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5화
“경신법의 바탕이 뭔지 아나? 길을 많이 아는 거야. 그 다음은 아는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무공이지.”
종리추는 분운추월의 충고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분운추월은 적이 될지도 모를 사람에게 너무 큰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을지 모르지만 비무에서 진 종리추는 그 말이 천명처럼 들렸다.
‘아는 길도 따라갈 수 있는 무공.’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경신법에 온 신경을 몰두했다. 당금 무림에서 경신법으로는 분운추월이 최고지만 무공의 최고수라고는 하지 않는다. 천하제일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추려본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거론되지만 그 사람들 중에서도 분운추월은 끼지 못한다. 그가 아니라도 천하제일인으로 거론되는 사람은 많이 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경신법으로는 분운추월을 당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재 익히고 있는 비호무영보만으로 무림에서 활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 종리추는 다르게 생각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무공으로 분운추월을 제압할 수 있다 해도 분운추월이 싸우려고 들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그가 싸우지 않고 뒤만 밟는다면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는 살수다.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수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쫓길지 모른다. 항상 경계해야 한다. 하물며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을 게다.
‘빨리 나갈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발을 빨리 놀리는 것, 몸을 가볍게 하는 것. 비호무영보는 진기를 끌어내 용천혈에 집중시킨다. 진기가 용천혈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과 같아. 그러지 말고 족지소양담경으로 진기를 돌린다면? 용천혈로 진기를 뿜어내지 않고 스치듯 지나가는 거야. 진기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진기가 현종혈에 이르렀을 때 평소보다 빠르게 휘돌리는 거야. 발등, 발바닥, 발 전체에 자극을 가하는 거지.’
생각이 미치자 즉시 시험해 보았다. 진기는 예정된 힘, 예정된 순서로만 돌려고 했다. 현종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빠르게 휘돌린다는 생각은 적합한 듯싶었지만 실제로 해보니 여간 어렵지 않았다. 실상스러울 것은 없다. 원래 어느 내공이든 기초가 닦인 사람이 배우는 것은 초심자가 배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우니까. 권각을 놀리는 수법은 배우면 배울수록 빨리 배우게 되지만 내공은 정반대인 것을. 종리추는 계속 수련했다.
‘뭔가가 부족해, 이것으로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냈을 때 새로운 경신법을 창안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휴우! 그럼 바탕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가볼까?’
종리추는 수련을 중단하고 집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늘 하는, 이미 버릇으로 굳어져 버린 행동이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을 최고조로 열어 주위를 살핀다. 분운추월이 벽리군 곁에 항상 붙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을 거듭한다.
이윽고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병기를 세워놓은 병가로 가서 뒤쪽을 어루만졌다.
그르릉…!
병가가 옆으로 이동하며 시커먼 암동을 드러냈다. 암동은 지하로 이어졌다. 지하에는 이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전에는 약초꾼이기도 했고, 땅꾼이기도 했으며 봇짐장수를 한 사람도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살문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차후 계속 연락을 보내오게 되리라. 과거 살혼부가 그랬듯이 이들은 종리추의 눈과 귀가 되어준다.
벌써 많은 혜택을 받았다. 중원은 넓고 크다. 어디서 사람이 죽어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중원이다. 낭인, 엽사, 포사. 그들의 이름이 아무리 높아도 조그만 지역을 벗어나면 무명인사가 되어버리는 곳이 중원이기도 하다. 무인들이 가문에 뛰어난 절기가 있어도 명문정파를 찾게 되는 것은 중원 곳곳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에 입문하여 자파에서 이름이 난다면 곧바로 중원무림 전체에 이름이 나는 것과 같다. 종리추는 지하에 있는 이들 덕분에 이름난 엽사, 포사들을 쉽게 찾았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산적들도 이들이 가르쳐 주었다. 원래 이들이 가르쳐 준 산적은 모두 네 군데에 있었다.
종리추는 제일 먼저 들른 곳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만났고 살수로 영입했다. 다른 곳은 들를 필요도 없었다. 이들이 가르쳐 주었으니 다른 곳에도 분명 뛰어난, 살수로 영입하고 싶을 만한 산적이 있을 터이지만 종리추는 현재 자신이 능력의 한계임을 알고 있었다.
혹여 그들을 받아들이는 날이 있다면 좀 더 성숙한, 좀 더 문파가 커진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무인은 무공이 최선인 줄 안다. 유생은 학문이 최선인 줄 안다. 상인은 장사가 최선이다. 하지만 가장 최선은 역시 그들이 짓밟고 선 민초들의 마음에 있다. 그들의 머리 속에, 미천하다고 얕보는 그들의 지식 속에 있다.
종리추가 들어서자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멋들어지게 늘어진 노인이 다가왔다.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종리추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어디 좀 볼까요?”
“일이 오시게.”
노인은 종리추를 이끌고 커다란 서가로 갔다. 제일 윗부분에 ‘하남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서가다.
“모두 이천사백구십팔 장이네. 휴우! 하남성이 이렇게 넓은 줄은 처음 알았지 뭔가.”
노인은 큰일을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길을 많이 아는 게 경신법의 바탕이다. 종리추는 분운추월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장 실천에 옮겼다.
인간이 중원 전역을 돌아다니며 길을 익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분운추월에게는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개방도가 있고 그들을 통해 길을 익힌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보지 않았어도 직접 눈으로 본 것보다 세세하게 알고 있다. 개방도의 정리된 보고가 그에게 큰 힘을 실어주고 있으리라.
