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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07화


644화

이드가 가지고 있는 수영에 대한 인식은 어릴 때 가까운 개울이나 호수에서 하는 물놀이의 연장선이었다. 이드가 태어난 중원에서도 수영의 개념은 희박했다. 수영이라기보다는 물놀이였고, 생계를 위한 고기잡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였다. 온천이나 지구의 수영처럼 여가나 취미, 건강을 위한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는 그레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 큰 부를 쌓은 부자나 권력자의 경우 수영장인지 목욕탕인지 분간하기 힘든 물건을 만들어 즐기기도 하지만, 그건 수영장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런 이드의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지구에 있는 수영장을 체험하고 난 이후였다.

처음엔 이드도 일부러 물을 가두고 수영장을 만들어 헤엄을 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수영은 가까운 호수와 강을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구의 상황을 이해하고 수영장을 몇 번 이용한 후에는 그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발에 흙이 묻지 않고,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으니까.

특히 수영장 주변에 비치된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은 도저히 포기하기 힘들 정도였다. 말만 하면 가져다주는 음료와 간식의 소중함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이드는 다른 사람이 라미아의 수영복 차림을 보는 것이 싫어서 넘치는 자금으로 수영장을 통째로 대여했다. 당연히 수영장 입장에서는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이드와 라미아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드는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서비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자랑하는 고급 호텔의 수준 높은 수영장을 이용할 기회가 많았던 이드는 수영장의 시설적인 부분을 보는 눈도 자연 높아져 있었다.

그런 이드가 일리나에게 만들어 주는 수영장이니만큼 단순히 땅을 파고 물을 채우는 것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이드는 우선 나무를 옮겨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는 벽으로 삼았다.

라미아의 수영복 차림도, 일리나의 수영복 차림도 다른 사람이 보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지구의 수영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다.

처음 접하는 수영복에 빠져 신종 변태나 생기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후 미리 봐 두었던 만큼 땅을 파고 고도의 삼매진화와 정령들의 도움을 통해 순간적으로 흙을 녹이고, 도자기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굳혔다. 그리고 그 주변 땅과 수영장의 경계를 무릎 높이의 계단으로 층층이 나누고, 기둥 형태의 장식물을 세웠다.

또 햇살이 잘 드는 곳에는 흙으로 구운 선베드도 설치했다.

실로 작지 않은 공사가 순식간에 끝났다. 그레센 대륙 최초의 수영장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큰 의미는 없지만 말이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일리나는 수영장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무공의 목적은 전투가 아니고, 건축과 같은 실생활용이 아니었을까?”

처음 나무를 옮기고 난 이후, 거침없이 진행되는 공사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일리나였다. 아무리 배수 시설과 여타 편의 시설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이드의 수영장 제작 속도는 너무 빨랐다. 이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리나에게 무공의 목적에 대한 고찰을 남겼다.

섬세하게 검기를 조종하여 매끄러운 표면에 미끄럼 방지용 문양을 넣는 것을 끝으로 수영장 제작을 완료한 이드가 일리나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일리나, 이상하지는 않죠? 시설 면에서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마법과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훌륭하게 제 역할은 해 줄 거예요.” 

“신기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이드는 처음 수영장을 본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일리나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잘 모를 때는 직접 이용해 보면 알 수 있죠.”

이드는 바로 물의 정령을 불러 수영장에 물을 채우고,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온도로 물을 데웠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수영복!”

이드는 아공간에서 다양한 색깔과 종류의 수영복을 여러 벌 꺼내 일리나의 앞에 늘어놓았다. 모두 일리나의 몸에 맞는 것들로,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색깔을 순식간에 분류한 데다 기능과 디자인적으로 우수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일리나에게는 처음 접하는 파격적인 옷이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이 이드뿐이라면 입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드는 어떤 수영복이 제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일리나의 질문에 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을 닮은 파란색에 등이 깊게 파인 원피스 수영복을 들어 보였다.

“이거요.”

“그럼 그걸로 입을게요.”

일리나는 이드에게서 받아든 수영복을 들고 원통형으로 만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사이 이드도 즉석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영복을 입고 나타난 일리나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역시 생각대로 최고로 잘 어울려요.”

“라미아보다 더요?”

‘뭐지? 이 위험한 향기가 감도는 질문은?’

갑자기 튀어나온 라미아의 이름이 이드는 멈칫했다. 혹시 그 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라미아에게서 많이 당해 본 패턴이었다.

하지만 곧 일리나의 질문이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후 자신의 말이 라미아에게 흘러들어 갈 것을 대비해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그럼요. 그 수영복은 일리나만을 위한 것인걸요.”

“고마워요.”

이드는 만족스러운 답변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수영장에 일리나를 먼저 들어가게 했다.

“일리나를 위해 만든 수영장이니까 주인공이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게 당연해요.”

“물이 차갑지 않아서 기분 좋아요.”

짧은 감상을 남긴 일리나는 이드가 보는 앞에서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은 빠르게 두 번째는 느긋하게. 빠르게 돌 때는 일반적인 수영법과 다르지 않았지만, 물 위를 떠가는 낙엽 같은 느긋한 수영에는 물이 튀지 않았다.

오히려 물도 튀지 않는데, 잘도 움직인다 싶을 정도였다. 신기해서 물었더니 엘프들의 수영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물을 타고 한나절 정도 하류로 흘러갔다가 돌아오고는 했어요.”

‘그건 수영이 아니지 않나?’

