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1화 : 이순신을 만나다
이순신을 만나다
“못 들어간다. 수사님이 그리 한가하신 분이라더 냐?”
전라좌수영의 문지기는 은동을 쫓아 버리려는 듯 말 했다. 은동은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전라좌수영에 온 것이다. 이곳에 올 때까지는 흑호 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흑호나 태을사자는 이 순신과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은동이 그들 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할 처지였다.
허나 이순신은 율포에서의 해전을 마치고 6월 10일 에야 좌수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은동은 6월 11일 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어린아이가 감히 전라좌수사님을 직접 뵈어야겠다는 말에 코웃 음만 칠 뿐이었다. 은동은 애가 탔다.
“급한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그게 뭔데? 말해봐.”
“여기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러면 들어갈 수 없다.”
“아이구, 이거 참…….”
은동은 계속 문지기에게 졸라대었으나 문지기는 들 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승사자니, 호랑이 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아예 미친 아이 취급받 을 것이 분명하니, 그런 내용에 대해 말할 수도 없 었다. 문지기가 딱 잘라 말했다.
“수사님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쉬고 계시다. 너 같은 아이를 만날 시간이 없으셔!”
은동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 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게 몸을 감추고 있던 흑호와 태을사자가 은동에게 전심법으로 말을 걸어왔다.
– 어허, 들여보내 주지 않는가 보구나.
– 제기럴. 내가 저 문지기놈을 한 대 먹여서 기절시키면 될거아니우?
– 그런 짓을 해서야 쓰겠는가? 그런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일단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
은동과 태을사자, 흑호 등은 한식경 (한 차례의 음식 을 먹을 만한 시간)이나 그 앞에서 궁리를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 호유화가 있었다면 이순신의 부장으로 둔갑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일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을 텐
태을사자가 중얼거리자 은동은 사경을 헤매는 호유 화 생각에 눈물이 나려 했다. 그때 어느 꾀죄죄한 노인 하나가 좌수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노인은 절대 군사나 관리 같지 않았는데도, 문지 기는 그 노인을 아무 말 없이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었다. 그것을 보고 흑호가 말했다.
– 어, 저 영감은 왜 들여보내 주지?
– 흠, 어디 좀 알아보세나.
태을사자는 다시 좌수영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왔다.
– 저 사람은 의원일세. 이순신의 병을 봐주고 있는것 같더군.
그러자 은동이 말했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이순신 장군이 아프댔죠? 그럼 허주부님께 물어보면 안 될까요?”
– 허주부가 누구냐?
“왕실 내의원에 계시는 의원이신데, 솜씨가 아주 용하신 분이에요! 그분에게 증상을 말하고 처방을 받으면…………… 나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잠시 태을사자가 생각해보고 입을 열었다.
– 하지만 그 사람을 여기로 데려올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네가 비록 처방을 그 사람에게 듣는다 해 도, 네가 의술을 지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텐데?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하나?”
그러자 흑호가 말했다.
– 가만가만. 내게 좋은 수가 있어!
– 어떤 수인가?
– 은동아, 나랑 같이 좀 가자꾸나. 히히히…………….
흑호는 기분좋게 웃으면서 뭐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은동에게 둔갑법을 씌워서 휙 하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 버렸다. 태을사자는 흑호가 무슨 짓을 꾸미는가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찌되려는가 보려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마수들이 언제 이순신을 노릴지 모르 는 상황이었으므로 모두 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 던 것이다.
흑호가 은동을 데리고 간 곳은 어느 깊은 산골짜기 였다. 인적이 닿지 않은 그늘이 진 언덕빼기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 은동을 내려놓고 흑호는 실실 웃었다.
“은동아, 저거.”
흑호는 어느 한 곳을 손짓했으나 은동은 의아해할뿐이었다.
“뭐가요? 여긴 어디에요? 뭐 하러 날 데리고 왔나 요?”
“음냐, 저거저거.”
은동은 흑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으나 풀과 나무들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뭔데요?”
“아이구, 바부멍청아. 저기 산삼이 있잖여? 저걸 얼링 캐란 말여!”
“사…… 산삼요?”
“그려! 그걸 들고 이순신에게 바친다고 하면 무난 히 들어갈 수 있을 거 아녀!”
