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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44화


1479화

달그락. 검후의 포크가 멈췄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새로운 단서라도?”

그게 아니고서야 시간이 없을 이유가 없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정답이긴 했지만 이드는 조금 서글펐다.

혼돈의 파편과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일 없는 인간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식탁에 오른 새빨간 사과 하나로 쓴 입맛을 달래던 이드는 뜻밖에 달콤하고 풍성한 과즙에 깜짝 놀랐다. 이건 올해 먹은 사과 중 최고다!

“이거 맛있네! 일리나도 먹어 봐요. 라미아도!”

말과 함께 손을 움직였다. 껍질을 깎은 사과를 공평하게 잘라 두 아내와 검후의 접시에 나눠 준다.

그리고 두 아내의 포크가 사과를 찌르는 걸 보며 말했다.

“혼돈의 파편 때문인 건 맞는데. 새로운 단서 같은 건 없어.”

“그러면요?”

“직접 찾아보려고.”

“정보도 없이 말인가요?”

검후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대륙도 좁다며 국경을 넘나드는 혼돈의 파편을 발로 뛰어 잡겠다니. 이런 최악의 술래잡기를 하느니, 차라리 백사장에 떨어진 모래 한 알을 찾는 것이 더 쉬울 터였다.

하지만 이런 반응에도 이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혼돈의 파편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잖아. 조심해야지.” 존 워스가 소멸하고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조직원이 노출되면 당분간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피겠지만, 과연 혼돈의 파편도 그럴까?

반대로 저들이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다면 오히려 속도를 낼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이드의 활동이 그런 폭주를 막는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흐음, 옳은 말이에요. 옳은 말이기는 한데………….”

그러나 정작 검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그녀에게서 서운한 기색을 읽은 이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꼬며 웃음을 지었다.

“혹시 미리 의논하지 않아서 섭섭한 거야?”

“어머나? 내가 무슨 앤가요? 그런 걸로 섭섭하게?”

이 나이 먹고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며 어처구니없다는 검후.

한데 어째서일까. 입술을 삐쭉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 소녀로만 보일 뿐이다. 만약 이 자리에 황녀가 있어 저 모습을 보았다면 참 좋아했을 것 같다.

“정말 아니야?”

“당연하잖아요! 어차피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고요.”

“그랬어?”

그런 줄 몰랐던 이드는 조금 놀랐다.

검후는 고기를 지분거리던 포크를 완전히 내려놓고 이드가 잘라 놓은 사과를 한 입 깨물었다.

“그렇잖아요. 소드 팰러스에 또 다른 혼돈의 파편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놈들이 소드 팰러스로 찾아올 것도 아니니까. 결국 놈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쪽에서 찾아가야죠.”

“……혹시 모르잖아? 한 놈 정도 더 소드 팰러스에 숨어 있을지도?”

“그런 끔찍한 소린 하지도 마요.’

슬쩍 던져 본 농담에 온몸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검후다.

“하하. 어지간히 싫은가 보네.”

“이런 끔찍한 경우는 한 번으로 족해요. 솔직히 혼돈의 파편이라면 찾아오는 것도 사양이에요.”

어떤 놈이든 혼돈의 파편이라면 소드 팰러스에 등장하는 즉시 전투가 벌어질 것이 기정사실.

소드 팰러스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피해가 어떨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특히 인적 피해도 피해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 물적 피해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클라인 백작은 거품을 물고 기절할 것이 분명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마음은 검후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이 좋았다. 존 워스가 정체를 감춘 혼돈의 파편임에도 소드 팰러스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만약 전투가 있었다면 높은 확률로 소드 팰러스는 반파 혹은 완파되었을 것이다.

긴 시간 소드 팰러스에 깃든 그녀의 추억도 함께 말이다.

그런 생각에 검후는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돌아올 집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빠른가? 난 조금 여유를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검후가 복귀하고 이미 이 주가 넘었다.

그사이 소드 팰러스는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물론, 검후가 새롭게 발표한 무공으로 인해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모두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제국와 마스의 문제는 그대로지만, 그거야 국가의 몫이니 넘어가자.

아무튼 이렇게 보면 이드가 지금에서야 움직이려 하는 것은 늦다고 할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움직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걸 빠르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이드의 반응에도 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라요. 지금처럼 대형 사건은 그 수습과 처리에만 몇 개월이 걸린단 말이에요.”

“아니, 그건 당사자나 나라의 경우고. 난 아니잖아.”

“왜 아니에요? 이 이일에 이드만큼 관련이 깊은 당사자가 또 어딨다고.”

“…….”

헛소리 말라는 검후의 반응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이드.

“최소 한두 달 정도는 여유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준비도 서두르지 않은 건데.”

