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41화
종리추는 숨을 멈췄다. 입은 아예 늪 속에 파묻혔고 위로 나온 것은 눈과 이마뿐이었다. 거머리가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건드리는 정도였으나 이내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아댔다. 어떤 놈은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가 슬금슬금 눈썹으로 기어 내려왔다. 그래도 종리추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썹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쏴아아아…!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던 빗방울은 늪에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솟구쳐 올랐다. 종리추는 목석으로 만든 인간인 듯, 감각을 상실한 듯 늪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지 않았다. 사각! 토끼가 비를 피하는지 풀잎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리추는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늪 속으로 머리끝까지 잠겨들어갔다.
“헉!”
모진아는 헛바람을 토해냈다. 뒷머리 아문혈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감촉은 분명히 쇠로 만든 비수였다.
“모진아, 넌 죽었어.”
종리추가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 이런!”
“쉿! 아문혈에 사촌 깊이로 찔리는 순간 벙어리가 돼. 약속을 지켜.”
종리추의 음성은 악마의 속삭임처럼 나직하고 포근했다.
‘제길!’
결국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내가 처음입니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종리추가 서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빗방울만 쏟아졌다.
‘끄응! 벌써 잡혔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한 반 각 정도만 있다가 나가야겠군.’
모진아는 비를 피해 나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밀림에 돌아다니는 왕뱀은 길이가 이십여 척에 이르는 놈도 있다. 그런 놈은 오히려 위험하지 않다. 엄청난 힘으로 허리를 조여오지만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정작 위험한 놈은 오히려 작은 놈들이다. 작은 놈들은 먹지도 못할 동물에게 독만 내뿜는다.
쒸이이익…!
종리추의 어깨 위로 얼룩 반점이 있는 뱀이 기어갔다. 작고 날씬하며 머리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제법 귀여운 놈이다. 하지만 놈에게 물리며 숨 두어 번 고를 사이에 절명하고 만다. 뱀은 종리추의 존재를 모르는 듯 스쳐 지나갔다. 후두둑…! 빗방울이 나뭇잎을 할퀴었다. 스윽…! 다람쥐가 나무를 타는 미세한 소리는 빗방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감각이 동물적으로 발달한 종리추의 귀에는 뚜렷이 들렸다. 스스슥…! 종리추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해지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탁!
화살 한 대가 날아와 종리추가 앉아 있던 자리에 박혔다. 화살은 엄청난 강궁으로 쏘았는지 나무에 박힌 다음에도 한참을 부르르 떨었다.
‘나무! 잡지 못했어.’
적지인살은 위기를 느꼈다. 살수의 실패는 곧 죽음과 직결된다.
‘당황하면 죽음…’
적지인살은 진기를 끌어올려 지청술을 펼쳤다. 지난 십 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는지, 배금향에게 당한 대거혈은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진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혈염도법을 펼쳐 내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주위에는 없다.’
확신이 들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적지인살은 움직이지 않았다.
‘역지사지… 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내가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을 게다. 그럼 움직이지 않는다.’
적지인살은 손을 품속에 넣어 다람쥐 한 마리를 꺼냈다. 그리고 살며시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타다닥…!
다람쥐는 풀어주기가 무섭게 나무를 타고 올랐다.
‘네놈이 가는 곳에 내 길이 있을 터…’
적지인살은 다시 강궁에 활을 메겼다. 그리고 다람쥐가 가는 곳을 부지런히 쫓았다. 순간,
“이…런!”
팽팽하게 당겨졌던 시위가 쏘아내지도 못하고 풀어져 버렸다.
“아버지, 끝.”
종리추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내가 끝이냐?”
“아버지 체면은 채워드려야죠.”
“고맙다, 이놈아. 한 번쯤 잡혀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럼 그 화살에 맞으란 말예요?”
“그래.”
“에구! 무정한 부정이여.”
“가장 나중에 잡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연히 고맙다고 해야죠.”
“징그럽게 고맙다.”
“가요.”
적지인살은 앞장섰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소리는 절대 내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중원에서 한때는 필살수로 불리던 적지인살이다. 그런 그가 본신의 실력을 모두 쏟아 부었는데도 잡혔다. 종리추는 대답이 없었다.
“이놈아, 갑자기 벙어리라도… 응?”
뒤돌아보던 적지인살은 아연해졌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이놈이! 허허!”
결국 너털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때,
촤아악…!
숲 속에서 갈퀴로 나뭇잎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윽! 아이고! 거 되게 아프네.”
특히 엄살이 심한 유회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열 살 어린아이로 쫓기던 종리추는 스무 살 장정이 되었다. 쉰 초반에 쫓기던 적지인살은 환갑이 되었다. 삼십대였던 배금향은 마흔여섯의 주부인이 되었고, 모진아 역시 흰머리가 많이 늘어 나이인 쉰을 코앞에 바라보고 있다. 유구가 서른아홉, 유희가 서른여섯. 모두 중후한 나이들이다. 그런 나이에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홍리족 부락에 들어온 종리추는 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만 서성거렸다. 돼지를 받은 날 이후로 금족령은 풀렸지만 큰 집은 홍리족 부락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제발! 어린아, 너를 위해서도 제발!’
종리추는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그동안 홍리족에게 물심양면으로 받은 도움이 적지 않다. 홍리족 부락민들은 모두 종리추를 어린의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 열여덟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개돼지와 같다.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상처를 적게 받도록 노력은 해야지. 최선을 다하고 와라.’