흑호는 원래 영통한 동물이었고 산삼도 영약이었으 므로, 흑호는 커다란 산삼이 묻혀 있는 곳을 여러 곳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은동은 흑호의 말에 얼른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순간 흑호가 잔소리를 했다.
“아이구, 그건 산삼이 아녀. 여기여기. 향긋한 냄새 나는 이 풀이 산삼이여.”
은동은 얼른 산삼을 뽑으려 했으나 흑호가 또 만류 를 했다.
“이거 봐, 이 바보야. 넌 산삼 캐는 법도 모르냐?”
“네…..? 몰라요.”
“산삼은 잔뿌리 하나라도 다치면 약효가 반감되는 법이여. 손가락 끝으로 조심조심 파서 잔뿌리 하나 도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캐내야 혀! 어서!”
은동은 그 말을 듣고 열심히 고사리 같은 손을 놀려 산삼을 캐내었다. 그 산삼은 상당히 큰 것이어서 캐 내는 데만 꼬박 한식경 이상이 걸렸다. 흑호는 그 외에도 주변에 자라는 산삼을 몇 개 더 가르쳐 주어 서 은동은 도합 다섯 뿌리나 되는 산삼을 캘 수 있었다.
“와, 신기하네요. 이건 되게 귀한 거 아닌가요? 그 런데 이렇게 많아요?”
그러자 흑호는 히히 하고 웃었다.
“귀하지. 영약 중의 영약이지. 보려무나. 다섯 뿌리 중 제일 작은 게 사백 년 묵은 거구, 제일 큰건구 백년이나 묵은 거여. 아마도 내다팔면 큰 기와집 한 채는 살걸?”
“요거 다섯 뿌리로 집을 산다구요?”
“으이구……, 모르긴 몰라도 제일 작은 거 한 뿌리 로도 집 한 채는 살 거다, 히히. 왜? 너 돈 좀 벌고 싶어?”
“돈을 뭐에다 쓰겠어요. 이순신 장군이나 낫게 해드 리면 그만이지. 근데 이걸로 낫게 해드릴 수가 있을 까요?”
“모르긴 몰라도 죽은 사람만 아니면 그걸로 못 구할 리 없을 거여. 하지만 말여, 한 번에 다 줘 버리진 말어. 작은 거부터 하나씩 주라구. 이건 하늘이 내 린 천물(物)이니 아껴 쓰란 말여.”
“네.”
은동은 대답하고 나서 산삼을 잘 갈무리하여 품에 넣었다. 산삼에서 풍기는 청아한 내음이 정신까지 맑게 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은동이 산삼을 갈 무리하자 흑호는 다시 둔갑법을 써서 번개같이 전라좌수영 부근으로 돌아왔다. 은동이 돌아오자 그때까지 혼자서 망을 보고 있던 태을사자가 흑호에게 물었다.
– 어디를 갔었나?
– 히히, 산삼 좀 캐러 갔다왔수.
– 산삼?
– 히히. 이순신도 만나고, 병도 좀 낫게 해주고. 꿩 먹고 알 먹는 거 아니우?
그러자 머리가 빠른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은동에게 말했다.
– 그래, 제법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러면 은동아, 잘해보아라.
하지만 은동은 비록 흑호의 도움으로 산삼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몰라서 막 막했다. 그리고 막막하기는 흑호나 태을사자도 마찬 가지였다. 흑호는 워낙이 단순했고, 태을사자는 워 낙 고지식했기 때문에 잔꾀가 부족했던 것이다.
일단 무엇이라 말을 하고 들어가야 이순신을 직접 만날 수 있을지, 또 만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셋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 보았으나 역 시 막막하기만 했다.
으음, 이럴 때 호유화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흑호가 호유화를 들먹이자 은동은 또 대번에 눈가가 붉어졌다. 그것을 보고 태을사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데 뒤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고민들 하나?”
셋이서 돌아보니 그것은 바로 하일지달이었다. 하일 지달은 몸을 감추지 않고 평범한 여자의 모습을 하 고 있었는데,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은동에 게 다가와 말했다.
