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21화 : 호유화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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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21화 : 호유화의 등장


호유화의 등장

“이러지 마시오!”

태을사자는 오른손에서 묵학선을 떨쳐내어 짓쳐 들 어오는 암류사자의 공격을 퉁겨내었다. 그러고는 몸 을 날려 명옥사자의 공격을 피하자마자 이번에는 장 창을 든 신장이 달려들었다. 태 왼손에서 백아검을 떨쳐내어 신장의 장창을 막아냈다.

장창을 막아내자 손에 찌르르하고 고통스런 느낌이 가해져 왔다.

그 순간 그 뒤를 이어 화극을 든 신장이 덮쳐 들어왔다.

태을사자는 간신히 묵학선을 날려서 화극의 자루를 쳐내어 신장의 공격을 가까스로 비켜내었다. 그리고 몸을 날려서 뒤로 멀찍이 물러서 버렸다. 그러자 묵 학선에 되퉁겨진 법기를 회수하며 암류사자가 버럭 소리쳤다.

“태을! 과연 요사한 수법으로 법력을 크게 증진시켰구나!”

암류사자가 사용하던 법기는 자그마한 수레바퀴 모 양의 생김새였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암류환 (暗流環)이라 이름을 붙인 물건이었다. 그런데 불과 이틀 전만 해도 태을사자의 법력은 암류사자보다약 간 낫기는 했지만, 이렇듯 암류환이 단 한방에 묵학 선에 의해 가볍게 퉁겨나가 버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태을사자는 암류사자가 의심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 생각했지만그렇다고 흑풍사자의 법력까지 얻게 되어 법력이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말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법력이 두 배 증가되었다는것 은 자신의 예전 법력과 같은 실력자 둘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이상의 것이 있었다.

쉽게 예를 들어 체중이나 힘이 어린이의 두 배가 되 는 어른이 있다면, 그 어른은 어린이 두 명이 아니 라 대여섯 명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그 예는 태을사자의 묵학선만을 말할 때의 이야기이지, 백아검까지 합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좌우간 두 명의 저승사자들보다 더욱더 믿지 못한다 는 표정으로두 명의 신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원래 신장은 저승사자보다 훨씬 강한 법력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것도 두 신장의 공격을 태을사자는 별로 타격도 입지 않고 막아내다니.

태을사자는 다시 한 번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화극을 든 신장이 화극으로 태을사자를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유진충(劉眞忠)이라고 한다. 너의 손에 든 검, 보통 것이 아닌듯 싶구나.”

그러자 장창을 든 신장이 유진충 신장에게 말했다. 

“놈은 보통 실력이 아니오. 과연 판관을 해칠 정도 의 법력이 있는듯하오.”

그러고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 둘은 충(忠)자 돌림의 신장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고영충(高永忠)이라 부른다. 네 수단이 악랄하고 법력이 높으니 손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 각오하라.”

“가…………… 가만…..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나는 결코…….”

그러나 신장 고영충은 태을사자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장창을 수없이 공중에 찌르더니 허공에 꽃 모 양을 만들어 태을사자에게로 몸을날렸다. 그 뒤로 유진충도 화극을 휘둘러 둥근 원을 만들면서 달려들 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명옥사자와 암류사자는 두 신 장에게 일단 태을사자를 맡겨두고, 태을사자의 일행 으로 보이는 은동과 금옥에게로달려들었다. 금옥은 아직 정신이 완전히 들지 않은 상태라 맥없이 명옥 사자에게 잡혀 버렸다. 그러나 은동은 암류사자가 자신을 잡으러다가오자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나 암류사자의 손을 피했다.

암류사자는 은동이 감히 인간의 영혼 주제에 자신의 손을 피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암류사자는 화를 이기지 못해 노기를 띠며 호통을 쳤다. 

“이놈! 순순히 있지 못할까?”

“왜 날 잡으려는 겁니까? 그리고 왜 태을사자님을 잡으려는 거예요?”

“이놈! 듣지도 못하였느냐? 태을사자는 상관인 이 판관을 살해한 중죄인이다!”

