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9화
종리추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삼도산 산속까지 들어와서 마시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삼도산은 깊은 산이다. 산속에 틀어박혀 있으면 평생 가도 약초꾼 한 명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주공도 너무하신단 말이야. 이런 곳에까지 와서 술을 마시지 말라니. 주공은 지금쯤 단잠에 빠져 있겠죠?”
“어린은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지난번 볼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던걸. 이제 함부로 놀리지도 못하겠어.”
“놀리다뇨! 주공이 어린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놀려요. 자자, 목이 컬컬한데 한잔 쭉 들이켜요.”
남만에서라면 서로 창을 겨누고 목숨을 노렸을 암연족과 홍리족이다. 평생 전쟁터에서나 만날까 얼굴 구경도 못했을 게다.
그런 그들이 다정한 벗이 되어 술독을 기울였다. 암연족 전사가 홍리족 용사를 형으로 떠받드는 일은 남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외는 깨지라고 존재하는 법인가. 역석은 유회보다 세 살이 많았고, 유회는 그를 형으로 깍듯이 떠받들었다. 유구와 역석은 동년배이지만 유구가 이월생, 역석이 십이월생인지라 대형은 유구 차지가 되었다.
부족은 다르지만 같은 남만인, 종리추를 주공으로 모신다는 공통점이 그들을 섞이게 만들었다.
“크으! 역시 이 맛이야.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술맛이네.”
“목이 탁 트이는 것 같지 않소? 주공은 다 좋은데 너무 세심한 게 탈이야. 돌다리를 두들겨 보며 건너더라도 어느 정도여야지. 으이구! 고생길이 훤히 보이지 않소?”
“대형도 오늘은 밤을 했을까?”
“그렇겠지. 같이 자면서 안 하겠소?”
“넌 생각 안 나?”
“안 나면 고자지, 사내요?”
“이휴! 우리도 이번에 내려가면 계집부터 고르자. 이거야원 생홀아비 신세니…”
유회와 역석은 모진아가 담가놓은 매실주를 독째로 들고 이십여 장 떨어진 개울가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흠뻑 취했다.
지난 세월, 긴장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종리추가 외출할 때마다 가슴 졸여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이제는 편한 곳에 왔다. 마음을 풀어놓고 흠뻑 취해도 된다. 날씨도 좋아서 아무데나 쓰러져서 자도 된다.
“새로 들어온 놈들이 제법 야무져 보이죠?”
“하하! 그 뭐야… 혼세천왕이라고 별호를 지은 놈. 그놈 힘이 장사인 것 같던데 한번 붙어볼 생각 없어?”
“치잇! 그런 어린놈하고.”
“어리긴 하지만 여간 장사가 아니던데 뭘. 단병쌍추를 휘두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냐. 맨손으로 황소도 쓰러뜨린 적이 있다던데?”
“나도 물소를 쓰러뜨린 적이 있소. 집에서 기르는 황소와 팔팔 뛰는 물소를 어딜 비교해.”
“돌아가거든 한번 붙어봐. 난 자네에게 걸 테니까.”
“머리를 그렇게 굴리면 안 되죠. 내가 바본가? 나한테 건다고 해놓고는 그놈에게 걸려고 하는 것 모를 줄 아오?”
“하하! 자신 없나 보지?”
“괜히 사람 마음 흔들어놓지 마쇼. 얌전히 있는 사람 싸움 붙이고 그래.”
“암연족은 원래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나?”
싸움을 좋아했다. 그래서 싸울 일이 생겼다.
사사삭…!
풀잎을 스치는 소리에 유회와 역석은 잡담을 중지하고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깊은 산속이니 먹이를 찾아 나온 짐승이려니 하면서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문에 기거하면서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사삭…!
소리는 또 들렸다.
‘이건 옷이 스치는 소리야.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냐.’
유회는 역석을 보았다.
역석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회와 역석의 무공은 남만을 떠나올 때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종리추는 틈이 생길 때마다 그들을 몰아쳤다. 그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으니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다.
유구, 유회, 역석은 군소리없이 따랐다.
유구와 유회는 모진아로부터 오독마군의 구연진해를 수련한 틀이 있어 쉽게 따라왔지만, 역석이 익힌 권투는 무림인들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종리추는 역석에게 하오문주의 비류흔과 혈염옹의 혈염도법을 전수했다. 비류흔은 권투와 어울려 빨리 익힐 수 있는 무공이고, 혈염도법은 장기적으로 크게 성장시켜 줄 무공이었다.
역석이 짧은 비수를 꺼내 움켜잡았다. 유회는 고개를 돌려 목 관절을 우드득 소리가 나게 풀었다.
술맛은 가신 지 오래였다. 신경을 팽팽히 긴장시킨 채 자그맣게 들리는 소리를 쫓았다.
사사삭…!
소리는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천천히 접근하는 소리.
불행이라면 장소를 잘못 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도산 지형을 능통하게 꿰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리를 흘리고 있다. 자신들이었다면 소리를 흘리는 미숙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게다.
