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4화
숭산 소림사는 무림인들의 성역이다.
소림사는 가장 많은 무공을 보유했고 계속 창안되고 있다.
무림인들은 소림 고승에게 한 수 지도받고 싶어 한다. 또한 장경각에 들어가 수많은 무경을 보고 싶어 한다.
무림인에게 소림사는 꿈이다. 소림사가 계율이 조금만 느슨하고 혼인을 할 수 있다고 하면 승려가 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어떻게 오셨는지요?”
“방장님의 초청을 받았소.”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이름보다는 살문 문주라고 전해주시오.”
지객승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 살문 문주가 이토록 젊었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살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군.’
종리추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
지객당주는 각자 항렬의 고승이었다.
“각운이라 하오.”
“살문 문주입니다.”
“잘 오셨소. 몸에 혈기가 깃든 듯한데 불심으로 정화시키는 게 어떻소?”
지객당주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각운 대사님, 소생은 방장님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불을 드리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스님께서는 시간이 많으신 듯하나 소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객당주의 얼굴에 노기가 스쳐 갔다.
“부처님 집에 왔으면 부처님을 먼저 뵙는 게 순서지요.”
종리추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걸었다. 그가 걷는 방향은 산문 쪽이었다.
“시주!”
불당이 쩌렁 울리는 고함이 터졌다.
지객당주의 고함 때문인가? 무승 이십여 명이 곤을 들고 앞을 가로막았다. 건장한 신체를 지녔다.
무공으로 단련된 몸에서는 강철 같은 기개가 느껴졌다. 심오하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일정 수준을 넘어선 무공이 엿보였다.
‘십팔나한.’
“시주, 살심을 씻어내시오!”
“유인이었나!”
지객당주의 호통이 떨어지기 무섭게 종리추의 일갈이 새어 나왔다.
지객당주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맡은 일이 지객당주라 숱한 무림인을 만났지만 이런 천둥벌거숭이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큰소리를 치는가. 자신이 누구라고 하대를 하는가.
“시주의 살심이 너무 깊구려.”
“그 말은 나를 잡겠다는 소리로 들어도 좋소?”
“아미타불!”
십팔나한이 일제히 움직였다.
일정한 방위를 선점했고 각기 독특한 자세로 곤을 쳐들었다.
종리추는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각운 대사, 한마디만 분명히 하시오. 이 싸움은 내가 일으킨 싸움이 아니며 위협을 느낀 이상 살검을 들지 않을 수 없소. 물론 내 목숨 또한 걸겠지만 이들의 목숨도 거시오.”
“아미타불!”
지객당주는 종리추의 말을 무시했다.
십팔나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 선 자들은 사방을 점유했다. 뒤에 선 자들은 육방, 그 뒤는 팔방. 사상, 육합, 팔괘가 어우러진 진이다. 숨 쉴 틈 없이 공격하겠군. 승부는 빨리 끝낼수록 좋겠지.’
“하하하! 불문이라 공경한 마음으로 찾아왔거늘, 피를 원하다니! 소림사가 이토록 광오했던가!”
쉭! 쉭쉭쉭…!
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옆으로 신형을 틀어 피하면 다리를 치고, 다리를 들어 올리면 허리를 찍어왔다. 앞선 자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면 곧바로 뒤에 선 무승이 빈 공간을 찔러왔고, 그마저도 무위로 끝나면 가장 뒤에 있던 무승이 팔방에서 휘몰아쳤다.
‘빨리 끝낼수록 좋아.’
종리추의 손이 전신을 더듬었다. 그와 동시에,
쉭쉭! 쉬익…!
비수 네 자루가 막 덮쳐들던 무승을 향해 날았다.
탕! 탕탕…!
비수는 곤에 퉁겨 맥없이 떨어졌다.
이번 일격은 비수를 사용한다는 경고다. 종리추는 지객당주의 안색을 살폈다.
지객당주는 십팔나한을 철저히 믿는 듯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고 있다.
‘이제는 정면 승부!’
“허벅지!”
휘리리릭…!
종리추의 손에서 긴 철사가 삐져나왔다.
비수를 연이어 던지는 모습이 꼭 철사처럼 보였다.
“악!”
“큭!”
무승 두 명이 허벅지를 감싸며 풀썩 주저앉았다.
“어깨!”
쉬리리릭….!
연이어 삐져나오는 비수는 끝을 보이지 않았다. 무승 두 명이 어깨를 감싸 쥐며 물러섰다. 그들의 상반신은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종리추는 십팔나한진의 맥을 끊었다.