“거짓말이에요! 태을사자님은 계속 나하고 같이 있 었다구요! 오히려 나쁜 것은 이판관이에요!” 

“어허! 이놈이 발칙하게 거짓말을!”

암류사자는 더욱더 살기등등하게 은동을 다시 맨손 으로 잡으려 하였으나 은동은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암류사자의 손을 비껴나갔다. 그러자 암류사자는 화 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네 이노옴!! 함부로 거짓말을 지껄이더니 감히 저 승에서 사자의처분을 거역해?”

그러자 은동도 화가 나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물론 전심법으로 내지르는 소리였지만 묘하게도 생시에 소리 지르는 것과 거의 기분이같았다.

“이판관이 나빠요! 이판관이 나쁘다구요! 이판관이 노서기라는 영감님을 죽이는 걸 봤어요! 바로 이판관이 저기 금옥 누나도 풍생수라는 마계 괴물에게 팔아먹었다구요!”

“태을사자가 이판관을 소멸시키고 노서기의 입을 막 으려고 같이소멸시킨 것이 분명하다! 허황되이 입 을 놀리지 마라!”

“정말 거짓말도 구별하지 못하는군요! 그러면서 무 슨 인간을 심판한다는 거예요! 바보들 같으면서!” 그 말에 암류사자는 화가 치밀어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법 기 암류환을 은동 쪽으로 던졌다.

그러나 암류사자는 은동을 정말로 맞추어 소멸시켜 버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정신을 잃는 정도의 타격 을 주어 나중에 지옥에 몰아넣고 거짓말 한 자들이 받는 혀를 잡아 빼는 고통을 줄 작정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암류환에 원래의 법력의 십분의 일 정도만 힘을 실어 던진것이다.

은동은 암류환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저승사자의 법기는 경천동지할 무기이니 그것에 맞으면 그대로 박살이 날 것 같았다. 너무도 끔찍하여 몸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손을들어 얼굴만을 가렸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암류사자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내가 던진 법기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은동 역시 자신이 죽었나 살았나 싶었지만 몸에 별 다른 충격이 없었다. 무서워서 얼굴을 가렸던 손을 풀고 바라보니 손에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은동의 손에는 아까참에 태을사자의 소매 속에 들어 있을 때, 엉겁결에 쥐었던 화수대가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사념에 의해 옷을 입은 모습으 로 있었지만, 그 옷은 실제의 옷이 아니었으므로소 맷자락 같은 것도 없었다.

화수대는 영적인 물건이라면 거의 무한정 집어넣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암류사자의 법기인 암류환은 은동에게 날아들다가 공교롭게도 화수대의 주머니 부분을 건드리게 되어 화수대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었다. 만약 암류사자가 자신이 지닌 법력의 삼분 의 일이라도가해서 던졌더라면 단순한 주머니인 화 수대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주머니를 찢고 나와 은동 을 쳤을 터…

그러나 암류사자는 은동이 너무 어리고 힘이 없으리 라 생각하고은동을 너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최 대한 힘을 줄여 던졌던 것인데, 법력이 거의 없는 암 류환은 일단 화수대에 들어가자 그 힘을 잃어 버리 고 말았다. 암류환에 법력을 조금 더 가해서 던졌으 면 도로 거두어들였을 것인데, 이제는 법력조차 떨 어져 그냥 물건처럼 화수대에 들어가 은동의 차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법기는 원래 그 주인의 힘을그대 로 지니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형체를 이루는데 대부분의 법력이 들며 던지거나 도로 돌아오개 하는 데에는 여분의 법력이 소모되는데 암류사자는 그 여분의 법력을 거의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법기가 은동의 손에 들어가자 암류사자는 얼굴빛이 벌겋게 변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 이 녀석! 그 물건을 냉큼 내놓지 못하겠느 냐!”

은동은 천우신조로 암류환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자 기쁘기도 하고호기도 일어 대뜸 되받아 소리쳤다. “그럼 태을사자님을 놓아줘요! 우린 급한 일이 있 단 말이에요!”

“입 닥치지 못할까!”