“요 꼬맹이. 내가 꼼짝말고 있으랬는데 언제 여기까 지 왔니? 찾느라고 혼났네.”
하일지달이 은동에게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하자 은 동은 별 이유도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흑호 는 공연히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건넸다.
어, 여봐. 하일지달. 뭐 좀 좋은 수가 없을까?
“무슨 좋은 수? 또 뭘 쑥덕거리고 있었는데?”
흑호와 태을사자가 하일지달에게 이순신과 은동을 직접 만나게 할 방도가 없겠느냐고 사정 이야기를 하자 하일지달은 다시 그 특유의 흥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뭐 그런 정도 가지고 그래? 나한테 맡겨.”
– 정말 문제없겠는가?
“쉬운 일이지, 뭐. 산삼이나 나한테 주구. 그래, 그 럼 가자. 은동아.”
하일지달은 산삼 한 뿌리를 받아들자마자 곧바로 은 동의 손목을 잡고 좌수영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은 동은 반사적으로 하일지달의 손을 뿌리쳤다. 호유화 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냥 따라갈래요.”
“원참 애두. 그런데 얼굴 표정이 그게 뭐냐?”
“내 표정이 어때서요?”
“눈이 벌겋게 되어 가지고…… 흠, 좋아. 아무튼 내가 살짝 신호를 하면 막 울어야 한다. 알았지? 그 러면 넌 이순신 옆에 있을 수 있을 거야.”
은동은 하일지달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몰랐지 만 좌우간 하일지달의 뒤를 따라갔다.
하일지달은 은동을 좌수영 문앞에서 좀 떼어놓고 문 지기와 한참동안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았다. 그 다음 문지기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자 하일지달은 은동을 데리고 좌수영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문지기가 은동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어떻게 했죠?”
은동이 묻자 하일지달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뭐 간단하지. 귀한 산삼을 얻었기에 이수사님께 바 치고 싶다고 했어. 그 대신 수사님 얼굴이라도 한 번 뵙고 싶다고 빌었지, 뭐.”
“그런다고 들여보내 줬단 말예요?”
“수사님 병에 대해 긴히 아뢸 것이 있다고 했어. 너 는 지금부터 7대를 내려온 의원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거야. 알았지?”
“네?”
은동은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더 묻고 싶었으나 입 을 다물었다. 어느새 좌수영 안에서 장수 한 사람이 부하 두 사람과 같이 다가오는 바람에 이야기를 중 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장수는 바로 녹도만 호인 정운이었다. 정운이 하일지달에게 다가와 물었 다.
“너희가 은희와 은동이 오누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누이?’
은동은 놀라 하마터면 뭐라고 말할 뻔했으나 옆에 따라온 태을사자가 전심법으로 ‘쉿’하는 통에 소리 를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일지달이 고개를 숙이 자 은동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하일지달은 그 사 이 자신에게 은희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인 모양이었 다. 은동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유화도 그렇고, 하일지달도 그렇고……. 여자들 은 전부 저렇게 거짓 흉내내는 것에 능한 것일까?’
하일지달은 지난번 호유화가 허준 앞에서 은동의 어 머니 흉내를 냈던 것을 눈치채고는 자신은 이번엔 은동의 누이 행세를 해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정운이 하일지달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나이도 어린데, 이수사님의 병 을 돌보아 드릴 자신이 있느냐?”
“의원의 재주가 경륜에 많이 좌우되기는 하나, 꼭 경륜만으로 의술을 행하는 것은 아닐 터, 해보겠사 옵니다.”
말하면서 하일지달은 은동과 흑호가 캐온 산삼을 슬 쩍 꺼내 보였다. 워낙 오래 묵고 영통한 산삼인지라 꺼내자마자 향기롭고도 그 특유의 쌉쌀한 내음이 사 방을 메웠다. 그것을 보고 정운은 크게 놀랐다.
‘어허, 저렇듯 큰 산삼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이라면 보통 의원 집안의 아이들은 아닐 것 같구나. 안 그 래도 이 지방 의원이 영 신통하지가 않아 고민이 많 았는데 한번 수사님의 병을 돌보게 할까?’
그리하여 정운은 하일지달과 은동을 데리고 별청으 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순신의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며, 한편에서는 약 달이는 냄새가 났 다. 그곳에서 정운이 말을 건넸다.