살문 살수들에게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표적이 배정되면 일차로 지도를 외운다. 이차는 답사를 하고 답사를 할 적에는 표적이 보여도 공격하지 않는다. 공격은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에 한다. 완전히 지형을 꿰뚫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않는 것.
살문 살수들은 감쪽같이 해치우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직은 미숙한 놈들. 살수의 기본은 미약하나 무공은 수준에 오른 듯하니 이급살수야. 살천문인가?’
살천문과는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다만 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경쟁이란 때때로 피를 부르기도 한다.
종리추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구파일방보다도 살천문의 급습을 가장 우려했다.
사사삭…!
‘거의 다 왔어. 공격할 빌미를 줘야 해.’
“한 잔 더 드쇼. 달빛이 참 곱죠?”
“너무 취해서 못 마시겠어. 난 됐으니 한 잔 더 들어. 정말 달빛이 곱군. 노인네가 정정해서 다행이야.”
유회와 역석은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모진아를 노인네라고 불렀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대형으로 받들 수도 있지만 남만인에게 사부는 하늘이나 다름없었다. 쉰 살밖에 되지 않은 모진아를 노인네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큼 모진아를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내 장담하건대 두고 보쇼. 그 양반, 늙어 죽을 때까지 카랑카랑할 거요.”
“그럴까?”
“백 냥 걸겠수.”
‘왔어!’
역석은 기지개를 켜는 척하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 유회는 술독을 드는 척 앞으로 몸을 숙였다. 순간,
쉭! 쉬익! 쉭…!
사방에서 인영이 번뜩이더니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하하! 쥐새끼 같은 놈들!”
유회가 벌떡 일어서며 제일 앞서 달려드는 자의 머리를 술독으로 내려쳤다.
퍼억!
술독은 앞선 자의 머리를 깨뜨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 다음에 덤벼들던 자는 멱살이 잡혀 허공에 번쩍 들리더니 큰 바위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검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둔한 것 같은 유회의 신법은 날래기 그지없어 그들의 필살 일격은 한결같이 허공을 베었다. 그러면 끝난다. 몸과 몸이 붙다시피 근접해 있는 상태에서는 두 번째 검공을 구사할 시간이 없었다. 역석은 더욱 빨랐다. 기지개를 켜던 상태 그대로 번쩍 일어서는가 싶더니 인영들 사이를 파고들면서 날카로운 비수를 번뜩였다.
하오문주의 비류흔이다. 권투를 익혀 눈썰미가 유난히 예리했던 역석인지라 틈을 발견하고 파고드는 데는 따를 자가 없었다.
“컥!”
“크윽!”
순식간에 세 명이 나뒹굴었다.
인영들이 뒤로 물러섰다. 기습에 실패한 것을 알았고, 잠깐의 접전으로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도 알아냈다.
“제법 한가락 하는 놈들이군.”
인영들 뒤에서 체격이 다부져 보이는 청년 두 명이 나섰다.
“살천문 조무래기들이냐!”
유회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매달았다.
“한가락 하기는 하지만 네놈들은 죽어줘야겠어.”
“애새끼가 주둥이만 살아가지곤.”
유회가 말을 잇는 사이 청년은 검을 뽑았고 달려들었다. 형식이고 예의고 일체 배제한 살검이었다. 청년은 틈을 잡았고 달려들었다. 살수들이기에 책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럴 줄 알았지!”
유회가 성명병기로 선택한 낭아봉을 휘둘렀다. 종리추가 혼세천왕에게 서른 근짜리 단병쌍추를 만들어주자 열 근을 더 보태 마흔 근으로 만든 병기다.
휘이잉…!
묵직한 낭아봉이 청년의 허리를 으깨 버릴 듯 밀려갔다.
“우리도 싸워볼까?”
다른 청년이 역석에게 덤벼들었다.
“얼마든지!”
역석도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창! 창창창…!
비수와 검의 싸움은 검이 일방적으로 우세하다. 비수를 들었다는 것은 병기를 들지 않은 것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이다. 권법가와 싸울 때나 쓸모 있다고 할까?
역석은 짧은 비수로 검배를 후려치며 틈을 파고들었다.
그때 물러서 있던 인영들이 유구와 역석의 등 뒤로 돌아갔다.
‘합공을 할 생각이군, 이놈들!’
유회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청년부터 박살 내려고 했지만 청년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싸움만 유지할 뿐 결판을 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제길! 걸려들었어!’
상대가 슬슬 피하면서 필요할 때면 간간이 반격을 해서는 장기전이 되고 만다. 청년 두 명은 유회와 역석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손발을 묶어놓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등 뒤로 돌아간 인영들이 조그만 묵통을 꺼내 입에 물었다.
‘독침! 쳇!’
유회는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전장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슬슬 물러서기만 하던 청년이 확 짓쳐들며 날카로운 공격을 펼쳤다.
‘이럴 줄 알았지!’
