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83화
620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저택 앞의 거리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모여드는 사람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담을 넘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에단과,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록이 저택 앞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수업 신청을 위해서 애원하거나 진상을 부리며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미꾸라지 같은 말솜씨와 신청서라는 종잇조각의 힘을 빌려 큰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신청서와 추천서가 실시간으로 산처럼 쌓였다. 시간당 두 포대씩! 정말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넘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는 중에도 모여드는 사람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난 듯 보이기도 했다. 즉, 두 사람이 돌려보내는 사람보다 모여드는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다. 한정된 공간에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자 밀집도가 올라가고, 그로 인해 싸움이 나기도 했다.
“이 새끼! 어딜 만져!”
“내가 할 말이다. 이 새끼야! 어디다 그 더러운 똥 덩어리를 가져다 대는 거야!”
대부분 싸움의 원인은 불쾌한 접촉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라미아가 특단의 대책이라며 기다란 천에다가 수업을 받고 싶은 사람은 신청서와 추천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붉은색으로 그 이외의 신청은 일절 받지 않는다고 굵은 궁서체로 적어, 저택의 옥상과 저택을 둘러싼 담 위에 걸었다.
“음. 어쩐지 글쓴이의 진지한 마음이 엿보이는군.”
플래카드를 본 사람들은 그 내용이 진짜라는 사실을 느끼고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헐. 신기하네. 내가 앞에서 그렇게 소리쳐도 딴소리하던 사람들이 다 돌아갔네?”
“어쩐지 보고 있으면 묘하게 미간이 모이는 것 같은데, 이거 마법이 걸린 글이냐?”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록이 플래카드의 위력에 놀라며 물었다.
[그냥 궁서체에요.]
궁서체? 마법의 이름인가? 록과 에단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마법이든 아니든 확실한 효과가 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해결해 주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 다시 하나둘 모여든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서는 신청서와 추천서를 냈다. 플래카드에 적어 둔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으헐,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신청서 받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네.”
사람들이 물러나고 저택의 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수련생들이 나타났다.
“허, 딱 맞춰서 오네. 일찍 왔으면 엄청 고생했을 텐데, 어디 숨어 있다가 오는 거냐?”
“네! 아까처럼 많은 사람들 사이로 기어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죠.”
개운한 미소 사이로 번뜩이는 이빨을 보이며 내뱉는 수련생의 당돌한 대답에 에단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수련생들이 이드의 수업을 빼먹을 가능성은 절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까지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드가 마르텔을 쓰러트린 후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져 버렸다. 하룻밤 만에 검왕이라는 별명을 단 이드의 수업의 가치를 누구보다 수련생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날아든 행운을 단단히 움켜잡고 놓을 생각이 없었다.
과연 다른 수련생들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 뒤를 이어 몰려들었다.
“졸지에 내가 경비병이 됐네.”
“후배들을 위해서 그 정도 희생은 해야지? 하하.”
희생은 무슨? 에단은 옆에서 신청서를 받고 있던 록의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던 그의 눈에 빅터가 들어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가 달려오는 것 같았지만 유독 그만 홀로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어서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허! 저놈 다시 왔네?”
옆에서 힐끔거리던 록도 빅터를 봤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감탄했다.
“박수치는 거 보고 얼굴 두꺼운 줄은 알았는데, 오늘 다시 올 줄은 몰랐는걸. 어쩌지? 막을까? 저런 놈은 언제고 딴 짓거리를 할 게 분명한데.”
에단이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마스터가 결정하실 일이지.”
“음………… 그렇기는 한데. 흐, 그런데 마스터가 나서시기 전에 끝날 것 같다?”
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에단이 눈을 번뜩였다. 저택으로 들어가던 수련생들이 멈춰 서서 빅터의 앞을 가로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에단의 말에 록이 돌아보니 이미 빅터와 마주 선 케마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스터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히 알고 있으시겠지. 그래도 애들 일이잖아. 어른들이 나서면 우스워져!”
그 사이 케마란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빅터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도움을 받기로 했지, 이드 님의 수업을 포기한 건 아니야.”
순간 푹하고 록의 웃음이 새 버렸다.
“저건 뭐냐? 술은 마셨지만, 술값 계산은 내 책임이 아니다. 뭐 그런 거냐?”
“쯧. 비유가 왜 그렇게 저렴해?”
두 사람이 시답지 않은 말을 시시덕거리는 사이 철면피 같은 빅터에게 약이 오른 케마란이 목소리를 높이다가 네리베르에게 막혀 뒤로 물러났다. “진정하세요, 케마란 양. 선배님들 앞에서 상스러운 말은 삼가세요.”
똑 부러지는 네리베르의 목소리에 에단과 록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뒤 네리베르를 보고 뒷걸음질 치던 빅터가 곧 네리베르의 말에 가까이 다가오고, 다시 이마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표정이 굳어 있을 뿐 연인이나 연출할 수 있는 모습에 에단이 힘차게 콧김을 뿜었다.
“훙! 훙! 저거, 저거. 지금 뭐하는 수작이야. 나도 아직 시도도 못 했는데 저 자식이!”
“너나 후배 상대로 딴마음을 품는 거야! 거기다 케마란도 아니고 네리베르다. 어지간히 잘 알아서 할까. 얌전히 보고 있어라.”
