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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42화


1477화

네리베르에게 그날은 충격이었다.

이드와의 전투를 통해 드러난 존 워스의 진면목.

그걸 목격한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의 또다른 이면이 있음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젊은 그녀가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날의 충격은 상상을 아득히 넘은 것이었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두근거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접근하기엔 이면에 도사린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손가락 끝에 뭉개지는 개미가 될 것 같은 기분. 달리 말하면 무력감과 공포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어깨가 무겁다.

과연 그런 이면의 존재에 있어 삼검왕이라는 이름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 거 같은데?”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케마란의 반응은 하염없이 가볍다. 비교하자면 전날 오후에 내렸던 폭우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리베르는 기가 찼다.

“그 전투를 보고도 그런 속 편한 말이 나오니?”

“어쩌라고?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범위 밖의 일인데.”

온몸으로 내 말이 틀려? 하고 묻는 케마란을 보며 네리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저걸 자기 분수를 안다고 봐야 좋을지, 무신경하다고 봐야 좋을지 헷갈렸다.

무엇보다 어느 쪽이라도 틀린 반응은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녀의 말이 옳았다.

혼돈의 파편에 관련한 일은 고작 은색 기사단의 평기사 따위가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리베르도 이런 자신의 위치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거기에 자신이 상관할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이 정해진다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제는 가끔 후회가 된다. 굳이 조르고 졸라 혼돈의 파편에 대한 사실을 듣게 된 것이 말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친구의 모습에 케마란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알밤을 먹였다.

따악!

“아얏! 무슨 짓이야!”

“정신 차려, 바보야.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 좀 알았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우린 겨우 기사단의 막내일 뿐이라고!”

“…..나도 알아..”

기가 죽어 답하는 네리베르.

케마란은 그런 친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이었다는 거야. 이드 님이 찾고 있던 사냥감. 그리고 결국 사냥에 성공하셨지.”

“하지만 아직 남은 혼돈의 파편이 많아.”

“내 말이! 그러니 더더욱 소드 팰러스를 떠날 이유가 없는 거잖아. 여기 소드 팰러스만큼 사람과 정보가 모이는 곳은 없다고.”

케마란은 소드 팰러스에 대한 자부심을 뽐냈다.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철저한 사실에 기반한 것이었다. 소드 팰러스가 기사들의 성지로 불리는 것은 듣기 좋은 올려 치기가 절대 아니다.

대륙에 이만큼 한 분야에 대한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은 소드 팰러스 말고는 바벨이 유일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만큼 세상을 두루 살피기 위해서는 오히려 소드 팰러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한가지 문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 그러셔요. 그래서 소드 팰러스 사람 중에 존 워스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이 누가 있는데?”

“…….” 

그랬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같은 의미로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핵심이 없다면 종이 낭비일 뿐이다.

존 워스라는 가면을 쓴 혼돈의 파편은 오랜 시간 소드 팰러스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 위대한 검후도 존 워스를 제자로 두고 열정적으로 무공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도망자가 되어 사라진 검왕도 존 워스와 배반을 모의하지 않았던가. 모조리 눈뜬장님이라며 신랄하게 꼬집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다행이라면 그렇게 꼬집어 줄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일까. 그도 그럴 것이, 혼돈의 파편과 가장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이드마저도 존 워스를 몇 번이나 마주하면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에는 존 워스로 정체를 감추고 있던 혼돈의 파편이 가진 특수성이 있기는 하다. 그러니 차원의 인도 조용했던 것이고.

하지만 설령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혼돈의 파편을 이드가 아닌 사람이 알아볼 수 있을까?

수상한 정황이 발견되더라도 과연 의미 있는 연결고리에 가져다 낄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서는 기고만장하던 케마란의 뽕도 바람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불가능한 일을 두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대신 말문이 막혀 버린 케마란의 입술이 심술이 난 양툭 삐져 나왔다.

“그래서 소드 팰러스가 능력이 없으니, 이드 님이 떠날 거라는 말이야?”

“미친년인가? 내가 언제 소드 팰러스에 능력이 없댔니? 유언비어 퍼트리지 마!”

네리베르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항변했다.

