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08화
645화
한 대의 마차가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관문을 지나 소드 팰러스 안으로 들어섰다.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큰 마차에는 아나크렌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한참을 창문 너머로 소드 팰러스를 살피다 말했다.
“허허.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군. 다행이야, 다행”
마차를 탄 중년인, 벤 자작은 잠시 옛 기억 속 소드 팰러스의 모습을 눈앞에 겹쳐 보며 추억을 되새겼다. 제국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젊은 시절을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하며 보냈었다.
그러나 반가운 한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그 속에 담긴 사람의 마음이 변해서 제국과 미묘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변한 것은 사람뿐인가.”
벤 자작은 아쉬운 듯 소드 팰러스를 바라보다 창을 닫았다.
“아쉽군. 검후님이 계셨다면 이렇게 대립하지는 않았을 텐데. 쯧쯧.”
벤 자작은 고고하고 위엄 가득하던 검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검후의 존재가 문제의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소드 팰러스의 힘과 영향력이 너무 강해져 버렸고, 그와 반대로 황제와 제국의 소드 팰러스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만 갔다. 통제되지 않는 힘의 위험함을 잘 알고 있는 황제와 제국이 소드 팰러스를 견제하는 건 당연했다. 그가 소드 팰러스를 찾아온 이유도 소드 팰러스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를 얻기 위함이었다.
“이드라…………….”
벤 자작은 오늘 자신이 만나야 할 인물을 떠올렸다.
그때, 똑똑똑 하고 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마부 옆에 앉아 있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작님, 보고서입니다.”
“이리 주게.”
벤 자작의 말에 마차의 전면이 작게 열리더니 팔이 들어와 곱게 접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두 장의 작은 종이 안에는 수 시간 전까지 확인된 이드에 대한 자질구레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크게 중요한 내용은 없었지만 벤 자작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꼼꼼히 읽어 본 후 탁자에 올려 둔 보고서 가장 끝에 종이를 끼워 넣었다. 작은 책 한 권은 될 만한 보고서는 모두 이드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장 처음 확인된 이드의 행적에서부터 사소한 행동으로 분석된 성격과 취향까지 전부.
이드가 봤다면 뭘 쓸데없이 이런 것까지 조사했느냐며 혀를 내두를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벤 자작은 이미 수차례 읽어 대부분의 내용을 머리에 넣어 둔 보고서를 다시 펼쳐 보며 이제 곧 자신이 만나게 될 인물을 머릿속에 그려 나갔다. 이드가 벤 자작의 방문을 전해 들은 것은 일리나와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왜 하필 이때 찾아오는 거야?”
기분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이드의 입술이 삐죽였다. 클라인을 통해서 방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찾아올 줄은 몰랐다. 반사적으로 일리나를 돌아보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다릴 테니까 빨리 만나고 오세요.”
선베드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드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일리나는 오히려 그 모습이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충 머리를 닦아 낸 후 벤 자작이 기다리는 접객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 저택의 주인인 이드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런 방문에도 이렇게 반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벤 벨튼 자작입니다.”
선 채로 창밖을 구경하고 있던 벤 자작이 친한 친구를 대하듯 반갑게 이드의 손을 잡았다.
이드는 나이도 어리고 작위도 없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높이는 벤 자작의 모습에서 그가 노련한 정치인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희 집을 찾은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드는 내심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벤 자작과 짧게 덕담을 주고받은 후 그와 마주 앉았다.
“크흠, 그럼 우선 제가 이드 님을 찾아온 이유부터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수도의 레오날도 후작님의 말씀을 이드 님께 대신 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벤 자작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보고서를 통해 이드가 복잡한 수식어가 붙은 정치적인 언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게도 수도의 소식을 전해 주시는 분이 있으시지요. 황제 폐하께서 저에 대해 궁금해하신다면서요?”
그러나 이어지는 이드의 말은 벤 자작의 생각보다 더 직설적이었다. 보통은 이런 사실을 알아도 모른 척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벤 자작은 이드가 보고서로 확인한 것보다 더 직설적이라고 보고 이어질 대화 내용을 다시 구상했다.
하지만 그건 벤 자작의 착각이었다.
이드는 정치적인 언변을 싫어할 뿐, 대화하는 데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좋은 시간을 방해한 벤 자작에 대한 심술과 최대한 빨리 일리나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었다.
“어허허허, 그렇습니다. 귀가 밝으시군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제는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뜻을 비치시는 것을 보고 레오날도 후작께서 절 보내신 거니까요.”
