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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5권 – 2화 : 평양 함락


평양 함락

한편 이순신과 만났던 그날로부터 운동은 좌수영 뒤 켠에 기거하면서 이순신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정 운과 방답첨사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등등의 당부 가 있어서 좌수영 내의 모든 사람들은, 은동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의원님’이라 존대하여 불렀다. 은 동은 퍽 쑥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의원 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별수 없 었다. 특히 정운은 이순신과 몹시 가까운 사이여서 측근의 일을 많이 위임받고 있는 듯싶었다. 정운은 몸소 은동을 데리고 좌수영 뒤켠의 작은 별채에 데 려다주며 말했다.

“소년 의원. 자네는 여기 묵게나. 혼자서는 불편할 것이니 시중 들어줄 아이라도 구해줌세.”

그날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흑호와 태을사자도 주 위를 좀 둘러보고 양신법과 둔갑법을 쓴 후, 이틀 가량 있다가 오겠다고 해서 은동은 홀로 작은 별채 에서 뒹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심심해져 은동 은 흑호에게서 받았던 산삼 중 남은 것을 꺼내어 보 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뒤적거리다가 자리에 누웠다.

‘허참……………, 내가 의원이라니….. 잘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거짓말 한 것이 들통나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날은 군무에 바빠서였는지 아무도 은동의 처소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은동은 혹시라도 누가 와서 의학지식에 대해 물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 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은동은 누군가가 자신을 톡톡 건드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은동을 깨운 사람은 바로 하일지달이었다.

“피곤했니? 자자, 시간이 없어. 어서 이걸 보고 외우도록 해라.”

하일지달이 내놓은 것은 종이에 기록되어 있는 무슨 봉서(편지) 같은 것이었다.

“그게 뭔데요?”

“처방을 적은 약방문.”

“약방문? 아, 그럼 허주부님께 다녀오셨나요?”

“그래. 그런데 조금 골치 아프게 되었어.”

그러고 보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하일지달은 별로 낯빛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허주부님도 못 고치는 병인가요?”

은동이 묻자 하일지달은 허준을 찾아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일지달은 이순신과 비슷한 남자의 모습 으로 둔갑을 하여 허준을 찾아갔던 것이다.

비록 호유화만은 못하지만 하일지달은 모습을 자유 로이 바꿀 수 있는 수룡이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증 상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이순신과 흡사한 모습으 로 변하여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하일지달은 이순신의 진맥을 하면서 이순신 의 맥박수도 알아내어 비슷하게 조절했다.

실제로 이순신의 맥을 짚은 것은 은동이었지만 하일 지달의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되어 그런 것이니, 실 질적으로 진맥을 한 것은 하일지달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둔갑한 하일지달의 맥을 짚 어보고 단박에 말했다.

“이상하군…….맥은 고르지 못하나, 그리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허준은 뜨끔해하는 하일지달에게 이것저것 자세한 것들을 물어 보았다. 하일지달은 이순신에 대해 사전지식이 별로 없던 터라, 조금 당황하여 대 강 아는 한도 내에서 억지로 증상을 두들겨 맞추었 다. 그러자 허준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 으로 말했다.

“혹시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니오? 몸의 병이라 기보다는 마음에 병인(病因)이 있는 것 같소만.”

“그럴지도 모르지요. 요즘 퍽 일이 많아서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제가 일전에 커다란 삼 (蔘)한 뿌리를 얻었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허준은 탄식했다.

“허어………., 큰 삼이오?”

“예……. 아주 크고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이야기에 허준은 고개를 저었 다.

“마음에 병인이 있는 터에 탕약이 무슨 도움이 되리 오. 댁의 증상은 나로서도 처음 보는 기이한 것이 오. 병이 있는 듯 맥이 고르지는 못하나 깊은 곳에 서 이상한 곳은 없는 듯하니…..”

그러면서 허준은 자신에게 계속 들러서 진맥을 받고 그때그때마다 처방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난감해진 것은 하일지달이었다. 일단 억지를 부리다시피 하여 비슷한 약방문은 받아왔지만.

“그러니 어떡하니? 내가 아무리 맥을 비슷하게 해도 그 허주부라는 의원은 실제로는 병이 없다고 척 알아내는 거야.”

“그럴 만도 하죠. 명의시니까.”

“좌우간 걱정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순신을 데려 가야 정확한 진맥을 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이 야기인데……. 이순신하고 허준은 천기상으로 직접 만나는 일이 없는 걸로 알아.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하면 자칫 천기를 흐트러뜨리는 일이 될 터인데……”

하일지달이 말끝을 흐리자 은동도 내심 근심에 싸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일단은 별수 없지 않니? 내일 이순신을 진맥할 때 내가 허준에게서 들은 대로 말하고, 우선 이 처방을 내리거라. 나는 옆에 있다가 가급적 이순신하고 똑 같이 맥을 만들어서 가보아야지……………”

바로 그때 문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다른 방법도 있을 거요.”

은동은 깜짝 놀라 문을 열려고 했지만 하일지달은 놀라지 않았다. 은동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드르 륵 열리고 파리한 낯빛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태을사자였다. 은동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하일지달이 흥흥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위에 결계를 쳐서 보통 사람은 우리 이야기 를 듣지 못해. 아니, 그보다 너는 말로 이야기를 하 고 있지만, 우리는 전심법으로 이야기하니 다른 사 람들은 들을 수 없어. 적어도 태을사자나 흑호 정도 도력이 있어야 들을 수도 있고,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지.”

그러자 태을사자가 물었다.

“흑호는 아직 안 왔느냐?”

“와 있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시커멓 고 커다란 그림자가 휙 날아 들어왔다. 은동은 그 형체를 보고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그 덩치가 너무도 크고 얼굴이 험상궂어 보여서였다. 흑호라는 것을 알아도 놀랄 지경이었으니 그 모습이야…………. 흑호는 은동이 놀라는 것을 보고 계면쩍은 듯 머리 를 긁적였다.

“좀 이상해 보이냐? 사람 같지 않어?”

“사….. 사람은 사람 같은데………좀…”

태을사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 헝겊으로 얼굴 가리고 다니게.”

흑호는 그 말을 듣고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대꾸했 다.

“제기럴, 나는 죽을 고생을 했는데 다들 왜 그려? 태을사자, 댁은 뭐 성한 줄 아슈? 시퍼렇게 썩은 송 장 같아 보이는구먼……………..”

그 말에 태을사자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하일지달이 참을 수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참 기이하네. 둔갑이 그리 서툴러서 어째? 내가 보기에는 둘이 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좋 겠어. 그리고 태을사자, 댁은 앉은뱅이 행세를 하는게 낫겠어.”

“앉은뱅이? 내가 왜?”

“세상에 어떤 인간이 저렇게 둥둥 떠 있는담?”

