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10화
“그럼… 내가 여기서 세 사람을 못 가게 막고 있어야겠네…. 에효~~ 난 싸우는 건 싫은데…”
아시렌의 말투는 어느새 평어로 바뀌어 있었다.
짤랑…….
그와 함께 아시렌의 팔목 부분에서 맑은 금속성이 울리며 각각 한 쌍씩의 은빛 팔찌가 소매에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은빛의 팔찌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든 시원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는데, 서로 엇갈려 아시렌의 팔목에 걸려 있는 모습이 꽤나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인 아시렌도 같은 생각인 듯 양 팔목의 팔찌들을 소중한 듯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드도 라미아를 부드럽게 뽑았다. 그러자 챠앙~ 거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사르르릉 거리는 마치 옥쟁반에 옥 쇠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은은하게 물든 발그스름한 검신을 내보였다.
그런데 뽑혀 나온 라미아의 검신을 잠시 쓸어보고 고개를 든 이드의 시선에 두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 쪽을, 정확히 라미아를 바라보는 아시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들려오는 아시렌의 목소리.
“와~ 예쁘다. 뭘로 만들었길래 검신이 발그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는 거야? 거기다 검의 손잡이도 뽀~얀 게… 예쁘다.”
[어머…. 저 혼돈의 파편이라는 사람, 다른 혼돈의 파편이라는 둘과는 달리 뭘 볼 줄 아네요. 헤헷…]
아시렌의 말과 그에 답하는 라미아의 말에 세레니아와 일리나에게 조금 떨어져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라고 전음을 보내던 이드는 다시 한번 저리로 달아나는 긴장감을 급히 붙잡고는 속으로 잡히지 않는 전투 분위기에 한탄해야만 했다.
‘에효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싸우냐고~ 그리고 라미아, 너까지 왜!!’
그렇게 한창 잡히지 않는 전투 분위기를 그리워하던 이드의 귀로 다시 아시렌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검, 그 검, 이름이 뭐야? 응? 발그스름하고 뽀얀 게 되게 예쁘다….. 있잖아… 혹시 그거 나 주면 안 될까? 응? 그거 주면 나도 좋은 거 줄게. 응? 응? 나줘라…”
이드는 아시렌의 말에 순간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멍~해져 버렸다. 지금 전투 분위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이런 분위기에, 하물며 잘 아는 친구 사이라도 되는 양 라미아를 달라고 조르다니… 이건 전투 중에 조심하라고 걱정해주는 모르카나보다 더해 보였다.
그때 아시렌의 말을 이어 들려오는 라미아의 목소리.
[어머? 저렇게까지 부탁하다니… 하지만 이드님은 거절하실 거죠? 절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며 귀여워 해주시는 이드님이니까요. ^^*]
왠지 기분이 들뜬 듯한 라미아의 말을 들은 이드는 순간 거절하려던 것을 바꾸어 그냥 던져줘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꾹꾹 눌러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고 똑똑 부러지는 말투로 거절했다.
물론 여기에는 제대로 된 전투 분위기를 찾고자 하는 이드의 의도였다.
“거절합니다. 아시렌님. 전장에서의 무기는 자신의 생명. 그런 무기를 달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전투 때가 아니라도 라미아를 거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주시죠. 저희들은 바삐 움직여야 합니다.”
아까 전까지 이야기하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딱딱한 목소리였다. 마치 처음 사람을 대하는 듯, 아무런 감정도 배어있지 않은 목소리.
확실히 이 정도라면 상대도 분위기를 맞춰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개의 경우일 뿐이었다. 여기 눈앞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머? 그렇게 정색할 것까지야… 보아하니 그 검, 에고소드 같은데 그런 건 검이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은 쓸 수도 없다구. 그런데 그렇게 나서는 걸 보니까 그 검을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야… 라미아라는 이름도 좋고. 이드가 지어 준 거야?”
아시렌의 말과 함께 이드는 다잡고 있던 분위기가 더 이상 어떻게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일조하는 라미아의 “꺄아~ 꺄아~ 어떡해!”라는 목소리까지.
순간 이드는 자신이 이곳에 왜 서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리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레니아를 바라보았다.
“세레니아, 돌아가죠. 여기 더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네요.”
“….. 네?”
이드는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한 듯 대답하는 세레니아를 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자고요.”
“자, 잠깐… 잠깐만…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짤랑… 짤랑…..
이드는 자신의 말에 급히 움직인 탓인지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푼수 주인과는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맑은 소리…
‘헤휴~~~’
작게 한숨을 내쉰 이드는 고개만 슬쩍 돌려서는 아시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시렌님은 전혀 저희를 막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 말에 잠시 할 말이 없는지 옹알거리는 아시렌.
이드가 그녀의 모습에 다시 고개를 돌리려 하자, 아시렌이 작은 한숨과 함께 왼쪽 손을 들어 올렸다.
짤랑…….
“휴~~ 막을 거예요. 단지 싸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하지만 역시 그냥 가도록 놔둘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자 아시렌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왼쪽 팔목에 걸려 있던 두 개의 팔찌 중 하나가 빠져 나갔다.
“우선은…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부터. 윈드 캐슬(wind castle)! 바람의 성이여, 너의 영역에 들어선 자의 발을 묶어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드와 일리나, 세레니아의 주변으로 급격히 이동한 바람이 눈에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압축되더니, 울퉁불퉁하고 삐죽삐죽한 모양으로 세 사람을 감싸 버렸는데, 그 모습이 흡사 성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일행들을 가두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은 곧바로 이어진 이드의 목소리와 발그스름한 빛에 의해 깨어져 버렸다.
“우리는 바쁘다니까요. 바람은 바람이 좋겠지… 삭풍(削風)!”
쓰아아아악……
발그스름한 빛이 이는 것과 동시에 마치 공기가 찧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드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바람의 성은 찧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이드들의 주위로 강렬한 기류가 잠깐 머물다가 사라졌다.
“그런 걸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