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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89화


626화

“시, 십만 골덴!”

터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 살롱의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봤지만, 손에 들린 것은 분명 십만 골덴짜리 수표였다.

화려한 색감과 복잡한 문양, 그리고 마법에 의해서 신비롭게 반짝이며 수표의 가치를 인증하는 황실의 도장까지.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그대로의 수표였다.

‘미친 십만 골덴이라니!’

엄청난 거액에 놀라 이걸로 뭘 얼마나 할 수 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장 앞에 있는 마담과 하인들이 신경 쓰였다. 그들 앞에서 놀라 수표의 액수를 말한 것이 걱정되었다. 혹시 그들이 탈취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하인들은 놀란 듯 했지만 마담은 변화가 없었기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기야, 이런 고급 살롱에서 오고 가는 돈이 얼마나 많겠어.’

비싼 포션으로 차를 만들어 서비스로 내어놓은 살롱의 위엄을 떠올린 빅터는 곧 어안이 벙벙했던 촌스러운 표정을 감추고는 물었다.

“허험, 그러니까 이걸 백작 각하께서 내게 전해 주라 하셨다는 말이오?”

“네, 약속한 금액이라고 하셨어요.”

“약속? 무슨 약속?”

그런 게 있었던가? 이번에 처음, 아니, 두 번째 만났을 뿐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아는 바가 없답니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역시 고급 살롱. 손님들의 비밀을 지키는 것을 넘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빅터는 조금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없지는 않아요.”

“어떤 경우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 이유에 빅터가 급히 물었다. 그러자 마담이 하인들을 내보내고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아 말했다.

“장래가 기대되는 어린 수련생분들을 후원하는 경우랍니다. 그런 경우 수련에 필요한 장비와 장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시죠. 저희 살롱에도 그런 분들이 가끔 들르신답니다.”

마담의 이야기에 빅터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재능은 있지만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수련생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지원한다는 이야기.

‘그럼 백작 각하께서 내 가치를 알아보시고!’

그때 마담의 목소리가 환희에 찬 빅터를 두드렸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거액을 투자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개인적으로 다른 뜻이 있지 않으신가 싶어요.”

“그 개인적인 의견을 내가 들을 수 있겠소?”

‘특별한’이라니. 빅터는 벌써 다음 말이 기대되었다.

“원래 이런 개인적인 생각은 저희 살롱을 자주 이용해 주시는 분께만 해 주는 건데 말이에요.”

“으하하하. 걱정 마시오. 나도 마담과 이 살롱이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오. 그러니 어서, 좀!”

“아이, 급하시긴. 제 생각엔 어제 백작님의 기사가 되기로 두 분이 확답을 주고 받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신의 기사가 될 것이 확실하다면 돈을 넉넉히 투자해서 조금이라도 더 실력과 인맥을 쌓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요.”

‘과연! 과연! 그런 거구나!’

빅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엘 백작의 친근한 행동과 어제 기억이 끊기기 전까지 즐겁게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싶었다.

술을 너무 마셔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백작과 그렇게 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아, 아쉽구나. 술에 취해 주군과 나누었던 대화조차 생각해 내지 못하다니!” 

사무엘 백작을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백작 각하에서 주군으로 바뀌었다.

아쉬워하는 빅터의 옆에서 마담이 축하를 해 주었다.

“내 이럴 것이 아니라 바로 주군께 가봐야겠소.”

“아, 그건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며칠 바쁜 일이 있을 거라고 하셨답니다. 지금 찾아가면 실례가 될 거예요. 그리고 기쁘시겠지만, 이 일이 비밀인 것은 아시죠?”

빅터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은 비밀이었다. 전 수련생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 보겠소.”

“네, 다시 찾아오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빅터는 마담의 배웅을 받으며 살롱을 나섰다. 배웅을 나온 마담이 문을 나서기 직전 클린 마법의 스크롤로 술 냄새로 찌든 옷과 몸이 깨끗이 해 줬다. 지금까지 다니던 주점과는 차원이 다른 서비스에 빅터가 마음을 굳혔다.