그러고 보니 태을사자는 무릎을 굽히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습관이 있어서인지 자리에 앉아서도 땅에 서 조금 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태을사자는 음음 하고 용을 써서 간신히 몸을 땅에 붙였다. 그 모습 을 보고 하일지달이 다시 말했다.

“어디 한 번 걸어봐, 인간들처럼.”

그러자 태을사자는 힘을 잔뜩 주고 일어나서 방안을 걸었으나 도대체가 자연스럽지 않고 이상해 보였다. 원래 다리는 몸의 무게를 받치는 것인데, 태을사자 의 경우는 아무리 양신으로 둔갑했어도 무게 없이 떠다니는 영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다리로 무게를 받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땅에 붙이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하여 걷는 꼴이 오죽 이상할까?

흑호는 그것을 보고 서까래가 주저앉을 정도로 커다 랗게 웃어댔고 하일지달과 은동마저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태을사자가 영 입맛이 개운치 못한 듯한 표정을 짓자 하일지달이 나섰다.

“아무래도 어색하니 안 되겠어. 그러니 뭘로 묶어서 뜨지 않게 해두고 거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라구. 공연히 걸었다가는 사람들 의심을 살 테니.”

대뜸 흑호가 되받았다.

“나는 원래가 생계의 존재니 이상하지 않지? 어떠 우, 응?”

그러면서 흑호는 어린아이처럼 뽐내듯이 방안을 걸 어 다녔다. 흑호의 걸음걸이는 약간은 어색하였지만, 역시 거의 사람과 흡사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는 이상에는 구별이 되지 않을 성싶었다. 다시 하일지달이 흥흥거리며 웃은 다음 말했다.

“그건 됐는데….. 흑호…….”

“왜 그러우?”

“그런데 덩치를 좀더 줄일 수 없을까? 옛날 신라 때 석탈해가 아니라면야 조선땅에 그렇게 큰 사람이 어디 있어?”

“음냐……, 그건 잘 안 되우……. 제길…….”

흑호는 무의식중에 뒷발로 머리를 긁적거리려 하다 가 화들짝 놀라면서 그만두었다. 흑호 역시 네발 짐승일 때의 버릇이 튀어나오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하일지달은 한숨을 쉬면서도 웃었다.

“걱정이다, 걱정…………. 얼굴 가리고 바보 흉내라도 내야겠네. 하나는 앉은뱅이에 죽은 사람 상이고, 하 나는 얼굴 가린 바보니……………. 무슨 의원집안이 이럴 까….? 흥흥흥…….”

은동도 앞날이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좌우간 분위기 를 바꿔볼 양으로 태을사자에게 물었다.

“으음……,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다른 방법이란 게 뭐죠?”

은동의 질문에 태을사자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누구더냐? 내 저승에 가서 용한 의원의 영을찾아다주마.”

반가운 마음에 은동이 손뼉을 쳤다.

“아……, 그래서 그 의원으로 치료를…….”

은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일지달이 은동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안 돼. 죽은 사람의 혼을 이끌어내서 이승사 람을 건드리다니…… 아마 나중에 혼날걸?”

“어……, 그럼 안 되나요?”

“안 돼. 이승과 저승간의 법도가 그렇지 않아.”

태을사자가 근엄하게 말하자 은동은 화가 났다.

“법도! 법도! 무슨 법도가 그리 많나요? 답답해 …….”

은동이 화가 난 것 같자 태을사자는 하일지달을 보고 말했다.

“나도 의원의 영을 직접 청하여 이순신을 치료하려 생각한 것은 아니오. 다만 아까 내가 얼핏 들으니, 그대가 이순신의 맥을 흉내내었지만 고르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것 같기에 그것만 닮게 해주려 말한 것 이오. 그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 않겠소?”

그러자 하일지달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갸우 뚱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쨌거나 그렇다면 한번 신인님이나 대모님께 여쭈어 보지, 뭐.”

“성계에 올라가서 말이오?”

“응.”

성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은동이 소리쳤다.

“그러면 나도 갈래요. 호유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 금해요!”

그러나 하일지달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 성계에 그렇게 마음대로 갈 수는 없단다. 네가 한 번 중간계에 갔던 것만도 엄청난 일이거든. 그러니 미안하지만 네가 갈 수는 없어. 대신 내가 꼭 소식은 전하여 줄 테니 기다리렴. 알았지?”

결국 하일지달은 떠나고 은동은 밤새 다음날 이순신 을 진맥하는 척 하기 위해 그 길고 어려운 약방문과 처방전을 다 외워야 했다. 그러나 은동이 이해하지 못하자 흑호는 슬쩍 밖으로 나가 동네 의원 집을 다 니면서 의서 나부랭이들을 닥치는 대로 훔쳐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어렵고 방대한 의원공부가 어찌 하룻밤 사이에 끝날 수 있겠는가? 은동은 밤을 꼬박 새웠지만 여전히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새벽녘이 되자 하일지달이 돌아왔다. 하일지달은 증 성악신인과 삼신대모에게서 저승에 있는 죽은 의원 의 재주를 빌리는 일을 허락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하일지달은 삼신대모의 전언을 태을 사자와 흑호에게 일러주었다.

“현재 일은 잘되어가고 있다고 해. 사계에 침범한 유계의 군대는 점차 패하여 세력이 약해지고 있고 마계와 유계의 변경도 빈틈없이 지켜지고 있다고 해.”

그 말을 듣고 흑호는 좋아했다.

“그러면 새로운 마수 같은 것들이 여기 더 내려올 가능성은 없구먼. 우리가… 아니, 은동이가 벌써 한 마리 잡았수. 이제는 열한 마리의 마수가 남은 셈이지!”

그러나 그 말에 하일지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열둘이 남았어.”

그러자 흑호는 눈을 치켜떴다.

“날 놀리우? 열둘에서 하나를 잡았는데 어찌 열둘 이 남우? 날 바부루 알우? 음………….., 하긴 내가 생각 해도 그런 셈에 내가 좀 약하기는 하지만……. 그래 두…… 음…… 맞는 것 같은데… 으음…….”

“전에 중간계의 재판 때 도망친 흑무유자는 끝내 잡지 못했거든…… 기억나?”

하일지달의 말에 태을사자가 놀라서 말했다.

“아니, 그러면 흑무유자가 생계로 도망쳐 들어왔단말이오?”

하일지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태을사자의 얼 굴은 상당히 긴장되었다. 흑무유자라면 마계의 대표 로, 재판에 참석할 정도로 법력이 강한 최정상급의 존재가 아닌가? 지금 생계에 온 풍생수들만 해도 대적하기가 쉽지 않은 판이었는데, 흑무유자 같은 초강자가 왔다면………………

“우리들로 흑무유자가 상대가 될까…………. 흑무유자는 마계에서 어느 정도의 직위요? 지난번 백면귀마는 마계 서열 이십사위라고 들었는데…………….”