과연 록의 말대로였다.
마치 연인 같은 포즈로 가만히 네르베르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빅터의 모습에 곧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찡그리던 얼굴이 붉어지고, 이어서 하얗게 질리더니 결국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도망쳐 버렸다.
그 뒤로 네리베르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단은 갑작스러운 빅터의 행동에 이마를 찌푸렸다. 꽤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배짱 좋게 나타났다 싶었는데 너무 쉽게 떠나 버렸다.
“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에단은 무좀보다 더 간질거리는 궁금증을 느꼈다.
그때 줄을 서서 기다리던 한 남자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 손을 들고 말했다.
“이보시오. 지금 도망간 저 수련생, 혹시 이드 님의 수업을 받던 수련생이 아니오? 그렇다면 그 빈자리! 내가 들어가겠소!”
“아니, 나부터!”
“줄 서! 원래 내 차례야!”
남자의 말을 듣고 순간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길게 늘어선 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덮치듯이 에단과 록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아침처럼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플래카드를 가리켜 보였지만 이번에는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때와 달리 확실하게 비어 버린 한 자리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후배 새끼 때문에!”
에단이 버럭 소리치며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박힌 빅터가 에단에게 단단히 찍히는 순간이었다.
이드는 저택 안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과 록이 수업 신청자들에게 시달리는 틈을 타서 저택 안으로 무사히 들어온 네리베르가 가장 먼저 이드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이 살짝 치마 주름을 잡아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이드 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빅터 수련생을 수업에서 쫓아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었다면 되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되돌릴 수는 있고?”
“언제든지요.”
짧고 간결한 대답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드는 피식 웃으며 수련장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수련생들을 보고는 말했다.
“빅터 수련생에 대한 일은 다른 수련생들의 동의도 받은 일이겠지?”
“네. 제가 수련생 모두의 동의를 받았습니다.”
“그럼 됐어. 하지만 이후에는 우선 내 허락부터 받을 것.”
“그 부분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직전제자도 아닌데 인성이 바닥인 놈을 억지로 가르칠 생각은 없거든. 무엇보다 그놈을 위해서 다른 수련생들이 피해를 보는 것도 싫고, 내가 나서지 않는 선에서 처리해 줬으니 오히려 고맙지.”
이드는 자신의 말에 가볍게 미소 짓는 이 아가씨가 혹시 그 부분까지 생각하고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나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웃음으로 봐서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 뭐,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아.’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도망간 빅터에게 뭐라고 한 거야?”
“그건 아가씨의 비밀이랍니다, 이드 님.”
네리베르는 얌전히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고는 수련장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 진짜 궁금한데. 아깝다. 좀 더 귀를 기울일 걸 그랬나?”
이드는 작아지는 네리베르의 말소리를 따라 공력을 높이지 않았던 순간이 아쉬웠다.
[으이그. 그러면 눈치 없다는 소리 들어요.]
“그래도 궁금하잖아. 넌 안 그래?”
[전대충 짐작이 가는데요?]
순간 이드의 귀가 쫑긋해졌다.
[하지만 아가씨의 품위를 위해서 비밀을 지키렵니다. 그리고 이드는 밖의 소란부터 해결해야죠.]
“끙. 한다고, 해.”
라미아는 한 번 무너진 플래카드의 위엄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이드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드는 담 위에 걸린 플래카드 위로 뛰어 올랐다. 바람에 펄럭이는 플래카드 위로 이드가 올라서자 바람에 흔들리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춰 버렸다. 동시에 이드를 중심으로 안개 같은 위엄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묘한 기분과 은근한
두려움이 들게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다 이드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멈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니, 이드의 거대한 존재감이 그들의 눈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어느새 축제 날 시장통 같던 저택 앞이 조용하게 변했다.
이드는 모든 사람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음속에 태산 같이 거대한 석검(石劍)을 세웠다.
아주 투박하지만, 그 무게가 중원천지와 같은 마음의 검이었다.
후화화확ᅳ
순간 이드를 보는 모든 사람의 눈에 이드가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게 변하며 자신들이 그 아래 뭉개질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허어억!”
털썩.
여기저기서 입을 벌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사람이 생겨났다.
오롯이 일대의 공간이 이드의 의지 아래 놓이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드의 의지에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제 이드는 한 푼의 내공 없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죽는 사람들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드의 의지에 의해 영혼이 살해당한 육체가 자연사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주저앉은 사람들의 뒤를 쓸어 보았다. 어두운 골목 안과 가정집과 창고의 창문, 그리고 하염없이 세워진 마차까지.
그런 후 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약속을! 내가 어기는 것도, 남이 어기는 것도 싫어합니다.”
“……”
당연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이드는 한 번 더 좌중을 둘러보고는 훌쩍 저택 안으로 뛰어내렸다. 안에서는 수련생들이 이드와 저택 밖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과연. 사검왕이란 말이· 그냥 나온 헛소리가 아니구나.”
이드가 플래카드 위에서 내려가고 한참 만에 참았던 숨을 내쉰 누군가의 말에, ‘수업을 원하기는 하지만 설마 사검왕까지는………………’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에단과 록이 크게 소리쳤다.
“줄을 서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