그러면서 갑자기 바빠지게 생겼다며 투덜거리더니, 술잔을 비우는 검후다.

이드로서는 이런 검후의 반응이 조금 따라가기 힘들다.

“야, 잠깐만. 갑자기 네가 왜 바빠지는 건데?”

“혼돈의 파편을 찾아야 하니까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설마…… 나만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아니, 너뿐 아니라, 전부 다 데려갈 생각 없었어. 처음부터 라미아하고 일리나만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다고.”

진심이었다.

이드의 계획에는 검후는 물론, 두 아내를 제외하고 그 누구의 동행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굳이 사람이 많이 필요할 이유가 없으니까.

“혹시 무능하고 필요 없어서 떨궈 내려는…………….”

“야아!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니거든!”

이드는 뜬금없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기 시작하는 검후에 발끈해서는 반응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렇지.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삼류 양아치로 만드는 건 반칙이지.

“그저 처음부터 길게 생각한 여정이 아니라서 그럴 뿐이야.”

“어째서요? 혼돈의 파편을 찾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일정까지 짧으면…….”

어차피 이드에게 다른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이야 언제든 늘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길지 않다고 못 박을 정도라면 정말 길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검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대놓고 이드의 계획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혼돈의 파편을 찾는다는 건 핑계고, 혹시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잠시 피해 있겠다는 목적은・・・・・・ 아니죠?” 

“절대 아니야!”

이게 자꾸,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지만 검후의 의심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아, 그럼 혹시 부부간의 여행? 그런 거라면 당연하게 빠져 줄 수 있는데. 나도 그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아요.”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라.

이드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검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 틀렸어. 혼돈의 파편이 목적이라는 건 진심이라고! 단지 곧 드래곤들이 돌아오기 때문에 시간을 길게 잡지 않았을 뿐이야.”

“아, 맞다. 그랬죠!”

“그랬죠? 그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니? 아무리 생각해도 눈치보단 기억력이 없는 것 같은데?”

조금 많이 유치한 이드의 도발에 검후는 별거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바쁜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깜빡했을 뿐이에요. 그렇구나, 곧 드래곤들이 돌아오는군요. 이 중간계의 수호자들.” 

과거의 어떤 순간을 회상하는 듯 검후의 눈빛이 순간 아련해졌다.

그 순간, 그녀는 수십 년 전 보았던 압도적이고 아름다웠던 드래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드와 긴 수명을 가진 종족들을 제외하고 인간 중에서는 오직 그녀만이 가진 기억이었다.

“확실히 드래곤들이 돌아온다면 지지부진하게 단서를 쫓을 필요는 없겠네요.”

“그런 거지. 이번에 짧게 여정을 잡은 것도 혹시 모를 사건에 대한 예방 차원의 성격이 커 스케스틱을 동행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케스틱까지 동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검후는 조금 반성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몇 번이나 반성하지만, 여기 이 세 사람과 함께할 때면 항상 긴장에 더해 나사 하나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드래곤들이 돌아올 때가 진짜 머지않았다.

“곧・・・・・・ 이 세상의 운명을 가르는 거대한 전투가 벌어지겠네요.”

모든 드래곤들이 대륙으로 돌아오고, 정비를 끝낸 후 이드와 그들이 대륙 하늘에서 날개를 펼치는 날.

더 이상 혼돈의 파편이 숨을 곳은 없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검후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두려움인지, 두근거림인지 그녀 자신도 정확히 그 기분을 알 수 없는 떨림.

하지만 이런 묘한 분위기는 퉁명스러운 이드의 한마디에 부서져 버렸다.

“어디 케케묵은 동화책도 아니고. 세상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는 무슨! 그저 어디에서나 있는 목숨을 건 싸움일 뿐이지.”

“그건 아니죠!”

“다를 거 없어. 근본적으로 똑같아.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 거지.”

이드는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에 정말이지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것이 걸린 전투다. 하나둘 의미가 더해질수록 부담만 늘어날 뿐. 좋을 것이 없었다.

어차피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도 결국 이 단순한 진리 안에 있을 뿐이다. 원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세상이지 않은가. 이 세상은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검후는 불만인 듯했다.

“두고 봐요. 이 전투가 끝나면 대륙 곳곳에 이 승기를 기록하고, 축복하는 탑을 세울 테니까.”

“마음대로 해.”

아마 그땐 이미 자신은 이 땅을 떠나 있지 않을까?

이드는 비시시 웃으며 검후의 말을 들어 넘겼다. 그러다 곧 앞선 이야기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편애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거야?”

아무렴 은색 기사단에서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들이 고작 그 정도의 사소한 일을 검후에게 들고 올 리가 없다.

“뭐 있어요. 그런 인간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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