대뜸 흑호가 엄청나게 커다란 손바닥으로 철썩 무릎 을 치며 말했다.

“맞어, 맞어. 백면귀마도 상당히 높지 않수? 마계 스물네 번째라며? 그러나 비겁한 방법을 써서 그랬 지, 원래대로라면 한 주먹 감이우! 백면귀마가 그 정도면 일위라고 해도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닐 건데?”

그러자 하일지달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계의 서열은 간단해. 십위까지는 그냥 열 마리이 지. 그러나 십일 위가 두 명 있고, 십이위는 네 명 있지. 십삼위는 여덟 명, 십사위는 열여섯 명…………. 그런 식이야.”

그 말을 듣자 흑호의 눈이 커졌다.

“에엑?”

은동도 놀라서 가만히 속으로 셈해 보았다.

‘흐음……, 그러면 십오위는 서른두 명이고…… 십 육위는 예순네 명… ……. 으음…… 더 이상은 계산도 안 되네.’

흑호도 계산이 안 되는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백면귀마 같은 놈이 마계에 몇 마리나 있단 말이우? 설마 그 같은 놈이 삼사백 마리나 된다는 거유?”

그러자 계산이 빠른 항상 영혼의 숫자를 파악하고 다녔으므로) 태을사자가 천천히 말했다.

“일만 육천삼백여든네 마리네.”

그 말을 듣고 흑호는 거의 까무러치려는 듯했다.

“뭐? 아니, 뭐가 그리 많어? 그러면 까마득한 중에 도 까마득한 졸때기 아녀?”

“그뿐만이 아니네. 서열 이십사위가 일만 육천 마리 가 있다는 것 외에도, 백면귀마보다 법력이 높은 자 는 더 많은 걸세. 이십삼위까지의 합으로 셈하여야 하니까. 이십사위까지의 총수는 일만 육천삼백아흔 세 마리일세. 마계에서는 대략 삼만 이천 마리 정도 가 백면귀마와 비슷하거나 빼어난 실력을 가졌겠구 먼.”

“으……, 으으음…….”

흑호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머리를 움켜쥐는데 하일 지달이 거들 듯이 말했다.

“마계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 세계인데 그래? 그 정 도면 상당히 높은 자야. 자네들이 상대했다는 홍두 오공은 삼십사위 정도 돼. 그런 녀석은 마계에 대략 일천육백칠십칠만 칠천이백열여섯 마리 있을걸? 그 놈과 비슷하거나 강한 놈은 대략 삼천삼백오십오…….”

“그만두슈, 그만둬. 너무 하우. 이게 뭐유? 어떻게 상대가 되겠수?”

흑호가 탄식하자 태을사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성계, 광계, 사계, 환계가 총동원되어 막고 있으니 될 걸세. 우리는 다만 여기 생계에 내려온 열두 놈 만 잡으면 되는 게야.”

“흠……, 그건 그렇구먼……. 백면귀마보다 센 놈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지난번에 은동이와 같이 잡은 놈들은 하나도 안 세더구먼.”

“그럴지도 모르지. 백면귀마가 서열을 자신있게 입 에 올린 것으로 보아 생계에 파견된 자들 중 상당히 높은 직위였을 것이라 여겨지네. 마계의 마수들 전 체가 생계로 파견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태을사자가 말하자 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그려. 백면귀마보다 더 강한 놈은 흑무유자 정도일 거야. 하일지달, 그놈은 서열이 얼마유?”

그러자 하일지달은 또 한 번 섬뜩한 소리를 했다.

“흑무유자는 마계 서열 사위야.”

그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이었 다. 조선의 관직과 마계의 서열을 비교하여 마계 서 열 일위를 왕으로 보고 이위를 영의정으로 본다면 흑무유자는 이조판서나 대제학 가량 될 것이다. 따 라서 서열 이십사위라던 백면귀마는 종 십이품 정도 될 것이다(정일품, 종 일품, 정 이품, 종 이품………… 식으로 나가므로).

그런데 관직으로는 가장 낮다는 능참봉조차 종 구품 이었다. 대강 때려 맞추기로 십품을 중인, 십일품을 양민으로 치면 십이품이면 천민 정도에 해당하지 않 겠는가?

현대의 군체계로 보더라도 일위를 군통수권자인 대 통령으로, 이위부터 십위까지를 부통령이나 총리, 국방장관 등으로 보고 십위부터 원수(별 다섯 개)라 고 치더라도 이십사위라면 겨우 말단 병장에 지나지 않는다! 순서로 이십사위가 아니라 서열로 이십사 위라면 사위와 이십사위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도 같 은 것이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자 하일지달이 주저하듯 입을 열었 다.

“거기에 더 좋지 못한 소식이 있어.”

“그게 뭐죠? 혹시라도 호유화가…….”

은동이 놀라서 말하자 하일지달은 고개를 저었다. 은동은 조금 안심했지만 곧이어 하일지달이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대모님과 염라대왕님이 나누었던 말 기억 해? 마수들이 생계에서 인간들의 영혼을 닥치는 대 로 잡아갔는데도 사계에 들어온 영혼 수가 같았다는 …….”

그 말에 태을사자의 눈이 빛났다. 역시 일종의 직업 의식 때문인지 영혼에 대한 주제는 태을사자의 관심 을 더 많이 끄는 것 같았다.

“그랬지. 그 이유를 알아냈소?”

“대모님이 말씀하셨어. 그것은 아마도 암흑의 대주 술일 거라고……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하일지달의 말에 흑호가 눈을 멀뚱거리며 물었다.

“암흑의 대주술? 그게 도대체 뭐 하는 건데?”

“잘 들어봐. 우주에서 생계는 비록 작은 세계이지만 거기에서는 모든 영혼들이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가 지고 발전해 나가도록 되어 있어. 거기서 발전한 영 혼들, 또는 퇴보한 영혼들이 광계나 성계, 나아가서 는 신계에까지 올라가 결국은 새로운 우주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야. 그건 이제 알지?”

사실 흑호나 은동은 그런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지난번 중간계에 서의 재판 이래로 대강의 우주 순환을 이해하고 있 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일지달은 계속 말했다.

“그 반대의 세계가 유계와 마계야. 그들은 어둡고 악하여 파괴와 혼돈을 원하는 영혼들이 타락을 거듭 하다가 모이는 곳이지. 즉, 사계에서 윤회의 심판에 들 자격조차 없는 타락한 영혼이 보내지는 곳이야.”

“그럼……, 호유화도 그런가요?”

