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9화
강에 살얼음이 덮였다. 살짝 떼어내어 입에 넣으면 아삭거리며 시원하게 부서질 것 같은 얼음이다. 그 위에 하얀 눈이 덮였다.
종리추가 강물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던 곳은 그만의 연무장이 되었다. 섬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을 비롯해 누구도 그의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무공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염려해서다. 호법은 철저히 섰다.
종리추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섬에 있는 무인들은 절반씩 번갈아 가며 종리추 주변을 에워쌌다. 누군가가 종리추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섯 개의 살겁을 뚫어야 한다.
‘아직 멀었어.’
종리추는 자신이 익힌 무공을 정리했다. 살문에서 수하들이 죽은 것은 자신 탓이다. 자신이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비영파파의 월영반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고 수하들이 죽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공동파 최고수 중 한 명인 비영파파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야 했다.
정통 무가를 세운다면 지금 무공으로도 충분할지 모르나 중원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살수 문파의 문주가 되기 위해서는… 천하 최강이 되어야 한다.
소고는 사무령이 되는 길로 묵월광이라는 조직을 생각했다. 묵월광을 소림이나 무당파와 버금가는 문파로 육성하면 구파일방이라 할지라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맞는 말이다. 묵월광이 그 정도로 클 수만 있다면 구파일방은 살겁 대신 공존을 선택하리라. 약아 빠진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싸움을 할 리 없다.
구파일방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세인들로부터 ‘묵월광은 사파다’라는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풍문이 떠돌기 시작하면 아무리 공존을 선택한 구파일방이라 해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해도 살검을 뽑지 않을 수 없다.
소고는 끊임없이 절제해야 한다. 구파일방 장문인과 대화를 나눠야 하고 타협을 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한 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
종리추는 천하 최강을 생각했다. 불가능하다. 무림 역사상 천하 최강이라고 자부한 무인은 없다. 일세를 풍미한 기인도 자신의 무공이 천하 최강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살수계의 전설인 사무령이 되기 위해서는 천하 최강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야 하거늘. 거기에 묵월광과 같은 단단한 문파가 받침돌이 되어주어야 하거늘.
사무령… 그것은 천하 최강의 무공을 익힌 문주와 구파일방과 같은 강대한 문파를 지니고 있을 때만 가능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면 사무령이라고 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
‘지금보다 배는 강해져야 해. 그렇지 않고는 무림에 나갈 수 없어. 분운추월, 비영파파 정도는 가볍게 누를 수 있어야……’
“타앗!”
신형을 허공에 띄웠다. 종리추의 양발에서 거센 경풍이 일어나 눈보라를 일으켰다.
오독마군의 구연진해를 하나로 합일시키는 공부(工夫)다. 전부터 깨우치고는 있었으되 능숙하지 못했던 구연진해를 완벽히 몸에 익혀야 한다.
단철각, 환영각, 자오각…… 아홉 가지의 각법이 따로이 생각나지 말아야 한다. 아홉 가지의 각기 다른 각법이 몸속에 녹아들어 생각이 일자마자 뻗쳐 나와야 한다.
구연진해는 각기 다른 각법 아홉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나 하나로 합치면 뻗쳐 나가는 각도와 방법만 여든한 가지가 된다. 여든한 가지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관절이 꺾일 수 있는 모든 부분, 발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향, 신형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공간이 포함되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각법이 나온다. 물론 무극지경에 이르렀을 경우에.
종리추는 구연진해를 하나로 귀일시켜 사용해 보았지만 흉내만 낸 정도에 불과했다.
구연진해라면 모진아가 가장 정통하지만 그 역시 종리추의 무리(武理)를 듣고 난 다음에야 아홉 가지 각법이 하나로 귀일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깊이는 종리추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쉬익! 쉬이익……!
각법이 현란하게 전개되었다. 경력(勁力)을 강하게 발산하려면 신형을 잘 움직여 줘야 한다. 발로만 차는 것보다 허리를 이용해 가격하는 것이 더 강한 타격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종리추는 구연진해에 금종수를 덧붙였다. 발로는 구연진해의 초식을 전개하면서 초식에 더욱 강한 경력을 보태기 위해 금종수를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 쳐냈다.
무형초자의 삼십육초 천풍선법, 혈염옹의 혈염무극신공, 하오문주의 한성천류비결, 아버지의 뇌인일지공까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합일시켰다.
쿵!
힘차게 솟구치던 신형이 부조화를 이룬다 싶더니 거칠게 떨어져 내렸다. 각기 다른 초식을 한 몸으로 전개하는 데 따른 부조화다.
종리추는 다시 일어섰다.
