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79화
616화
“블러디 혼.”
목소리의 주인은 ‘피투성이 붉은 뿔’이라 불리는 마르텔이었다.
마르텔은 이드가 자신을 알아보자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드가 일부러 자신을 모르는 척한다고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수치스러웠던지!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별명이 튀어나오지 않는가!
“블러디 혼이 아니다. 마르텔 님이라고 불러라!”
마르텔은 겁박하듯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아무렴, 날 알아본 건 당연하지만 어디서 블러디 혼이라는 별명을 함부로 불러?”
이드는 마르텔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가 저택을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폭급한 기운을 한 점도 숨기지 않고 뿜어대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냥 두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 같아서 에단을 보냈더니 에단은 어디 두고 혼자 나타나서 시비다.
열심히 수련하라는 말에 ‘헛소리!’라고 소리치는 게 시비가 아니면 뭘까?
이드가 마르텔의 뒤를 살피니 에단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힘줄이 올라올 정도로 붉어진 얼굴에 땀이 번들거렸다. 마르텔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다 곤욕을 치른 듯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막지 못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단이 힘들게 말했다.
“괜찮다. 처음부터 막으라고 보낸 게 아니니까. 그보다는 말도 듣지 않고 강제로 밀고 들어온 사람이 잘못이지.”
들으라는 듯한 이드의 말에 마르텔의 눈매가 떨렸다. 이드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어떤 용무인지 묻는 에단을 힘으로 밀어 버리고 저택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열심히 불한당을 막아선다고 고생했다. 잘했다.”
이드는 에단을 칭찬했다. 사실, 이드는 지금 에단의 모습이 새로워 보였다.
이드가 아는 에단은 눈치가 빠르고 처신이 좋아, 어떤 상황에서도 유들유들하게 잘 대응하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마르텔의 마중을 맡겼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기혈이 꼬일 때까지 마르텔을 막아설 줄이야. 기혈이 꼬이는 고통이 보통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내가 아직 사람을 보는 눈이 모자라기는 모자란 모양이다. 하기사, 얼마나 살았다고 한눈에 사람 마음속을 바닥까지 알아보겠어.”
이드는 자신의 미숙함을 알았다. 동시에 자신의 명령을 열심히 이행한 에단의 모습이 흐뭇하고 대견했다.
이드는 힘들어하는 에단의 어깨를 잡고 그의 기혈을 진정시킨 뒤 비틀린 곳을 풀어냈다. 그리고 흐뭇한 마음으로 진기를 풀어 기혈을 씻어 냈다. 혈도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조금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단 세 호흡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르텔은 순식간에 에단의 얼굴이 편해지자 눈을 번뜩였다.
자신의 몸도 아니고, 타인의 기혈을 풀어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일을 숨 쉬듯 당연하게 했다.
‘대단하군. 내공의 이용이 능수능란하다. 역시 보통이 아닌 재주를 가졌다. 그런데 그래 놓고 내놓은 게 고작 벤딩 훈련이라고? 욕심 많은 놈!’ 이드의 대단함을 알수록 더욱 배알이 꼴리는 마르텔이었다.
“지금 감히 내게 불한당이라고 말한 건가? 내가 누군지 알면서? 지독히도 무례하고 불쾌하군.”
“본인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 건 아셨나 봅니다.”
“뭐?”
“용무를 물으러 간 사람을 이리 상하게 하고 허락도 없이 강제로 타인의 집에 쳐들어왔으니 그게 불한당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거기다 다른 사람의 수업을 두고 헛소리라니요. 그게 양식이 있는 사람이 할 짓입니까?”
다다다 쏘아지는 말에 마르텔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앞에 두고 이렇게 거칠게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같이 늙어 가는 두 친구를 제외하고는 절대 없었다.
무엇보다 틀린 소리가 아니라서 반박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그가 폭급하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옳은 소리를 틀렸다고 하는 삐뚤어진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드의 마지막 말을 들은 마르텔은 그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눈을 번뜩이며 불같이 소리쳤다.
“흥! 별것도 아닌 일로 잘도 나불대는구나. 양식이 없다는 소리는 내가 할 소리다. 헛소리라고? 타인의 수업에 끼어들었다고? 잘못된 수업을 한다면 언제라도 나서서 막아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수련생들이 헛수고를 하는데, 절차와 예의가 대수겠느냐!”
점점 높아지는 마르텔의 고함 소리에 그의 등장으로 놀랐던 사람들의 눈에 긴장감이 돌았다.
마르텔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수업이 만검수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블러디 혼님은 제 만검수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드는 경계심을 가지고 마르텔을 마주 보았다.
만검수련은 전통과 역사가 있는 수련법이었다. 그걸 잘못이라고 걸고 나왔다는 것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꼴깍.
수련생들은 손에 땀을 쥐고 숨을 죽였다.
마르텔이 이드의 수업에 클레임을 걸고, 이드는 마르텔을 블러디 혼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블러디 혼과 마인드 마스터 후예의 대결이라니! 마르텔이 말하는 만검수련의 오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만검수련? 마인드 마스터가 사용하던 이국적인 이름을 붙이기는 했다만, 이건 벤딩 훈련이다. 수십 년 전에 기사도 아닌 마법사가 만들어 낸 쓰레기지.”
벤딩에 원한이 깊은 마르텔의 말이 수련생들 앞에서 사정없이 거칠어졌다.
그러나 이드는 그보다는 벤딩이라는 단어에 귀가 팔랑였다. 그레센 대륙에서도 만검수련을 만들어 낸 사람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 짧은 무공의 역사에 만검수련이 나왔다는 사실이 말이다.
