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90화
1525화
“말씀하시오. 내 경청하지.”
찻잔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는 황제.
이런 황제의 모습에 마음을 굳힌 이드가 말했다.
이드라는 이름은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고.
그 이름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으며, 내가 바로 마인드 마스터라고.
담백하게 그 사실을 밝혔다.
이건 결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검후를 어려워하면서도 결정을 망설이는 황제. 그 마음의 저울에 무게추를 더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머지않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부활하는 맹약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도 핵심적인 정보의 비대칭은 먼저 해결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차후 중요한 결정 과정에 있어 자신의 정체로 인해 오해가 발생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갑자기 밝힌 사실에 황제는 제법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
꾹 다문 입술에 혼란해 보이는 눈빛.
이전 필리푸스 황제나 쉴라 앞에서 정체를 밝혔을 때 그들이 보였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조금 다른가?”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은 눈빛이 어쩐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푸후 하는 한숨과 함께 놀라움으로 경직된 몸을 풀어낸 황제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랬구려.”
“죄송하지만,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으십니다?”
“많이 놀랐소. 지금도 가슴이 놀란 망아지처럼 쿵쿵 뛰는 중이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려 보인 황제는 이드와 자신의 빈 찻잔에 손수 차를 따랐다.
과연 놀랐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차를 따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다.
이드는 황제가 따라준 찻잔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다만?”
“명예 후작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소. 덕분에 빠르게 놀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소.’
“그 말씀은…….누군가 제 정체를 밝힌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소.”
“누굽니까. 그 사람이.”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하지만 이들 중에 허락도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힐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세상의 혼란을 걱정해서.
또 누군가는 이드의 정체를 숨겨 이득을 독점하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우정과 의리를 위해서.
이드의 정체를 함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밀을 사전에 라일론 황제에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혼돈의 파편과의 연결 가능성이 떠오른다.
지인들을 제외하고, 자신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존재가 바로 혼돈의 파편이니까.
저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의심이 발동한 이드.
하지만 황제는 이러한 이드의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날 그대가 대전에서 물러난 후, 나는 공작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맹약의 부활과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
“그때 제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까?”
“그렇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크페르니 공작이 명예 후작에 대한 의문을 내놓았소. 명예 후작은 어떻게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와 같이 강력한 무공을 쌓을 수 있었는가. 하고 말이오.”
“당연한 의문이군요.”
그러한 질문은 너무도 많이 받았다.
중원에서도 지구에서도 받았던 질문.
어떻게 하면 자신도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느냐고. 가르침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제자로 받아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크레르니 공작의 질문에 나람 공작이 간단하게 답했다오. 천재라고.”
“훗.”
이드는 나람 공작이 남긴 짧고 굵은 평가에 희미하게 웃었다.
천재.
자신의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단어.
그러나 동시에 이드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이런 재능과 천운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처럼 젊은 나이에 지금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노력이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깎아내리고 싶지도 않다.
결국 같이 노력해서 다른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은 재능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람 공작이 한마디를 더했소. 어쩌면 명예 후작이 보이는 것처럼 젊지 않을 수도 있다고. 소드 팰러스의 저 위대한 검후처럼.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소. 그러는 편이 젊은 나이에 그와 같은 강대한 힘을 가졌다는 것보다 훨씬 납득하기 쉬웠으니까. 그만큼 그대가 보여준 힘은 충격적이었다오.”
“아직 제 정체를 밝힌 사람이 누구인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이드가 다시 묻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페르니 공작이오. 나람 공작의 말을 들은 크페르니 공작이 한 가지 의문을 내놓았소. 무공이 높은 경지에 올라 육체가 젊어진 것이 명예 후작과 검후뿐이냐고. 마인드 마스터도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그 말을 들은 나와 공작들은 하나의 가설을 떠올리고는 동시에 우린 큰 충격을 받았소. 우리가 떠올린 가설이 무엇인지 혹시 짐작하시겠소?”
황제가 물었다.
이드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바로 하고는 멋쩍은 얼굴을 했다.