암류사자는 화를 이기지 못해 은동에게 달려들려 했 다. 그때 금옥을 잡아 막 소맷자락에 넣으려던 명옥 사자가 미소를 지으며 암류사자에게 말했다.

“저까짓 꼬마에게 어찌 화를 내고 그러나? 자네가 부주의해서 그런일이 벌어진 것이잖나.”

“아니, 자네는 지금 저 꼬맹이 편을 드는 겐가?”

“아니네. 화내지 말고 그냥 잡아 법기를 되찾으면 될 것 아닌가?”

명옥사자는 싱글거리면서 이번에는 조용히 서 있는 승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은동은 운이 좋아 암류사 자의 법기를 빼앗아서 의기양양했지만, 이미 금옥이 명옥사자에게 잡히고 승아까지 잡히려는 것을보자 커다랗게 외쳤다.

“손대지 말아요! 그애는 관계가 없다구요!”

그러나 명옥사자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 승아를 잡으려고 했다.

“네가 날뛰는 것을 보니 더욱더 잡아야겠구나.”

“놓아주라구요!”

은동은 외치면서 무심결에 명옥사자에게 뛰어들어 명옥사자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승아를 잡아 뒤로 물러서게 하려고 하였으나 어느틈엔가 암류사자의 손에 잡힌 꼴이 되고 말았다.

“요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암류사자는 인정사정없이 은동의 따귀를 철썩철썩 때렸다. 은동은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자신 은 영의 몸이라 생계의 사람들은자신을 만질 수 없 겠지만, 이곳은 저승이며 저승사자들도 자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라 때릴 수 있는 것만이 아니고 맞는 아 픔까지도 생계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은동은 얻 어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반항하면서 힘껏 외쳤다. 

“힘없는 아이나 괴롭히다니! 이 나쁜 놈들아!” 

더 심한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모친 엄씨의 엄한 교육 밑에서 점잖게 자란 은동이었다. 그래서 알고 있는 상소리가 그 정도밖에 없어더 심한 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따귀만 두어 대 더 얻어맞자 은동 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씨근거리기만 했다. 태을사자는 그때 한참 유진과 고영충 두 명의 신 장과 엄청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은동으 로서는 그들의 몸놀림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 다.

태을사자의 묵학선은 이미 흑풍사자의 법력을 합쳐 두 배의 위력으로 강해져 있었다. 백아검도 원래 자 체적으로 영성을 지닌 명검인데다가 윤걸의 영이 봉 인되어 있으니, 이 또한 두 명의 저승사자의 힘정도 에 해당되었다.

윤걸이 근위무사였던 만큼 저승사자보다는 조금 더 영력이 있었지만 백아검은 법기가 아닌지라 그만큼 의 영력은 없었다. 태을사자가백아검과 묵학선을 동 시에 사용한다면 원래의 네 배 정도에 해당되는법력 을 부릴 수 있으며, 이는 신장 하나의 힘을 조금 넘 는 정도였다.

그 때문에 태을사자는 간신히 신장들의 공격에서 자 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두 명의 신장이 동시에 전력을 다하여 공격한다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의 신장은 일개 저승사자가 이토록 강 한 법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모든 힘을 다하지 않고 태을사자를 시험하며 공격을 가했다. 그 때문에 태을사자는 그나마 겨우 방어를 할 수있 는 처지였다.

좌우간 태을사자가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니 은동과 금옥은 두 저승사자에게 잡혀갈 도리밖에 없었다. 거의 절망적인 기분이 되자 은동은 다시 한 번 암류 사자에게 악을 썼다. 태을사자가 의심을 받고 있는 형편이니 자신과 금옥은 그들과 같이 가는 것이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승아는 전혀 관련 이 없으니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들었던 것이다. 

“그 아이만이라도 놓아줘! 그 아이는 우리와 같이 오지 않았단 말야! 어서!”

별안간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들려오자 은동은 말을 멈추고 눈을크게 떴다. 난데없는 웃음 소리에 암류 사자와 명옥사자도 동작을 멈추고 웃음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승아가 소리내 어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꼬마가 제법 의기가 있네. 저 저승사자는 봐줄 필 요가 없지만 너는 한번 봐줄 만하구나.”