소드 팰러스에 능력이 없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비록 삼검왕의 배신으로 인해 그 위상이 살짝 추락하기도 했지만, 검후가 직접 발표한 검법으로 인해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오히려 전보다 많은 관심과 사람이 모여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소드 팰러스가 능력이 없다? 자칫 선배 기사들의 귀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훌륭한 배신자 후보생으로 사상 검증을 당할지 몰랐다.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시험하게 될 그런 경험은 단연코 거부하고 싶은 네리베르였다. 아무튼, 그렇게 단단히 못을 박은 네리베르는 조금 진정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소드 팰러스가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냐.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이드 님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거지. 그만큼 위험한 적이니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소드 팰러스가 이드를 지원해 줄 방법은 다양했다. 그리고 그런 지원은 이드로서도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각국의 동향이나 특별한 정황에 대한 정보들이 있어야 이드도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정보들을 굳이 소드 팰러스에 앉아 기다릴 필요는 없다. 언제 어디서라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기다리는 시간을 아깝게 보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움직여 탐색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래도 여기엔 검후님이 계시잖아. 정말 그분을 두고 떠나실까?”

“검후님은 보살핌이 필요한 소녀가 아니야.”

가장 큰 위기를 넘긴 검후였다.

또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험 요소였던 삼검왕은 죽고 도망친 상태다. 지금 제국, 아니, 대륙에서 그녀에게 위험이 될 요소는 몇 없었다. 당연히 이드의 보살핌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런 네리베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케마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인정머리 없는 년.”

“죽을래?”

“사실이잖아. 넌 검후님이 이드 님 부부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즐거워하시는지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난 그런 검후님을 보고 있으면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던데. 그런 즐거움을 꼭 뺏어야 속이 시원하냔 말이다!”

움찔.

사실 그건 네리베르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그녀뿐 아니다. 은색 기사단에 속한 기사라면, 검후와 가까운 관계에 있다면 최근 검후의 분위기가 얼마나 밝고 가벼워졌는지를 모를 수가 없다. 이드가 떠난다면 그런 검후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이드를 떠나보내는 것도 아니니까. 자신이나 은색 기사단이 이드에게 남아 달라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래도・・・・・・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매달리고 매달려 혼돈의 파편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놀란 점은 그들이 가진 목적이었다. 순수하게 세계를 시험하고, 종말을 가져오는 존재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존재라니. 동화 속 마왕도 이유 없이 그런 짓은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라니, 심지어 마왕도 아니고 신이 준비한 안배란다.

악신도 이런 악신이 없다.

위험도를 보면 이건 이드에만 맡겨 둘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멸망이 달린 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나서도 모자랄 일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적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어중간한 인간이 나서 봤자 도움은커녕 혼란만 가중되어 방해가 될 뿐이다.

나선다면 백 년 전 혼돈의 파편을 일차로 저지했던 그때처럼 최강의 전력만 나서야 한다. 라미아는 그렇게 말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당시는 불만이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는 일에 자신들도 힘을 보태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존 워스의 진면목을 알게 된 지금의 생각은 달라졌다. 스스로의 분수를 알았다고 할까.

“우리는 열심히 응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젠장. 무력하네. 이젠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 은혜를 갚을 기회가 없다는 점도 아쉽고.”

케마란은 네리베르가 남긴 물병을 들어 입안에 물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답답한 속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다.

“우리가 나설 순간도 있을 거야. 검후님도 가만히 계시진 않을 테니까.”

“역시 그렇겠지?”

“당연하지! 누가 뭐래도 그분은 이 그레센 대륙 최강의 기사이시라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검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꼭 검후의 곁에 은색 기사단이 함께 하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확신하고 있었다.

언젠가 혼돈의 파편과 싸우는 날이 오면 그것이 언제 어떤 상황이든 검후의 곁에는 자신들 은색 기사단도 함께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배울 수 있을 때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배워야 한다는 말이야. 알겠니? 설마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내일 빠지고 싶어?”

“……사람을 이렇게 구석에 몰아넣어야 속이 편하냐?”

“응, 재밌어.”

푹 한숨을 내쉬는 케마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방글거리는 네리베르의 얼굴을 보며 빠득빠득 이빨을 갈던 그녀가 돌연 이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에 불길함을 느낀 네리베르가 급히 케마란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야, 너 뭐 하려고?”

“기회가 많지 않을 거라며? 그럼 최대한 기회를 잡아야지. 내일만으로 되겠어? 모레도, 글피도 미리미리 예약해 둬야지!”

잘 보면 살짝 눈이 돌아갔다.

완전히 폭주 해버린 케마란이 네리베르의 손을 떨치고는 이드와 일리나를 향해 달려갔다.

“이드 님! 부탁이 있어요!”

“야! 야!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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