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3화
660화
“일리나 님!”
잘릴 뻔한 자신의 팔을 구해 준 신발의 주인을 확인한 네리베르가 환한 얼굴로 외쳤다. 딱 어린애가 친구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을 때 나타난 부모를 보는 얼굴이다.
“어………… 라미아….. 님?”
그에 반해 일리나보다 라미아가 먼저 눈에 들어온 케마란은 하얗게 질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어렴풋하게 자신이 라미아의 일을 망치고 큰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호~ 어쩐 일로 라미아 님이야?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더니.]
사실이었다. 이드가 본인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밝힌 후에도 라미아에게 존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드가 직접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끼는지를 이야기하며 그녀를 존중하라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라미아에게 가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뛰어난 아티팩트 정도였다. 즉, 기본적으로 물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특이한 사연이 있지 않는 한 물건에 존대를 하는 사람은 없다. 이드의 말에 조심은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뒤에라도 라미아와 친분이 쌓이고 친해져 그녀를 더 이상 아티팩트가 아니라 인격체로 보게 되더라도, 이드나 일리나를 대하듯 우러러보는 것이 아닌 친구의 포지션에 놓고 만다.
이드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은 라미아의 인간화에 대해서 밝히려고 했지만, 라미아가 나서서 막았다. 고작 존댓말을 듣자고 사사로운 개인사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존댓말은 그저 윗사람에게 높여 말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의미하지만, 이드는 순순히 라미아의 말을 따라 주었다.
이후에 말한 것이지만 라미아는 개인적으로 존경받기보다 친구처럼 친근하고, 격의 없는 관계가 더 좋다고 밝혔다.
[보자, 요렇게 안 하던 짓을 하며 아부를 떠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잘 보여야 할 일이 있을 경운데.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보지?]
“아…… 하…… 하…… 하…….”
설마 방 안의 상황이 분명한데도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케마란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이야기하는 라미아가 사실은 상당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저것도 지금 비꼬고 있는 거지?’
꼴깍 침을 삼킨 케마란은 최대한 미안하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링스피어에 베인 상처를 앞으로 내세웠다. 어떻게든 라미아의 불호령을 피해 보려는 수작이었다.
라미아로서는 같잖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이번 일은 적당한 아부로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려 바이트 타블렛의 코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출입을 막아 놓는 건데.’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 봤자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라미아가 자신도 모르게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보던 케마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 미안해! 잘못했어. 어떻게든 변상할게!”
그 말에 한숨을 쉬던 라미아가 딸꾹질이 날 정도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푸흑. 너 말 함부로 한다. 여기 있던 물건들의 가치가 얼마나 하는지 알고 변상한다고 말하는 거니? 그러다 인생은 물론 영혼까지 저당 잡힌다? 크큭.]
“히익…… 그렇게 비싸?”
[실가치도 문제지만 중요도가 더 크지. 에그, 너희가 무슨 잘못이겠니. 애초에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그래도 코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변상하려고 영혼까지 저당 잡히는 일은 없겠어.]
라미아는 일리나의 발에 제압당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링스피어를 노려보았다. 놈은 링스피어 내부로 침투해서 진동하는 강기의 힘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인딩! 상상의 날개를 베어 자유를 빼앗는 억압. 사념 차단!]
라미아의 양 날개에서 발현된 마법에 링스피어가 둘러싸였다. 붉은 마법진이 사라지자 링스피어는 뿌연 막 안에 갇혀 있었다.
[일리나, 링스피어 제압은 끝났어요.]
그제야 일리나와 네리베르가 한발 물러섰다.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붙잡고 있던 사람이 없는데도 죽은 듯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애병을 안타까운 눈으로 확인한 케마란이 말했다.
[일단 살펴봐야지. 걱정돼?]
“당연하지. 내 반쪽 같은 무기라고!”
[그러게 애초에 조심했어야지. 일단 연구실로 가자. 이놈도 살펴야 되고, 하는 김에 네 상처도 치료해야지.]
“내 치료가 하는 김에 하는 거야?”
[네 인생을 저당 잡아 주길 원해?]
“……부디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분만 기다립니다.”
케마란이 버림받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참 솔직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라미아는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링스피어를 단단히 들고 움직였다. 네리베르와 케마란이 도망가는 걸 막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 뒤를 케마란을 업은 네리베르와 일리나가 뒤따랐다. 평소라면 부끄러워 고집을 피웠겠지만,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심해진다고 조용히 말하는 네리베르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자신을 위해 팔을 희생하리라 결단한 네리베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기 때문이다.
아마 당분간 케마란은 절대 네리베르에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일리나 님이 제때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예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일리나의 곁에서 살금살금 눈치를 보던 네리베르가 말했다. 그녀는 케마란과 같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에 조마조마하면서도 일리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에 황홀한 기분이었다.
“당연한 일이에요. 나는 오히려 네리베르의 과감한 결단력에 놀랐어요. 하지만 좀 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아요. 특별한 무기나 마법에 의해 다치면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으니까요.”