유회는 묵통을 꺼낸 인영들을 향해 낭아봉을 휘두를 기세처럼 보였다. 청년은 검에 힘을 실었고 유회는 방향을 홱 틀어 청년의 일검을 받아냈다.
타앙! 퍼억!
낭아봉은 청년의 검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동시에 청년의 머리도 잘 익은 수박처럼 으깨져 버렸다. 순간,
“크윽!”
유회는 신음을 터뜨렸다.
인영들이 꺼낸 묵통은 시위용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남만인들이 사용하는 죽통처럼 독침이 들어 있었고, 독침은 유회의 등에 깊이 박혔다. 손과 발이 저릿저릿 저려오는가 싶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똑바로 서 있으려 했지만 다리는 자꾸 꺾이고 머리는 땅으로 처박히려고 했다.
‘이래선 안 돼! 이래선…’
터엉!
낭아봉을 들고 있을 힘도 없었다. 마비된 손에서 빠져나간 낭아봉이 바위에 부딪치며 커다란 울림을 토해냈다.
슈욱!
검날이 짓쳐 왔다. 검이 오는 것은 보이는데 움직일 수가 없다.
푸욱!
검은 배를 뚫고 등 뒤로 비죽 삐쳐 나왔다.
유회는 사력을 다해 인영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양손을 엇갈려 비틀었다.
우드득…!
목뼈가 부러지며 인영의 눈이 팽그르르 돌더니 흰자위만 남았다.
“우아아아악…!”
유회는 고함을 질렀다. 목이 부러진 인영의 멱살을 잡아 묵통을 들고 있는 자들에게 힘껏 던졌다.
역석은 유회가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빼내는 것은 겨루고 있는 자의 숨통을 끊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대를 최대한 빨리 죽일수록 유회에게 다가서는 시간이 빨라지리라.
쉬이익!
검날이 사선으로 번뜩였다.
상대로서는 맨손으로 덤벼드는 자와 싸우는 기분일 게다.
역석은 몸을 뒤로 젖히면서 검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가 빙그르르 신형을 돌리며 가까이 붙어 섰다.
제일 먼저 상대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넌 이제 끝났어.”
청년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푸욱!
비수는 명치에 틀어박히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악! 아아악! 아아아아악…!”
청년은 너무 고통스러워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질렀다. 비수가 천천히 몸을 그어대는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최대한 잔인하게. 그래야 다른 자들이 겁을 집어먹고 쉽게 덤벼들지 못한다.’
비수가 청년의 늑골을 하나씩 떼어낼 무렵에는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청년은 이미 절명한 것이다.
시신을 내동댕이쳤다.
청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역석의 손을 붉게 물들였다. 비수를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심장을 꺼내 들고 있는 흉신악살처럼 비쳤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인영들이 퍼뜩 생각난 듯 묵통을 들어 입에 물었다. 그때,
“유구, 모두 죽여라.”
빙굴에서 터져 나온 듯 소름을 오싹 돋게 하는 차디찬 음성이 인영들의 등 뒤에서 들렸다.
전의를 잃으면 싸우지 못한다. 수가 아무리 많아도 싸울 생각이 없는 자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일당백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너무 강한 사람이라서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전의에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일당백의 용사라고 부른다.
유구는 눈빛이 이글거렸고 인영들은 전의를 잃었다.
일방적인 도살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들고 있는 묵통을 최대한 활용하면 싸울 수도 있는 일이건만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자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한 놈은 죽이지 마라. 물어볼 게 있어.”
모진아는 유회에게 달려가 검을 뽑아내고 상처를 살피는 중이었다.
“살천문이냐?”
종리추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네? 네네.”
같이 온 일행이 모두 죽자 사로잡힌 인영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한 번 더 묻겠다. 살천문이냐?”
“네네, 살천문주가 보내서…”
“이놈 귀를 잘라내.”
옆에 서 있던 역석이 대뜸 달려들어 인영의 귀를 잘라냈다.
“아아악…!”
“잘 듣지도 못하는 귀를 달고 다닐 필요가 없지. 다시 한 번 묻겠다. 살천문이냐?”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인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이제 말귀를 알아듣는군. 어떤 놈이 보내서 왔느냐?”
“사, 사무령님이…”
“사무령?”
“예예, 틀림없습니다.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인영은 종리추가 또 화낼까 봐 전전긍긍했다.
“사무령이란 놈은 어디 있느냐?”
“낙양 청림방…”
“청림방주와의 관계는?”
“….”
“이번에는 네 목이다.”
“처, 청림방주님이 사무령이십니다! 방주님이 사무령이에요!”
“넌 누구냐?”
“처, 청림방 사, 삼대 제자입죠.”
“삼대 제자라… 잘 들어라.”
“예예.”
“제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부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설사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영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구배지례를 하였느냐?”
“예예.”
“구배지례까지 올린 놈이 사부를 배신하다니. 쓸개 빠진 놈이군. 유구, 뒷정리해.”
종리추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곧이어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