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046화


1481화

끼릭.

레버를 돌리자 펑펑 쏟아지던 물줄기가 멈췄다.

물을 잔뜩 먹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후, 몸의 물기를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가 미리 준비된 오버핏 반팔을 대충 걸쳤다.

당연히 라미아가 준비해 준 것으로 온전히 그녀의 취향이다.

그렇게 샤워를 마친 이드는 기분 좋게 달아오른 열기를 얼음물 한잔으로 식히고는 침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가장 먼저 침대에 등을 보이고 앉은 라미아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 앞에 누운 일리나의 얼굴에 한창 열중하고 있었다.

“뭐해?”

뭘 하기에 돌아보지도 않지? 호기심에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다가갔다.

“아앗! 물이 튀잖아요.”

화들짝 놀란 라미아가 양손으로 물방울을 막는 모습에 그대로 멈추는 이드. 아무래도 머리카락에서 물이 튄 모양이다. 대충 예상되는 궤적이 일리나를 향하고 있다.

“미안, 미안해요, 일리나 많이 튀었어요?”

그 말과 함께 미안한 마음에 수건으로 머리를 둘둘 말았다. 엉성한 손길에 수건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키득키득.

라미아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민 일리나가 이런 모습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팩에 떨어진 거라 그다지 느낌도 없어요.”

“대신 팩이 망했죠.”

아무래도 팩을 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라미아의 말대로 물이 떨어진 팩은 마치 하루 종일 사용한 과녁판처럼 하얀 자국 수십 개가 생겨 있었다.

영 보기 좋지 않은 모습에 라미아는 과감하게 폐기 판정을 내렸다.

“쯧, 역시 새로 붙여야겠어요. 일리나는 다시 눕고, 이드는!! 거기서 움직이지 말아요!”

“예스, 맴!”

결정을 내린 라미아는 능숙한 솜씨로 망가진 팩을 걷어내고, 새로운 팩을 이식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은 섬세했고, 이식은 완벽했다. 그녀의 시술에 만족한 일리나가 조용히 엄지를 세우자, 흐르지도 않는 이마의 땀을 훔치는 라미아다.

그 모습이 퍽 재밌어서 실실 웃고 있으니, 어느새 고개를 돌린 라미아가 이쪽을 돌아보며 침대 가장자리를 두드린다.

“또 팩 망치지 말로 이리 와요. 머리 말려 줄 테니까.”

“땡큐, 맴!”

“장난치지 말고요.”

이드의 천진한 대답에 예쁘게 눈을 흘기는 라미아.

이를 능청스럽게 넘긴 이드가 침대에 엉덩이를 가져다 붙였다. 곧이어 향긋한 냄새와 함께 작은 손이 다가와 둘둘 말린 수건을 풀어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차분하게 닦아냈다. 그 익숙하고 포근한 손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저 머리를 만져줄 뿐인데, 왜 이렇게나 평화롭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인지.

“좋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이드 때문에 아까운 팩 하나를 날렸는데, 좋아요?”

“에이, 겨우 하나로 엄살은.”

웃기지 말라며 콧방귀를 날리며 뒤를 돌아보는 이드,

“그거 아공간 한쪽에 태산처럼 쌓아 놓은 걸 내가 봤는데?”

농담이 아니고 진짜 산처럼 쌓아뒀다.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주문을 넣은 라미아의 대량 구매. 당시 그 엄청난 주문량에 제조사의 주가가 다 들썩였을 정도였다고.

뭐, 예상대로 갑자기 돌아오게 된 만큼 따지고 보면 옳은 판단이기는 했다.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이젠 더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죠.”

“모르지. 혼돈의 파편이 사라지면 다시 가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이제 와 돌아보면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인연이 한둘이 아니다. 기회가 있다면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이드 고향을 가면 거길 어떻게 가요?”

웃기지 말라는 것이 라미아의 반응이었다.

이런 라미아의 반응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드의 고향과 현대의 지구는 동일한 시간선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드가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동일한 미래는 사라질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래의 지구로 떨어진 것도 혼돈의 파편이라는 변수로 인한 일종의 사고였다.

차원의 인이 완성되더라도 그처럼 시간선을 엉망으로 만드는 간섭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 그게 가능하더라도 창조주가 그걸 허락할까?

‘그럴 리가 없지.’

내심 고개를 젓는 라미아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극한의 생존 게임의 설계자이긴 해도,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멈추지 않는 순환을 위한 것. 그런 존재가 시간이라는 절대 법칙이 망가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일리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쉽네요. 이드와 라미아가 다녀온 지구라는 곳에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는데.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라미아와 함께 즐기고 있는 문화생활이 모두 지구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상으로만 보았던 세상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일리나는 이드의 고향과 지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이드의 고향이죠. 이드의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마음을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답하는 일리나였다.

역시 관광지보다는 가족이 우선이다.

이런 모습에 이드가 감동의 눈길을 보내는 사이, 라미아는 또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뭔데?”

“아니, 이드 고향으로 갈 생각을 하니까, 아까 식당에서 있었던 검후의 반응이 떠올라서 말이에요.”