은동이 눈을 크게 뜨자 하일지달은 싫증내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건 아니야. 환계는 뭐랄까… 일종의 자유로운 영혼들만이 모이는 곳이라고 할까? 정(正)이나 사 (邪)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 는………… 그런 깨달음을 얻은 존재들의 세계지……………. 그러니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환계의 존재는 선한 존재일 수도, 악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호유화 등의 환계의 존재는 그렇게 악한 존재는 아니야. 자 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존재이기는 해도.”

그리고 하일지달은 다시 얼굴빛을 엄숙히 했다.

“그 유계와 마계는 이번에 일어난 전쟁을 빌미로 하 여 많은 수의 영혼을 모았어. 천기를 조작하여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천기에 열려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도를 이용하여 많이 죽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영혼을 거뒀지. 생계의 영혼을 관장하는 사계의 존재들마저도 모르게 말야. 매우 치밀한 계획 이 분명하지.”

“그렇소이다. 더군다나 무척 오랜 시간 동안 꾸민 계략일 것이오. 이판관도 실제로는 마계의 백면귀마 였소. 저승에서 판관의 지위는 결코 그렇게 낮다고 볼 수 없는 것. 더구나 그 밑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자들이 모두 속고 있을 정도였다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꾸몄던 일일 것이오.”

태을사자의 말을 듣자 하일지달은 한 번 씩 웃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일지달이 왜 웃는지는 몰랐다. 하 일지달은 자신이 웃은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주 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좌우간 나중에 사계로 거두어들인 영혼의 숫자는 하나도 차이가 없었지. 물론 홍두………… 뭐더라? 그 괴수가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영혼들만은 미처 그들도 헤아리지 못했을 거야. 그 괴수와 백면귀마가 한 꺼번에 죽어 버렸으니 그 영혼이 은동이의 몸안에 있었으리라고는 몰랐겠지. 그러나 마수들은 그토록 공을 들여 인간의 영혼들을 거두어 갔으면서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모조리 사계로 되돌려 주었어. 그렇다면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을까? 궁금하 지 않아?”

“혹시……”

흑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영혼들이 가짜는 아니었수? 그렇게 애를 써서 영혼들을 거둬 모은 다음에 그걸 그냥 돌려보낸다는 건 이상하잖우? 가짜를 돌려보낸 거 아닐까?”

그러자 하일지달이 아닌 태을사자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 그러나 영혼을 어디 가짜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만은 신계를 제외하고서는 창조가 불 가능한 것이라네.”

“그렇지만….. 아하! 그렇지. 은동이 몸속에 있었 던 스무 명의 영혼도 그 말대루면 도로 저승으로 갔 다는 거잖수. 안 그러면 어찌 숫자가 맞을 수 있었 겠수? 그렇다면 가짜밖에는 도리가 없는데?”

하일지달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반만 맞았어. 거의 모든 영혼들이 틀림없이 사계로 돌아가기는 했지.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사계로 돌아간 것이오? 영 혼을 가짜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인데, 그러면……”

그러다가 태을사자는 앗 하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성 을 냈다. 흑호나 은동은 아무 것도 모르고 멍한 상 태였지만, 영민한 태을사자는 눈치를 챈 것이다. 그런 태을사자를 보며 하일지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을 거야. 말해봐, 맞나 보게.”

“대체 뭐유? 답답허니 말 좀 해보우!”

흑호가 묻자 태을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들은…. 아마도 마계의 존재들일 걸세. 마계 의 존재들의 영혼이…… 산 사람 대신 저승으로 간 것이겠지….”

‘에엑?”

흑호와 은동도 몹시 놀랐다. 그러자 하일지달이 말 했다.

“그래. 비록 마계의 존재들일지라도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되면 구별하기 어려워지지. 백면귀마가 이판관으로 변신하여 있었어도 사계의 누구도 몰랐을 정도로 그들의 법술은 뛰어나거든.”

“그렇다면………….”

“맞아, 무서운 흉계야. 일단 사계의 심판을 받고 나 면 그들은 다시 생계에 태어나지. 더군다나 그 심판 은 마계의 존재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계 에서 죽은 사람들이 살았을 때 행동에 의해 이루어 지는 거야. 조선군은 대부분 방어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자들이니 가엾은 자들이지. 아마도 대부분은 다시 생계에서 인간의 몸으로 환생되어질 거야…………. 그러면 ………….”

그 말을 듣고 태을사자는 묵묵히 긴장된 듯한 동작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생계에 마계의 주구들이 늘어나게 되는 셈이 로군요….. 그러면 나중에는 천기를 눈에 보이게 어그러뜨리지 않고도 그런 인간들의 행동만으로도 천기를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인간들은 창 조하는 존재이므로 약간씩 천기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였으니…………. 과연 무서운 음모요.”

태을사자가 몸을 부르르 떨자 하일지달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러나 그것뿐일까?”

“음?”

“마계의 존재들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아. 무서울 정 도로 교활하지. 그리고 모든 영혼들이 바꿔치기 된 것은 아니야. 사실 그런 정도라면 굳이 전쟁을 빌미 로 하지 않아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태을사자, 당신의 능력은 이제 어쩌면 사계의 저승사자들 가운 데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거야. 하지만 모든 저승 사자들이 그만한 능력이 있나?”

“그렇지는…… 않소…….”

“그래. 그러니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저승사자들을 속이는 것만이라면 결코 생계에 티가 나는 전쟁까지 일으키지는 않았을 거야. 마수들의 술법과 능력만으 로도 가능한 일이니까. 그런데 마계는 유계를 부추 겨서 사계를 침공하기까지 했어. 그건 왜 그랬을 까?”

하일지달은 스스로에게 묻듯이 중얼거리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침묵이 흐른 뒤에 천천히 입을 떼었다.

“더구나 마수들의 능력은 원래 그리 강하지 않아. 그들이 왜 그리 강해졌을까? 아니면 마계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정예만이 나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 슨 이유로 인해 마수들이 그토록 법력이 강해진 것 일까?”

그러자 태을사자가 되물었다.

“대모님이나 염라대왕도 모르시는 듯싶소?”

“아직까지 확실한 것은 알아내지 못하신 듯해.”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신 암흑의 대주술이란 무엇이 오?”

태을사자의 물음에 하일지달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 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계의 존재들이 신이 되려고 하는 거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려는 거야.”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에 태을사자와 흑호마저도 깜짝 놀랐다.

“세상을 창조한다고? 도대체 어떻게? 창조의 힘을 지닌 것은 신계와 생계의 존재뿐이라 하지 않았 소?”

“그러니 생계의 존재를 이용하는 거야……. 그걸로 그들은……………. 대모님의 짐작이 맞다면…………….”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만든다는 거유? 생계의 존 재를 또 어떻게 이용하구? 이번 일과는 도대체 무 슨 관련이 있다는 거유!”

“암흑의 대주술・・・・・・ 그건 바로 영혼을 번식시키는 술법이라고 해.”

