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3화
종리추는 객잔에서 낯선 손님을 맞았다.
“아미타불! 소림의 계원이라 합니다.”
“…”
종리추는 인상 좋은 스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계원 대사는 이름난 승려다.
소림 방장에게는 각일 대사라는 직책이 있다. 현재 장경각을 맡고 있는 각주이며, 소림 무승들 중 나한십팔장에 가장 능통하다는 고수다.
계원 대사는 각일 대사의 직제자다.
소림 방장의 맥을 잇고 있는 승려. 뛰어난 무승이 많은 소림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무승 중 한 명이다.
계원 대사는 무례한 종리추의 태도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방장님의 전갈을 모셔왔소이다.”
“…”
“근간 소림사를 방문해 달라는 말씀이시오.”
“얼마 주겠소?”
“….?”
“난 돈이 되지 않는 곳은 움직이지 않는 성격이라.”
불심이 깊은 계원 대사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분노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대사는 금방 평온을 되찾았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었다.
“세상에는 돈보다 귀중한 게 있는 법이라오.”
“무식해서 모르겠는데, 고명 높으신 스님께서 일러주시겠소?”
“소협, 빈승의 무공이 보고 싶은 것이오?”
“…”
“보여드리리다.”
계원 대사는 탁자에서 일어나 나한십팔장의 기수식을 취했다.
종리추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무공을 보느니 광대들의 줄타기를 보는 게 더 재미있지. 유구, 유회!”
“….”
대답이 없었다.
“역석, 쌍구, 혈살!”
“…..”
역시 대답이 없었다.
“후사, 음양, 천왕, 좌리!”
“….”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산화, 구류, 광부, 혼세, 살문!”
계원 대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리추를 쳐다보았다.
“하하! 미련하기는. 잘 들어라. 쌍구가 내리찍는다.”
쉬익!
천장에서 인영이 뚝 떨어져 내렸다.
계원 대사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양손을 위로 내밀었다.
파앙…!
공기가 응축되었다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음양 뒤! 혈살 앞!”
쒸이익…!
양장이 쌍구에 닿기도 전에 종리추의 일갈이 터져 나왔고, 계원 대사는 등 뒤에서 밀려오는 경기를 느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나타나는 자는 제법 날카로운 채찍질을 가해왔다.
빠르기는 하지만 아직은 미숙한 무공들이다.
“시주! 당장 멈추시오!”
계원 대사는 일갈을 내지르며 몸을 빙그르르 돌았다.
우장이 정확히 채찍 끝을 가격했고 좌장은 음양쌍극을 밀어냈다.
“역석, 후사! 좌우!”
역석과 후사는 같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 봐도 좋다. 역석은 짧은 비수로 비류흔을 펼치고 후사도 역시 소도로 근접전을 즐긴다.
두 명이 좌우측 기둥에서 나타나 계원 대사에게 바짝 다가섰다.
“시주! 다칠 수도 있소!”
계원 대사가 고함을 지르면서 살수를 펼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이들의 공격이 가소롭기 때문이다.
팍팍팍…!
역석과 후사는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연신 손을 휘둘렀지만 번번이 나한십팔장에 막혔다.
나한십팔장은 천수여래의 불력에서 창안된 무공이다. 휘두르는 손은 두 개뿐이되 너무 빨라 천수가 움직이는 것 같다. 거기에 백보신권의 파괴력까지 가미된다면 맞받을 자가 몇 명 되지 않는 절공이다.
“좌리!”
촤아악…!
계원 대사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디서 무엇이 나타났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인정 때문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살상을 자제하는 바람에 역석과 후사도의 비수가 계속 육신으로 짓쳐들고 있다.
일순 공격이 뚝 멈췄다.
계원 대사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아래를 쳐다보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검이 가랑이 사이에서 사악한 웃음을 토해냈다.
외팔이 사내는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누워서 왔다. 등을 방바닥에 눕히고 두 발로 박차면서 기어왔다. 그리고 가랑이 사이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래 모두 방위를 가르쳐 줬어. 그런데 이자만은… 위, 앞, 뒤… 좌우… 방심했어.’
계원 대사는 수치스러웠다.
안중에도 두지 않던 자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이것이 속전이다. 방법이 나쁘더라도 빨리 끝낼 때가 유리할 수도 있다.”
사방에 숨어 있던 자들이 나타나 깊이 읍을 취해 보인 후 물러갔다.
“앉으시오.”
계원 대사는 처음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그에게는 종리추가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이곳을 어떻게 알았소?”
종리추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계원 대사는 부드럽게 들리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눈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없소.’
처음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게다.
“개방의 소식은 정통하지요.”
계원 대사는 사실대로 말했다.
“방장님께서 무슨 일로 소행을?”
“빈승은 방장님의 전갈을 모실 뿐.”
“알겠소. 조만간 방문하리다.”
“약조를 받아오라는 말씀이 계셨소.”
“약조라.. 하하! 무림을 떠도는 사람에게 약조라. 살아 있다면 칠월칠석에 방문하리다.”
계원 대사는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때가 된 거야.’