“우와, 진짜야?”
“나 들어봤어. 만검수련을 보고 누가 벤딩 훈련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뭐야, 그럼 이름만 다르지 우리가 하는 게 벤딩이야?”
“그렇게 단정하긴 어렵지 않을까?”
수련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만검수련이 벤딩 훈련과 똑같다는 주장이시군요.”
“그렇다. 벤딩은 검술을 천천히 수련하면서 검식과 검식에 연계된 육체를 이해하고 근육의 힘과 유연성을 기르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부가적으로 내공의 연마와 느림 속에서 정신을 단련하는 거창하기만 한 목표를 둔 훈련이다.”
“대단하군요.”
아마 만검수련이 처음 저와 같지 않았을까?
“흥! 대단? 허풍쟁이 마법사의 헛소리지! 결국 아무 효과도 없었어. 1년을 투자했는데도!”
마르텔은 이드의 말을 격렬하게 비웃으며 수련생들을 보고 소리쳤다.
“잘 들어라. 너희들이 지금 하는 훈련은 시간 낭비다.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다. 그건 나 블러디 혼 마르텔이 장담한다.”
기세등등한 마르텔의 외침에 수련생들이 조용히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가 답할 차례였다.
이드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만검수련이 가짜라고 소리치는 이런 경우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가벼운 모양입니다. 장담을 하셨으니 이번 기회에 이름을 바꾸시죠. 벤딩 훈련,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검수련은 벤딩 훈련과 다릅니다. 외형이 비슷할 뿐이지요.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그 사실은 수련생들도 알고 있지요. 비결로 전했으니까.”
아, 맞아. 진짜 비결이 있었지!
수련생들은 워낙 강렬하게 밀어붙이는 마르텔의 말에 잊고 있던, 이드가 비결로 전수했던 만검수련의 핵심 키워드 두 가지를 떠올렸다. 마르텔은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련생들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쓰레기에 그럴 듯한 말로 잘 치장을 한 모양이군. 거기 너!”
“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수련장 위에 홀로 서 있던 이그렌이 바보처럼 대답했다.
“대답 똑바로 못 하나! 자네, 기사일 테지! 이름이 뭔가!”
“이, 이그렌 시온입니다!”
이그렌은 무슨 일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최대한의 성량을 뿜어 냈다.
“좋다! 이그렌 경, 잘 들어라. 나는 자네 무공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본 대로 판단할 뿐이다. 내가 누구이며 내 실력이 어떠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겠지?”
“옛!”
“내 이름을 걸고 이야기하지. 만검수련으로 자네의 무공은 바뀌지 않는다. 자네의 무공은 추억으로 남겨 두고, 소드 팰러스에서 새로운 검을 얻어라. 내가 도와주겠다!”
“와~!”
기세를 올린 마르텔의 선언에 수련생들이 환호하면서 이그렌의 행운을 축하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그렌은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이의 검을 통해서 일리나를 알아본 이그렌은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드가 확인해 준 일을 무시하라니………….
그렇다고 바로 부정하자니 마르텔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두려웠다.
그때 망설이는 이그렌보다 먼저 사무엘 백작이 나섰다.
“이그렌 경, 축하하네. 천하의 블러디 혼께서 직접 자네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는데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나!”
“자, 무엇하나 어서 감사드리게!”
정신이 없던 이그렌은 사무엘 백작의 재촉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갑자기 찾아든 행운에 펄떡이는 가슴이 바보 같았다. 사무엘 백작 아래 잡혀 있으면서, 그러고도 고향도 버리지 못하는 어중간한 놈이 감당하지 못할 행운을 앞에 두고 무슨 고민이란 말인가!
감당하지 못할 보물은 언젠가 불행을 가져온다.
증조할아버지의 무공으로 절실하게 깨달은 일이었다.
“저는………… 이드 님께 계속해서 배우겠습니다.”
“무…….”
사무엘 백작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이그렌이 거절할 줄이야.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기가 막히긴 마르텔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거절당할 줄이야.
이드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이그렌을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발끈한 마르텔의 눈에 마침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한 수련생 하나가 보였다.
순간 마르텔은 그를 지목했다.
“너!”
“옛!”
순간 화들짝 놀라던 수련생은 이그렌의 경우를 기억하고는 발악하듯 대답했다.
“너도 만검수련이 올바른 수련법이라고 생각하나?”
움찔!
수련생은 조건반사처럼 이드를 곁눈질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대답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블러디 혼 마르텔 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다고 믿습니다.”
사실 그는 친구들과 섞여서 이드의 수련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그저 스폴과 데일리를 보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드로 인해 두 사람이 물러났다는 사실이 불만이었다.
수일간 힘썼던 만검수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르텔의 말처럼 아무런 효과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쪽은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 블러디 혼.
다른 한쪽은 아직 정식 인정도 받지 못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자신은 그 아래서 배우는 수십 명의 수련생들 중 하나.
‘고민하는 놈이 병신이지!’
눈을 뜬 그의 눈에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순간, 자신과 친구들의 길이 갈렸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은 이제 저 수련생들 위로 날아오를 것이다.
“쯧쯧쯧. 자네는 기사이면서 수련생보다 보는 눈이 모자라는군.”
마르텔은 대답한 수련생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혀를 찼다. 그러나 우유부단하지만 고집이 있는 이그렌은 마르텔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사이로 이드의 목소리가 마르텔의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정말이지, 자신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그 오만과 독선이 참기 힘들 정도로 불쾌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