평소 냉철한 태을사자조차도 믿어지지 않아 그만 입 을 딱 벌렸다.

“여…………… 영혼을 번식시킨다구? 말도 안 되는……………!”

태을사자가 말을 잇지 못하자 하일지달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릇 생계의 산 것들은 짝을 지어 번식하여 수를 불려 나가지. 그것과 비슷한 거야.”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경우도 있소이까?”

“물론 대부분의 영혼은 순환되어 다시 태어나는 윤 회를 거듭하지만 간혹 가다가 소멸되는 영혼들도 있 어. 너희들도 싸움 중에 마수들을 여럿 소멸시켰고, 마수들과 싸운 사자들과 신장들도 소멸되곤 했잖아. 좌우간 그런 식으로 영혼의 수가 부족해질 때에 영 혼은 다시 태어나는 거지. 그러나 새 영혼의 탄생은 무척이나 중대한 일이라서 신계에서 직접 관할을 하 지. 하지만 마수들은 아무래도 인간의 영혼을 이용 하여 영혼을 증식시키는 법을 알아냈거나,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그게 바로 암흑의 대주술이 라 믿어지고 있어.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뿐. 허나 그것은 가장 금단의 술법임이 분명해. 그리고 성계의 분들이 가장 우려하시는 것이고……”

“영혼을 어떻게 번식시킨다는 것이오?”

“그건 아직 아무도 몰라.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이 렇게 추측하고 계셔. 아마도 완벽한 영혼을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이니, 영혼의 일부분을 떼내어 하나 의 영혼처럼 만드는 거겠지. 물론 그들은 사악하고 기괴하며 추한 영혼일 거야. 조화도 갖추어지지 않 고 어떤 한 가지에만 편중된∙∙∙∙∙∙. 하지만 마수들이 노리는 일은 그런 것들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그것들로 도대체 무엇을 한다고!”

“아까 말했잖아?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여 그 세계의 신이 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일 것이라고..”

“허어…..”

태을사자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일지달의 말대로 라면 이것은 정말 너무나 중대하고도 큰일이었다. 흑호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어찌 하필 이 시대, 조선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유……. 허참…….”

“그건 몰라. 왜 마수들이 이 시대, 이 땅에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내야겠지. 그러 니 태을사자, 흑호, 그리고 은동이도 최선을 다해 줘. 비록 광계, 성계 등이 총동원되어 마계와 유계 를 막고 있지만 생계에 직접 내려온 녀석들을 없애 지 않으면 위험해. 더구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 만, 놈들은 이 전쟁을 확산시키기 위해 왜란종결자 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리고 생 계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너희들밖에 없어. 반드시 해야만 해. 반드시….”

그러자 태을사자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 다.

“그것이 대모님의 전언이오?”

“그래…….”

흑호와 태을사자가 마음이 무거워져 있는데 은동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호유화는요? 괜찮나요?”

하일지달은 미소를 머금으며 은동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말했다.

“글쎄・・……. 어쨌거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

“혹시…… 주…… 죽을 것 같나요?”

“아니야, 소멸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아직은 의 식이 없어.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것 같은데……………. 치료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은동은 잠시 동안은 실망한 듯한 눈빛을 띠었으나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죽지만 않았으면 됐어요! 꼭 만나게 될 거예요, 꼭! 반드시 기다릴 거예요!”

하일지달이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그렇게 될 거야…….”

태을사자가 하일지달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려’란 마수를 아시오?”

“려?”

“그렇소, 려.”

“잘 모르겠는걸? 무슨 관계가 있어?”

그러나 태을사자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말을 돌렸다.

“흠……, 은동아. 혹시 내 법기인 묵학선을 본 적이 있느냐?”

“네? 음, 글쎄요. 저는 잘 몰라요.”

“거기에 단서가 있을 터인데……. 묵학선이 어디에가 있을까?”

말끝을 흐리는 태을사자를 보며 흑호가 나섰다.

“지난번에도 나헌테 묵학선이 어딨냐고 묻더니만. 법기라면 법력으로도 되찾을 수 없수?”

“글쎄…, 생계에 있다면 법력으로 반드시 감응이 될 것인데…….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네.”

태을사자의 얼굴빛이 어두운 것을 보고 하일지달이 물었다.

“법기라면 물론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게 그렇 게 중요해?”

“중요하지요. 첫째는 그 안에는 소멸된 내 친구의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 법기는 내 법력의 삼분의 일 이상을 담은 것이기 때문이오. 마 수들을 상대하려면 되찾아야 할 것인데… ・・・・・・・ 그것이 어디 갔을까?”

아직 태을사자도, 그 누구도 태을사자의 묵학선을 호유화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 다. 더구나 호유화는 의식불명으로 중간계에 있으니 그런 사실을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낙천적 인 흑호는 태을사자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염려 마슈. 법기가 가면 어디로 가겠수? 조 만간 찾게 될 거니 염려 마시우, 히히. 그나저나 태 을사자도 양신을 하니 인제 만져지는구먼.”

그러면서 흑호는 태을사자의 등을 하릴없이 계속 툭 툭 두드렸다. 태을사자는 흑호와 거리를 두려고 조 금 몸을 이동해서 스르르 옮겨갔다. 그때 밖에서 새 벽 첫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태 을사자는 조금 찔끔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하 일지달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양신을 하고 있으니 계명(닭 울음소리)에 놀 라지 않아도 돼. 습관이 무섭긴 무서운 거로군. 흥흥흥….”

그러자 태을사자는 멋쩍은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은동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면 은동아, 우리는 이만 간다.”

“네? 어……….., 둔갑도 했으니 같이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우리는 양신법과 둔갑법을 시험해 보았을 뿐이야. 어제는 분명 너 혼자밖에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여럿이 있으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우리는 차후에 각각 오는 걸로 하지. 양신도 좀 가 다듬고 행동도 조금 더 인간같이 다듬어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앉은뱅이나 벙어리 흉내만 낸다면 그 렇게 붙어 있기가 쉽겠느냐?”

태을사자의 말은 이치에 그른 것이 없었다. 하일지달은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일단 다시 증성악신인에 게 돌아갔다가 이삼일 후에 오기로 하고, 태을사자 와 흑호도 이삼일 터울을 두고 한 사람씩 은동을 찾 아온 것처럼 합류하기로 했다. 은동은 혼자 있는 것 이 불안했지만 별수 없었다. 떠나면서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말했다.

“일단 자네는 이 근방에서 마수들을 경계하여 은동 이를 도와주게. 나는 며칠 동안 좀 할 일이 있네.”

“할 일이 뭐유?”

“일단은 저승에서 의원의 영의 힘을 좀 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거야 금방 될 거 아뉴? 아하, 묵학선 찾으시 게?”