종리추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전을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십칠 전밖에 수련시키지 못했다.
‘소림까지 가고 오면서 하면 되겠군. 천천히 가면서.’
소림 방장이 불렀다.
살문의 개파 진위를 캐려는 게다. 향후 일어날 살겁을 방지하려는 게다.
소림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소림 방장의 한마디는 곧 무림의 법이다.
구파일방이 확고하게 굳어지기 전에는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선보이는 것이 무인의 도리였으나 지금은 조율을 받아야 한다.
계원 대사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
“문도를 얼마나 받을 생각이신가?”
“문도는 무슨…”
그는 문도를 받지 못한다.
소림사와 약속을 한 것이다.
“오백 명 정도면…”
“허허! 그 정도면 소림사도 능가하겠소이다.”
알아서 줄이라는 말이다, 제재를 가하기 전에.
‘후후! 재미있는 담판이 되겠군.’
종리추는 웃었다.
벽리군은 종리추가 남겨놓고 간 서신을 펼쳤다.
“유월 말일에 펼쳐 봐. 그전에는 펼쳐서는 안 돼.”
그가 말한 유월 말일이다.
“헉!”
벽리군은 깜짝 놀랐다.
분운추월.
“세상에!”
벽리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림자가 분운추월이었다니!
‘어떻게 분운추월을 움직였을까? 분운추월 같은 고수를…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분운추월님, 문주님의 전갈이 있는데요.”
쉬익!
지붕이 들썩인다 싶었는데 꾀죄죄한 거지가 뚝 떨어져 내렸다.
본 적이 있다. 머리에 혹이 달린 노인. 상품식에 참석했고, 어떻게 죽일 거냐는 난제를 낸 적이 있다.
“낄낄! 방금 문주의 전갈이라고 했느냐?”
분운추월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광채가 뻗어 나왔다.
사람이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광채가 뻗칠 리 없지만 벽리군은 분명히 빛이 새어 나온다고 느꼈다. 동시에 몸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도.
‘이 사람과는 싸울 수 없어. 너무 고수야.’
부지불식간에 든 생각이었다.
“예, 문주님이…”
“그놈이 떠날 때는 나도 있었지. 네게 전해지는 소식도 모두 알고 있고. 전갈이 오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벽리군은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분운추월이라는 단 네 글자만 적혀 있었다. 떠나기 전에 어떤 말이 오고 갔다는 뜻이다.
“또 내가 당한 것 같군. 그놈한테는 번번이 당하는 기분이란 말야. 그래, 어떤 전갈이냐?”
‘그래요. 문주님을 당할 수는 없어요. 뛰어난 무공을 지니셨지만… 안 되죠, 문주님께는.’
벽리군은 비로소 미소를 되찾았다.
“그동안 감사했다 전해달라셨어요. 나중에 다시 찾아뵙는다고.”
“뭐야?”
“….”
“감사했다 전해달라고?”
“네.”
“순전히 제멋대로군. 내가 떠나지 않는다면?”
벽리군은 다른 서신을 내밀었다.
살문 외장 식객들이 수집해 온 정보다.
거기에는 소림 방장이 살문 문주를 청했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크크! 이놈의 짓거리를 또 하는군.”
분운추월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서신을 홱 던져 버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좋아. 떠나달라는데 굳이 있을 내가 아니지. 그전에… 계집아, 하나만 묻자. 무림에서 일어난 의문사들, 살문에서 저지른 일 맞지?”
벽리군은 실수를 했다.
‘풋!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몰랐어요?’
그녀의 생각은 얼굴에 나타났다.
“그렇군. 역시 살문이었어. 계집아, 하나만 더 묻자. 전각에는 분명히 살수 놈들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로 들락거린 거야?”
벽리군은 또 실수했다.
‘생각을 읽었어! 능구렁이군. 조심해야지. 자칫하면 모두 들키겠어. 그렇다고 힘으로 물러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분운추월의 등 뒤에 있는 서가를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 슬쩍.
분운추월이 고개를 돌렸다.
“큭큭! 그래, 지하 통로였어. 역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 기관의 대가가 아니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장치군.”
벽리군은 분운추월과 마주 서 있기 싫었다.
그가 무서웠다.
“계집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지금까지는 그놈이 마음에 드니까. 죽인 놈들도 하나같이 인간 말종들이고. 내 손에 걸렸으면 내가 죽일 놈들이야.”
“….”
“그놈이 오면 전해. 배고프면 찾아오라고. 다른 건 못 줘도 개고기 그 부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벽리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방에는 절대 찾아가지 말라고 해. 노우의 충고라고 전해.”
‘진심이야.’
벽리군은 분운추월을 다시 봤다.
그는 진심으로 종리추를 좋아하고 있다.
‘문주… 인복이 많은 건지 인복을 만드는 건지…’
분운추월이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향하는 곳은 외장 가장 안쪽에 새로 지은 전각, 어린이가 있는 곳이다.
종리추는 잔인하게도 그녀에게 부모와 장모,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부탁했다.
잔인하게도 그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