비록 짙은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것은 종리추가 부모님을 그만큼 격의 없이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그는 부모님의 엄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종리추 일행이 몰래 떠날 경우, 어린은 차기 족장의 위치에서 물러서야 한다. 홍리족 역사상 사내에게 버림받은 첫 여자가 탄생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결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종리추는 남만에 머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마음속에서는 ‘중원에 볼일이 생겨서 몇 년만’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이 시점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린을 안다. 몇 년만이라고 약조를 하면 정말 기다릴 여자다. 철없이 천방지축 뛰어다니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원이 얼마나 험난한데…’
종리추는 십 년 전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살천부에 쫓기고, 개방에 쫓기고… 중원무림인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찾던 그때를. 돌아간다 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몸이다. 소고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소고의 수족이 되라면 돼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부모의 정을 주고 무공을 가르쳐 준 부모님에 대한 도리다. 살수의 길을 걷다가 이름 없는 황야에서 죽게 될지라도.
‘어린아, 제발 너를 위해서…’
종리추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기 족장 지위를 버리겠어요.”
어린의 입에서 기어코 우려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족장의 지위는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간다. 구맥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듯, 어린에게 물려주고, 어린은 자신의 딸에게 물려준다. 지금 어린이 족장의 지위를 포기한다면 대물림해 왔던 족장의 지위는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린이 차기 족장 지위를 버리겠다면 족장도 물러나야지.”
무당의 입에서 차디찬 냉소가 새어 나왔다. 그게 관례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지만 차기 족장이 불의의 변고를 당할 경우 족장도 지위를 내놓아야 한다. 다른 집안에서 족장이 나오고, 차기 족장이 선출된다.
“휴우!”
구맥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어린의 뜻은 이미 굳어졌다. 종리추를 따라서 중원으로 들어가겠다고, 적지인살과 배금향을 봐서 알지만 사내가 여인을 지배하는 이상한 세계로.
“족장, 의사를 명확히 밝혀요.”
무당이 다그쳤다.
“족장을… 뽑도록 해요.”
구맥은 모든 것을 버렸다.
‘맙소사! 이게 아닌데… 아이구! 이제 꼼짝없이 걸려들었네.’
밖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종리추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맸다. 족장 구맥도 미녀였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 홍리족 청년들은 그녀의 마음에 들고자 갖은 선심을 다 썼다. 그 결과, 그녀의 남편으로 낙점되어 돼지를 받은 사내는 모두 네 명이었다. 그중에 어린의 아버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어린의 아버지는 권투에 능했으나 암연족과의 수환봉 싸움에서 죽고 말았다. 어린이가 구맥의 뱃속에 있을 때였으니 아기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어린을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구맥의 말에 종리추는 낯빛이 하얘졌다.
‘정말 첩첩산중이네. 무슨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부족을 떠날 수는 없어. 중원은…”
구맥의 남편 중에 한 명이 머리를 수그렸다.
‘옳지! 더 강하게, 빨리 더 강하게 밀어붙여요.’
“우리는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해. 이곳을 떠나면 천신이 노여워하실 거야.”
다른 남편도 떠나지 않을 뜻을 비쳤다. 그들에게 구맥은 하늘이었다. 구맥의 그늘 아래서 밥을 먹고, 생활을 한다. 하지만 부락을 떠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부락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구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어린을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비록 옆에 든든한 종리추가 버티고 있다 해도.
“어린아, 너와 나만 떠나야 될 것 같구나.”
구맥은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가 낳은 자식은 모두 일곱 명이다. 사내가 다섯, 여자가 둘. 사내는 모두 혼인을 하여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의 언니는 세 살이 되었을 때 열병에 걸려 죽었다. 비록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현재 그녀에게 남은 자식은 어린뿐이었다.
“그래요, 우리 가가가 어머니를 잘 모실 거예요. 그렇지, 가가?”
‘아아! 하늘이시여!’
종리추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들은 자신 하나만 믿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종리추가 밖에 나오자 두 명의 사내가 창을 들고 막아섰다. 권투왕 역석, 그리고 마을에서 제일 일을 잘하는 비부. 역석이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아내의 말을 거역했어. 나도 떠날래.”
“안 돼요, 중원은…”
그의 말을 어린이가 잘랐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자고 했어. 왜 안 돼? 가도 되잖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종리추는 차라리 병에 걸려 눕고 싶었다.
“그, 그럼 비부는…?”
이번 대답은 비부가 직접 했다.
“네가 혼인하고 나면 나도 혼인할 거야. 내가 두 번째야.”
“뭣?”
종리추는 어린이를 노려보았다. 중원의 풍습을 그렇게 일러주었는데…
“가가가 노상 그랬잖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럼 난 어떡해?”
“그래. 가자, 가.”
종리추는 포기해 버렸다.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쏟아졌다. 십 년 전 그날은 햇볕이 살을 태울 듯이 이글거렸다. 건기에 와서 우기에 돌아간다.
“저 초막… 몇 년 동안이나 버틸까요?”
종리추가 십 년 동안 온갖 정을 받았던 초막을 보며 물었다.
“백 년은 갈 게다. 마음속에 새겨놓는다면.”
적지인살이 대답했다. 하늘은 정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