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5화
582화
펑!
가슴속 분노를 끄집어 낸 기합성과 함께 방패를 세운 쉴라가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은빛의 탄환이 되어 솟아오르는 검은 진흙의 허리 부위를 부수고 관통해버렸다.
솟아오르던 허리에 구멍이 생기자 진흙이 꿀렁거리더니 구멍 위의 부분이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어차피 그저 불룩 솟아올랐을 뿐이지 아무런 형상도 없었던 존재였다.
검은 진흙은 아무렇지 않게 무너진 부분에서부터 다시 신체를 키워 갔다.
쉴라는 그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처참히 당한 카린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산산조각 내야 했지만, 우선은 상대를 살피는 것이 먼저였다. 분노에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할 만큼 그녀의 정신은 무르지 않았다.
당장 상대의 형상은커녕 어떤 능력을 가졌고, 얼마만큼 강력한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부하의 복수를 해 줘도 모자를 판에 앞뒤 분간 못 하고 달려들어 그 부하 앞에서 땅을 구르는 한심한 꼴을 보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
우선의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싸움의 두 번째 기본이다.
당연히 첫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다.
검은 진흙은 쉴라의 따뜻한 시선 아래 무럭무럭 자랐다. 멀대 같이 길게 자란 놈은 어느새 라미아와 카린을 내려다 볼 정도로 높이 자랐다.
할로윈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아이같이 아무것도 없던 형상에서 커다란 눈과 입이 생겼다. 정상적인 눈과 입은 아니었다. 그저 길게 솟은 머리 부분에 생겨난 세 개의 구멍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꿀렁거리는 몸체에 솟아난 팔과 다리였다. 모두가 검은색이었지만, 그 형태로 보아 인간과 트롤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팔과 다리는 끊임없이 몸속으로 사라졌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쉴라는 어느 순간 질퍽거리던 땅이 말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땅에서 솟아오르더니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폐기장에 고여 있던 썩은 오물이었던 것이다.
“실로 흉측하구나. 그게 네 본 모습이냐.”
구오오오옹-
마치 쉴라의 말에 대답하듯 괴수의 입에서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닮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괴수는 높은 곳에서 폐기장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구멍에 라미아와 카린의 모습이 담겼지만 괴수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놈은 처음부터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는 듯 코끼리 같은 울음을 토하더니 쉴라를 덮쳤다. 공격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거체를 그대로 쉴라에게 밀어붙인 단순한 공격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그와 같은 공격을 가만히 서서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에게 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카린의 처참한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따위 되도 않는 공격으로 그녀가 그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워지는 괴수의 입을 유심히 살폈다.
과연 이 괴수가 카린을 공격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봤자 어차피 적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이 괴수에게 카린이 당한 것이 맞다면 좀 더 상대하는 데 조심하고, 좀 더 열심히 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 자로 크게 벌려진 놈의 입에는 이빨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빨이 없다. 카린 경을 공격한 건 이놈이 아닌 걸까?’
어쩌면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진짜 이 괴수가 카린을 공격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이 폐기장에 이 괴수 말고 다른 놈이 하나 더 있을 수도 있겠구나.”
쉴라는 혹시 있을지 모를 제삼자를 마음에 두고 괴수를 피하며 검을 들었다. 두꺼운 가죽을 베어낸 서걱거리는 감촉이 느껴지고 커다란 괴수의 입이 찢어졌다.
구오오옹-
괴수의 입에서 비명인지 불명확한 울림이 울렸다.
어쩌면 기합성일 수도 있다. 울림의 뒤에 몸에 붙어 흐느적거리던 주인 모를 팔다리가 채찍처럼 늘어나며 쉴라를 노려 왔기 때문이다.
슈슈슈슉ᅳ
하나같이 쫙 벌어진 손에는 쉴라를 잡겠다는 갈망이 엿보였다.
그러나 하늘을 가득 매우는 화살도 막아내는 그녀의 검을 뚫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쉴라는 검기를 휘둘러 그녀를 향한 변태의 손처럼 보이는 검은 손을 막아냈다. 그런데 쉽게 베어진 괴수의 얼굴과 달리 팔다리는 검기에도 베이지 않았다. 아무리 손이 얼굴보다 두껍고 질기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인간과 트롤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봐야했다.
그사이 꾸물렁거리며 일어선 괴수가 다시 그녀를 덮쳤다.
그래도 학습 능력은 있는지 무작정 덮치지는 않았다. 그녀를 노리던 상변태 같은 팔다리를 그물처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쉴라도 이미 괴수의 팔의 강도를 확인한 후였다.
쉴라는 피하지 않고 은빛 검강을 번쩍이며 머리 위 그물을 도려냈다.
순간 잘려진 검은 팔다리가 모래 먼지처럼 부서지며, 그 자리에서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끼야아아악!
“갑자기 이게 무슨………….”
그리고 갑작스러운 현상에 놀라던 쉴라는 비명을 뒤따라 전해진 묵직한 충격에 당혹스러워 했다. 성인 두 사람 정도가 몸으로 부딪혀 온 정도의 가벼운 충격이었지만 문제는 힘의 크기보다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지만 그녀는 방금 충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비명이 일으킨 일종의 음파 공격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나의 유동은커녕 공기의 떨림조차 없었기 때문에 완전 무방비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과연 괴수가 이와 같은 공격을 해 온다면 두 번째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복수에 대한 생각이 지워진 쉴라의 마음에 괴수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행동을 하기 전 괴수의 공격이 이어졌다.
다행히 걱정하던 음파 공격은 아니었다.
