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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09화


1444화

검후와 마르텔.

마주 선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둘 사이에 쌓인 시간이 그 둘의 입을 막아 버린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먼저 움직인 것은 마르텔이었다.

“죄 많은 기사 마르텔이 검후께 인사드립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댄 그는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심장 위에 오른쪽 주먹을 올렸다. 기사도를 따른 마르텔의 정식 군례는 절도와 멋이 넘쳤다. 다만 이런 군례는 보통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나 군을 이끄는 사령관, 그리고 왕에게 하는 것. 그렇다면 마르텔의 군례는 어떤 의미일까. 검후를 앞에 둔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이 군례라니. 정말이지 예상을 완벽히 벗어난 행동에 모두 눈만 깜빡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검후 역시 마찬가지.

예를 올린 채 움직이지 않는 마르텔을 복잡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고 말했다.

“그대의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내심 바라기는 했으나, 진짜 인사를 받아 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마르텔은 재차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마치 과거 마르텔이 검후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그 순간을 닮아 있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길지 않았다. 곧 마르텔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당당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검후를 향했다.

검후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핀 마르텔이 악의 없이 씨익 웃었다.

“편해 보이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하하하. 제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글쎄. 이제는 그 안다는 데 그다지 자신이 없구나.”

염세적인 느낌마저 묻어나는 검후의 대답에 마르텔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놀랐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검후께 자신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흥, 내 앞에서 오래 살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게다가, 너희들이야말로 내 자신감을 빼앗아 간 원흉이 아니냐. 그래 놓고 그런 말을 해?”

“크크큭.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할 말이 없지요. 항상 속을 썩이는 제자들이라 정말이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 못난 것들.”

“예. 못나고 멍청한 놈들이 이번엔 진짜 큰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쳐도 이미 크게 쳤느니라. 어지간해야 수습을 해 줄 게 아니냐.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 어쩌자고 이런. 마치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대화를 주고받던 검후.

그러나 조금씩 진전이 되는 이야기에 서서히 감정이 고조된 것인지, 막상 중요한 부분에서 목이 멘 듯 말을 잊지 못하는 모습이다.

“면목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한마디 하자면, 페시딘이 문젭니다. 옛날부터 큰 사고를 치는 건 항상 그놈이었습니다.”

“그러는 너는 또 남 탓이고?”

“옛날 버릇이 어디 가겠습니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 다 된 거라는데, 보시다시피 전 이렇게나 건강합니다.”

“……”

팔을 들어 근육을 자랑하는 마르텔의 모습에 일순 말문이 막혀 버리는 검후다.

과연 저것이 용감한 죽음을 바란다는 인간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럼 이제 용감한 죽음은 포기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가끔 네 생각을 잘 모르겠구나.”

가만히 한숨을 쉬는 검후의 모습에 마르텔이 또 한 번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 사이에 술이나 차만 놓여 있었다면, 아니, 저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만 아니었다면 정말 오랜만에 재회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도 셋 중에서 제가 제일 다루기 쉬운 제자였지 않습니까?”

“나는 셋 다 버거웠다. 그 결과 우리가 이렇게 마주 서 있지 않으냐”

“그게 검후님의 탓이겠습니까. 못난 저희의 탓이지.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혹시 존은 만나 보셨습니까? 이 자식이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겨 버렸지 뭡니까.”

“그럼 페시딘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는 거니?”

“황제의 소환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직접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잘 도망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널 두고 간 것에 비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니?”

“그렇지 않아도 오라는 말은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이 이상 구질구질해지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 뜨겁고 화끈해야지요.”

“그래서. 그래서 그날 나를 향해 검을 들었니?”

“예. 변명은 아니고, 페시딘 그놈의 말이 제법 달콤했습니다.”

변명이 아니라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마르텔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슬쩍슬쩍 건네는 검후의 질문에 그야말로 솔직 담백한 답변들이 튀어 나왔다. 그에 특히나 클라인 백작이 바짝 귀를 기울였다.