“그러면 너희가 한번 수사님의 진맥을 해보고 약을 써 보거라. 누가 할 것이냐?”
“제 동생이 저보다 열 배는 낫사옵니다.”
하일지달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은동은 어이가 없고 놀라서 안색이 변했으나, 정운은 그런 은동의 얼굴 은 보지 못하고 수사님께 여쭙고 오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은동은 하일지달에게 말했다.
“아이구, 나한테 진맥을 보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뭘 아는 게 있다구요!”
“별수 없잖니? 앞으로 네가 이수사 주변에 있으려면 의술에 능통해지는 방법밖에 없잖아?”
그러자 근처에 둔갑법을 써서 몸을 숨기고 있던 흑 호가 끼어들었다.
“어허,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던데 잘못하다간 은동이 가 이순신을 잡겠네그려. 은동아, 너 약 쓰고 진맥 할 줄 알어?”
흑호가 반농담 삼아 웃으며 말하자 은동은 울상이 되었다.
“몰라요!”
은동이 툴툴거리자 하일지달이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말고 그럴 듯하게 흉내나 내거라. 내가 알아서 감당할 테니.”
“어떻게 감당을 해요?”
“내가 이순신의 병세를 자세히 보고 허주부에게 물 으련다.”
“아………….”
그러자 은동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허주부, 허준이 라면 의술이 정심하여 당대의 명의로 꼽힐 만한 사 람이었으니, 하일지달이 그 사람에게서 처방을 얻어 다주기만 한다면 이순신도 고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태을사자가 정색을 하며 나섰다.
“그러나 하일지달, 당신이나 우리는 모두 인간의 일 에 직접 개입하여서는 안 된다고 엄히 명받고 있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허준에게 직접 약처방을 물어 이순신을 구한다면 안 될지도 모르는데………….”
순간 하일지달은 조그맣게 특유의 흥흥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이순신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니 괜찮아. 그리 고 대모께서는 나에게 은동이 옆을 지키라 하셨거 든. 그런데 그때 허주부가 은동이를 돌보고 있었으 니까 허주부에게 내가 묻는 것은 아마 괜찮을 거야.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 말에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일지달은 보기보다 퍽 머리 회전이 빠른 것 같았다. 하긴, 보 통 존재도 아닌 귀한 용족 출신이니까. 좌우간 태을 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운동도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팔자에 없는 가짜 의 원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퍽이나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더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정운이 돌아와서 은동과 하일지달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은동은 어떻게 해야 가짜 의원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 도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왜란종결자인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드디어 은동은 하일지달, 정운과 함께 이 순신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순신은 방에 보 료를 깔고 누워 있었는데 이순신의 곁에는 정운말고 도 몇몇 장한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방답 첨사 이순신과 군관 나대용 등등 이순신의 가까운 수하들이었다.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되어 이순신의 얼굴을 볼 수조 차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잘할 수 있을까? 가짜라는 것 이 들통나면 어떻게 하지?’
은동은 저절로 몸이 떨리는 판인데, 옆에서 하일지달은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 동생에게 진맥을 하게 하소서.”
은동은 도대체 그놈의 진맥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 지조차 몰라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 고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은동의 어깨를 무겁게 눌러 은동은 일어나기는커녕 몸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서 그 힘은 은동의 손을 가볍게 옮겨갔다. 은동 은 놀랐지만 그 곁에서 하일지달이 슬쩍 눈짓을 하 기에 좀 당황하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은동 의 손가락이 저절로 척척 움직여 이순신의 야윈 팔 목을 잡고 여기저기를 짚어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뒤에서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전심법의 음성 이 들려왔다. 흑호였다.
– 허허, 은동이가 진맥도 잘하는데? 손놀림이 제법이구먼. 어디서 배웠냐?
태을사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하일지달이 은동이의 몸을 대신 움직이는 것이네.
하일지달은 은동을 곁에서 돌보던 며칠 동안 허준의 손놀림을 보면서 진맥하는 방법을 대강 익혀둔 것이 다. 물론 하일지달도 인간을 진맥하는 법이야 당연 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손놀림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은동의 손목을 잘 조정했다.