“내 앞으로 여기만 찾겠소!”

“호호호.”

다시 숙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진 빅터는 넉넉해진 자금으로 다시 선물을 사들고 어제 미처 만나지 못한 여자들을 찾아다녔다. 돈은 흘러넘쳤지만 선물은 어제와 같았다.


사무엘 백작은 그와 같은 빅터의 행동을 보고받고는 만족해했다.

“끌끌끌. 열심이군. 당연히 그래야지.”

그는 책상 한쪽에 곱게 접힌 서류를 흐뭇한 얼굴로 만지작거렸다. 하인이 손님의 방문을 알리고 젊은 기사를 들여보냈다. 사무엘 백작은 반가운 얼굴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게, 로터스 경. 수련에 고생이 많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젊은 기사 로터스는 나이도 많고 자신보다 지위도 높은 사무엘 백작을 대하면서도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하하하. 내 우연히 의미 있는 물건을 얻었는데, 내가 쓰기에는 적당치 않아서 말이야. 마침 자네가 생각이 나지 않겠나!”

사무엘 백작은 젊은 기사와 덕담을 주고받은 후 준비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서류를 펼쳐 본 로터스는 놀라며 기쁜 얼굴을 했고, 사무엘 백작은 그에게 몇 가지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사무엘 백작은 로터스가 매우 만족한 얼굴로 감사를 표하고 돌아가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슈스타 로터스. 로터스 후작가라면 이 정도 투자가 적당하지. 하하하.”

슈스타 로터스는 로터스 후작가의 둘째 공자였다. 사무엘 백작은 그에게 현재 소드 팰러스에서 가장 핫한 물건을 뇌물로 주었다.

이드를 목표로 찾은 소드 팰러스였지만, 사무엘 백작은 남는 시간도 알뜰히 사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본국에 있을 때보다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소드 팰러스에는 일리나스에서 수련을 위해 찾아온 사람도 많았고, 그들을 통해 그들의 가문과 연줄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껄껄껄. 소드 팰러스가 이렇게 인맥 관리에 좋은 곳인 줄 이제 알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야. 아쉬워.”


이드의 수업은 오전의 수련생과 오후의 평기사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당 시간을 넘어서 수련을 하거나 수업시간보다 일찍 와서 수업을 지켜보는 일을 막지는 않았다.

그저 집중의 문제였다.

이드는 두 수업 중 수련생을 가르치는 오전 수업을 더 좋아했다. 경지에 올라 틀이 잡힌 기사들보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즉각 반응하는 수련생들의 수업이 더 생기 있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이드는 일리나와 함께 수련장에 나왔다.

“조만간 라미아가 조사한 바이트 타블렛에서 성과가 나올 것 같아요.”

라미아는 최근 플래카드를 걸어 만든 것을 제외하면 지하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바이트 타블렛을 조사하면서 묵혀 두고 있던 지식들을 재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잘됐네요. 토벌 작전 전에 결과가 나왔으면 했는데. 같이 연구하는 비올라는 어때요?”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체중이 반으로 준 것 같았어요. 라미아가 연구하다가 중간중간 쫓아내지 않았으면 쓰러졌을 거예요.”

“쯧쯧, 확실히 마법에 미친 인간이기는 하죠. 그렇게 빠져 있으면서 생명의 관에서는 어떻게 살아 있었나 몰라요.”

이드가 잠을 잊은 비올라의 행동에 혀를 찼다.

그때 에단과 함께 저택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록이 젊은 기사를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기사네요. 무슨 일일까요?”

이드가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수업을 받고 있는 전원의 얼굴과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록의 옆에 선 기사는 분명 처음 보는 자였다.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기사를 기다리게 한 후 록이 다가왔다.

“마스터, 일리나 님.”

“무슨 일이야?”