그는 아직 십팔나한진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본능적으로 앞과 중간, 뒤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자에게 비수를 던진 것뿐이다.
“다음은 머리다! 계속할 텐가!”
“아미타불!”
지객당주가 불호를 외우자 십팔나한이 뒤로 물러섰다.
“허허! 정중히 모시라고 일렀거늘.”
“죄송합니다. 살심을 씻은 후에 데려오려 했습니다. 경내에 피 냄새가 진동해서.”
소림 방장은 깡말라서 힘줄이 드러나 보였다. 눈매도 날카롭고 광대뼈도 툭 튀어나와 고승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혜공 선사는 명성이 자자한 고승이었다. 무공의 고수로서가 아니라 불제자로서.
“소림과 척질 생각이었는가?”
“십만인이 있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허허! 십만인만 없다면 그러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그렇다?”
“인의도 없고 자비도 없습니다. 싸울 때가 되면 싸울 문파입니다.”
향기로운 찻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는 껄끄러운 말이었다. 말하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곤혹스러울 게다.
“말해 주겠는가? 왜 인의가 없고 자비가 없는지?”
“청간을 보냈으나 사미승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인의가 없습니다. 편협된 생각으로 살심을 씻으라 했으니 자비가 없습니다.”
“자네는 살수가 아닌가. 살수가 인의와 자비를 말하는가?”
“살수라 인정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방장님은 제게 말할 수 없어도 저는 방장께 말할 수 있습니다.”
“궤변이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왜 청간에 대답이 없었는지, 초청자에게 억지로 예불을 드리게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면벽구년을 아는가?”
“압니다.”
“해보겠는가?”
위협이었다. 대소림의 이름으로 살문 문주를 죽였다고 해서 책 잡힐 것은 없다. 이유야 만들면 그만이다. 종리추는 호랑이 굴로 뛰어든 셈이다.
종리추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 해도 소림사가 죽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아마 일 대 일의 격전을 벌여도 맞상대할 자가 부지기수로 있으리라.
십팔나한들. 그들은 계자 항렬이었다. 객잔에서 보았던 계원 대사의 제자뻘 되고, 방장과는 다섯 항렬이나 차이가 난다.
소림사는 종리추의 성격과 무공을 시험해 본 것이다.
종리추는 일어나서 대례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후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살문은 개파를 했습니다. 명분이 없는 자는 손을 쓰지 않겠습니다. 십망이 선포될 때 받겠습니다.”
“자신 있나?”
“후일 뵙게 될 겁니다. 그때 다시 방장님과 이 차를 마시겠습니다.”
종리추는 물러 나왔다.
혜공 선사는 붙잡지 않았다.
종리추가 물러간 뒤 방장이 나한전주에게 말했다.
“개방의 분운추월이 붙어 있었다고 했나?”
“네. 아무 증거도 잡아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쯧. 분운추월도 늙었구먼. 살수가 분명한데.”
“저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속가제자 중에 삼십육방을 통과한 제자가 누구 있지?”
“개봉에는 정운이 있습니다.”
“아니, 아니, 정운은 너무 드러났어. 하남성에서 정운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정운 말고 누구 없나? 백천의는 지금 무얼 하지?”
“절강성으로 내려가 후학을 가르친다 들었습니다.”
“그래, 백천의야. 어떤가?”
“아주 적합합니다.”
“백천의에게 사람을 보내. 살문 문주가 약속한 대로 이행하면 도와주라고 하고.”
“도와주기까지 합니까?”
“저놈은 물건이야. 무공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제자와 견주어도 하등 손색이 없습니다.”
나한전주가 대답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봤어. 눈빛이 안으로 갈무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공을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말이야. 젊은 나이에 놀라운 성취지.”
소림사 방장과 나한전주가 종리추의 무공을 인정했다.
방장은 내공이 뛰어나다고 말했고 나한전주는 자신과 싸워도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자라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비수를 날린 수법은 전임 하오문주의 십비십향 같은데… 무척 뛰어나. 하오문주보다 뛰어난 것 같아.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십팔나한은 살아 있지 못할 게야.”
“….”
“잘하면 하남성이 깨끗해지겠어. 요즘은 죄업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쯧! 부처님의 노여움을 어찌 감당하려고. 아미타불!”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잔잔하게 울렸다.
매서운 여름이 기승을 부리는 칠월 칠석이었다.
‘고비를 넘겼어.’
종리추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며칠이나 걸릴까?’
