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1화
무림은 경악했다. 낙양 청림방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문파를 기습받고 멸문하는 일은 무림에서는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림이 경악한 것은 청림방이 멸문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죽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청림방주의 잘린 머리가 정문에 박혀 있었다. 큰 못으로 이마를 뚫고 들어가 나무 대문에 단단히 박혔다.
그 밑에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는데, 청림방이 살문을 급습한 사실이 신빙성 있게 적혔다.
살문은 당당히 자신들의 존재를 밝혔다. 청림방과 친분이 있거나 복수를 원하는 자는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는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대자보가 사실이라면 살문을 욕할 수는 없다. 무림인은 당하고 앉아 있지 못한다. 명문 정파이든 사파이든 정당한 복수는 용인된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인하게 청림방을 몰살시켰지만 하자가 있는 살인은 아니다.
무림인들은 살문의 존재를 새삼 의식했다.
‘미친놈’ 이라며 쓰레기들과 함께 버렸던 청부업자도 떠올렸다.
살천문의 존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말할 문파는 아니다. 살문은 살천문과 성격이 같은 듯하면서도 겉에 나서고 있다.
“살문 문주를 한번 오라고 하지.”
소림 방장 혜공 선사의 입에서 살문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장소는 청와수 강변.
일 대 십칠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종리추는 갈대밭에 편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삭…!
소리가 들렸다.
종리추의 청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지금에 이르러서는 불가의 천이통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다. 귀로 듣지 않고 느낌으로 듣기에 그가 듣지 못하는 소리는 없었다.
종리추는 등을 대고 누운 채 무릎만 굽혀서 위로 기어갔다.
사사삭…!
소리가 한결 정확히 들렸다.
‘일 장 안에 있어.’
종리추는 같은 방법으로 조금 더 기어갔다.
이러다 들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기어가는 소리도 느낌으로 전해지는 소리 못지않게 컸다.
사삭!
이제는 바로 지척이다.
종리추는 몸을 뒤집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컥!”
답답한 신음이 들려왔다. 상대는 느닷없이 목을 틀어 잡혀 상당히 놀란 듯했다.
“나가.”
상대는 잠시 종리추를 쳐다보다가 메마른 웃음을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역삼각이라 독사를 연상시키는 사내, 음양철극이었다.
일 대 십칠의 싸움은 꽉 하루를 끌었다.
음양철극을 시작으로 천왕검제, 광부, 혼세천왕, 유구… 줄줄이 기어 나왔다.
“제길! 언제 옆에 왔는지 소리라도 들려야 알지.”
외팔이 좌리살검이 중얼거렸다.
“살문에 들어온 걸 다행으로 알아.”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혈살편복이 말했다.
“왜?”
“살문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넌 죽었어.”
“….?”
“평소 네 행동을 보면 원한을 많이 샀을 것 같은데, 청부가 안 들어왔겠어? 들어왔다 하면 죽은 목숨이지.”
“쳇! 그러는 너는.”
“그래서 난 일찌감치 살문에 들어왔잖아.”
가장 늦게 갈대밭을 나온 사람은 막내 산적들이었다.
그들의 별호는 살문사살이다.
별호라기보다는 상징 같지만 그들 머리 속에서 나온 별호다.
살문사살의 마지막 한 명까지 갈대밭에서 내쫓은 후 종리추도 몸을 일으켜 나왔다.
“겨우 하루를 못 버티다니.”
“문주님이 너무 강해서….”
“…..”
쌍구일살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비등한 입장에서 시작했다. 만나서 무공을 겨뤘고, 살수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고, 너 하나 주면 나도 하나 준다는 생각으로 살수가 되었다.
헌데 날이 갈수록 달라진다.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계산,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무공. 달라지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점점 높아지는 기도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일대종사의 기도라니.
열네 전각의 주인들은 종리추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굴복했다.
문주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누구를 죽이려는가? 모른다. 표적이 정해지면 죽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사치스러운 질문. 살수에게는 단 하나의 삶만이 있을 뿐이다. 죽이는 것.
살수 살문들은 진정한 살수로 거듭났다.
“오늘은 누구 차례야?”
“쩝! 제 차례입니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혼세천왕이 대답했다.
“알면서 뭘 해, 빨리 가지 않고?”
“휴우! 불공평합니다.”
혼세천왕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뭐가?”
“어제는 화주였는데 오늘은 향설주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나한테 따질 게 못 되지. 술을 사 온 사람은 첫째이니 첫째에게 따져.”
종리추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유구가 눈을 부라렸다.
“너, 내게 따질 거야?”
“아뇨.”
혼세천왕은 두말 않고 갈대밭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혼세천왕의 모습은 갈대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종리추는 유회의 습격 사건으로 좋은 교훈을 배웠다.
사람의 감정은 억누를 수 없다는 것. 긴장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풀어줄 때는 풀어줘야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내들이 탐닉하는 것은 세 가지다.
술과 여자와 도박.
종리추는 셋 다 허락했다.
