 옛날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며 털어놓을 수도 있다.
구신단 제조 기법은 몇몇 문파에서 봉합한다고 봉합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널리 알려졌다.
도인이 이십 년에 걸쳐 만들었다면 자신도 그만한 세월을 투자하면 만들 자신이 있다.
‘돈이야. 우선 충분한 자금을 만들어야 해. 그런 다음 은신처를 찾고 살문, 백천의 모두 죽여 버릴 거야. 호호호! 화산파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겠어. 도인을 가장한 늑대들!’
여숙상은 기다리기 위해 굶었다. 잠을 잘 때도 한쪽 신경은 늘 열어 놓았다.
배 위로 쥐가 기어갔다. 어떤 놈은 얼굴로 다가와 코를 킁킁댄다.
여숙상은 대들보의 일부가 되어갔다.
“천야께서 양성에 있는 게 확실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염왕채가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잖아. 염왕채 하면 천야 아냐?”
“에이, 설마 아직 이곳에 계시려고, 염왕채가 움직이고는 있지만 천야는 손을 뗐다고 들었는데?”
“떼기는 뭘 떼. 야이간이라는 작자가 있을 때도 암중으로 살살 조종했다는 소문인데.”
여숙상은 듣고 싶은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말을 들었지만 지금 들은 말은 가장 신빙성 있다. 무엇보다 백상의 입에서 거론된 말이 아니라 하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황제도 백성의 입은 막을 수 없다. 아랫사람들이 보고 느낀 것은 사실로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윽!
몸을 일으키자 수북이 쌓였던 먼지가 떨어졌다. 처음 살수 비기를 배운다고 했을 때 속으로는 비웃음을 떨치지 못했다. 살수 놈들의 잔재주 나부랭이를 배워서 어떻게 하잔 말인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공 수련을 한 차례 더 하는 것이 낫지.
그러나 막상 비망사 살수들과 부딪친 후에는 생각을 달리했다. 무공으로 겨루면 상대도 되지 않을 자들인데 형편없이 밀렸다. 은신술이라고 해서 몸을 숨기는 정도로만 알았던 비객 무인들은 솔직한 심정이지만 충격을 받았다.
살수들은 체력을 아낀다. 몇 날 며칠을 숨어 있어도 공격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력은 남겨둔다. 살수들은 은신술을 펼치는데 진기를 소진하지 않는다. 고된 수련을 거친 강인한 체력으로 감당해 낸다. 살수 문파를 이끌며 생긴 경험을 밑바탕으로 해서 숨는다. 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차이다.
여숙상은 천장 기와를 들춰내고 신형을 뽑아냈다.
쉬이익!
한 줄기 밤새가 어두운 야공을 날았다.
양성은 참으로 인연이 많은 곳이다.
종리추가 제일 처음 터전을 잡았다. 벽리군이라는 여자를 얻었고 하오문주와의 연결도 양성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중원은 무사안일했다. 살수 놈들이 움직여 봐야 얼마나 움직이랴 싶었다.
‘그때 뿌리 뽑았어야 했어.’
여숙상은 허름한 대문을 밀쳤다.
삐이걱!
대문은 낡을 대로 낡아서 조그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았다.
몇 평 되지 않는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문짝도 구멍이 숭숭 뚫려 폐허나 다름없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폐허가 되어버린 고옥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양성에서 천 노인과 관계없는 곳은 거의 없지만, 천 노인이 제일 처음 염왕채를 시작한 이 고옥만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영물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을 찾는다고 한다.
인간은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추억의 동물이다. 천 노인이 염왕채를 시작할 때는 혈기방장한 젊은 청년 때였으리라.
야망도 있었을 게다. 돈을 벌어 세상을 휘어잡고 싶은 욕심이 강했으리라.
늙은 천 노인이 고향이라고 생각해서 찾을 곳은 이곳뿐이다.
“쿨럭! 쿨럭!”
닫혀 있다고 할 수 없는, 문짝 한쪽이 걸쳐 있다고 생각되는 방에서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여숙상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뉘시오?”
곧 숨이 끊어질 듯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 노인? 안 돼!’
여숙상은 다급히 신법을 펼쳐 사오 장을 치달렸다. 그리고 문짝을 떼어내듯 열어젖혔다. 방 안에는 그녀의 머릿속을 잠시 스쳤던 불길한 풍경이 재현되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방에 침상이라고 할 수 없는 침상이 놓여 있다.
거지들도 덮지 않을 것 같은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초라한 몰골의 노인이 거센 기침을 터뜨리고 있다.
여숙상은 노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말해. 천 노인이야?”
“허허허, 백천의나 야이간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독심미화가 찾아오다니. 이 늙은이가 그래도 여복은 있는 모양이오. 쿨럭!”
거센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폐병!’
여숙상은 천 노인의 상태를 알아봤다.
천 노인은 가만두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 천 노인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을 게다.
‘틀렸어. 이런 상태라면 어떤 협박도 통용되지 않아. 죽어서도 돈을 짊어지고 갈 노인네 같으니!’
여숙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천 노인이 웃음을 지었다.
“내가 거부였긴 거부였는데 한세상 잘 살았지. 늦었소.”
“무슨 소리야!”
“야이간에게 백상을 물려줄 때 이미 돈은 바닥났소. 살문과 묵월광이 쓴 돈이 얼마인데. 허허허. 아무리 천하거상이라도 거덜 나지.”
“허튼소리 마! 야이간이 백상을 물려받은 후에도.”
“백상은 장사꾼이오.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지. 돈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움직이고. 허허허! 마지막 고혈까지 모두 빨아먹은 셈이라고 할까? 앞으로 양성에도 큰 바람이 불 것이오. 백상이 무너지고 다른 장사꾼이 들어설 테니까.”
“네놈이 백상에게 자금을 대줬잖아!”
“있는 것을 돌려쓰는 것도 재주라오. 이 나이까지 장사를 해왔는데 그만한 재주 없을까. 돈이 없다는 티를 내면 백상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돈마저도 내놓지 않았을 거요. 여기서 빼서 저기 막고, 저기서 빼서 여기 막고, 허허허! 그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랐지. 아마도 백상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게요.”
틀린 말이다.
백상은 천야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이다. 천 노인은 그들을 수족처럼 믿는다. 천 노인의 말은 어떠한 협박이 있어도 돈을 내놓지 않겠다는 완곡한 거절이다. 아마도 백상은 이미 살문과 인연을 끊고 완전히 자립을 했거나, 아니면 살문에 자금을 조달하고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