배신의 그 날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그리고 그에 관련된 죄인을 하나라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어쩌면 검후에 대한 책에 쓸 내용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페시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검후에 마르텔이 처음으로 곤란한 얼굴이 되어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대답해 드리고 싶지만, 정말 모릅니다. 묻지 않았고, 녀석도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하긴, 마법을 이용한 통신으로라도 함부로 떠들기는 곤란한 문제긴 할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

“되었다. 네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뭐, 짐작 가는 구석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저희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검후께서 돌아오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

그때를 생각하는 듯 마르텔은 아직 해가 뜨려면 두 시간 정도가 남은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마르텔의 모습은 어쩐지 외롭게 보였다. “중간에 복잡한 이야기는 빼놓고 결론만 말하자면, 마스 아니면 카논입니다.”

“무슨 저딴 하나마나한 뻔한 소리를…………….”

마르텔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클라인 백작이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는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역시 말을 하고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머쓱함을 지워 냈다.

마르텔은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였다.

“확실히 좀 뻔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정녕 그랬다.

곧 아나크렌 제국의 죄인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될 검왕.

현 최강국인 아나크렌과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품에 안아 줄 세력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이 비슷한 이름을 골라내지 않을까? 그리고 개중 빠지지 않는 이름이 아마 마스와 카논일 것이다. 검왕의 존재와 상관없이, 제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국가.

“아니,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하다. 네 성격에 그만큼 쉽게 답을 해 준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검후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일 뿐입니다. 지금 열심히 도망치고 있을 멍청이들, 그놈들을 살려 주시는 것도 모두 검후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소드 팰러스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검후에게 소드 팰러스가 소중한 만큼이나, 마르텔에게 있어서도 소드 팰러스는 소중했다. 그런 소중한 소드 팰러스에 더러운 피를 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치했던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잊었다.

이번 침묵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존 워스에 대해 물었지? 녀석은 죽었다.”

“쯧, 대충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습니다만……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까. 검후께서 보내 주신 겁니까?”

“그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존 워스는 껍데기일 뿐이고, 그 속에 든 것은 혼돈의 파편이었으니까.”

검후는 존 워스에 대한 진실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그야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르텔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애초에 그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검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 와서 검후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라면 그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혼돈의 파편이라면, 오래전에 저희들에게 한번 언급해 주셨던 그……………”

끄덕.

검후의 말 없는 끄덕임에 말없이 눈을 껌뻑이던 마르텔이 맥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거 참, 기분이 묘하네요. 더럽다고 할지, 아쉽다고 할지.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놈에게 이용을 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혹시, 페시딘도 혼돈의 파편이거나 그 동조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다. 굳이 그의 역할을 정의하자면 방조자이며 관찰자에 가까웠다. 최소한 우리 사이의 일에 있어서는 말이다.”

“후우. 다행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일까. 마르텔이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다만 세상 누구보다 가깝다고 생각해 왔던 존 워스의 정체가 혼돈의 파편이라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는지, 복잡한 심경을 다 감추지는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빠르게 정리되었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오늘 예약된 죽음보다 큰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결국 남는 건 페시딘 그놈 혼자라는 말인데…………… 불쌍하게 되었군요. 우리가 없으면 세상 기댈 곳 없는 외로운 놈인데 말입니다. 아, 그런데 혼돈의 파편이 그런 강력한 존재라면 그걸 상대한 이는…………….”

“저기 뒤에 있구나.”

“역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괜히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로군요. 좋습니다. 검후님의 은혜 덕분에 궁금한 건 다 해결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르릉-

그 말과 함께, 맑은 쇳소리의 은색 검을 뽑아 드는 마르텔이다.

곧이어 그는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집을 풀어 던져 버렸다. 거기에 더해 반대쪽 허리에 묶어 둔 단검도 풀어 던져 버렸다.

그건 정중한 군례만큼이나 예상외의 행동이었다.

마르텔이 블러디 혼이라 불린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그가 쌍검처럼 쓰는 단검에 있었다.

한데 그런 단검을 버리다니?

“기세가 줄지 않아?”

이드가 이런 마르텔의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자신을 상대할 때도 단검을 버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끝까지 단검을 활용했던 남자가 마르텔이다.

그런데 단검을 버린 지금.

어째서일까.

마르텔의 기세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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