고개가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종족 간의 차이라고 생각한 이드는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주스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수영장에서 수영해 보니 어때요?”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고마워요, 이드.”

쪽!

일리나의 촉촉한 입술이 닿는 감촉에 그녀를 위해 투자한 두 시간의 수고가 순식간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하하, 마음에 든다니 나도 좋네요. 그럼 우리 같이 놀아 볼까요?”

말과 함께 수영장에 풍덩 뛰어든 이드는 일리나에게 물을 뿌렸다.

“꺄악!”

이드의 장난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물장난과 수영을 번갈아 즐겼다. 라미아가 없어 아쉽고 미안했지만, 지하실에서 바쁜 그녀를 일부러 끌어낼 수는 없었다.

‘같이 있어도 문제지. 데이트는 몰라도 아직 수영을 즐길 수는 없으니까. 라미아는 나중에 따로 챙겨 줘야겠다.’

그러는 사이 수련생들의 수업이 끝났다. 과연 놀고 있을 때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그런데 수업을 마친 수련생들이 돌아가지 않고, 이드가 만들어 놓은 나무의 벽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꿈을 꾸며 졸았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한 수련생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련생들을 끌고 온 것이다.

“자, 봐! 나무가 움직인 게 맞지? 이래도 꿈이라는 소리가 나오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했던 수련생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지만,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수련생들은 없었다. 그들은 이드의 저택에 생겨난 미스터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무를 움직이다니 마법인가? 누가 이런 거지?”

“선생님 저택인데 당연히 선생님이 이렇게 하셨겠지!”

“하지만 그분은 무인이시잖아. 나무를 자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뿌리째 옮겨?”

과연 마법이 살아 숨 쉬는 그레센 대륙의 수련생들인 만큼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 앞에서 귀신을 찾지는 않았다. 대신 극한의 호기심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나무들 뒤에는 뭐가 있는 거지?”

“들어가 볼까?”

허락보다 행동 먼저! 과연 추진력이 뛰어난 무공 수련생들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수영장에서 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드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린 곳에는 물 위에 둥둥 뜬 일리나가 그녀의 가슴에 내려앉은 새와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저 모습은 내 독점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드는 수영복 위에 그대로 하의와 상의를 걸쳐 입고 막 진입을 시도하는 수련생들 앞에 나타났다.

“서, 선생님? 이 안에 계셨어요?”

“내 저택 안에 내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보다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게 문제가 아닐까?”

은근히 모여 있는 수련생들을 질책하는 발언에 수련생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가장 먼저 나무 뒤로 가 보자고 발언했던 수련생이었다.

‘이 자식들이!’

모두의 시선을 강탈한 수련생은 식은땀을 흘리며 친구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말만 먼저 꺼냈지 같이 움직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냥 침묵할 수 없는 분위기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수업 중에 나무가 움직이는 걸 보고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 와 버렸습니다.”

“그런 장면을 봤으면 궁금했겠지. 하지만 이곳은 너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호기심이 생겼다면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지.”

조용하지만 너무나 올바른 말에 수련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럼 이 나무 뒤에는 뭐가 있나요?”

사과는 했지만 호기심이 사라진 것은 아닌 듯, 한 수련생이 물었다.

“오전 명상에 수련생들이 몸이 굳어서 고생했었지? 그건 유연성이 부족해서다. 이 안에 근육을 부드럽게 하고, 유연성을 기를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련생들은 명상이란 단어에 질색하고, 수영장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호기심을 보였다.

“수영장이라면 물을 모아서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 눈치가 빠른데? 정답이다.”

“지금 구경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안 돼. 내가 시험 중이니까. 물에서 하는 훈련이라 최대한 옷을 가볍게 입어야 하니 남녀 따로 분리해서 수업할 생각이거든.”

이드의 발언에 남녀 수련생들에게서 동시에 작은 탄성이 터졌다. 물론 그 속에 담긴 뜻은 전혀 달랐다.

“같이 해도 좋은데…………”

“그럼 이 안에서 이드 님이 맨몸으로…………… 으히히.”

대놓고 아쉬워하는 남학생들과 엉뚱한 상상에 군침을 흘리는 소수의 여학생들이 있었지만, 이드는 그 엉큼한 속을 모른 척하고 수련생들을 돌려보냈다.

“기대하라고, 당장 내일부터라도 물속에서 얼마나 땀이 흐르는지 알려 줄 테니까.”

“네에………….”

되도록 알고 싶지 않은 일을 배우게 된 수련생들이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영장에서 정확히 어떤 수업이 진행될지에 대한 추측으로 떠들어 댔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들, 행여나 훔쳐볼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이야말로!”

수업과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대한 열의였다.

이드는 그 고함 소리에서 수업의 열기를 느꼈다. 정확히는 수업이 아닌 수업 외적인 부분에 관련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느낌은 정확했다. 이후 수영장 수업은 여러 가지 의미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남녀 수련생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물론, 그 목적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탓에 이드는 정원의 수영장을 포기하고 지하에 인공 온천을 만들어야 했다.

남녀 수련생들이 경쟁하듯 수영장 사용 신청을 해 온 탓이었다. 수영장을 사용할 때마다 남녀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면서 왜 쉬지도 않고 수영장을 찾는 것인지 실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수영장이 개장한 바로 그날, 황궁의 레오날도 후작의 명령을 받은 벤 벨트 자작이 소드 팰러스의 정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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