“그게………… 마스터의 수업을 받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록이 난감한 듯 망설이며 말했다.

“수업을 받아? 하지만 내 수업을 받는 기사들 중에 저런 기사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클라인 백작님의 추천인가?”

“백작님이라면 미리 이드 님께 양해를 구했을 겁니다. 이런 일은 저도 처음 겪어보는 어이없는 경우라서……………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록은 이마를 문지르다 손에 든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하얀 서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서류를 펼친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놀란 이드의 표정에 일리나가 어깨너머로 보이는 서류의 첫 줄을 읽었다.

“수업권 이전 계약…서?”

그녀의 목소리에 이드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드는 황당한 표정으로 록과 그 뒤에 서 있는 기사를 한 번 보고, 수업권 이전 계약서라는 바보 같은 제목의 서류를 마저 살폈다.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래 수업을 받기로 했던 자가 자신이 수업받을 수 있는 권리를 계약서를 소지한 상대에게 구만 골덴에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왜 하필 구만 골덴이야? 십만 골덴도 아니고?”

하도 어이가 없으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이거 원래 소드 팰러스에 이런 계약서가 있어? 아! 록도 처음 본다고 했지.”

어안이 벙벙한 이드의 표정에 록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록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

이드는 록의 말을 딱 자르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 사이 수련생들이 수련장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이드는 그 속에서 수련생들을 정렬시키고 있는 스폴과 데일리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마르텔과의 대결 후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스폴이 말했다.

이드는 두 사람에게 조용히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첫눈에 들어오는 계약서의 이름에 스폴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반대로 데일리는 심각하고 무서운 얼굴을 했다.

“어이가 없군요. 어떻게 소드 팰러스에 이런 일이! 도대체 이런 권리를 팔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다고!”

“거기 중간에 보면 수업 권리를 판 사람의 이름이 있어요.”

이드의 말에 두 사람이 급히 계약서를 살폈다.

“빅터 슈피프만? 빅터! 빅터라면 설마 마르텔 님과의 대결이 있던 날의 그 빅터?”

“수업 중인 수련생과 기사들 중에 빅터는 그 녀석뿐입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감히 이런 수작을 할 생각을 하죠!”

“뭐, 그때 당당히 박수를 친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럴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껍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일단 두 분 다 진정해요. 그보다 이런 일이 가능해요? 록은 처음 본다는데.”

이드가 흥분한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아니요.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하지만 계약서 자체는 만들 수 있겠죠. 개인 간의 거래니까요. 그보다 이런 멍청한 권리서를 구매한 저 멍청한 기사는 누구에요?”

“일리나스의 로터스 후작 가문의 둘째 공자인 슈스타 로터스 경입니다.”

시니컬한 스폴의 말에 록이 재빨리 대답했다.

“흐응, 과연 돈은 있는 멍청이네요. 기사 작위도 물기사겠고.”

“스폴 경, 물기사라는 말은 좀.”

“뭐, 어때요. 이런 멍청한 계약서를 구매했다는 것 자체가 멍청하고, 기본도 되지 않은 기사라는 거잖아요.”

“그럼 이 계약서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말이죠?”

이드가 계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의 말에 스폴과 데일리, 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계약서에요. 수련생을 고를 권리는 오롯이 이드 님께 있는 걸요. 이런 건 가치보다는 소드 팰러스의 수치라고 봐야 해요.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어요.”

“그래도 구만 골덴짜리 계약서입니다. 로터스 경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마스터의 가르침이 간절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제대로 된 기사라면 이런 걸 사서 들고 오지는 않겠죠!”

이드는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두 사람을 말리고 말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알았습니다. 일단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슈스타 로터스 경!”

“넵! 마스터!”

이드는 힘찬 마스터 소리에 눈꼬리가 떨리는 걸 참고 말했다.

“………마스터는 됐습니다. 이리 오세요.”

“넵! 마스터!”

“과연 물기사. 마스터의 말도 안 듣네요.”

거참, 마스터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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