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8화
1443화
쉴라는 놀라운 심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 남자가 이런 얼굴을 할 줄도 알았던가.’
지금 눈앞에 있는 마르텔의 표정은 맹세코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마르텔이라는 남자는 항시 당당하고, 무슨 일에도 자신감이 넘쳐서 때때로 저돌맹진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지만,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라는 것을 하지 않는 남자.
그런 인물이 바로 마르텔이었는데.
지금 바로 그 마라텔의 얼굴에 후회라는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후회할 거였으면서 왜..
쉴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렇다고 동정하진 않았다. 반역이고 배신이다. 상대가 폭군이라면 몰라도, 동정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약자의 반역도 아니다. 이름 높은 삼검왕을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단 자신은 그에 속하지 않는다고 쉴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텔이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쯧,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아무렴 네게 동정받을 정도로 내가 추락하진 않았다. 최소한 아직은 아니다.”
“제가 죄인을 동정할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럼 아니란 말이냐?”
“절대로!”
고개를 젓던 쉴라는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문득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다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바로 말을 꺼냈다.
“그런 마르텔 경이야말로 평소 같지 않으시고요.”
감히 자신을 동정하는 놈이 있다?
평소의 마르텔이라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을 일이다. 그걸 생각하면 확실히 평소와 같지 않은 모습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보라. 정작 마르텔은 지금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짓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는데.
이런 의미일까?
그때였다.
찰칵.
짧은 침묵을 뚫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어째서인지 그 크지 않은 소리가 야영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문이 열린 마차에서 검후가 천천히 내렸다.
시간이 멈춘 세상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텔을 따라 기습에 참여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정도로 그들의 오감이 오직 검후를 향했다는 의미다. 덕분에 그들이 받은 심적 충격은 거대했다.
“으으아…….”
“여・・・・・・ 역시 오는 것이 아니었어……”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막혀 가슴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외면하고 있던 죄악감에 눈을 감아 버리는 인물도 있었다. 그들은 마르텔의 강압에 이 자리에 끌려 나온 것에 대해 한결같이 후회했다. 죽더라도 내성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심적 충격에 흔들리는 사람들과 달리.
정작 검후는 그들에게는 일체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지금까지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마르텔,
‘또 표정이 변했다.’
검후의 등장에도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쉴라였기에 확실히 보았다.
자신을 상대로 시시한 농담과 같은 말을 주고받던 마르텔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느물거리던 입술은 굳게 다물어지고, 맹수 같은 눈은 움푹 깊어졌다.
무엇보다 쉴라라는 존재를 잊은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블러디 혼이라 불리는 삼검왕의 일인이지만, 이 거리에서 자신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인데 말이다.
기습이 없으리라 믿는 것일까, 아니면 기습을 당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쉴라는 그렇게 굳은 듯 검후를 바라보고 있는 마르텔을 보며 말했다.
“검후님이십니다. 이젠 최소한의 예의도 잊으셨습니까?”
“음? 예의? ……아, 그렇군. 잠시 잊고 있었군. 뵙고 싶었던 분이지만, 막상 뵙고 보니 생각이 복잡해서 깜빡했네. 해야지. 인사를 드려야지. ・・・・・・ 그럼, 길을 좀 비켜 주겠나? 검후께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싶군.”
“……제가 싫다고 한다면요?”
처음부터 마르텔은 검후의 몫이었다.
검후가 한참 전에 침 발라 놓은 상태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당장도 보라. 뒤통수로 날아오는 시선이 따끔따끔하다.
스폴일까, 검후님이실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평소 같지 않은 마르텔이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너무 궁금했다. 그뿐이다.
감히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검후가 침 발라 놓은 상대를 가로챌까.
“그렇다면 별수 있나. 자네와 먼저 싸워야지.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저기서 날 기다리시는 분의 눈길이 심상치 않은데?”
뻔한 수작은 그만하라며 능글능글하게 웃음으로 도발하는 마르텔이다.
그나저나 뒤통수에 꽂히던 시선의 주인은 역시 검후였던가. 괜한 호기심에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게 생겼다.
“・・・・・・ 비켜 드리죠. 그리고 경고하죠. 최소한 마지막 순간만은 검후님을 실망시키지 마세요.”
말과 함께 길을 터 주는 쉴라.
그에 옆을 지나가던 마르텔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뒤이어 그의 손이 올라왔다.
까딱.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던 쉴라의 손이 곧 멈췄다. 마르텔 정도의 인물이라면 빈손이라도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경계하기엔 지금 그 뭉툭한 손에는 한 점의 투기는 고사하고, 내력의 흔적조차 깃들어 있지 않다.
물론 상대는 그녀가 훤히 꿰뚫어 볼 정도로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행동과 말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이런 쉴라의 생각은 정확했다.
툭.
직후 마르텔의 손이 쉴라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자네의 경고, 명심하지. 그럼 나도 하나만 당부하겠다. 너만은…….. 부디 좋은 제자로 남아 끝까지 저분의 곁을 지켜 주기를 바란다. ‘사제’.”
