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02화
639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라도 생겼나? 이드는 환청을 들은 귀를 팠다. 데이트라니?
은색 기사단장 쉴라가 이름난 기사도 아니고 대머리에, 음침하고, 성격까지 삐뚠 비올라와 데이트라니!
‘심지어 쉴라가 데이트 신청을 했어!’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비올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어…… 노…… 농담! 그래, 지금 악질적인 농담으로 날 놀린 거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발언에 굳어 있던 비올라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저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기사가 데이트 신청이라니. 천재라고 자신하는 그의 두뇌는 이 상황을 거짓이라고 단정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충만했지만, 반대로 냉정히 자신의 외모를 평가한 결과였다. 바로 어젯밤만 해도 여기사들이 싫어라 하며 자신의 곁에 가까이 서지 않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은근히 여성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 비올라의 예측이 이번에는 틀렸다.
“전혀. 나는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은 빚을 정산하는 중이지 않은가.”
편안히 웃는 얼굴로 정색하고 대답하자 비올라는 처음 겪는 그것이 무서웠다.
“그, 그럼 필요 없어. 그 빚은 나중에 해결하자고.”
당황하긴 했지만 그나마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하지 않은 것은 그가 계산에 밝은 마법사인 덕분이다.
“아니다. 나는 이번에 해결해야겠다. 빚을 계속 묵혀 두고 미뤄 두면, 쌓이기만 할 뿐이 아닌가. 그대에게 앞으로 더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청산해야겠다. 그런 뜻에서 내일은 데이트다. 기대하도록.”
‘뭘?! 거기다 그건 보통 남자가 하는 말이라고!’
너무도 당당한 쉴라에게 압도당한 비올라가 허둥대는 사이 말을 마친 쉴라가 휑하니 돌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곧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에단이 분노한 얼굴로 비올라의 멱살을 잡았다.
“이 개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쉴라 님이 데이트 신청을 하신 거야! 세뇌냐? 아니면 약? 맞다! 네놈, 이상한 눈알 악마를 통해서 쉴라 님을 홀린 것이구나! 정의의 이름으로 내가 흑마법사를 퇴치하겠다!”
“이 멍청한 놈은 또 무슨 헛소리야! 놔!”
“너라면 놓겠냐! 죽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너를 죽여 내일 데이트를 없던 일로 만들겠다!”
“여기서 세계 평화가 왜 나와?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언어 능력이 달리냐!”
질투에 눈이 돌아간 에단의 시비에 두 남자가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비올라도 에단이 소중한 실험체라는 것을 잊은 듯 열심히 주먹을 휘둘렀다. 그나마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검과 마법은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그런데 쉴라 경은 왜 하필 지금 데이트를 하자는 걸까요?]
한심하다는 눈으로 두 남자의 격투기를 관람하던 라미아가 말했다.
“글쎄.”
사실 이드도 이상하기는 했다. 특히 어젯밤 은색 기사단에서 희생자가 나온 직후에 데이트라니.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쉴라가 그만큼 생각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노리고 데이트 이야기를 꺼냈다고 봐야 하나?”
그러고 보면 빚을 갚으라는 비올라의 말에 데이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쉴라였다. 이드는 껄껄 웃으며 에단과 비올라의 싸움을 구경하는 클라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이드 님의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노리고 이야기를 유도한 것이겠지요.”
“어째서요?”
“은색 기사단의 어두운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어젯밤 사건도 그렇지만, 검후님의 실종 아니, 납치 후에 은색 기사단의 분위기는 계속 좋지 않았습니다. 자책감도 컸고, 은색 기사단의 무능을 질책하는 소리도 있었으니까요. 검후님을 찾아 대륙을 떠도는 중에 불행한 사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기사도 적지 않은데 거기다 이번에 대량의 사망자가 나왔지요. 다행히 검후님을 납치한 적에 대한 단서를 얻기는 했지만 은색 기사단의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큰 적을 앞에 두고서 마음이 흔들려서야 성공 이전에 부상자만 늘어날 테니, 쉴라 경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데이트입니까?”
“예. 모르긴 몰라도 효과는 확실할 겁니다.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이다 보니, 다른 기사단들보다 연애 소식에 대한 반응이 격렬하거든요. 특히나 그 대상이 철저히 연애를 피해 온 쉴라 경이라면 효과는 확실하겠지요.”
“저 에단처럼 말이지요.”
정말 비올라를 반죽음으로 만들 생각인지 마운트 포지션으로 비올라를 깔아뭉개고 있던 에단은, 먼저 마법을 사용한 비올라에 의해서 꽁꽁 묶인 채 두드려 맞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다니 이런………… 컥…… 비겁한…… 꾸엑………… 놈!”
“그게 마법사에게 주먹 들고 달려든 놈이 할 말이냐! 마침 잘됐다. 다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이 자리에서 네놈의 배를 열어 해부해 주마!” 도저히 성인 같지 않은 철없는 말싸움에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효과가 좋지요.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도 쉴라 경의 뜻을 알 것이니 일부러라도 분위기에 어울려 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 소드 팰러스가 뒤집어지겠지요. 무려 은색 기사단장의 데이트가 아닙니까.”
[백작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
“하하하. 나는 오로지 검후님만 바라본단다.”
[……………대단하세요.]
라미아가 살짝 질렸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이드가 그들을 바라보다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우리도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일리나와 같이.”
[좋아요! 당장 일리나에게 알려야겠어요!]
라미아는 좋아하며 이드의 볼에 쪽쪽 입을 맞추더니 푸드득 수련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뒤에 이드의 만류로 배가 갈라지기 직전에 살아난 에단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허허헝. 쉴라 님이…………… 쉴라 님이…………… 어허헉…….”
