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1화
578화
‘음.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트롤버스터를 녹여 버리고 3층에 돌아온 이드는 살짝 고개를 숙여 수고에 대한 인사를 하는 쉴라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들춰서 좋은 일을 깰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복잡한 던전 안이니까.
“트롤버스터는 완전히 죽은 건가요?”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습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재생한다면 그땐 저도 방법이 없죠.”
이드가 식어 가는 용암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태양정은 이드가 가진 무공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12대식이다. 비록 약식이라는 말로 빼고 압축해서 저출력으로 발출했지만 트롤버스터의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다.
그 상황에서 재생한다면 그건 진짜 불사신이다. 못 죽인다!
다시 고개를 돌린 이드의 눈에 한가득 널려 있는 트롤버스터의 팔다리와 머리, 꼬리 등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트롤 수백 마리를 도축했다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다.
그 한쪽으로는 포로들이 입을 헤 벌리고 이드를 보고 있었다. 이드들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트롤버스터와의 싸움은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트롤버스터는 여기서 생활하는 그들도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이드는 그들을 지나쳐 독 안개를 막고 있는 일리나 옆으로 다가가 통로를 살폈다.
트롤버스터가 부수고 나온 통로는 다시 돌로 막혀 있었는데, 완전히 막힌 게 아니라 커다란 돌이 듬성듬성 큰 길만 막고 있었다. 그 사이로 그득하게 들어찬 희뿌연 독 안개는 로이콘이 그 앞에 단단한 바람의 벽을 만들어 막고 있었다.
“트롤버스터가 급격히 힘이 빠지기에 혹시나 했는데, 마법사들이 모두 나가떨어진 건 아닌가 보네요.”
“독 안개가 더 늘어나지는 않지만 로이콘이 밀어내지는 못하고 있어요. 로이콘의 힘을 막는 걸 보면 6클래스의 마법사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 혹은 둘. 그쪽도 필사적인 것 같아요.”
이드는 일리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밀리면 지들이 만들어 낸 독 안개에 자기들이 당할 테니까요. 꼴불견 마법사 베스트에 멍청한 마법사로 기록될걸요.”
“호호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드의 농담에 일리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때 다가온 쉴라가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있습니다. 백작급 이상의 영지에 세워진 마탑이나 마법 상점에서 판매하고 있죠. 제목은 다르지만.”
생각 못 한 말에 농담으로 말을 꺼낸 이드와 농담으로 웃어넘기던 일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마법사들이 그걸 그냥 둬요?”
이드가 궁금해 물었다. 지구라면 기네스북을 비롯해서 별별 기록이 다 있지만, 이곳 그레센은 지구와 많은 부분이 달랐다. 특히 명예와 자존심에 죽고 사는 귀족, 기사와 함께 가장 명예를 중시여기는 것이 마법사라는 족속이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그런 기록을 만들어서 자신의 손으로 팔고 있다고?
쉴라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의 생각은 때로는 괴짜와 같으니까요. 알고 있어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 긴 마법사(魔法史)에서 세세토록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항상 정신 바짝 차리라는 뜻이라더군요.”
“허허.”
이드는 작게 웃었다. 과연 쉴라가 말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 보고 싶기는 했다.
그때 쉴라가 검을 넣고 방패를 들며 말했다.
“앞서는 이드님이 앞장서셨으니 이번엔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그거야 상관이 없지만, 독 안개도 문제고 길을 막은 바위도 문제입니다. 끝에는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준비만큼 은색 기사단 단장으로서 제 준비도 모자라지 않으니까요.”
탕! 탕!
쉴라가 믿음직한 말과 함께 들고 있던 방패를 두드려 보였다.
이드는 어쩐지 자신만만한 쉴라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만류로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바쁜 사람이 그녀일 테니. 어지간한 자신감이 없다면 나서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럼 이번엔 저희가 쉴라 경의 뒤를 따르도록 하지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하죠.”
일단 결정되었지만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대로 로이콘의 바람의 벽이 사라지는 순간 쏟아져 내리는 독 안개에 애써 모아둔 포로들이 몰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리나가 삼층에서 포로를 던지고 이드가 일 층에서 받아 입구 근처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그 일이 끝나자 바로 쉴라가 4층 입구에 방패를 들고 섰다.
“후우흡!”
쉴라가 방패를 내밀고 몸을 숙이며 크게 숨을 쉬자 방패가 부르르 떨리더니, 은빛 강기가 출렁이며 뿜어졌다. 방패에서 뿜어진 강기는 파르르 떨리며 쉴라의 앞을 막아선 다음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며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방패에서 뿜어지는 강기는 처음이라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드는 그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멸혼향인가? 무기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초식도 없지만, 기세가 같다!’
그리고 막 이드가 그렇게 판단을 마치는 순간.
쿵!
거인이 해머로 땅을 내리친 듯한 발구름을 울린 쉴라가 그 반탄력을 터트리며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동시에 다이나마이트를 터트린 것 같은 폭발음이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쉴라는 어느새 통로의 삼분의 일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의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돌진에 바위가 모래로 변해 흘러내렸다.
콰콰콰콰-
검은 통로 안에서 오직 쉴라만이 은빛 강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두 호흡이 지나고 그녀가 통로의 절반을 지나는 순간, 뿌옇던 독 안개가 검은 안개로 변했다. 그 색깔과 마나의 향기는 이드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인센디어리 클라우드, 강력한 인화성과 폭발력을 가진 마법, 구름을 만드는 마법이었다.
“쉴라 경, 폭발…….”
콰과과광!
이드가 채 경고를 끝내기도 전에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빠르고 강렬했다.