암류사자와 명옥사자는 은동보다 더 작아 보이는, 그것도 하찮은계집아이인 승아가 그런 소리를 하자 기가 막혔다. 그런데 바로 뒤를이어 더욱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두 저승사자에게 승아가 거만하게 코끝으로 명을 내리는 모습이라니! 

“그 아해들을 내 려놓아라. 그리고 법기를 내놓고 절을 아홉 번 올린 다음에 네 발로 기어서 썩 꺼져라.”

암류사자와 명옥사자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잠시 할말을 잃다가 이윽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암류사자는 은동의 덜미를 잡아 흔들면서 승아의 머리를 쓰 다듬으려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하………, 너 제정신이냐? 감히 어찌…….”

암류사자의 손이 승아의 머리에 닿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암류사자의 몸이 마치 폭풍에 밀린 가랑 잎처럼 뒤로 날아갔다. 영체로 이루어진 저승사자의 몸이라 꼴사납게 땅에 뒹굴지는 않았지만 암류사자 는 흐윽 하는 소리를 내면서 기절한 듯 몸이 축 늘 어졌다.

은동이 승아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데 이 무슨 일인가? 원래대로라면암류사자와 함께 날아갔어야 할 은동이 어느 틈엔가 다시 땅에 내려 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명옥사자는 깜짝 놀라 법기를 꺼내려 하였는데, 순간 명옥사자도 으악 하 는 소리를 내면서 금옥을 잡고 있던 손을 떨구었다. 은동이 언뜻 보니 흰빛이 쉬익 명옥사자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 뒤로 명옥사자의 팔이 비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흰빛이 힐끗 비치더 니 이번에는 명옥사자도 법기를 떨구면서 아까의 암 류사자처럼 퍽 소리를 내며 저쪽으로 밀려가 버렸 다.

은동은 놀라서 삽시간에 정신을 잃어 버린 두 저승 사자를 보다가다시 승아 쪽을 돌아보고는 놀라서 소 리를 질렀다.

“호유화!”

승아 곁에는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한 마리의 커다 란 흰 여우가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한들한들 복슬복슬한 꼬리들을 살랑거리고 있었다. 여우의 털 빛은 환하게 빛나는 탐스러운 흰빛이었는데, 크기는 보통 여우보다는 조금 커서 거의 사람만했다. 어떻게 보면 몹시 귀여운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조금 요사스러운 면도 있었으며 교태가 자연스럽게 넘쳐흘렀다. 몸놀림마저 하늘하늘한 것이 사람을 홀 릴 정도의 모습이었다.

마치 여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동을 보고 살 짝 한쪽 눈을감았다 떴다. 은동은 그 눈짓이 무슨뜻인지 몰랐다. 다만 하얀 광채를 뿜는 호유화의 털 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여우는명 옥사자가 놓쳐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명옥사자의 단검 모양의 법기를 집어들고는 중얼거렸다. 

“청정검(劍)이라구? 아이들이나 희롱할 줄 아 는 놈들이 법기이름은 그럴 듯하게 지었네.”

여우는 한 번 중얼거리고는 은동에게 말했다. 

“정신 차리려무나, 꼬마야.”

그러자 은동은 고개를 마구 흔들며 정신을 추스렸다. 그러고는 놀라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호유화님인가요?”

“네가 보는 대로, 그리고 생각하는 대로.”

여우는 알 듯 말 듯하게 중얼거리면서 명옥사자의 청정검을 집어은동에게 건네주자 은동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여우는살랑살랑 가볍게 뛰어 정신을 잃고 있는 두 명의 저승사자에게로 갔다. 은 동은 고개를 돌려 허공에서 무섭게 격돌하고 있는 태을사자와신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 직이며 맹렬하게 격돌하고 있었는데 묵학선과 화극, 장창과 백아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똥이 번쩍번쩍 튀 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니 태을사자가점점 밀려가는 것 같았다.