“문주님이… 지금 뭐 하는 거지?”
“글쎄……”
좌리살검의 물음에 구류검수는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살문 고수들 중에 정통 무공을 익힌 사람은 오직 구류검수뿐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화산파에 입문하여 기본공부터 착실하게 닦아왔다.
화산파의 매화검수. 그게 세월이 흐른다고 그냥 얻어지는 영광이던가.
구류검수는 중원에 산재한 거의 모든 무학을 알고 있다. 어떤 무공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더라도 시전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무공인지 알 수 있다.
구류검수가 보기에 종리추가 연마하는 무공은 광대의 몸짓보다도 못했다. 기본공조차 익히지 못한 어린 소년이 상승절학을 구경한 후 흉내를 낸다 해도 종리추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저런 무공도 있었나?”
묻는 좌리살검이나 듣는 구류검수나 생각하는 것은 똑같았다.
‘없다. 저런 무공으로는 삼류 고수도 상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종리추이지 않은가. 살문 십사각 각주들 모두가 그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종리추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새삼스럽게 거론하지 않아도 될 터……
보기에는 삼류 무공도 안 되어 보이는 몸짓이지만 종리추가 익히고 있으니 딱 부러지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품은 의문은 다른 곳에 은신해 있는 후사도, 음양철극, 혼세천왕도 같이 품고 있으리라.
“하나만은 확실해.”
“뭐?”
“문주님의 저 무공을 완성하는 날이 우리가 중원으로 돌아가는 날이야.”
“……”
구류검수와 좌리살검은 동년배다. 그런 연유로 서로 간에 스스럼이 없어 십사각 각주들 중에서도 가장 죽이 잘 맞았다.
검은 판이하게 다르다. 한 명은 화산파의 정통 무공을 사용하고 한 명은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사검을 사용하기 때문에 검론(劍論)을 나눌 때면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종리추는 세상에 한 번도 선을 보인 적이 없는 새로운 무공을 수련하고 있으며 그것이 완성되는 날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것이 종리추가 말한 준비라는 것을.
종리추는 살얼음 밑에 흐르는 맑은 강물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강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았다.
물고기와 육지에 사는 동물들의 움직임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동물들은 역동적이지만 물고기는 유유하다. 물속이라는 환경이 물고기들에게 그런 움직임을 주었을 게다.
‘부드러워, 무척……’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방향을 꺾을 때는 도저히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물속에서 상하좌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종리추에게는 그런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세 가지. 물고기보다 더 빠른 움직임으로 잡아내는 것. 이건 물고기와 물고기의 싸움이야. 두 번째는 순간적인 찰나를 포착해서 잡아내는 것. 물고기와 새, 물고기와 곰… 세 번째는 어망(魚網).’
종리추가 관심을 둔 부분은 첫 번째다. 물고기들은 어떻게 같은 움직임을 가진 물고기를 잡는가.
같은 환경에서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는 물고기끼리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게 특이한 사항은 아니지만 종리추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단지 속도 문제만은 아니었다. 덩치가 크다고, 속도가 빠르다고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아니었다.
‘방향을 읽고 있어. 움직임을 차단하는 거야.’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을 때는 모든 움직임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했다. 유유히 헤엄치다가 뒤로 확 꺾이는 돌연한 움직임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건 두 가지다. 돌변하는 행동을 속도로 잡아낼 수 있어야 하고 행동 특성도 잘 알고 있어야 해.’
종리추는 무공 수련을 멈추고 강물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종리추는 옷을 벗었다. 그리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숨이 막혔다. 인간이 물속에서 숨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내공을 익힌 무인은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물속에서 숨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다시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올라서야 한다.
종리추는 물속에서 폐기(閉氣)했다. 소모되는 숨의 양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기 위해 진기의 흐름을 조절했다. 상단전을 최대한으로 열어보기도 하고 중단전을 활용해 보기도 했으며 하단전에 쌓인 진기를 풀어보기도 했다.
시행착오는 무수히 거듭됐다. 살을 얼릴 듯한 추위는 잊은 지 오래다.
숨이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 활기찬 숨은 인간을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어느 순간부터 종리추는 텅 비어 있던 공간인 단전 좌부에 미지의 진기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단전 좌부는 오행 중 목(木)에 해당한다. 목은 계절로 따지면 봄이며 봄은 죽었던 만물을 소생시킨다. 세상 만물에 어진 덕을 베푸는 것이다. 인(仁).
또한 목은 장(臟腑)에 있어서는 간담(肝膽)이다. 간은 혈액을 저장하고 조절하며 담은 정(精)을 저장하여 생리적 기능을 원만하게 유지시켜 준다. 인간의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는 곳도 담이다.