단서는 있다. 술을 마시되 한 명은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것. 여자를 탐닉하되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도박을 즐기되 싸움이 일어나면 얌전히 물러서야 한다는 것.
전각에만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준 것이다.
이들은 자유분방한 자들이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세상천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그들이 누리던 자유를 주었다. 물론 암습에는 그만큼 많은 부분이 노출되었다.
‘강한 자로 키워야 해. 웬만한 암습에는 끄떡하지 않는 거대한 고목으로 만들어야 해.’
백일연공은 그래서 시작되었다.
향설주는 투명하고 담황색이며 향이 짙다.
일 년 이상 숙성시켜 먹어야 하며, 그렇게 독하지는 않아서 주량이 약한 사람도 서너 사발은 마실 수 있다. 허나 진정한 술꾼은 단맛 때문에 잘 찾지 않는 술이다.
“쳇! 형님은 꼭 형님 같은 술만 사 온다니까.”
“좋은 술을 사다 주니까 왜 그래?”
“이걸 먹을 바에야 차라리 분주가 낫겠소.”
“그래? 그럼 마시지 마.”
“엥?”
“너 안 마셔도 마실 사람 많아.”
묘하게도 일 전각부터 삼 전각을 차지한 유구, 유회, 역석은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들은 모두 마흔을 넘어섰거나 가까이 되었는데 다른 살수들은 서른 초반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끼리는 종리추가 정한 서열 이외의 서열이 있다.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했고 돼지머리 앞에서 혈배를 마셨다. 모두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은 혈배를 만들며 칼로 손목을 그었기 때문이다.
의형제.
과거 살혼부가 그렇듯 살문 살수들은 의형제가 되었다.
그것은 종리추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종리추는 살문에 정이 없기를 바랐다. 살수들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불과할 뿐 끈끈한 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정으로 이어지면 구속이 생긴다. 흔적을 남겨 버릴 사람이 되어도 버리지 못하고, 죽게 될 사람은 무리를 해서라도 구하게 된다. 냉정한 판단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종리추는 그것도 받아들였다.
삼도산에서 뜻밖의 기연을 만난 후 그의 생각은 많이 변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순간순간 부딪쳐 오는 것이 순리다. 곤란이 닥쳐온다면 그것도 순리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어떤 원인을 만들어 놓았기에 곤란이 닥친 것이다. 헤쳐 나가야 한다. 그리고 앞날에는 곤란이 닥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 여자, 살수.
그전까지의 생각이다. 지금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
인간.
종리추는 술을 어느 정도 마셔 긴장을 풀었다고 생각하자 입을 열었다.
“오늘 싸운 것은 피전이다.”
“…”
순간 조용해졌다.
갈대밭에 숨은 혼세천왕까지 숨죽이며 종리추의 말을 들었다.
“산화단창, 갈대밭을 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지?”
산화단창은 열 번째 전각의 주인이다.
엽사 출신으로 단창의 명수.
그가 말했다.
“오늘은 문주님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갈대밭이지 않습니까? 사방이 환히 트인 곳인데…”
“그랬지. 그래서 싸움을 피했어.”
“…..?”
종리추의 생각은 항상 허를 찌른다. 살수 열일곱 명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싸움을 피할 때는 피해야 돼. 적이 기세등등하면 싸워서는 안 돼. 그때는 이기더라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돼. 싸움을 피하고 기다려. 사람은 항상 긴장만 하고 살 수는 없어. 풀어질 때가 있지. 그때 치는 거야, 쉬려고 할 때. 생각해 봐.”
한 사람, 두 사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갈대밭에 숨어들 때는 무섭게 긴장했다. 바람이 갈댓잎을 스치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다 풀어지기 시작했고, 음양철극이 잡혀 나가는 순간 또 긴장했다.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이완되는 순간 잡혔다.
“내일은 어디로 갈 겁니까?”
광부가 물었다.
“안 가. 내일도 여기서 해.”
“피전입니까?”
“이전.”
“이… 전이요?”
“이전은 공격하기 쉬운 곳부터 공격하는 싸움이지. 내일 제일 먼저 나오라는 사람은 반성해야 될 거야. 제일 공격하기 쉬운 상대였으니까.”
종리추는 싸움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남만에서 숱한 동물들과 싸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터득한 방법들이었다. 하루에 한 가지씩 백일 동안.
살문 살수들은 백 가지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고 싸움만 정확히 이해한다면 백일연공이 끝날 무렵에는 백전노장이 되어 있을 게다.
살수들의 수련은 무인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은 무공도 높아야겠지만 싸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형님. 내일 또 향설주 사 올 거요?”
“끄응!”
“좋게 말할 때 분주로 사 오쇼.”
“좋게… 말할 때?”
“어? 눈을 치켜뜨네? 아마 형수님이 술을 싫어하지? 술 마시는 사람은 벌레 보듯 쳐다보시지, 아마?”
유구의 눈꼬리가 사르르 내려갔다. 벽녀는 지금도 술 냄새만 맡으면 그때 그 일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유구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녀와 같이 있을 때는, 전각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