덕분에 이순신의 부하들 중 혈도에 식견이 있던 사 람들은 그 가볍고도 정확하게 혈을 짚어내는 은동의 손놀림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그러자 하일지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됐어. 인제 울어.
은동은 놀라서 하마터면 ‘네?’라고 말할 뻔했으나 간신히 입을 다물고 마음으로 물었다.
‘네? 울라고요?’
– 아까 말했잖아? 울기나 해. 그냥 엉엉 울라구.
은동은 막상 울려고 하니 조금 막막한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하일지달이 툭 쏘듯이 말했다.
– 어머니 생각 안 나니? 그리고 호유화 생각 안나?
하일지달이 말하자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붉 어지다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일지달은 눈치가 빨라 그 한 마디만 하면 아직 어린 은동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 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본인과 이순신의 부하들은 은동이 갑 자기 진맥을 하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라는 것 같았다.
“아해야, 어찌 우는고?”
조용하고 인자한 목소리에 은동은 문득 고개를 들었 다. 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몹시 피로한 듯, 눈밑이 처지고 안색이 파리했으나 매우 온화한 인상을 주는, 대장이라기보다는 서생이나 조 용한 선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동이 자기도 모르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입을 떼 려 하자 하일지달이 재빨리 은동의 입에 귀를 갖다 대고 나섰다.
“뭐……? 그게 정말이냐?”
하일지달은 은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이순신의 부하들 중 성질이 급하고 용감한 나대용 같은 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불문곡직 은동의 멱살이라도 잡고 다그칠 기세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조 용히 말문을 열었다.
“인명이야 하늘에 달린 것. 저어치 말고 이야기해 보거라.”
그러고 나서 이순신은 이상하게도 스르르 눈을 감고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이순신이 의식을 잃자 부하 들이 일순 동요했으나 하일지달은 고개를 끄덕여 보 이며 그들을 안심시킨 후 재빨리 말했다.
“그러면 저어치 않고 말씀드리겠나이다.”
그러자 나대용이 걸걸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아, 어서 고하여라. 뜸들이지 말고!”
나대용의 다그침에 하일지달은 청산유수처럼 어려운 병명과 증상과 처방들을 단숨에 수십 가지나 말했다. 아마도 허준의 근처에 있을 때 주워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순신의 부하들은 잘 모르는 내용이었고, 천하에 귀한 산삼을 선뜻 바친 것과 은동의 나이가 그토록 어린데도 손놀림이 정확한 것에 이미 압도되 어 있었다.
“제 동생이 눈물을 흘린 것은 이유가 있나이다. 수 사 어르신의 용태가 심상치 않은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옵고…. 두 번째는 수사 어르신의 구완에 몹 시도 어려운 문제가 많은지라…….”
“아니! 그래서? 못 고친단 말이냐?”
이번에는 정운이 나섰다. 정운은 이순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평소에 과묵하고 행동이 무거운 사람이었 으나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옵니다. 다만 용태가 심하시어 앞으로 얼마나 곁에서 모시고 구완을 드려야 할지 모르옵니다. 그 것이 몹시도 지난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얼마나 병구완을 해야 할지 모른다? 좌우간 고칠수는 있겠느냐?”
“고칠 수는 있다 하옵니다.”
“틀림이 없느냐?”
“예.”
은동은 이제 거의 멍하여서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 었다. 잘될 것인가 아닐 것인가도 걱정이 되었고, 지금은 어머니와 호유화의 슬픈 생각? 정신이 없었 기 때문이기도 했다. 좌우간 이순신의 수하들이 기 뻐하자 하일지달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하오나 여기에는 세 가지 어려운 점이 있사옵니 다.”
그러자 성질 급한 나대용이 다그쳤다.
“어허!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어서 말하거라. 답 답하구나!”
“첫째로는 약재가 문제이옵니다. 보통 약재로는 구 완이 곤란한데다가 지금은 난리중이라….”
“아무리 난리중이라도 설마 전라도 땅에 약재가 전 혀 없기야 하겠느냐?”