물속에서의 생활은 간담의 효용을 극성으로 끌어올렸고 다른 진기의 영향으로 목기(木氣)가 쌓이기 시작했다.
‘내 몸속에는 두 군데가 비었어. 좌부의 목, 우부의 금(金). 이걸 모두 채운 후 합일시켜야 돼.’
종리추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시간이 흐르면, 내공이 점차 증진하면 비어 있는 좌부와 우부가 스스로 움직여 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옳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종리추는 인위적으로 좌부와 우부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물속에서 움직임을 시작한 애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전이었으나 획기적인 발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중에서도 이미 목기는 찾아냈고 육성시키고 있다. 새로운 무공, 새로운 진기 경락법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부의 금 또한 물속에서 익힐 수 있다. 금은 폐(肺)나 대장(大腸),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 기운을 금기(金氣)라 하니, 봄과 여름이 지나 단전의 기운이 무르익을 때 금의 기운이 나타나리라.’
종리추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없어졌다. 적지인살, 배금향에게도… 어린에게도… 무슨 말을 하면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그는 안으로 침잠했다. 살문을 일으킬 때처럼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종리추의 전신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뿜어 나오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했다. 맑고 밝되 말을 아끼는 젊은 청년… 그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괴물을 주워왔군.”
적지인살이 농담 삼아 말할 때는 모두 웃었다.
종리추에게는 문주로서의 위엄이 사라져 갔다. 대신 친혈육 같은 따뜻한 정이 배어 나왔다.
“이 정도면 주공과 겨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섬에 있는 사람들 중 제일 고수라면 단연 모진아다.
모진아는 하루 일과가 무공 수련으로 시작해 무공 수련으로 끝난다 싶을 만큼 무공 수련에 미쳤다. 그는 구연진해를 하나로 합일시켰다.
과거 오독마군이 환생한다 해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을 만큼 모진아의 구연진해는 완벽했다.
그에 비해 종리추는 퇴보한 느낌이었다. 간혹 뭍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 특이할 만한 초식이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위력도 보이지 않았고, ‘아!’하고 감탄을 터뜨릴 만한 초식도 없었다.
종리추는 물과 같았다. 둥그런 그릇에 담으면 둥그렇게 되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난 모습이 되고… 약한 자와 만나면 약하고 강한 자와 만나면 강해지고.
종리추의 진신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얼음이 녹고 새싹이 돋아났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며 녹음이 짙게 깔렸다. 푸르기만 하던 녹음도 색이 바래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유구는 마흔두 살이라는 나이에 예쁜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암연족의 풍습에 따라 아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었고 아이는 쌀을 집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은 조미(糙米)가 되었다.
“예쁜 이름도 많은데 하필이면……”
혈살편복이 투덜거렸지만 유구의 부릅뜬 눈을 접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모진아와 구맥의 오가는 눈빛도 심상치 않다. 모진아는 암연족 제일의 용사였고, 구맥은 홍리족 제일의 미녀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족장이었으며 지금은 낯선 중원에 들어와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여러 가지 공감대가 두 사람을 가깝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은 종리추의 장모요, 한 사람은 노예이니… 이것이 두 사람을 애끓게 하는 것 같다.
어린은 소녀 티를 벗고 어엿한 처녀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농염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났다.
비부는 여전히 어린의 몸종이었다.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이 되었지만 그는 어린의 몸종을 자처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어린뿐이야.”
그는 공공연히 말했다. 종리추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듯했다. 많은 사내가 한 여인의 남편이 되는 것이 스스럼없는 홍리족이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랑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여인이 받아주지 않는 한 자신의 사랑은 자신의 마음속에만 간직해야 하는 것이 홍리족 사내다.
그는 철저한 홍리족 사내였다.
뭍과 섬을 오가는 사람은 천전흥과 등천조뿐이다. 천전흥은 비밀리에 물자를 조달해 왔고 등천조는 살문 외장을 유지, 관리했다.
살문의 정보력은 감쇠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 필요도 없는 무수한 정보들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살문은 수입원이 전혀 없다. 살행을 하지 않으니 수입이 있을 리 있는가. 더욱이 살문의 정보란 돈을 주고 사는 정보이기에 외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벽리군은 그래도 외장을 유지시켰다.
‘눈과 귀를 막으면 안 돼.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돼.’
그녀는 종리추와 어린 사이를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비부처럼… 자신도 종리추 곁에 머물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정염은 삭일 수 없었고 돌파구로 외장 유지에 몰두했다.
많은 변화가 있는 가운데 십이월이 저물고 새해가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