벤 자작은 이 일이 절대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후작님께서는 또한 이드 님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소드 팰러스의 허술한 일 처리로 인해서 이드 님에 대한 검증도 아직 마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황궁과 특별한 관계를 쌓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홀대해서 직접 저택을 구매하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는 마인드 마스터께서 제국에 베푼 은혜를 생각할 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이드 님을 검증할 능력이 없다면 차리리 일찌감치 이드 님을 황궁으로 모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마인드 마스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황궁이라면 좀 더 빠르고 확실하게 검증을 마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말 잘하네.’
이드는 말없이 벤 자작의 열변을 들었다. 정치인 같다는 첫인상처럼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특히 상대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분노하는 연기가 인상 깊었다. 만약 지구에서 성우나 정치를 했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드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벤 자작이 말하는 소드 팰러스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가 이드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을 읽은 벤 자작은 내심 당황했다. 힘 있는 자에게 핍박당하는 약자들은 그 입장을 공감해 준 것만으로 충분히 호감을 사고,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는데, 이드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벤자작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당연했다.
소드 팰러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드는 약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 자작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해서 후작님께서는 직접 이드 님과 황제 폐하의 만남을 주선하시고, 황궁의 뜻으로 이드님에 대한 검증을 마치고자 하십니다.”
“그렇군요. 이미 들었던 이야기대로군요.”
“…..그렇습니까.”
벤 자작은 고마움이 느껴지기는커녕 무미건조한 이드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려 제국의 후작이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황제와 만나게 해 주겠다는데 저런 시큰둥함이라니!
‘오만인가?’
눈앞의 사내는 현재 삼검왕의 일인을 꺾은 젊디젊은 강자였다. 이십 대 초반에 삼검왕을 꺾을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면 충분히 오만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우선 벤 자신만 해도 한때 검을 수련하던 기사로서 젊은 나이에 삼검왕의 경지에 오른 이드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존경의 마음이 동시에 솟았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 아니고서야 고작 그따위 것을 가지고 황제 폐하와 후작님의 이름 앞에 저렇게 뻣뻣할 수는 없지.’
아무리 강해 봤자 개인의 무력에는 한계가 있다. 개인이 제국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제국의 힘은 쉬지 않지만, 개인은 쉬지 않고, 자지 않고, 먹지 않으면 계속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벤 자작은 이드가 당당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이드의 실력 너머에서 찾고 있었다.
‘역시 진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라면 개인의 무력을 넘을 수 있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마인드 마스터와 황궁의 관계는 특별했으니까.
‘그러나 그 특별함도 오랜 시간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지. 과연 그대가 후작님과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처럼 뻣뻣하게 할 수 있을까?’
벤 자작은 이드가 두 사람과 만나는 모습이 한시 빨리 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드의 실력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했다.
‘보고서를 읽기는 했지만,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정말 그와 같이 뛰어난 실력자라면 친하게 지내 둘 필요가 있음이요, 그와 같이 젊은 나이에 그와 같은 힘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벤 자작의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이드의 목소리가 있었다.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허허허, 이후에 일을 생각하다 보니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소드 팰러스에 왔으니 삼검왕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드는 의외라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당연히 삼검왕을 먼저 만나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먼저 만나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드 님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들으면 이드가 삼검왕보다 중요하다는 말이지만, 이드는 그보다 레오날도 후작의 명령이 삼검왕의 존재보다 크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절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후작님의 말씀처럼 당장에라도 황궁으로 가고 싶어지는군요.”
“하면…….”
“하지만 저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그들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수일 뒤에 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황궁으로 가실 마음을 굳히신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이야기를 마친 벤 자작은 후작의 깊은 뜻을 잘 살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이드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벤 자작이 날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삼검왕의 얼굴이 멋지게 구겨질 텐데. 보지 못해 아쉽네.”
대충 삐뚤빼뚤 마귀 같은 얼굴의 삼검왕을 그려 보던 이드는 이후에 황궁에 가면서 벤 자작을 통해 물어봐야겠다고 일리나가 기다리고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당장은 노인들의 흉악한 얼굴보다는 아름다운 일리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먼저였다.
꽝!
책상을 내려친 페시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노와 수치심에 구깃구깃 구겨진 그의 얼굴은 이드가 상상하던 얼굴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는 흉한 심기를 전혀 숨기지 않고서 앞에 서 있는 벤 자작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