“그게 왜?”

“어쩌면…… 아니, 분명 우리가 이드의 고향으로 떠난다고 하면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쓸 것 같아서요. 그 모습을 생각하니까. 아하하하.”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라미아다.

이에 이드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그려졌다.

식탁 앞에서 얼굴을 붉히던 검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검후가 6살 아이처럼 떼를 쓰는 귀한 장면이 아니었던가.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를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사실이다. 

“그래도 그 맘은 이해가 가요. 그리고 귀엽잖아요.”

일리나는 검후의 편을 들었다.

그녀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홀로 남겨졌다면, 일리나도 혼돈의 파편으로 인해 이드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두 사람의 외로움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리나는 검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처럼 떼를 쓰던 그 마음도.

“원한다면 같이 못 갈 것도 없긴 하죠.”

그래서일까.

일리나의 반응을 가만히 살핀 이드의 입에서 툭 하고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에 가장 놀란 건 라미아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안될 것도 없잖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본인에게도 따분한 일상보다는 낫지 않겠어?”

어쩌면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많이 남았을지 모르는 검후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 제국의 지원을 받은 그녀의 무공이 어디까지 늘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녀가 고독해지리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스스로 이 소드 팰러스와 황실을 떠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 예정된 미래가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과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라미아의 생각은 조금 달라 보였다.

이드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름 검후와 쿵짝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검후와의 동행을 반대하다니 말이다.

‘하긴 아직은 먼 이야기이긴 하지.’

잠시 갈등이 있었지만, 황제와 검후는 한 핏줄이었고, 그녀가 아끼는 황녀도 있었으며, 소드 팰러스와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있었다. 아직은 혼자인 시간보다 함께인 시간이 더 많은 검후였다.

그런 그녀에게 다른 세상으로 떠날 것을 묻는 것도 과한 일이긴 했다. 물론 검후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 같기는 하다.

함께 동행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건 둘째치고라도 말이다.

“뭐, 그 부분은 차차 생각해 보자고. 원한다면 검후가 먼저 말을 하겠지.”

아직은 차원의 인의 완성은커녕 혼돈의 파편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이드에 라미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드는 참 단순해서 좋겠어요.”

“좋지. 최소한 복잡한 것보다는 낫다고 봐.”

그렇게 말을 돌려준 이드는 다 마른 머리를 대충 넘기고는 일리나 옆에 누우며 말했다.

“그 귀한 팩. 나도 하나 붙여 줘.”

“……에잇!”

아끼고 아끼는 걸 알면서 이런 요구라니.

약이 오른 라미아가 훤히 드러난 이드의 배를 퉁하고 두드렸다. 물론 그런 후 바로 새로운 팩을 꺼내서 그의 얼굴에 붙여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밤이 가고 다음 날이 밝았다.

이제 막 해가 뜨는 수련장에 이드가 홀로 서 있었다.

멀리서 새벽 수련에 한창인 기사들이 내는 소음이 들려왔지만, 그는 그게 들리지 않는 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사아아.

그렇게 고요한 중에 햇살이 이드를 비추기 시작할 때였다.

스스슷.

언제 움직였는지 알 수 없는 인식의 사각으로부터 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검은 없지만 검을 들고 있는 듯 가볍게 말아쥔 손은 그렇게 문득문득 사라지고 나타남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허공을 가로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검무도 아니고, 초식 수련도 아니었으며, 심상 수련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 이드가 하고 있는 수련은 어떤 것일까.

‘모르겠다.’

수련장 밖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쉴라는 포기를 선언했다. 그녀의 수준에서는 이드의 행위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도 쉴라는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위에 새기듯 이드의 동작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그리고 간절히 원했다.

언젠가 지금 이드가 하고 있는 수련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할 날이 자신에게 오기를.

자신의 모자람이 채워지는 날이 오기를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더 멍하니 이드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해가 온전히 떠오른 후, 허공을 가르던 이드의 손이 멈추고 그가 감았던 눈을 뜬다. 그리고는 툭툭 옷을 떨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련장을 내려왔다.

“쉴라 단장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런 물음과 함께 쉴라 앞에 멈춰선 이드.

그러자 번뜩 정신을 차린 쉴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 기사들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은 마음에…… 혹시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혀요 그런데 기사들의 무례라니요? 딱히 무례를 당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이드에게 감히 무례를 저지를 기사도 없지만, 며칠간 다른 기사를 마주할 일도 딱히 없었다.

“그게 아니면 혹시 케마란들의 수련 때문에? 그거라면 무레라기보단 부러움이겠죠.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과연 짐착이 맞았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하하, 쉴라 단정도 잔 걱정이 많은 사람이네요. 겨우 그런 문제로 찾아오다니 아직 아침 전이라면 같이 먹을래요”

“초대해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방금 수련이 뭘 위한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별것 아니었어요. 일전 전투의 복기였을 뿐이니까.”

“…….”

전투에 대한 복기라.

쉴라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 고요한 움직임 어디에 전투의 기색이 담겨 있었지?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