순식간에 통로 안이 불꽃으로 가득 차며 입구에 있는 이드와 일리나에게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두 사람 앞을 지키며 먼지를 잠재우던 로이콘에 의해서 두 사람 앞에서 둘로 갈라진 불길이 양옆으로 퍼지며 로켓의 꼬리처럼 타올랐다. 일반 사람이라면 한 호흡 사이에 숯이 되어 버릴 만한 불길이었다.
하지만 이드의 신안(神)은 불길을 넘어 그 속에서 번쩍이는 은빛 강기를 볼 수 있었다. 강렬한 불꽃 속에서도 한 점의 흔들림 없는 강기는 이제 쉴라의 전신을 덮고 있었으며, 그 속에는 갑옷과 방패에서 시작된 파란 쉴드 마법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두 호흡이 지나자 불꽃 속에 있던 쉴라가 앞으로 쑥 뻗어 나가며 이드와 일리나를 덮치던 불길이 진공청소기에 빨려 드는 것처럼 빨려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끝까지 뻥뚫린 통로를 보며 이드가 말했다.
“가죠. 일리나.”
“네.”
이드가 앞서며 두 사람이 검게 불탄 통로를 넘어 4층에 발을 디뎠다.
동시에 폭음과 비명이 터졌다.
빠르게 주변을 살피던 이드와 일리나의 눈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은빛 강기에 싸인 쉴라가 마법사 하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피떡이 되어 버린 마법사와 그 마법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쉴라를 향해 마법 공격을 하고 있는 마법사도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도망치고 있는 뚱뚱한 마법사까지.
쉴라를 공격하는 마법사는 도망치는 마법사를 돌아보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들어 보니 욕이었다.
“적은 둘.”
자신이 노려야 할 사람을 확인한 이드는 가볍게 한 발을 내디디며 혈뇌천강지로 뚱뚱한 마법사의 머리를 노리고, 반대 손으로 일라이져를 뽑아 반보 회전하며 검강을 뽑아 고개를 돌린 마법사의 심장을 노렸다.
두 가지 공격은 이드가 4층에 올라오고 일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펼쳐진 공격이었다.
두 사람이 올라온 사실을 확인조차 못 하고 있던 두 마법사는 제대로 인식도 못 한 상태에서 공격을 허용했다.
쉴라를 공격하던 마법사는 비명도 없이 한순간 절명했다.
도망치던 마법사는 자동 방어 마법이 발동한 때문에 몸이 기울어 원래 노렸던 머리가 아닌 얼굴의 한쪽이 날아가 버렸다.
마법사는 피투성이 얼굴을 붙잡고 지옥 같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드도, 일리나도, 쉴라도 누구 하나 그의 비명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손에 그보다 더한 비명을 질렀던 사람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를 동정할까.
“중간에 생각지 못한 폭발 공격이 있어 걱정했는데, 역시 쉴라 경의 실력은 대단하군요.”
이드는 사방으로 발출하던 내공을 갈무리하는 쉴라를 챙기고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4층은 실험실이었다.
한쪽에는 거대한 탁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각종기구와 책, 마법 재료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옆으로는 기기묘묘한 마법진들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벽을 파서 유리로 막아 둔 관 안에 초인과 차인과 융합된 오크와 트롤을 비롯한 각종 몬스터들이 해체된 채 정체 모를 액체 속에 담겨 있었다.
비올라에게 4층이 실험실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없었다고 해도 누구나 이곳이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실의 중앙에는 삼십 명이 넘는 사람이 검은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이드가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그중 이드들이 올라온 입구와 가까이 있던 십수 명은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는데, 역류한 독 안개를 들이마시고 죽은 것 같아 보였다.
남은 마법사들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미라처럼 삐쩍 마른 상태로 죽어 있었다. 비올라의 말대로라면 트롤버스터에 마력을 빨리고 죽었을 것이다. 다섯 명 정도가 그 속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그들도 곧 하나하나 숨을 멈추고 죽어 버렸다.
대부분 젊어 보이는 것이 저 클래스의 어린 마법사들인 것 같았다.
“어쩌다 여기에 있는지 모르지만 자업자득인 거지.’
이드는 곧 마법사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자들이 있었지만 살리려 애쓰지 않았다. 마법기사와 달리 이들을 포로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 마법사들이 아니라 이들이 토해 낸 정보를 손에 쥐고 인체 실험에 나설지 모를 단체들이 위험한 것이지만.
“끄아아………… 사, 살려………… 아아악!!”
그때 쓰러져 있던 마법사에게서 폭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드가 보니 쉴라가 발로 밀어 뚱뚱한 마법사를 뒤집고 있었다.
뚱뚱한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는 중에도 대부분 새어 버린 발음으로 연신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이드는 놈을 바라보다 쉴라에게 물었다.
“죽이지 않으시고, 왜?”
죽인다는 말이 나오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에도 뚱뚱한 마법사, 프뢰벨이 살려달라고 빌었다.
-비올라가 했던 말에 대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이드는 쉴라의 오러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무조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번엔 자신이 등에 칼을 맞을지 모르는 일.
이드는 일리나에게 프뢰벨이 간단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치료를 해 주도록 말했다.
일리나가 정령으로 프뢰벨의 입을 치료하자 그때부터 이드와 쉴라가 번갈아가면서 프뢰벨이 알고 있는 사실을 심문했다.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 비올라에 대해서, 그리고 비올라가 말했던 내용들에 대한 확인을 중심으로 질문했다.
생명의 관에 대해서, 부관주에 대해서, 생명과 정신과 영혼의 관에 대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해 보이는 탑주에 대해서 특히 자세하게 캐물었다. 그리고 프뢰벨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 고개만 저어 댈 때 이드가 은밀히 그의 사혈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