사람이 올 것이다. 우연을 가장하되 필연처럼 의심할 수 없는 사건으로 다가올 게다.
종리추는 지난 삼십 년 동안 하남 무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조사했다.
혜공 선사가 방장 직에 오른 후부터 오늘까지.
몇몇 문파는 개파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봉문했다. 장문인이 실종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도 그들은 정말 소림사에서 면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몇몇 문파는 멸문했다.
멸문한 문파의 공통점이라면 반드시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문파를 도왔고, 결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 멸문의 길을 걷는다.
종리추는 사람이 찾아올 것이란 걸 확신했다.
‘후후! 보내주는 사람은 잘 써먹어야지. 나한전 승려는 보내지 않을 테니 아마도 속가제자를 보낼 테고… 삼십육방 정도는 통과해야 안심하겠지. 뛰어난 자를 보내주는군.’
살문 살수들은 걱정이 되는지 객잔에서 편히 쉬라고 해도 길가에서 서성거렸다.
종리추는 그들을 보자 다시 기운이 솟구쳤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야. 해보자고. 멋있게!’
소고는 잘못 판단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종리추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두고 써야 할 사람이었다. 살수로 써도 괜찮고 책사로 써도 괜찮다.
소고는 소여은을 책사로 생각했다. 소여은이 수적들 사이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이미 조사해 봤기에 잘 안다.
그녀의 두뇌는 미모만큼이나 뛰어나다. 공동파의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거친 사내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지혜 덕분이다.
소고는 소여은의 무공보다 지혜를 더 높이 샀다. 한데 잘못 판단한 것이다.
소여은이야말로 진정한 살수다. 미안공자가 자신했듯이 어떤 사내라도 죽일 수 있는 여자다. 지략보다는 살수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여자다.
산적들을 죽이지 않은 행위로 그녀를 잘못 판단했다.
그녀는 그런 여자다, 사람을 잘 안다는 소고마저 판단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반면에 종리추는 지략과 추진력이 뛰어나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그 일을 완성해 놓고 있다.
살수로서의 능력은 미지수다.
종리추는 직접 살행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가 움직였다고 확신하는 것은 살천문 개봉 지부장을 죽였을 때뿐이다.
살문은 중원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적어도 살수들의 표적이 될 만한 문파와 살천문이 보기에는 그렇다.
소고는 그것을 바랐다. 살문이 나서면 묵월광이 살수를 규합하기가 쉬워진다. 설혹 어떤 꼬투리를 잡히더라도 살문으로 미뤄 버리면 된다.
살문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현재의 묵월광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구파일방이나 살천문에서 냄새를 맡았을 테고 묵월광의 존재를 파악해 냈을 게다. 특히 야이간이 문제다.
그는 사천 청살괴를 끌어들였다.
살수 문파가 살수 문파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늑대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살천문과 구파일방은 청살괴의 이동을 눈치챘다.
야이간은 감쪽같이 숨겨놓았다고 자신하겠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살문이 없었다면 묵월광의 존재가 드러날 절대적인 위기였다.
종리추의 놀라운 점은 또 있다.
소고는 살수 문파를 열면 다짜고짜 살행부터 저지를 줄 알았다. 종리추도 묵월광에 쏠리는 시선을 가로채려면 무림에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떠났다.
시선을 끌어들인다….
무림인들이 한눈팔 수 없을 만큼 살행을 저지르는 방법 외에는 없다.
무림인들은 십망을 선포하든 다른 방법을 동원하든 살문을 제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 기간이면 충분하다, 묵월광이 살수를 구하고 양성하는 데는.
살수가 양성된 다음에는 가짜 문파는 필요 없어진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묵월광이 나설 것이고 살천문을 제거하고 나면 하남 무림은 묵월광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도 살수가 필요할 때는 있으니까.
하남에는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살수 문파 하나만 있으면 된다.
종리추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 했다.
그런데… 살문이 건재하다. 소림 방장과 면담을 하고 난 후에도 실종되지 않고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소림사가 살문을 인정했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너무 컸어.’
종리추는 살문을 버릴 수 없을 만큼 키워 버렸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현재 묵월광은 살문처럼 당당하게 무림에 나서 있을 게다.
‘잘못 생각했어. 종리추를 보내는 게 아니었어.’
소고는 두 사람을 잘못 봤다.
종리추와 소여은.
“일살!”
“넷!”
어디선가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대답이 들렸다.
목소리는 큰 편이었는데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살기가 너무 진해도 그런 음성이 나온다.
“살문으로 간다.”
소고는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