“……”
터벅터벅.
짧은 당부를 남긴 마르텔이 완전히 스쳐 지나갔다.
‘사제라니…….’
당부의 끝에 더해진 자신에 대한 호칭.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무게는 특별했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르텔의 입에서 사제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문득 지금 마르텔의 표정도 궁금했던 쉴라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확인하고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분노와 투지가 조금은 식어 버린 느낌이다.
모두가 사제라는 단어와 마르텔의 손이 어깨에 남겨 둔 희미한 온기 때문이리라.
“하아, 지랄 맞은 세상.”
과연 용감하게 죽고 싶다던 마르텔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녀의 마음이 감상적으로 물들려 할 때였다.
“지금 뭐하자는 거요! 이대로 죽고 싶은 거요! 정신들 차리시오!”
“그, 그렇지! 모두 정신 차려. 상대는 은색 기사단이오. 지금 같은 정신으로 이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싸웁시다. 싸워서 살아 돌아갑시다!”
“오・・・・・・ 오오! 싸우자!”
방진보다 마음과 정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낀 선두 기사들이 동료들을 독려했다. 그들 역시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없다.
자신들을 두고 홀로 검후에게 다가가는 마르텔의 태도를 보면 뭔가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게 스스로 다독인 기사들의 고함에 흔들리던 기사들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지켜본 쉴라의 입가에는 비릿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이것 참 고마워서 어쩌지? 기분이 찝찝해질 찰나에 그걸 이렇게 해결해 주다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감히 반역자들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검후님의 앞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다니.
스르릉.
마르텔과 달리 저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몫이었다. 따로 사양할 필요도 없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스르르릉!
그리고 이런 단장의 모습에 은색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모닥불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는 검.
흠칫!
그와 마주한 적들이 순간 몸을 떨었다. 새삼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은색 기사단임을 재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앞서와 같이 놀란 마음을 추스를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은색 기사단!”
“오우!”
“지금이야말로 그간 쌓아 왔던 울분을 주군을 대신해 풀어낼 때이다. 이 순간만은 잠시 기사도를 잊는 걸 허락하겠다. 마음껏 피 흘리고 날뛰어라. 지금부터 반역자들을 주살하라!”
“충! 반역자를 주살하라!”
좀 전 기묘했던 기분을 털어 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등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다른 때와 달리 쉴라는 뒤에 머물며 기사단을 지휘하지 않았다. 사실 예고된 기습인 만큼 적을 상대할 계획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 두었기에 따로 지휘도 필요 없다.
그렇기에 이번 전투에서는 쉴라가 가장 선두에 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런 단장을 따라 은색 기사단이 하얀 파도가 되어 적을 향해 밀어닥쳤다.
그에 적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은색 기사단이 온다! 펜타고니움! 펜타그램! 절대 방진을 무너트리지 마라! 방진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가자!!”
“으아아악!”
은색 기사단의 그것과는 달리, 절박함이 담긴 기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쩌엉!
“죽어라! 반역자들!”
“꺼져 버려!”
패배를 선언하고 포기할 수 없는, 어느 한쪽이 몰살되어야 끝나는 전투의 시작이었다.
으아아아아!
쩌어엉!
콰릉!
퍼퍼퍼펑!
바로 십여 미터 거리를 두고 시작된 전투,
벌써 비릿한 피비린내가 풍겨 오고, 고막을 찌르는 금속음과 폭음이 정신을 사납게 만든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겨우 십여 미터의 거리다.
그럼에도 묘하게 전투의 그 모든 소음이 멀게 느껴진다.
사실 그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니었다.
“저쪽이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서 말이죠.”
검후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선 라미아가 말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은색 기사단의 전장과 황금마차 사이에 에어 커튼을 달아 놓았던 것.
거창한 방어막도 아니고, 그저 냄새와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였다.
“…….”
하지만 이런 그녀의 수고에 대해 검후도 마르텔도 전혀 반응이 없다.
이드는 약간 풀이 죽은 라미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마주 선 두 사람을 살폈다. 과연 무슨 말이 오고 갈 것인가.
아니면 말을 주고받을 것도 없이 바로 전투를 시작할까?
“이거 흥분을 참을 수가 없군요.”
그런 차분한 의문과 달리, 옆에 선 클라인 백작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 중이다. 이드는 황금마차에 등을 턱 기대며 물었다.
“그렇습니까?”
“반역자이자 배신자를 처단하는 순간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인데요. 무엇보다 그걸 제가 코앞에서 보게 되었다니.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이라고 해도 되려나.”
검후에 대한 배신자는 셋.
그중 존 워스는 이미 만났고, 또 죽었다.
하지만 그는 배신자 이전에 혼돈의 파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처리한 것도 이드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르텔은 처음으로 검후의 손에 죽는 배신자가 될 것이다.
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