태을사자는 신장들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 급 급하여 미처호유화가 나타났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 다. 본디 심계가 깊은 태을사자라 정신력이 강하고 집중력이 뛰어나 뭔가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것에 영 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신장들은 난데없이 흰 여우 한 마리가 나타 나 두 저승사자를 삽시간에 때려 눕히고 법기를 빼 앗는 것을 보고 상당히 다급해져서 전력을 다하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은동은 태을사자가 밀리는 것을 보고 초조해졌지만, 태을사자를 도울 만한 힘이 눈곱만큼도 없어 그저 바라볼 도리밖에 없었다.

승아를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저…… 저…….”

“뭐니?”

“호유화님께 말해서, 태을사자님을 좀 도우라고 할 수는 없을까?”

“왜?”

“아이구, 나는 저 저승사자와 함께 가야 한다구. 안 그러면 내가 죽고, 아버지도 구할 수 없게 돼! 그리 고 조선군…….”

“가만가만……. 차근차근 이야기하라구.”

“사정이 무척 길어! 좌우간 말 좀 해주란 말야!” 

하지만 운동은 사정이 길어서라기보다는, 언뜻 태을 사자가 호유화에게 금제를 가하여 굴복하게 만들 계 획임을 떠올린 것이다. 길게 이야기하다 보면 그 말 을 내뱉을지도 모르고, 자칫하여 호유화의 기분을 틀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지금 비록 두 저승사자가 실신했다고 하나 더욱 무 서운 두 신장이남아 있는 터였다. 만일 호유화가 자 칫 토라지기라도 하고 태을사자가 패하기라도 한다 면 자신은 그대로 지옥에 남는 수밖에 없다. 승아는 흥 하면서 조금은 속이 보이게 삐치는 척하더니 은동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에게 한 가지 약속해줘.”

“뭔데?”

그러자 승아는 배시시 웃었다.

‘저 모습이 꼭 뒷집에 살던 행희와 닮았구나.’

은동은 행희 생각에 기분이 잠시 울적해졌다. 

“나하고 내내 놀아줘. 여기 있으니까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야.”

뭔가 엄청나고 굉장한 부탁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은동은 예상외로 쉬운 답이 나오자 얼른 그러마 하 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어리기는 했지만 워낙 신 중하고 속이 깊은 성격이었다. 전에 유정이 자신을 따르라고 했을 적에도 깊이 생각해보고 대답했을 정 도였으니.

잠시 깊이 생각해 보자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이곳은생시가 아니라 지옥 중에서도 가장 깊 다는 십팔층의 뇌옥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승아와 내내 놀아준다는 것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포기하고 지옥에 계속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승아는 은동이 망설이는눈치를 보이자 입 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싫어? 내가 마음에 안 드는가 보지?”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도대체 뭐야?”

“나는 이 일… 일이 끝나면 도로 가야 해. 사실 난 아직 죽은 게아니거든.”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여길 왔니?”

“으음…………, 이야기하자면 길어. 좌우간 지금은 좀 힘들다구.”

그러자 승아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다시 배시시 웃었 다.

“그러면 나중에라도 우리가 만나게 되면 꼭 같이 놀 아줘야 해. 어때?”

생각해보니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닌 듯했다. 만일 여 기서 일단 나가게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이 다시 만 나게 될 기회가 있을까? 필경 은동이 죽어서 지옥 에 오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터였다.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은동은 그리되면 허튼 약속을 하는 것 같아승아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가 만약 나가게 된다면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렵지 않겠니?”

“그거야 운수소관이지 뭐. 좌우간 그럴지 안 그럴지 만 대답해.”

그제서야 은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아는 또다시 배시시웃음을 흘리더니 은동을 잡아끌고 여 우가 있는 쪽으로 갔다. 여우는쓰러져 있는 명옥사 자와 암류사자의 머리를 꼬리로 눌러 땅에 찧는중이 었다.

“뭘 하는 거죠?”

승아가 묻자 여우는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아홉 번 절을 하라고 명령했으니 절을 시켜야지.” 

은동은 어이가 없었다.

‘저게 무슨 절을 시키는 거야? 하긴… 저승사자들 이 순순히 절을할 리 없으니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 면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우는 은동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기어가게 만들어야겠지?”