“그것도 있고, 나름대로 전황을 좀 둘러봐야겠네. 그리고 조정의 이덕형이나 이항복, 유성룡 같은 인물들을 마수들이 노릴지도 모르니 그것도 좀 걱정되 기도 하고.”

“그러시유. 나야 뭐 이 근처에 있는 게 더 편하니 깐.”

그래서 태을사자는 어디론가 떠나고 흑호는 좌수영 앞바다의 돌산도 섬에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흑 호가 자리를 잡은 곳은 과거에 호유화가 잠시 쉬어 갔던 그 터였다.

은동은 밤을 새웠지만 그래도 하일지달이 구해온 두 루마리며 처방전들을 애써서 달달 외운 뒤에야 자리 에 누웠다. 조금 더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 았지만 잠이 쏟아져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리 길지 않은 기간, 고작 몇 달 사이에 너무 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시 잠이 들었던 은동은 누군 가가 밖에서 기침을 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은동이 급히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어보니 그 사람은 바로 정운이었다.

“아……,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니? 몹시 피곤했나 보구먼. 그러나 해 가 중천일세. 수사님 진맥을 좀 보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진맥을 다시 하게 된 터라 은 동은 가슴이 콩당거렸지만 별 방법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모양으로 정운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은동이 가는 도중에 갑자기 온몸에 부르르 소름이 돋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은동은 놀라서 그 자리 에 잠시 멈추어 섰다.

‘이건 뭐지? 왜 이런 기분이……’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왔다.

– 자넨가? 진찰을 할 사람이?

‘엑? 이게 뭐지? 태을사자나 흑호도 아닌데……!!

– 난 태인지 누군지 부탁을 받고 내려온 의원일 세. 내가 도와줄 것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진맥을 해보도록 하게.

은동은 기뻤다. 태을사자가 분명 저승에서 고명한 의원의 영혼을 데리고 와서 도움을 주려는 것이 분 명했던 것이다. 그때 은동은 정운이 왜 그러나 하고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은동은 그냥 몇 번 헛기침을 하면서 얼버무리 고 다시 정운과 함께 이순신의 처소로 향해 갔다. 이번에는 그렇게 걱정되거나 겁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란종결자이자 전쟁의 유일한 희망이라는이순신을 자신의 도움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모 른다는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은동은 상상 외로 이순신을 진맥하는 흉내를 능숙하 게 잘해내었다. 태을사자가 저승에서 불러온 의원의 귀신(?)은 은동의 옆에서 계속 귓속말로 은동의 행 동을 지시해 주었다. 그 의원은 이름도 밝히지 않았 고, 이순신의 증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은동의 동작만을 지시해 주었다.

그렇게 진맥을 한 다음에 은동은, 하일지달이 허준 에게서 얻어온 약방문을 말하여 약을 짓게 하였다. 하일지달은 의주를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허준에게 서 처방을 알아왔던 터였다.

하일지달의 둔갑술이 은동에게 도움을 주는 의원의 고증을 따른 것이라, 허준은 보다 더 정확한 처방을 내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허준의 진단으로 이순신은 일종의 신경성 병을 앓고 있는 것이라 완치가 되 기는 어려울 듯싶다고 하였다.

좌우간 몸에 더없이 좋다는 산삼을 탕으로 하여 먹 고, 또 좋은 처방으로 약을 쓰게 되자 이순신은 점 점 얼굴에 핏기가 돌며 건강을 되찾아갔다. 그것을 보고 이순신의 부장들 또한 기뻐하였으며, 은동은 한층 더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틀이 지난 후 둔갑한 흑호가 하일지달의 안내를 받아 은동의 집안사람인 척하고 역시 좌수영 내에 들어왔다. 태을사자는 저승에 한 번 다녀온 뒤로, 무엇을 찾아 나갔는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서 핑계 댈 필요는 없었다. 흑호의 경우, 심부름하 는 몸종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흑호의 무지무지한 덩치 (인간으로 변한 흑호의 키는 구 척을 넘어 십척, 즉 2미터 30센티에 가까웠다)와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몹시 놀라워했다. 하지만 좌수영 내의 사람들은 처음의 약속대로 은동의 집안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 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나대용 등의 몇몇 사람들은 ‘정말 바깥에 알려 지는 것을 꺼려할 만한 용모로구나. 허참.’ 하고는 속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정운이나 방답첨사 이순신 등은 흑호의 용모가 기이한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들의 좌수영 본영 출입 을 금했다.

은동은 어린아이였고 하일지달은 여자였으니 별로 의심할 것이 없었지만, 덩치가 크고 기이하게 생긴, 정체모를 장한이 아픈 이순신의 부근에 드나드는 것 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순신의 부하 중 몇몇은 비록 은동의 의술이 뛰어나 기는 하나 은동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지니고 있기 도 했다.

그러나 은동의 의술(실제로는 허준과 저승에서 온 의원의 의술이었지만)로 이순신이 며칠만에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가자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6월 20일. 은동의 처소 앞으로 수척한 아주머니 한 명과 계집아이 하나가 찾아왔다. 은동은 그 두 사람을 보고 놀랐지만 거부 할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찾아온 경위는 이러했다.

하일지달은 의주를 오가기도 하고 증성악신인의 명 을 받들어 일을 하느라 거의 처소에 없었다. 때문에 이순신의 부장들은 남자들(은동과 흑호)만 지내는 것이 좀 안돼 보인 듯싶었다.

하일지달은 워낙이 용이었으며 바깥 출입이 잦았고, 흑호도 도를 닦아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 순신의 부장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아무튼 아주머니는 밥이나 빨래 같은 일을 돌보아주고, 계 집아이는 일종의 몸종으로 시중을 들어주도록 정운 이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난민인데, 약 재를 간수하고 약을 달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은동은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흑호나 태 을사자는 가뜩이나 행동이 어색한데, 두 사람이 옆 에 붙어 있게 되면 행여 그들의 정체가 탄로날까 두 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머니와 계집아이인 오엽 이는 낮에만 들러 일을 돌보아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 오엽이라는 아이는 매우 맹랑하여 은동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은동으로서는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몹시 긴장 되고 초조한 나날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보다 조금 앞서 겐소와 야나가와는 급히 평 양을 들이쳐 조선 상감(선조)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덕형의 기지와 은동 및 흑호의 덕분으로 그 일에 실패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군의 방비가 있을 것으로만 믿었기 때문에 고니시는 천천히 진군할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남해에서의 연이은 패전으로 말미암아 해 상보급로가 막혀서 고니시의 부대는 심각한 어려움 에 빠져 있었다. 해상보급로가 막힌 이상 보급받을 방법은 육로밖에 남지 않은 셈인데, 육로로 부산포 에서 한양까지 보급을 하는 데에는 기간도 많이 걸 릴 뿐더러, 여기저기서 의병 등이 일어나는 단계라 몹시도 수송이 어려웠다.