“보셨군요. 명심하고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네리베르는 일리나의 말에 볼을 붉혔다. 어쩐지 그녀에게서는 자신이 존경하는 검후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마인드 마스터에게 검후와 같은 무공을 전수받아서 기질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검후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검후의
친구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네리베르에게 다시 일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까 링스피어를 상대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건 알죠? 가끔 당황하는 모습도 보였고.”
네리베르는 일리나와 라미아가 자신의 생각보다 조금 더 일찍 와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까지 상상해 보지 못한 상대라서요.”
“네리베르는 좀 더 상상력을 키울 필요가 있어요.”
일리나는 이전 몇 번 지적했던 네리베르의 단점을 언급했다. 훈련하고 교육받은 상황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뽑아내지만, 배우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생기면 빈틈을 보이고 만다.
그런 네리베르의 장단점을 알고 여러 사람이 충고했지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네리베르도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주인 없이 혼자 날아다니는 링스피어를 통해 어떤 방향의 기발함이 필요한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떤 식으로 상상력을 구사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네리베르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이제 실력이 또 늘겠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마란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네리베르가 부러웠다. 하지만 질투보다는 지지 않겠다는 경쟁심이 끓어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네가 꼭 필요해…………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케마란은 라미아 앞에 둥둥 떠가는 자신의 애병을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 해결됐으려나?’
워스와 마주 앉은 이드는 문득 급하게 자리를 비운 라미아와 일리나를 떠올렸다. 그녀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실에 들어온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무언가 잘못 만진 것 같다고 알려 온 뒤로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아마 다른 생각 말고 워스와 잘 이야기하라고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배려가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게 만들었다.
끝났으면 끝났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말이다.
그렇게 딴생각에 빠진 이드를 향해 워스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결국 소드 팰러스를 거절하고, 황궁과 손을 잡겠다는 뜻이군요.”
페시딘의 뜻을 가져온 워스는 그를 대신해 그간 있었던 무례와 견제에 대해 이드에게 사과하고, 화해하자는 뜻을 드러냈다. 동시에 페시딘의 뜻이 제국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된 기사의 성지라는 것도 살짝 내비쳤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으르렁거리던 놈이 갑자기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고 생각 없이 잡을 정도로 이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또, 존중 어린 말로 잘 포장되어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결국에는 삼검왕 아래로 들어가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쉬울 것 없는, 오히려 삼검왕에 대한 의혹만 가득한 이드가 그 제의를 받아들일 턱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거절할 입장은 아니죠. 무엇보다 황궁에 가는 것은 황제 폐하가 절 불러서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드 팰러스와 황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전 검후님의 손길이 닿은 소드 팰러스를 지지하는 쪽입니다.”
진심을 가득 담은 이드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워스가 말했다.
“하면 오늘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한 비밀은 지켜 주실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소드 팰러스가 누구의 것도 되지 않고 진정한 기사의 성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제국도, 삼검왕도 아닌 온전한 기사들의 성지 말이지. 마치 무림처럼.’
그것도 아니면 이전에도 이후에도 오직 하나뿐인 정당한 주인 아래 있거나.
하지만 이런 이드의 속마음을 모르는 워스는 그 말에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애초에 이드에 대한 호감을 보였던 그는 이드가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음에도 크게 노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성격이 불같은 마르텔이나 꿍꿍이가 가득한 페시딘과는 다른, 정말 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넉넉한 웃음이었다.
이드는 그 웃음 속에서도 은밀히 워스를 살피기를 쉬지 않았다.
앞서 라미아와 일리나가 자리를 비운 직후 검후와 초인들에 대한 이야기 중 워스가 무의식처럼 내비친 기묘한 초인력과 눈동자 깊이 일렁이던 황금빛을 본 때문이었다.
그에 이드가 워스를 눈여겨 살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후 다시 그런 모습을 보일까 유심히 지켜보아도 아직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났던 일임과 동시에 태연한 워스의 모습에 혹시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저도 전할 말은 다 했고, 급히 가 봐야 할 일이 있으신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워스는 급히 방을 나간 라미아와 일리나를 가리켜 말했다.
이드로서는 고마운 배려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쪽 일이 궁금했으니까.
말없이 저택 문까지 그를 배웅한 이드가 막 문밖으로 나서는 워스를 향해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초인 말입니다.”
“음?”
“이전에도 초인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하셨고, 오늘도 초인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초인들이 그렇게 위험한 걸까요?”
“통제되지 않는 힘에 문제가 없을 수 없지요. 개인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단호하기가 칼 같은 워스의 말에 이드는 살짝 질리는 기분이었다. 어지간히 싫어서는 저런 즉답이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황금빛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검후나 초인이 관련된 말에 반응하는 건가?”
이드는 멀어지는 워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수련장에 모여 있던 수련생들이 또다시 등장한 삼검왕의 모습에 환호하고 있었다.
“거참, 내가 느낀 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분명 초인력 같은데, 초인을 저렇게 싫어하다니. 무슨 동족 혐오 같은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판단하기에는 워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이드는 록에게 워스에 대한 정보를 더 모으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하실에 한번 가볼까? 왜 아직 아무런 말이 없는 거야?”
워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드가 지하실로 향했다.