괴수는 뻥 뚫려 있는 입을 통해 검은 레이저를 뿜어 왔다. 두 번의 공격으로 몸으로 덮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학습한 것 같았다. 검은 레이저가 지나간 곳에는 팔뚝만 한 깊이의 고랑이 생겨났다.
빠르기는 하지만 너무 직선적이라 텔레폰 펀치와 다를 것이 없는 공격에 쉴라는 쉽게 회피했다. 그러자 놈의 몸에서 다시 변태의 검은 손이 뻗어왔다.
동시에 이불처럼 늘어져 있던 놈의 몸 아래로 지네의 다리처럼 수십 개의 다리가 생겨나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쉴라는 괴수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검은 레이저를 피하고 팔을 막아냈다. 점점 괴수가 움직이는 속도가 올라갔지만 쉴라에게 부담이 되는 속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쉴라는 여유가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해 오는 검은 변태 손을 일부 잘라냈다.
앞서 있었던 음파 공격을 알아보기 위해 이전과 비슷한 반응을 내보인 것이다.
쉴라의 검에 그녀를 노리던 못된 손모가지 하나가 떨어지고, 그것은 허공에서 바로 까만 매연 덩어리처럼 무너지며 비명을 토해냈다.
좀 전과 같이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잘라낸 부위가 작은 듯 소리도 작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충격도 작았다.
마치 온몸에 짧은 펀치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대강 어떤 상황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이 공격을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충격은 있으나 확실히 몸에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진 것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쉴라 경. 그건 소울 밤이에요.]
라미아는 쉴라가 뛰어내린 것을 확인한 후 카린의 상처를 살폈다.
공주를 괴롭히는 괴수가 나왔으니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어졌다. 폐기장의 환경이 더욱 나쁘게 변하기 전해 카린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치를 해 두어야 했다.
우선 잠들었는지 기절했는지 알 수 없는 카린을 마법으로 좀 더 깊이 재우고, 전신을 마비시켰다. 이후의 처치를 생각하면 고통으로 인해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정화된 물을 소환해 카린의 몸과 옷을 정화했다. 그러자 썩은 살과 피딱지가 사라지며 피와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고름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라미아는 팔과 다리에서 썩은 부위와 살릴 수 있는 부위를 살펴 잘라내고 상처의 악화와 출혈을 막도록 조치를 끝냈다.
당장 최고의 실력을 가진 병원에 실려 가도 응급실이 뒤집어질 환자의 처치가 마법의 의해서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것이다. 가능하다면 의사들의 필수 과목으로 마법을 끼워 넣고 싶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라미아가 처치를 끝내고 쉴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소리가 들려왔다.
끄끼야아아악!
온갖 감정이 버무려지고 뭉쳐 썩어 버린 것 같은 처절한 비명.
동시에 비명을 따라 출렁이는 영력(力)의 파동을 확인한 라미아는 눈 깜빡할 순간에 루나틱 실드를 만들어 카린을 보호했다.
7클래스에 들어야 사용이 가능한 어포즈 실드보다 물리적인 방어력은 떨어지지만, 사악한 힘이나 영혼에 간섭하는 힘에 대한 방어력은 오히려 더욱 뛰어난 마법이었다.
투명한 달빛을 닮은 루나틱 실드 위로 검회색의 귀기(氣)가 악을 쓰며 비켜 흘렀다.
만약 영혼을 노리는 저 귀기를 그냥 두었다면 현재 영혼에 다대한 손실을 입고 있는 카린의 경우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심한 경우 그녀도 세상을 떠도는 악령이 될 수도 있다. 멀쩡한 영혼이라면 모르지만, 카린처럼 영혼이 상한 경우 갈 곳으로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염없이 떠도는 불쌍한 처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런 상황을 잘 막아낸 라미아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아래쪽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를 납치한 괴수를 처치한다더니, 오히려 공주를 위협하는 상황을 만든 쉴라에게 한마디 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아래쪽에 보이는 상황은 이상했다.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나쁜 흑마법사가 만든 괴상한 형태의 슬라임을 닮은 몬스터와 아름다운 여기사가 싸우는 소설 속 이야기의 한 장면이지만, 높은 격을 가지고 태어난 라미아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저게 도대체 뭐야?]
라미아는 복잡한 눈으로 쉴라에게 달려드는 검은 괴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물처럼 검기만 한 괴수의 몸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백의 조각난 영혼들이 보였다.
카린처럼 손과 발이 사라진 영혼도 있었고, 머리나 몸이 사라진 자도 있었다. 심한 자는 머리만 남은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을 보충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영혼의 팔다리를 뜯어 붙였고, 영혼을 빼앗긴 영혼은 그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영혼의 것을 빼앗아 온다. 그렇게 끊임없이 손실과 보충을 이어 나가지만 누구하나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혼은 없다.
영혼이란 것이 무턱대고 다른 사람의 것을 가지고 온다고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장기 이식처럼 가져다 붙이는 것으로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라미아의 눈에 쉴라가 괴수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히 괴수의 육체가 아니라 괴수를 이루는 어느 영혼의 손이었다. 걸레조각 같은 영혼이지만 그래도 수백의 영혼이 뭉쳐 생겨난 응집력으로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영혼의 집합에서 떨어진 손모가지는, 존재할 힘을 잃은 채 부서지고 흩어지며 영력의 파동이 되어 귀기를 일으켰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질적인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소울 밤과 같았다. 저와 같이 크고 작은 영력의 파동이 겹쳐지면 어지간한 영혼은 흔들려 혼돈에 빠지게 된다.
쉴라가 어지간한 정신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저 영력 파동에 계속 노출되어 좋을 것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라미아가 곧바로 쉴라에게 경고를 날렸다.
[쉴라 경. 그건 소울 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