“…………누가 보면 쉴라 경이 죽은 줄 알겠다.”
이드로서는 참 한심해 보이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쉴라의 데이트 발언에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 역시 에단만큼이나 격렬하게 반응했다.
“단장님이・・・・・・ 데이트?”
“그것도 그 음침한 마법사와?”
“불가!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해요!”
과연 클라인이 짐작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다만 그 반응이 조금 다른 쪽으로 격렬했다. 다름 아니라 쉴라의 데이트 상대가 비올라라는 것 때문이었다.
남자 가뭄인 단장에게 남자가 생긴 것은 기쁜 일이지만, 왜 하필 상대가 그런 이상한 작자란 말인가!
기사들은 너도나도 불가와 반대를 외쳤다. 상대가 흉악하고 사악한 마법사라며, 쉴라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데이트를 거부했던 비올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매도가 아닐 수 없었다.
“단장님이라면 최소 제국의 백작 정도는 되어야 균형이 맞아요! 당장 제가 단장님께 어울릴 남자 리스트를 뽑아 볼게요. 그러니 그 ‘흑마법사’와 데이트한다는 끔찍한 말은 그만하세요.”
음침한 마법사에서 위험한 마법사로, 다시 사악한 마법사에서 최종적으로 흑마법사까지! 짧은 순간 은색 기사단 안에서 비올라의 평가가 아주 광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쉴라는 팔딱팔딱 뛰는 기사들의 모습에 오히려 재미있어하며 거절했다. 그녀의 데이트는 빚을 갚기 위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던 기사들은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특히나 카린의 경우에는 쉴라가 말하는 빚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비장한 얼굴로 쉴라를 대신해서 희생을 자청했다.
“단장님께서 절 구하기 위해 그런 악마와 거래를 하셨다니, 이것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이후의 일은 제가 목숨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비올라가 있었다면 기가 막혀 기절할 말이었다. 자신이 쉴라를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누구를 흑마법사로 모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더했다.
“차라리 그 흑마법사를 처리하는 것은 어떨까요?”
순간 여러 기사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지만, 이어지는 말에 날카롭던 눈매가 동그래지고 말았다.
“비올라는 이드 님 저택에 머무르고 있지. 거기다 그분 밑에서 일하고 있어.”
“그럼 곤란한데요.”
누군가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제로 본 이드 님은 생각보다 더 강하셨어.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
기사들도 이드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최근 몇 가지 굵직한 사건과 엮여서 이드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으니까.
하지만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에게는 쉴라와 스폴이 친분을 쌓기 위해 공을 들이는 상대로 유명했다. 검후를 모시는 은색 기사단은 지금까지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호감을 얻기 위해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색이 은색 기사단의 수석 기사와 상급 기사가 타인의 수업을 보조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부터가 특혜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평소 이드의 존재에 대해서 여러모로 궁금해했다. 그리고 어젯밤 기사들은 그렇게 궁금해하던 이드라는 존재의 숨겨진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이었다. 본인의 힘도 그렇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마법을 사용하는 강철의 새까지!
그에게는 은색 기사단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개인이 가지기엔 정말 대단한 힘이었지만, 기사들은 내심 환호했다.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그녀들은 검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특히나 검후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아군의 등장은 더없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 내일 데이트를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흑마법사를 막는다!”
“오!”
“……..”
단 한 가지 주제로 훌륭하게 반전된 분위기에 쉴라는 만족했다.
‘그래, 동료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슬픔에 침몰되어서도 안 되지.’
쉴라는 자신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내일 있을 데이트 계획을 세우는 기사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화원의 지하에 마련된 안치실을 찾았다.
은색 기사단에서는 이번에 전사한 기사들을 마법으로 만들어진 안치실에 봉안했다. 검후를 찾기 위해서 싸우다 전사한 그녀들을 검후가 돌아온 후 매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행동에는 검후가 그녀들의 노력과 용맹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쉴라는 진한 나무 냄새가 풍기는 관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시신을 담았지만 안은 쾌적했다. 후에 검후가 직접 그들을 보고자 할 수도 있어 썩지 않도록 마법과 신관의 축복을 담았고, 덕분에 좋지 않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검후님을 찾아 우리의 임무가 다할 때까지 너희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부드러운 손길로 마지막 관을 쓰다듬은 쉴라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때까지 화원에서는 스폴을 중심으로 한 데이트 봉인 계획이 한창이었다.
“좋아. 이 계획에 따라 우리는 철저하게 단장님의 데이트를 저지하고 쳐부순다. 우리는 승리한다!”
“승리한다!”
스폴의 선창을 따라 기사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외쳤다.
어두웠던 기사단의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 데이트라는 카드를 꺼냈던 쉴라는 막상 자신의 데이트를 쳐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불타오르는 기사단의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분명 저들이 자신을 위해서 분노하고 있고, 또 분명한 목적이 있는 데이트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인생의 첫 데이트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그걸 망치겠다고? 그것도 철저하게?
그저 재미있는 수다거리로 삼아 가볍게 마음을 푸는 것으로 만족하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나 열심히 ‘첫’ 데이트를 망치려고 하면 데이트의 상대가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없던 승부욕도 생겨서 불타오르잖니!’
쉴라는 불쑥 치솟는 반발심에 내일 있을 데이트를 기대했다. 쉴라와 은색 기사단의 미묘한 간극의 소용돌이에 놓인 파란의 데이트가 아닐 수 없었다.
“으으…… 데이트라니! 도대체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거기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거냐! 젠장!”
괜히 그 사이에 놓인 비올라만 불쌍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