“저희가 쓰는 처방은 좀 독특한 것이라 아마도 쇤네 가 사방을 다니며 계속 다른 약재를 채집해야 할 것 으로 아뢰옵니다. 깊은 산이나 계곡, 혹은 동굴이나 물속에 이르기까지 저희는 저희가 정한 기준대로 채집한 약재만을 쓰는 까닭이옵니다.”
“그러면 네가 수고를 좀 해주면 될 것이 아니냐!”
“허나 수개월이나 수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터에 저 희 어린 오누이만이 있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사 …….”
“어허, 이분이 뉘신지 아느냐? 이분은 정말 중요한 어르신이다. 이 분이 없으면 왜군이 밀려와서 전라 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 것이야. 야속한 말을 하지 말고 제발 수고 좀 해주려무나. 보상은 두둑하게 해 줄 것이니.”
정운이 간절하게 말하자 하일지달은 고개를 숙였다.
“보상을 바라지는 않사옵니다. 다만 정 그러하시다 면 쇤네가 자유로이 바깥 출입을 하고 또 좌수영 내 일지라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만 해주시옵소서.
여자의 몸으로 군영에 드나드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 는 것이옵니다.”
“어허, 그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또?”
“또한 약을 다루려면 은동이 혼자서는 곤란하옵니 다. 그러니 약 일에 능숙한 집안사람을 두어 명 써 야 하옵는데….”
“두 명이 아니라 스무 명이라도 필요하면 써야지. 솜씨 좋은 하인이나 이 근방 의원들이라도 붙여주면 어떻겠느냐?”
“아니옵니다. 저희와 잘 아는 집안사람들이 좋을 것 이옵니다. 다만…………….”
“무엇이냐?”
“그 사람들은 용모가 조금 남들과 다루고 행동이 조금 이상한 데가 있는지라…………… 군영에 드나들면 혹남들이 놀랄까 저어되옵니다.”
그러자 흑호가 엥 하며 놀라는 소리가 은동과 하일지달에게 들려왔다.
– 어라라? 그럼 그건 혹시 우리?
곧이어 태을사자가 허허 웃는 소리도 들렸다.
– 그런가 보네. 우리도 편히 드나들게 하려고 그런 꾀를 썼나보이. 말도 잘하는군.
좌우간 흑호나 태을사자의 말이 들리지 않는 나대용 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어허, 문제 같지도 않은 것을 문제라고 말하지 말 거라. 누가 의술에서 용모를 따지겠느냐? 반편이건 곱사등이건 개의치 말거라. 왜놈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좋다.”
“그리고 저희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자칫 잘못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저희 처지가 매우 곤란해지옵니다. 수사님의 병환을 돌보는 데에만 전 념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흠……, 그럴 수도 있겠구나. 좋다.”
정운이 응낙하자 이번에는 방답첨사 이순신이 물었다.
“다음은 무엇이냐?”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옵니다.”
“무엇인데 그러느냐?”
그러자 하일지달은 잠시 뜸을 들이고 생각하는 척하 다가 조심조심 말했다.
“이 병은 비록 구완이 불가능하지는 않사오나 한번 발작이 일어날 때 치료에 때를 놓치면 매우 좋지 않 사옵니다. 특히 흥분하시거나 놀라는 일이 생기면 더욱 어려워집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야 거의 모든 병이 마찬가지 이치겠지.”
“삼국지의 주유도 싸움중에 흥분하여 결국 죽게 되 었다고 전해지옵니다.”
“불길한 소리는 말거라. 그건 그렇고, 이 소년 의원이 왜 눈물을 흘린 것이냐?”
“그러니 수사님의 병세를 살피는 동안에 은동이는 계속 수사님 근처에 있어야만 하옵니다. 하오나 수 사님은 해군의 전선을 다스리시는 터, 해전을 하러 나가시게 되면 은동이도 그 배를 타고 따라가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아이는 그 것을 저어하여 그러는 것이옵니다・・・・・・.”
대뜸 흑호가 의아하다는 듯이 태을사자에게 물었다.
– 어라라? 은동이가 같이 배를 타면 더 좋은 거 아뉴? 근데 왜 저러지?
태을사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허허, 하일지달은 정말 영악하군그래. 정말 머리가 좋아.
– 머리가 좋다구? 난 모르겠구먼.