여우는 두 저승사자를 꼬리로 누른 상태에서 휙 걷 어차 둘의 몸을납작하게 눕혔다. 그러고는 마치 기 어가는 것처럼 멀찌감치로 밀어버렸다. 비록 땅에 몸이 닿지는 않았으나 기어가는 것과 흡사해 보였 다. 그러자 승아가 여우에게 말했다.

“이 꼬마가 저승사자를 도와달라고 말하는데요?” 여우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방금 이 꼬마가 위험한 지경에 빠져서도 맹랑 하게 너를 도우려 하기에 도와준 것 뿐이야. 저자 에게는 볼일이 없어.”

은동이 다급해져서 말했다.

“하지만 저승사자가 지는 것을 그대로 두면 저는 영 영 나가지 못하고 말아요!”

“그러면 어떠냐? 여기서 우리랑 놀면서 지내는 것 도 괜찮지 않아?”

여우는 교태스럽게 딴전을 피웠지만 은동은 그 말에 울상을 지었다. 곁에 있던 승아는 약간 귀찮다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됐어요. 이 아이는 나중에 나랑 놀아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난 믿어요. 그러니 어서 도와주세요.”

그러자 여우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요염한 눈매 로 은동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왜 여기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 니?”

“성계에 가서 시투력주를 삼켰기 때문에…… 들어오 게 되었다고들었습니다만………….”

“그래, 알고 있었구나. 시투력주라는 것은 미래의 천기를 읽을 수있는 보물이지. 그것 때문에 나는 이 곳으로 들어온 거야. 그러나 난감금된 게 아니란 다.”

호유화가 잡혀서 감금된 것이 아니라는 말에 은동은 흠칫 놀랐다.

“그러면요?”

“난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거야. 미래의 천기를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미래의 역사에 지장을 줄 수 있거든. 그래서 그것을 막으려 한거야. 그런데 파리떼 들이 계속 나를 귀찮게 하지 뭐니.”

“파리떼라뇨?”

“마계의 잡것들하고 사계의 놈들까지도 자꾸 그걸 찾으러 온단 말이야. 벌써 대여섯 번이나 왔었지.”

시투력주가 어떻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 지만, 지금 한편에서는 태을사자가 계속 밀려서 얼 마 지나지 않아위험해질 판이라 다급했다. 태을사자는 몸에 장창이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가서 소맷자락이터져나가는 상황이었다. 소매 속에 들어 있던 쇠고리며 노서기가 준두루말이 같은 것들이 허 공에 흩어져 나왔다.

“아이구, 일단 태을사자님부터 구해주세요. 어서 요!”

“가만 있어 봐. 좌우간 놈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난 이제껏 모두물리쳤단다. 박살을 내서 소멸시켜 버렸지. 여태까지 놓친 놈은 단 한놈뿐이었는데……”

그러자 승아도 맞장구를 쳤다.

“잘하셨어요. 감히 호유화님을 건드린 놈은 죽어도 싸지요.”

은동은 더 참지 못하고 여우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그러자 승아가 눈짓을 하면서 은동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서 호유화님의 말씀이 맞다고 해.”

은동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 면서 계속 여우에게 간청을 했다. 그러자 여우는 씨 익 웃고는 은동에게 말했다.

“좋아. 저 신장놈들도 날 성가시게 만들었으니 혼을 내주어야지. 하지만 내가 손쓸 필요까진 없어. 꼬마 야, 너 저승사자들의 법기를 가지고 있지?”

“예? 아, 예…….”

“그것을 태을이더간? 그 저승사자 쪽으로 던지거라.”

“예? 어째서……”

그러자 여우는 짜증난다는 듯이 내뱉었다.

“어서 시키는 대로나 해!”