가령 쌀을 보내려면 그 쌀을 지킬 병력을 같이 파견 해야 하는 판이었으니, 올라오는 중에 그 병력이 쌀 을 다 먹어치워 기껏 보급부대가 당도해도 남은 쌀 은 거의 없는 식이었다. 결국 고니시는 텅텅 빈 성 이나 다름없는 평양을 6월 15일에 함락하게 되었는 데, 거기서 고니시의 전부대는 진이 빠져 더 이상 진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실패다…….. 이 전쟁은 실패다……………..’

그래도 조선의 큰 성인 평양을 점령하였다고 나름대 로 빈약한 축하연이 벌어졌으나 고니시는 내내 입술 을 깨물고 침통하게 앉아 있었다.

‘조선 병사만이 우리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조선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와 싸우고 있다. 비록 지금 우 리가 우세하다 하나 우리가 이길 수는 없을 것 같 다…………….’

조선군은 미약했지만 조선백성들은 끈질긴 잡초와 같았다. 그들은 왜군에의 협조를 대단히 꺼려하고 싫어했으며, 성이 점령되면 모두 어디론가 흩어지고 숨어 버렸다. 그 때문에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하던 보급품이나 군량의 수급도 큰 문제에 빠지게 되었으 며, 여기저기 불쑥 나타나는 소규모의 조선인 집단이 길을 잃거나 홀로 떨어진 왜병들을 해치고 있었 다.

원래 왜군은 조선백성들을 잘 회유하라는 군령을 받 고는 있었으나 일이 그렇게 풀릴 수는 없었다. 도자 기를 비롯하여, 조선의 앞선 많은 문물을 수탈하라 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의 군대가 물건을 수탈하면서 자신들을 따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그 말을 들을 것인가?

때문에 왜병이 진군하는 곳에는 조선백성들이 거의 뿔뿔이 흩어져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험한 산로, 판이한 환경 조건 때문에 수많은 환자들이 발생했다. 보급을 받지 못해 잘 먹 지 못한데다가 물을 갈아마신 탓인지 이질 환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생강, 마늘 등 비교적 맛이 독한 것 을 즐겨 먹어 장이 단련된 조선인들에게 이질은 그 냥 단순한 배앓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옅은 음식을 주로 먹어 장이 약한 왜병들에게 이질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별로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고작 천오백 리를 진격 하고 이렇게 군이 지쳤는데, 이런 군대를 거느리고 어떻게 명나라를 침략하겠는가? 말도 되지 않는구 나…………. 틀렸다.’

현재 고니시 부대의 상황은 심각했다. 평양에서 불 과 수백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의주에 조선상감의 어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로 진격할 엄두조 차 낼 수 없었다. 고니시는 이제 전쟁에 신물이 났 다. 하지만 왜국에 있는 히데요시는 망상을 버리지 않고 계속 전쟁을 독촉하고 있었다.

‘부하들을 모두 죽이라는 말인가…. 아아…………, 방 법이 없구나. 어떻게 하여야 하나………….’

고니시는 문득 이순신이라는 조선장수가 미워졌다. 그의 경쟁자인 가토는 이미 함경도 부근까지 진격했다고 들었다. 가토는 동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어 서 수로를 통해 보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자신은 서해안을 끼고 있으니 남해안을 거치지 않고서는 보급선이 도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해안에서 모든 수군은 이순신의 몇 척되 지도 않는 조선군 수군에 속속 몰살당하고 있으니, 고니시는 보급받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라 는 그자만 없었더라면 보급을 받아 조선을 단숨에 석권할 수 있는데, 그자 때문에 지척인 의주조차 갈 수가 없으니….

‘이순신만 없다면……. 이순신만 없었다면………’

고니시는 괴로웠다. 비록 고니시가 반전주의적인 경 향을 띠고 있기는 했으나 지금은 엄연히 정벌군의 선봉으로 나선 대장이다. 경쟁관계인 가토는 계속 진격을 하는 마당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는 것 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이대로라면 진격이 문제가 아니라 이곳에서 자칫 보급이 끊겨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부 하들 모두가 함께.

‘무슨 수를 내야겠다…………. 이순신을 없애야겠는 데……………, 가능할까?’

지금 고니시는 작전구역이 다르니 이순신을 처치하 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고니시는 문득 인자인 겐키를 떠올렸다.

‘암살은 어떨까? 겐키에게 의뢰해 볼까…………….’

그러고 보니 겐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궁 금했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갈 한번 없 었다. 이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흐음, 그나저나 겐키는 아직 일을 마치지 못했나? 왜 돌아오지 않지?’

고니시는 그냥 그렇게만 여기고 그날 밤 축하연을 마친 후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설핏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고니시는 잠 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불이 꺼졌는지 아무 것도 보 이지 않았다. 아니, 불이 꺼진 것 정도가 아니라 마 치 땅속에라도 들어온 것같이 사방이 온통 암흑에 휩싸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누구 밖에 없느냐!”

고니시는 소리를 쳤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 다. 그 대신 킬킬거리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니시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면서 뒤를 휙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니시는 방 구석에 세워둔 패검을 찾았지만 그것도 손에 잡 히지 않았다.

‘또 그 악마들이로구나!’

고니시는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 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음산하면서 도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니시……. 아직도 우리와 손을 잡지 않으려느냐? 너는 두렵지도 않느냐?”

“썩 물러가라, 사탄아!”

고니시는 딱 잘라 말하고는 열심히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눈도 꽉 감고 뜨지 않았다. 그러자 그 목 소리가 다시 말했다.

“네가 조선인들을 살육하지 않겠다면 너희 부하들이 대신 죽을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헛소리!”

“눈을 떠보는 것이 어떠냐?”

“네놈들의 말은 듣지 않겠다!”

“이것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그 말에 고니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떴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눈앞, 캄캄한 어둠 만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신의 눈앞에 한 여 인이 서 있었다. 긴 백발에 간드러진 용모를 지닌 요염한 모습의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은 양손에 무 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 저것은!”

고니시는 자신의 눈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것 은 바로 두 개의 머리였다. 여기저기 깨어지고 뭉개 진 것 같은 참혹한 사람의 머리.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고니시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인자들의 복면 같은 것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그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겐키와 닮아 있었다.

“네가 왜국에 파견했던 첩자들이다. 조만간 겐키라 는 자도 이렇게 될 것이다. 쓸데없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면 너도 이 꼴이 될 것이야. 알겠느냐?”

“어…… 어떻게………….”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어서 우리와 손을 잡겠다고 언약해라!”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험한 꼴을 당해 봐야 말을 들을 모양이군.”

여인은 잠시 날카로운 눈초리로 무섭게 고니시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잘 들어라.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이상, 너의 앞 길에는 패배와 절망뿐이리라. 좌절과 고통만이 네 앞길에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러니 어서 생각을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호호호…….”