혹시 혼돈의 파편과 연결을 가진 인물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쉽게 떠올리지 못할 뿐, 저들이 가지는 의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충 짐작이 갑니다. 마인드 마스터와 그 후예가 동일 인물이 아니냐는 의심이었겠지요.”
“정확하오. 저 혼돈의 파편이라는 강대하고 위험한 존재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둘이라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는 편이 자연스러웠소. 또한, 세상의 멸망이 걸려 있는 일에 후예를 보냈을 뿐, 마인드 마스터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생각했소.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의심을 입 밖에 내지 못했소. 당장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오. 다만 맹약이 부활하고, 때가 된다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진실을 알게 될 줄이야.”
속이 탔는지 말과 함께 단숨에 찻잔을 비운 황제.
하지만 차 한잔으로는 뜨거운 속을 달랠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에 발그레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처음 볼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애주가인 황제였다.
“진즉에 사실을 밝히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그것이 어찌 사죄할 일이겠소. 명예 후작이 짐의 신하도 아닌데.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필리푸스 황제는 명예 후작의 정체를 알고 계시오?”
“알고 계십니다. 검후께서 증인이 되어 주셨지요.”
“그 외에는?”
“황실에선 밀리아리아 황녀가, 소드 팰러스에서는 검후를 모시는 몇몇이 알고 있습니다만. 그 수가 스물을 넘지 않습니다.”
“스물이라. 비밀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필리푸스 황제와 검후 덕분이겠구려.”
황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두 분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지요.”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오. 이제야 납득가는 부분이지만, 맹약의 부활에 대한 조건들도 굉장히 합리적이었소. 경우에 따라서는 아나크렌의 피해를 감수하는 부분도 있었고, 알고 보니 그것이 명예 후작의 진짜 정체 때문이었구려.”
이드가 중심에 있기에.
그가 혼돈의 파편과 싸우고 있기에 아나크렌 제국과 검후가 적극적으로 협력 중인 것이 아니냐는 황제의 말이었지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닙니다. 맹약의 핵심은 혼돈의 파편이지요.”
“알고 있소. 아, 그전에 하나 더. 앞으로 그대를 어찌 불러야 하오? 그대가 마인드 마스터임을 알았으니.”
“그저 지금처럼 대해 주십시오. 이 일이 극히 중요한 비밀은 아니오나, 아직 세상에 밝힐 생각도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처럼 명예 후작으로 부르면 되겠소?”
“그렇게 해주십시오.”
“좋소. 그리고 그대의 정체에 관해서 말인데. 내 공작들에게는 이를 밝히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소?”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저들도 이미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는 밝히셔도 무방합니다. 맹약의 부활을 위해서도 그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소. 공작들이 적극 협력해 준다면 굳이 대신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지.”
다행이라며 술잔을 기울이는 황제.
이드는 문득 황제의 주량이 궁금해졌다.
상당한 독주를 마시고 있는 것 같은데, 얼굴만 살짝 붉어질 뿐,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다.
여기서 얼마나 더 마셔야 저 눈이 흐려질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황제는 손에든 술잔을 완전히 비우고는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내게 정체를 밝힌 것이오? 큰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큰일이라.
아무래도 황제에게 있어 이드의 정체는 굉장한 중대 사항인 모양이었다.
이드는 이런 황제의 생각을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 보고 있는데, 굳이 그걸 깎아내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간단합니다. 제 정체보다 혼돈의 파편을 막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제 정체를 밝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말을 들으니, 새삼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약속하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려는 이드.
그에 황제는 손을 들어 그런 이드를 막고는 말했다.
“그대에게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니오. 혼돈의 파편이 진정 이 세상의 종말을 바란다면, 이는 절대 남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대신 명예 후작에게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부탁이 있소.”
“부탁・・・・・・ 입니까?”
“그렇소. 거절해도 좋소.”
그렇다면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라일론 제국의 작위를 받아주었으면 좋겠소. 아나크렌과 같이 의무가 없는 명예 작위라도 좋소.”
“・・・・・・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공작들에게 명예 후작과 대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