은동은 황급히 화수대에 손을 넣어 암류환을 꺼낸 뒤 암류환과 청정검을 태을사자에게로 던졌다. 어린 은동이 던진지라 가속이 별로붙지 않았다. 그러자 여우가 한 번 꼬리를 부채 모양으로 펼치며 훅하고 숨을 내뿜었다. 암류환과 청정검은 흰 불꽃 같은 것 에 휩싸이면서 갑자기 속도를 얻어 태을사자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태을사자는 막 신장의 화극에 찔릴 뻔하다가 아슬아 슬하게 뒤로물러섰던 참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날아 드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조차하지 못하고서 묵학선 을 들어 앞을 막았다. 그런데 날아들던 암류환과 청 정검이 묵학선에 부딪히지 않고 묵학선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것이 아닌가?

은동은 그 모양을 보고 태을사자도 화수대를 가지고 법기를 거둔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옆에서 승아가 말했다.

“저 법기들은 이제 법력을 지니고 태을사자에게 흡수된 거야. 전이도력(轉移道力)이란 거지.”

태을사자는 신장들에게 밀리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손에 들고 있는묵학선에서 커다란 힘이 흘러나와 몸 에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급 하게 고영충의 화극을 묵학선으로 밀어내자, 별안간 고영충이 으윽 하고 신음성을 내뱉더니 뒤로 두어 자나 물러섰다.

그것을 본 유진충은 놀라 다시 장창을 곧추세워 날 카롭게 찔러 들어왔으나 이번에 태을사자는 백아검 으로 막았다. 그러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는 충격에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태을사자의 묵 학선은 이제 두 저승사자의 법력을 합쳐지게 되었으 니 도합 네 명의저승사자만큼 힘이 있는 셈이었다. 신장들은 보통 저승사자의 세 배 정도의 신력을 지 니고 있어 묵학선이 고영충의 공격을 일격에 물리친 것도 당연했다. 그에 비해 백아검은 저승사자의 두배 정도의 힘이었으니 유진충의 강한 공격에 조금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심기가 깊은 태을사자는 백아검이 조금 밀리 는 것을 금세알아차리고는 백아검을 오른손에 옮겨 쥐고 한 번 천천히 휘둘렀다.

이제껏 쓰지 않았던 생계에서의 무술인 만검법(慢劍 法)을 사용하기시작한 것이다. 과거 태을사자는 윤 걸 및 흑풍사자와 함께 사계를 나서면서 백아검이 일반 법기가 아닌 것을 알아보지 않았던가. 설령 법 력이 뒤지더라도 백아검의 법기로서가 아닌 병기로 서의 특징을 활용하면 보다 강한 자와도 대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윤걸도 그러한 태을사자의 심중을 알고 있었 다. 검 속에 봉인 되어 있는 윤걸이 그 점을 깨달아 태을사자에게 무형의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좌우간 태을사자가 오른손으로 백아검을 쥐 고 만검법을 발휘하자 유진충의 공격을 그럭저럭 방 어할 수 있었다.

유진충의 장창법은 빠르고 쾌속하였다. 그러나 물샐틈 없이 찔러들어가도 이상하게 태을사자의 느릿느릿 움직이 휘말려 법력이 자꾸 빗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한편 태을사자는 왼손에 든 묵학선으로 고진충의 화 극과 상대하고있었다. 하지만 고진충은 묵학선에 담 긴 네 사람 분의 법력을 당해낼수 없는지라 조금씩 밀리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밀리던 태을사자가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어 조금씩 앞으로 밀고 나가자 그것을 보고있던 은동은 기뻐서 손뼉을 쳤다.

“고맙습니다! 정말…….”

여우에게 눈길이 머물자 은동은 깜짝 놀랐다. 여우 의 얼굴이 갑자기 험상궂어졌기 때문이었다. 은동은 급히 고개를 돌려 승아를 보았는데 승아도 얼굴빛이 곱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은동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여우를 자세히 보았 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여우는 태을사자의 소매에서 떨어진 쇠고리, 호유화를 금제하려고 울달과 불솔이 변한 고리를 손에 들고 찬찬 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이거 야단이네. 저 여우는 분명 저게 뭔지 알 거야. 우리도자기를 잡으러 온 것이라는 걸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자신을 찾아와 성가시게 군 놈들은 모두 박살을 내 버렸다는 여우의 말이 뜨끔하게 은동의 뇌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여우가 은동을 날카롭게 째려 보며 말했다.

“이건 대체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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