그 여인은 간드러진 웃음소리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 렸다. 그리고 주변을 가득 채우던 시커먼 어둠이 갑 자기 핏빛으로 변하면서 고니시에게 몰려들었다.

“으아악!”

고니시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눈을 뜨니 낯익은 막사 안의 모습이 보였다. 세워 놓은 검도, 걸어 놓은 갑옷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고니시는 땀을 흘리며 몇 번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꿈……이었나?”

그러나 다음 순간, 고니시의 눈앞에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다. 장막의 한쪽 구석에 방금 꿈에서 고니시 가 보았던 두 사람의 인자의 머리가 마치 눈덩이처 럼 싯누런 물로 녹아 내려가고 있었다. 코 언저리가 녹고, 이윽고는 눈과 이마마저도 녹아 내린 후 두 개의 머리는 완전히 형체가 사라지고 단지 누런 물 자국으로만 남았다.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여인은 대체 누구인 가? 사탄인가? 악마나 요괴인가?’

고니시는 두 개의 머리가 모두 녹아 없어지고 난 이 후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쪽을 바라보 면서,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저 멍하니 그렇게………….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며칠만에 전라좌수영까지 흘러 들어왔다. 사람들은 곡을 하고 슬퍼하였으 나 정작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은 이순신은 침착했 다. 은동은 항상 이순신 주변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순신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고니시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걸세.”

어느 날, 병문안을 온 방답첨사 이순신과 군관 나 대용이 의주도 위험할 것 같다는 말에 이순신은 그 렇게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나대용이 놀라자 이순신은 천천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니시는 보름만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진격했네. 그러나 한양에서 한 달 남짓이나 움직이지 않고 시 간을 끌었어. 하지만 가토는 이미 함경도까지 나아갔다더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흠……, 그렇다면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수만 대군의 군량과 무기와 탄약을 수송하 려면 고갯길이 많고 험한 육로로는 수송이 어려울 것이야. 그렇다면 반드시 해로를 이용하여 배로 물 자를 실어 날라야 하는데,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가토군은 보급을 받겠지만, 고니시는 서해안을 통해 보급을 받아야 하거든. 단, 그러려면 남해안을 통과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역할이 막중하다 는 것일세.”

이순신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대용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나 만약 가토가 의주로 진격하면 어떻게 합니 까?”

“가토는 의주로 갈 수 없네. 가토도 바보는 아닐 거 야. 의주 쪽으로 진군하면 그 역시 보급로가 끊어지 는데 어찌 그가 의주로 가겠는가? 함경도 쪽으로 진군하다가 그칠 것이네. 그러니 우리가 이곳을 잘 지켜야만 고니시를 꼼짝 못 하게 붙잡아 둘 수 있으 며, 종묘사직 또한 안전하게 되는 것일세.”

“우리만으로 되겠사옵니까? 혹시 저들이 해로를 포기하고 육로 운송을 강화한다면………….”

나대용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것 같았으나 이순신은 고개를 저었다.

“육로로는 못 움직일 걸세. 대군은 움직여도 수송부대는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어찌하여 움직이지 못한다 하시옵니까?”

“난민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이제는 우리 백성들도 마음을 가다듬고 있네. 민심은 대개 어디 서나 비슷한 법일세. 들으니 이제 곳곳에서 여러 뜻 있는 분들이 의병을 일으킨다 하더군. 의병들이 중 간을 방해하니 육로수송은 불가할 것이야. 두고보 게. 이제 전세는 변했네. 지금 당장은, 물론 말할 수 없이 우리가 불리하네만…………… 이대로만 잘 나간다 면 우리 조선에도 승산이 있다네.”

이순신의 말처럼 전세는 바야흐로 변하고 있었다. 조선땅 여기저기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의병들은 전쟁 초기부터 조직되기 시작했으 나, 이순신의 승리에 기운을 얻어 비로소 행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의병장들이 제아무리 격문을 뿌 리고 구호를 외쳐도, 백성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전 혀 없다고 생각하니 의병에 자원하는 자가 그리 많 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이순신의 군대가 그리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수부나 어부들이 라는 소문이 알려지자 이를 갈며 의병에 자원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다. 따라서 의병장들은 비로소 싸울 만한 숫자로 의병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고장마다 존경받는 촌로들이나 학자, 뜻 있는 낙향선비들이 지역의 유지 격으로 대우받고 있 었는데,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역의 민심을 기반으로 오히려 관군보다도 훨씬 많은 수효의 백성들을 모아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였다. 이때 곽재우의 친구였던 김덕령은 노모가 심 하게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을 직접 일으키 지는 않았지만 그가 사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고경 명, 유팽로, 고종후 등이 광주에서 의병 6천을 모아 진군하였으며 김천일, 양산주, 임계영 등이 남원에 서 의병을 일으켰다.

충청도에서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였던 조헌이 의병 을 일으키고 영규가 이끄는 승병과 신간수, 장덕개 등의 병력을 합하여 청주로 진군하였으며, 황해도에 서는 조득인과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해주와 연안 을 각각 사수하였다.

평안도에서는 휴정과 유정이 승병을 주축으로 한 의 병군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며 함경도 경성 (鏡城)과 경상도 하동에서는 당시 도방(道房)의 양 대지주라 일컬어지던 정문부와 정기룡이 각각 의병 을 조직하려 하고 있었다.

비록 관군은 형편없이 패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숨겨 진 힘은 이때서야 비로소 드러내려 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의병들은 비록 무기나 훈련에서 왜병들보다 훨씬 뒤졌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곽재우처럼 도력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도 걸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느리는 의병들은 거의 패하지 않았지만 의기만 드높다고 훈련도, 장비도 부족한 의병을 제대로 지휘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전멸할 때까지 싸우면서도 투지를 잃 지 않았고, 그럼으로 해서 왜군들에게 두려움과 공 포감을 안겨 주었다. 곽재우는 기량을 있는 대로 발 휘하여 평양이 떨어진 6월 말에 왜군의 유명한 승 장(僧將) 안고쿠지(安國寺 안국사)의 에게이(惠瓊 혜경)가 정암진에 침투한 것을 물리쳐서 왜군과 조 선군 모두에게 유명해졌다. 특히 곽재우는 항상 붉 은 옷을 입고 다녀 ‘홍의장군’이란 이름을 크게 떨 쳐 조선의병들의 사기를 크게 높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전쟁은 이제 상황이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 하고 있었다. 점령했다고 생각한 지역에서, 전력을 알 수 없는 의병이라는 군대들의 출몰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왜군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커 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당하는 전투에서 조금씩 호각지세로 상황이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군은 점차 자신감이 꺾여가고 있었고 조선군은 조 금씩 전의와 사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도 정확히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왜군 장수들과 조선군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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