태을사자가 생각하니 이것은 하일지달의 깊은 계략 이었다. 은동은 이순신을 보호하려고 이순신 곁에 가려는 것이니 전라좌수영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해전을 치르러 나가면 그 배에도 타야 하는 것이다.
마수들이 이순신을 공격한다면 흑호나 태사자가 막을 수 있겠지만, 만약 마수들이 인간의 몸을 빌려 이순신을 해치려 한다면 태을사자나 흑호가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인간을 통해 치러지는 일은 은동 만이 막을 수 있도록 중간계의 재판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만약 은동을 배에 태워달라고 한다면 왜 의원 이 배에까지 따라가야 하느냐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 다. 그래서 하일지달은 일부러 저어하는 듯 애를 태 워서 오히려 저쪽에서 은동에게 배를 항상 타고 있어 달라고 강요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 일지달은 슬픈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쇤네의 처지로서도 슬프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나 이다. 이제 십여 세밖에 안 된 동생이 전함을 타고 전쟁터로 간다니요…….”
그 말에 이순신의 부하들도 일순간 한숨을 지어 보 였다. 그러다가 정운이 말했다.
“그렇더라도 어쩌겠느냐? 너무 염려는 말거라. 우 리는 이미 여러 번 싸웠지만 아직 한 척의 배도 잃 지 않았다. 수사님은 그만큼 고금에 없는 명장이시 니 안전할 것이다.”
나대용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하물며 이 소년 의원은 대장선에 탈 것이 아니냐? 대장선은 내가 목숨 걸고 지킬 것이니 안심하거라.”
이어서 방답첨사 이순신도 말했다.
“지금 이 난리중에 이 나라 백성치고 힘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은 자, 누가 있겠느냐? 하지 만 누구나 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지. 아직 어린아해에게 이런 것을 말하는 내 심정도 괴롭지만 어쩌겠느냐? 아해나 아녀자뿐만 아니라, 도깨비나 귀신의 힘이라도 이 나라 귀신의 힘이기만 한다면 뭐든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말을 듣고 흑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어라? 저 인간이 우리 일을 아는 거 아뉴?
그러자 태을사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 허허…………, 말이 그렇다 이거네. 저 인간이 어찌 알겠는가? 하긴 실제로는 비슷하게 일이 돌아가기는 하네만. 도깨비나 귀신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존재들이 이 난리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허…
좌우간 하일지달의 대활약으로 은동을 이순신 곁에 붙여놓는 계략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이순신의 부하 들은 하일지달이 내놓은 모든 조건에 동의하였으며,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을 테니 꼭 이순신을 낫게 해 달라고 수차례 부탁하는 것이었다.
하일지달과 은동이 물러나온 뒤 태을사자가 하일지 달에게 물었다.
“다 잘되었으니 다행이네. 정말 수고 많았네.”
“그 정도야, 뭘. 흥흥흥…….”
“참,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네. 이순신은 자네가 의식을 잃게 하였지? 헌데 왜 이순신이 듣지 못하게 하였는가?”
그 질문에 하일지달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하지 않았어.”
“그러면?”
“이순신이 그냥 기절한 거야. 아마…………….”
“그냥 기절? 어째서?”
“병이 중할지 모른단 소리를 들으니 그랬나 봐. 마 음이 되게 약한 사람인가 보지, 뭐. 좌우간 일단 난 허주부 만나러 간다…………….. 연극도 해보니 재미있는데 그래?”
하일지달은 훌쩍 둔갑하여 평양으로 떠나 버렸다. 하일지달이 사라지자마자 은동은 의아하여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태연했는데…… 자기 병이 중한 줄 알고 놀라 기절했다고요?”
은동은 정말 뜻밖이었다. 무슨 왜란종결자가 저렇게 마음이 약한 것일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태을사자 는 그냥 쓴웃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비록 명장이고 왜란종결자일지라도 심약하 고 병약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무튼 은동과 자신, 흑호와 하일지달까지도 이순신 옆에 떳떳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뿐이었다. 다만 하일지달이 정말 허준의 지식을 빌 려 이순신을 잘 치료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기는 했 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을사자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 렸다.
‘이제부터는 만사가 좀 제대로 풀리려나? 그래야 할텐데………….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