종리추는 그만한 인력이 없다. 그는 다른 방도를 강구했다. 지도. 골목 하나까지 빠짐없이 그려진 정밀 지도다. 지도를 보고 지형을 머리 속에 기억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짓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시킨다.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만 들여다보면 되리라.
“이건 정말 큰 역사네. 비록 지금은 하남성 하나뿐이지만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이렇게 빠른 시간에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노인은 감회 서린 눈으로 서가를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하남성 전역을 그린 지도는 각 부별로, 또 각 성별로 분류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단지 종이뿐인 서가. 이 종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살문의 생사가 점쳐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됐어.’
종리추는 꾹 눌러 참으며 이걸 기다렸다. 이것만 완성되었다면 진작 살수행을 시작했으리라. 살수행을 하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유구, 유회, 역석, 그리고 자신만 있어도 살수행은 꾸준히 할 수 있다. 과거 살혼부가 단 여섯 명으로 살수행을 했던 것도, 그러면서도 살천문과 버금가는 문파를 이룩한 것도 모래알처럼 흩어진 많은 민초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네 약속을 믿어도 좋은가?”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노인의 이름은 용금화, 직업은 없다. 그는 평생 동안 중원 곳곳을 떠돌며 지도 제작에 몰두해 온 명인이다. 사람들은 돈도 되지 않는 일에 평생을 소모한 그에게 ‘미친놈’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용금화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미친놈이라는 이름이 그를 따라다녔다.
“지도를 만들 생각입니다.”
“하게.”
“중원 전역에 대해서는 노인장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없지만 동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역시 동네 개구쟁이들입니다.”
“…”
“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역시 산을 타는 사람이겠죠. 약초꾼, 땅꾼, 엽사, 산에서 나물을 캐는 아낙네도 노인장보다는 산을 더 잘 알 겁니다, 자기가 즐겨 찾는 산에 대해서는.”
“그렇겠지.”
“저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을 겁니다. 그로 하여금 지리를 아는 사람을 찾게 하고,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제가 찾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지만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수천 수만 명이 이 일에 연관되어질 겁니다.”
“….”
“동네 하나를 그려도 좋고, 산 하나를 그려도 좋고, 개울 하나만 그려도 됩니다. 중원 구석구석 빠짐없이 그려진 종이를 이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죠.”
“허허허! 듣고 보니 참 쉬운 일이군. 정말 내가 미친놈일 모양일세. 그렇게 쉬운 일을 평생토록 찾아다녔으니.”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비웃음이다.
“문제는 지도란 자로 잰 듯 정확해야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충 그린다는 거죠. 그래서 정확히 척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인장이죠.”
“…..”
“이가 빠진 부분은 없는지, 잘못 그려진 곳은 없는지. 붓끝 하나만 살짝 스쳐도 몇십 리 차이가 나는 일입니다. 한 군데만 빠져도 병신이 되는 게 지도입니다.”
“무엇 때문에 지도를 만들려고 하는가?”
“살수이기 때문이죠.”
“뭣!”
“저는 지도를 이용해 사람을 죽일 겁니다.”
“꺼져!”
“대신 노인장께 지도를 드리겠습니다. 저와 같이 만드는 지도 모두 노인장 것입니다. 저는 지도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필요할 때는 언제나.”
종리추의 말은 진심이었다. 노인의 종리추의 말에서 그가 정말 살수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정말 지도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다.
“왜… 왜 사실을 말하는가?”
“지도는 변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죠.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지도는 계속 보완되어야 합니다. 노인장이 죽을 때까지, 아니, 노인장이 죽은 다음에도 지도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계속 보완되어야 합니다. 사실을 알고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네가 세세연년 보완해 나가겠다는 말인가?”
종리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노인장 몫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전수자의 맥을 끊지 말아야겠죠. 저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정확한 지도가 필요할 뿐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동안은 보장하죠.”
“…”
긴 침묵 끝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습기가 없는 곳이 필요해.”
“만들죠.”
“돈이 많이 들 거야. 천석지기는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힐 만큼 많이.”
“살수는 돈을 많이 법니다.”
노인은 이상한 눈빛으로 종리추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람이 살수가 되는 것은 돈을 쉽게 많이 벌기 때문이지. 자네는 돈에 욕심이 없는 듯한데 왜 사람을 죽이는가?”
“모시는 분이 살수이기 때문이죠.”
“모, 모시는 분!”
“…..”
“자네에게 모시는 분이 있나?”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
“…..”
두 달 전이다. 노인은 분운추월이 벽리군의 그림자 역할을 해주고 얼마 있지 않아 살문에 들어왔다.
종리추는 그에게 지하 연무장을 내주었다.
“공기도 그렇고 습기도 알맞고 아주 적당해.”
“아직도 저를 모르십니까?”
“알지. 휴우, 이제부터 자네는 이걸 이용해 사람을 죽이겠군.”
“생각하지 마십시오. 괜히 괴롭기만 할 겁니다.”
“그렇지. 그런 거 생각할 틈도 없네. 이제 겨우 일 할이 완성된 것뿐이야. 죽기 전에 중원 전역을 그려놓으려면 잡다한 일에 신경 쓸 틈도 없어.”
“사본을 준비해 놓으세요.”
“….?”
“이곳은 살문입니다. 언제 불탈지 모르는 곳이죠. 사본을 보관해 놓을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종리추는 살혼부의 마지막 비처, 오채산 암동을 떠올렸다.
‘이건 노인장의 목숨이지. 살수들에게는 천하제일의 보물이 될 게고. 그래, 이건 천하제일의 보물이야.’
첫 살인.
종리추는 열 살 나이에 살인을 했다. 지형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형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분운추월은 그때의 기억을 일깨워 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